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02화 (475/2,000)

< 484. 교생 실습-28- >

[네?]

‘아니 그렇잖아. 내가 왜 나 좋다는 여자를 굳이 떨쳐내야 하냐고. 그것도 애인도 아닌 별 관계도 없는 유부남 때문에.’

[그래도 업적이 걸린 분에게 심력을 집중하시는 편이···.]

‘내가 한낱 체육 선생 때문에 이번 공략을 실패 할 것 같다는 소리야?’

[물론 그렇게는 생각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뜻이죠.]

‘괜찮아. 이제껏 수많은 파도를 헤치고 왔어. 이 정돈 부스럼은커녕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랄까.’

[혹시 정현아 선생님께 호감을 느끼는 건가요?]

‘솔직히 반반이야.’

[네?]

‘우선 공략에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먹어 보고 싶어. 무슨 밀린 업무처리 하듯 목적을 가지고 여자들 자빠뜨리는 건 피곤하거든. 그건 자유의지가 없는 삶이잖아. 내가 무슨 업적의 노예도 아니고···.’

[흐음.]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야. 현아는 이번 교생 실습에서 학점을 부여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야. 그녀에게 잘 보인다면 과탑을 달성하기가 훨씬 수월하겠지.’

[과탑이 그렇게 이루고 싶은 목표였나요?]

‘난 이제껏 1등 밑으론 성적을 받아본 적 없거든.’

[아···.]

‘그게 내 자존심의 근간이야. 설사 빡대가리로 변한 지금이라도 그것만은 양보 못 해. 암, 그렇고 말고.’

[정말이지 대단한 자부심이군요.]

‘또 현아는 진아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의 역할도 있어.’

[미끼라뇨?]

‘진아는 뼛속까지 시건방진 계집애야. 스스로를 고귀한 귀족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지. 따라서 그녀에겐 질투를 유발할 수 있는 적절한 경쟁자가 필요해. 혜진이는 성격도 그렇고, 외모에서 많이 꿀려서 자극을 주긴 어려울 거야. 하지만 현아는 좀 다르지.’

[어떤 점에서요?]

‘현아는 일단 현직 교사잖아. 자신이 이루고 싶어 하는 목표를 먼저 달성한 사람이지. 게다가 몸매도 훌륭하고 예뻐. 성격이 약간 푼수 같긴 해도, 진아 입장에선 껄끄러운 상대임엔 틀림없지.’

[호오. 거기까지 염두에 두신 건가요?]

‘두고 봐. 현아를 이용해서 진아를 쉽게 따 먹을 테니까. 그걸 위해서라도 현아를 쉽게 포기해선 안 돼. 체육 선생은 그냥 소소한 장애물일 뿐, 큰 의미부여 할 필요 없어. 유부남 주제에 제까짓게 무슨 훼방을 할 수 있겠어?’

로시와 대화를 하며 걷느라 한동안 말이 없던 것이, 같이 걷던 진아에겐 무척 뻘쭘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빤 말 수가 별로 없으시네요."

"응?"

"아니면 제가 불편하신가요?"

"전혀 아닌데? 왜?"

"그게 아니라 계속 앞만 보고 걸으시니까···."

진아는 상당히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딴엔 로시와 열심히 속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지만, 남들 입장에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보일 테다.

아니면 심통이 나 일부러 말을 안 한다거나.

"그게 아니고···. 잠깐 뭘 생각 중이라서."

"뭘요?"

"연구부장 선생님이 아까 불러서 그러더라고. 조만간 수업지도안 써오라고. 한 번도 안 써 봤는데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막막해서."

"아···. 교생 대표 수업안이요?"

"응. 교감 선생님이 결재 나는 대로 말해준다고 했어. 근데 되게 꼼꼼하게 볼 것 같은 인상이었거든."

"저런, 대표 수업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겠네요. 제가 혹시 도와드릴 일이라도?"

"진아 네가? 왜?"

"아···, 그, 그래도 같은 학년에서 대표 수업을 하는 데 실습생끼리 서로 도와야죠. 무, 물로 저만 도와드린다는 게 아니고 다 같이요."

진아는 혹시나 감정을 들킬까 초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도도한 그녀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한 재미다.

"말이라도 고맙다. 아, 저기 볼링장 보인다."

한참 걷다 보니 옥상에 커다란 볼링핀 조형이 설치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도착한 교생들은 자연스럽게 뭉쳐 의견을 나누었다.

"볼링 좀 치는 사람 있나? 도훈이 너 혹시 볼링도 잘쳐? 에버리지 몇인데?"

자연스럽게 말을 놓은 사람은 진아와 같은 반 교생인 임달영이었다. 듣기론 삼수로 입학해서 군대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또래들보다 너댓살은 위라나?

"그냥 평범해요. 볼링은 많이 안쳐봐서."

"아, 믿었던 에이스가 이래서는 우리팀이 많이 불리하겠는데···."

"왜요?"

"아까 뒤에 있다가 체육 선생님 말하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 트렁크에서 장비 꺼내온다 하더라."

"장비요?"

"어. 동호회 활동해서 마이볼하고 신발까지 풀 세트로 챙겨 다닌다는 거야. 내 생각인데, 누구라도 체육 선생님 커버 못 하면 백퍼 우리가 지는 게임이야."

"아···. 술값 내기 지면 이번 달 용돈 개털 각인데···."

"설마 직장인들인데 학생인 우리보고 다 내라곤 안 하겠지."

"그건 모르죠. 1차는 이미 계산했으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하, 왠지 학년 부장 선생님도 한 가락 하실 것 같은 눈친데···. 이거 완전히 설계 당한거 아니야?"

서로 모여서 머리를 맞대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교생팀은 오매불망 나만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흐음. 현아 샘이 옆에 있으니 체육 선생도 평소 이상으로 최선을 다 할 텐데. 너무 처 발려서 호감도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제 생각에 주인님은 운동을 잘해서 인기가 좋은 게 아니라, 얼굴이 잘생겼는데 운동까지 잘하시니 인기가 좋은 겁니다. 설사 체육 선생이 동호인 수준이 아니라 프로라도 상관없을걸요?]

‘물론 그렇긴 한데, 내가 승부에 지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말이지. 혹시 볼링 잘 치는 방법은 없을까?’

[글쎄요, 재능 모방자 스킬로 여자 프로 볼러를 공략하는 수밖엔···.]

‘진짜로?’

[농담입니다. 운동 능력을 단기간에 향상하는 아이템은 얼마든지 있지요. 지난번 100m 달리기할 때 쓰신 물약처럼요.]

‘오케이. 일단 상황 보고 결정하자.’

***

현란하게 돌아가는 조명, 심장을 쿵쿵 울리는 우퍼까지.

일행이 찾은 볼링장은 몇해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락 볼링장’이었다.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은근히 클럽 느낌이 났다. 실제로 몇몇 테이블에선 맥주를 마시는 팀들도 있었다.

"우앙, 이런 데는 처음 와봐요!"

"뭐야, 현아 샘 촌스럽게."

"같은 팀끼리 자꾸 갈굴래요? 봉두샘 맞을래요?"

"하하, 맞는 건 사양하지. 아무튼 선배의 실력을 보여주자고."

볼링공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온 봉두의 눈이 반짝거렸다.

‘후후. 에버리지 200이 넘는 나의 실력을 현아샘 앞에서 드디어 보여줄 날이 왔구나! 학년 부장 선생님이 은근히 머리가 잘 돌아 간단 말이지?’

사실 남자 선생들끼리 모임 때 볼링장에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다. 학년 부장이 내기 종목을 볼링으로 정하고 교사 대 교생팀을 나눈 것은 체육 선생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생들 기를 너무 살려도 곤란해. 지금은 겸손부터 배워야 할 시기니까 말이야.’

체육 선생이 오른손에 금속 보호대를 착용하며 도훈을 쳐다보았다. 그는 신중한 태도로 무게에 맞는 공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진지하게 공을 고르는 이유는 볼링을 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도훈은 볼링공에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야릇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구멍이 딱 3개네? 마치 여자처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왜 있잖아. 여자의 삼구멍. 입술, 거기, 똥꼬.’

[윽. 자나 깨나 그 생각 뿐이시군요.]

‘그러게 직업을 잘못 골랐나 봐. 굴착공이 돼야 했었는데.’

[정말 못 말리겠군요, 주인님.]

구멍에 손가락을 끼우던 도훈은 문득 신박한 생각을 했다.

‘가만. 이것도 구멍인데 듀얼 쇼크 되는 거 아니냐?’

[네?]

‘여기 손가락에 끼워서 말이야. 이렇게.’

도훈이 중지와 약지를 구멍에 끼우며 음란하게 손을 떨었다.

[와, 진심 소름 돋을 정도군요. 이 정도면 병입니다, 주인님.]

‘이게 딱 여자 구멍이면 그대로 보내 버릴 수 있는데 말이야.’

[정말 그리 해드릴까요?]

‘응?’

[예전에 지독스러운 변태 플레이어가 응용하던 스킬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도훈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감각 전이라는 스킬 입니다. 특정 물체에 대상의 감각을 전이시키는 기술이지요.]

‘구체적으로 말해봐. 감각을 어떻게 전이시킨다는 거야?’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사랑하던 애인과 멀리 떨어지게 된 남자가 자신의 물건과 목각 딜도의 싱크를 맞추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애인이 딜도를 이용해 자위를 할 때마다, 남자는 자신의 물건이 직접 삽입되는 자극을 전이 받을 수 있죠. 물론 완벽히는 아니지만요.]

‘대박. 그런 스킬이 존재한다고?’

[네. 본래 그런 음란한 용도로 쓰이는 스킬이 아니었지만, 응용버젼 이랄까요?]

‘미쳤네, 진짜.’

[당장 감각 전이 스킬을 익힐 순 없겠지만, 이를 응용한 아이템 또한 존재합니다. 한시적으로 감각 전이를 가능케 해주는 패치 같은 것이죠.]

‘오오. 잠깐만, 진짜로 그럼 이 구멍을···’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여자들을 둘러 보았다.

29살의 여교사 정현아와 21살의 새파란 여대생 오진아가 눈에 들어왔다.

[네. 일시적이긴 하지만 감각의 전이가 가능합니다.]

‘오호라, 그러면 이 자리에서 아주 질질 흘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죠.]

도훈은 갑자기 작전을 변경했다.

게임에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체육 선생만큼 자신의 실력을 늘리던지, 아니면.

‘···한 명을 완전히 구멍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도 있지.’

아무리 체육 선생이 멱살 잡고 캐리한다 한들, 커다란 구멍을 막긴 어렵다. 도훈은 체육 선생을 찍어 누르기보다, 정현아를 무너뜨리는 쪽을 선택했다.

[진심이십니까?]

‘응. 이미 볼링 못한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잘하면 거짓말쟁이 같잖아. 괜히 엄살 부렸다는 핀잔을 받느니,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겠어.’

[역시 주인님은 정말이지···.]

‘그리고 정현아를 괴롭히는 쪽이 훨씬 재밌을 것 같거든. 크크. 아이템 설명해 봐.’

[네. 감각 전이 아이템은 패치 형태의 아이템 입니다. 감각을 전이할 신체 부위를 지정하고 해당 패치를 물건에 붙일 경우 한 시간 동안 상대의 감각이 공유됩니다. 물론 실제보다는 민감도는 떨어지구요.]

‘알겠어. 구입해.’

[넵. 주머니로 전송시키겠습니다.]

"거 적당히 공 고르고 후딱후딱 시작하자고. 인터벌이 너무 긴 거 아닌가?"

"넵!"

도훈은 손가락이 꼭 맞는 적절한 공을 골라 자동 벨트 위에 올렸다. 두 레인에 나란히 위치한 교사 대 교생팀은 얼추 비슷한 실력끼리 파트너를 짜 게임을 진행했다.

"합산 점수 내기야. 지는 팀은 술값 내기. 콜?"

"네."

"그럼 우리 팀 선봉은 정현아 샘!"

"우리도 여자가 나가야겠는데···."

최연장자로서 주장을 맡은 임달영이 팀원을 둘러 보았다.

남아있는 여자는 모두 셋.

다들 주저하는데 오진아가 자진했다.

"제가 할게요."

"그래. 우리 팀은 진아가 1빠따!"

레인 위에 나란히 선 두 여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어쭈, 나랑 한 번 붙어보자 이거지? 어리고 예쁘다 보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데, 나도 소싯적에 운동 좀 했거든?’

현아가 진아를 노려보며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진아 역시 현아를 보며 생각했다.

‘도훈 오빠한테 흑심이나 품고. 나이 먹었음 곱게 늙어야지 이 아줌마야.’

먼저 현아가 기세 좋게 공을 굴렸다. 생각외로 동작이 깔끔한 그녀는 단번에 8개의 핀을 쓰러뜨렸다.

"오! 현아 샘 잘하잖아?"

"훗. 락 볼링장이 처음이랬지, 볼링장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야, 이럼 우리 팀이 너무 유리한데? 교생팀 괜찮겠어?"

진아 또한 밀리지 않고 차분한 자세로 공을 굴렸다. 자세가 엉성하긴 했지만, 힘이 좋은 그녀의 공은 좌우로 휘지 않고 쭉 뻗어 나가 똑같이 8핀을 넘어뜨렸다.

"아싸!"

"우리도 해볼 만하다!"

"진아, 파이팅!"

열띤 응원전이 펼쳐지는 사이 도훈은 구석에서 볼링공의 구멍에 패치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현아의 거기로 지정해서 붙이면···.’

도훈이 꼼꼼히 패치를 붙이는 사이 현아가 스페어 처리를 시작했다. 오른쪽 구석에 뭉쳐진 두 개의 핀이 아슬아슬 걸치며 둘 다 넘어갔다.

"나이쓰!"

"이야, 현아 샘 최고다!"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다!"

"우이씨, 진짜 혼날 래요?"

스페어 처리에 성공한 현아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진아에게 말했다.

"진아 학생도 잘 해봐, 호호."

"······."

기선을 제압당한 진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그녀 역시 스페어를 시도했으나 아쉽게 한 핀이 남았다.

"아···!"

"괜찮아. 잘했어. 9핀이면 충분해."

"저쪽은 스페언데···."

"다음 프레임이 두고 봐야지."

게임이 계속 진행되며 1프레임의 어느새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드디어 에이스 대결.

상대편에선 유일하게 보호대를 착용한 체육 선생이 나왔고, 한참 공에다 패치를 붙이던 도훈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도훈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봉두가 물었다.

"아까부터 공에다 뭘 붙이는 거야?"

"아, 제가 손에 땀이 많아서 안에 반창코 좀 발랐어요. 손에서 빠지지 말라고."

도훈의 대답을 들은 체육 선생이 속으로 비웃었다.

‘배구는 잘하더니 볼링은 영 초보네. 밴디지를 할거면 손가락에 직접 해야지, 공에 바르면 굴림이 더 안 좋아질 텐데···. 뭐 상관없지. 어쨌든 내기는 내기니까.’

체육 선생은 동호인의 솜씨를 뽐내듯 완벽 자세로 스핀을 줘 초반부터 스트라잌을 만들었다.

"와! 체육 선생님 잘하신다!"

"도훈아, 너도 할 수 있어!"

"도훈 오빠 파이팅!"

도훈도 각오를 다지며 볼링공을 들었다.

‘후훗. 이번엔 체육 선생을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야.’

그러면서 동시에 의자에 앉아 있던 정현아를 쳐다보았다.

‘···바로 정현아를 망치는 게 목적이지.’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던 현아가 도훈이 구멍에 손가락을 끼우는 순간 풉-! 하고 음료를 뿜었다.

< 484. 교생 실습-28-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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