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 교생 실습-27- >
도훈의 짐작대로 진아는 소소한 칭찬 하나에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껏 받은 상처가 별것도 아닌 한마디에 씻은 듯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진아는 자신의 감정선이 지나치게 널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설마 도훈 오빠를···?’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밥을 먹다 말고 도훈을 힐끔거렸다.
잘생긴 얼굴. 다부진 몸. 뛰어난 운동신경.
거기다 실습에 대한 열의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것 없는 완벽한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어째서 그를 몰라봤을까?
‘어쩜···. 보면 볼수록···.’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도훈이 시치미를 떼고 물수건으로 입가 주변을 훔쳤다.
"아, 아니요. 그, 그게 아니라···."
말을 더듬기는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진아는 도훈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어, 어떡해. 완전 찐따처럼 보였겠지?’
평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 도훈의 밀당에 농락당한 그녀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페이스가 말려있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결국 진아가 후다닥 자리를 일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려 도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던 현아의 눈매가 점차 가늘어졌다.
‘요것 봐라?’
누구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티가 나기 마련.
현아는 진아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슬슬 경계심이 들었다.
‘하긴. 내 맘에 이렇게 쏙 드는 아인데, 다른 여자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해. 안 되겠어, 최대한 빨리 도훈이의 마음을 훔쳐야지.’
"그나저나 다들 2차는 가는 거지?"
현아가 넌지시 도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들’이라 했지만, 결국 도훈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2차요? 어디로 가는데요?"
"그냥 뭐···,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우니 가볍게 술 한 잔 하는 거지. 시간 봐. 저녁 다 먹어가는데 여전히 7시도 안 됐잖아. 초저녁에 호프집에 있는 직장인들 조사해 보면 죄다 선생들이라잖니, 호호!"
"저, 전 좀 몸이 안 좋아서···."
밥을 먹는 내내 명치 부근을 쓰다듬던 혜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녀는 명치가 아니라 가슴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샤워 당시 가슴이 살짝 커 보인다는 느낌이 들 때부터 젖꼭지 부근이 욱씬거렸기 때문이었다. 생리 때 마냥 유방 안쪽에 몽우리가 잡혔다.
‘혜진이 왜 저래?’
[마법의 정액에 담긴 풍유환 옵션 때문이지요.]
‘풍유환?’
[네. 일종의 성장통이라고나 할까요? 청소년기 때 정강이 또는 허벅지, 팔 등이 저리신 적 있지 않던가요? 급격한 신체의 발달은 육체의 고통을 불러일으키거든요.]
‘난 급격히 커 본적이 없는데?’
[아차.]
‘아무튼 가슴이 커지느라 아픈 거라고?’
[네. 한동안 고통스러울 겁니다. 하룻동안 대략 1인치 이상이 급격히 자라나니까요.]
‘헐, 그럼 세 번만 발라도 컵 사이즈가 휙휙 바뀌겠네. 혜진이가 바보도 아닌데 의심하진 않겠지?’
[의심한들 어떻겠습니까? 가슴이 커지는 데 싫어하진 않을 테구요.]
‘하긴. 립밤 바르고 적당히 둘러대면 콩으로 메주를 쓴데도 믿겠더라. 아까 현아 샘 보니.’
[정현아의 눈치가 수상합니다. 혜진 양이 2차부터 사라지면 오진아 양과 함께 신경전을 펼칠 가능성이 큽니다.]
로시의 우려에 도훈이 속으로 씩 웃었다.
‘넵 둬. 여자들은 본래 질투의 화신들이니까. 적당히 눈치 봐가며 탕평책만 펼치면 될거야.’
[줄타기 잘하시기 바랍니다. 호감도란 때론 시소게임 같아서 제로섬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걱정 붙들어 매라고.’
"저런···. 혜진이는 그럼 집에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 겠네. 도훈이는 갈 거지?"
"예, 저는 뭐···."
그때 볼일을 본다던 진아가 돌아왔다.
현아가 진아를 향해 물었다.
"진아 학생은 2차 어떡할래?"
"2차요?"
거두절미한 현아의 물음에 진아가 눈치를 살폈다.
거울을 보며 겨우 멘탈을 잡은 그녀였다.
‘2차면 아마도 술자리겠지? 도훈 오빠는 가려나? 도훈 오빠가 안가면 별 의미도 없는데···.’
진아가 조심스레 도훈을 쳐다보자, 도훈이 의도를 눈치챈 것처럼 곧바로 대답했다.
"혜진이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집에 간대요. 저는 참석하기로 했고요."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정규 회식은 여기까지니까. 피곤하면 너도 집에 가서 쉬어도···."
"가야죠. 그래도 2학년 교생 대푠데, 제가 빠지면 되겠어요?"
진아의 참전 선언에 현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애가 진짜 도훈이한테 마음이 있긴 한가 보네. 머뭇거리다가 도훈이 간다니까 잽싸게···. 하지만 도훈이는 양보 못하지.’
두 사람 사이의 기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사이, 잠자코 앉아 있던 체육 선생이 말했다.
"교생들 2차 많이 남을 것 같은데 주종은 뭘로 가는 게 좋을까? 소주? 맥주? 아님 섞어서? 도훈이 술 잘 마시니?"
"아뇨. 제가 보기보다 술이 약해서···."
"어허! 덩치는 말술도 거뜬하게 생겼구만, 점잔 빼긴."
"진짜에요. 술에 유독 빨리 취하는 편이거든요."
"하하. 이거 이거 내가 잘 챙겨줘야겠는데? 잘 생긴 총각 누가 업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선생님은 본인이나 좀 챙기세요."
현아의 핀잔에 체육 선생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야 뭐···."
현아를 바라보는 유부남 체육 선생의 눈이 어딘가 착잡해 보였다.
***
"나야 뭐···."
이름 김봉두.
올해로 서른다섯의 유부남인 그는, 동 학년에 근무하는 처녀 선생에게 유독 관심이 많았다.
‘거참. 톡톡 쏘아대는 게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내가 진짜 사고 쳐서 결혼만 안 했어도···.’
현아는 교사라는 직업을 제쳐두고라도 무척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낙화 직전의 꽃이 가장 화사하고, 상하기 직전의 과일이 가장 진한 향기를 뿜는 것처럼, 최근의 현아는 여자로서 그 물이 정점에 올라 있었다.
보기 딱 좋은 C컵의 가슴은 걸을 때마다 출렁이며 사내의 방심을 자극했고, 이따금 치마 사이로 허벅지 안쪽이 내비치는 날에는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그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봉두는 유부남이었다. 게다가 현아는 새까맣게 탄 자신에겐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현실적 한계와, 이상형에 갈망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했지만, 애초에 답이 보이지 않는 일이다.
그저 그녀에 대한 감정이 사그라질 때까지 묵묵히 지켜만 볼 뿐.
"도훈이가 술이 약하다니 소주는 무리겠고, 그럼 맥주집으로 가야겠네."
"맥주도 좋죠. 이 근처에 세계 맥주집 거기 괜찮던데."
"다른 반들도 한 번 물어볼까?"
조사 결과 교생 11명 중 5명이 2차를 따라가기로 했다. 교사 중에선 아직 애가 어린 5반과 7반이 빠졌다.
공교롭게 숫자가 동률을 이루자 2학년 부장이 제안했다.
"우리 이러지 말고 2차는 술값 내기 게임이나 할까?"
"게임이요?"
"왜, 배도 좀 꺼뜨릴 겸. 난 너무 과식해가지고 술 들어갈 배도 없거든."
"부장 선생님 배를 봐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아, 암튼 말이야. 교사 대 교생팀으로, 볼링 한 판. 어때?"
현아가 반대했다.
"에이, 도훈이가 교생팀에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겨요? 쟤는 완전 운동 천잰데."
"어허. 선배 체면에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체육 선생도 거들었다.
"그래, 현아 샘. 볼링은 또 모르는 거잖아. 공은 둥구니까."
그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흐흐. 내가 볼링 동아리 경력만 몇 년 찬데? 이번 기회에 도훈이를 누르고 현아 샘한테 눈도장 좀 찍어놔야지.’
"아이참···. 곤란한데···."
현아가 곤란해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하필 교사대 교생으로 팀을 짜느라 도훈과 다른 편이 된다는 오직 그 이유였다
‘그럼 도훈이랑 진아랑 같은 팀이 된다는 거잖아? 저 여우 같은 계집애가 얼마나 꼬리칠는지···.’
현아의 망설임을 내기 때문이라고 오해한 부장이 한마디 했다.
"현아샘. 우리팀이 불리하면 또 어때? 기분 좋게 술값 한 번 내주면 되지."
더 고집 피우다간 괜히 쫌생이처럼 보일까 두려웠던 현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뭐."
"오케이. 그럼 2차 참석 못하는 학생들은 여기서 헤어지는 걸로. 다들 고생 많았어요."
"네,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내일 뵐게요."
"그래. 잘 가고."
"볼링 잘하세요!"
도훈 역시 가게 밖까지 따라나가 혜진을 배웅했다.
"오늘 무리했나 보다, 그치?"
"그런 가봐요."
"내일 되면 괜찮아 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렇겠죠?"
"참···."
도훈이 눈치를 살피더니 혜진에게 다가가 살짝 귓속말했다.
동기들을 배웅한다는 핑계로 뒤를 따라나섰던 진아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뭐라 쏙닥거리는 거지? 두 사람 너무 가까운 거 아냐?’
***
"···내일은 노팬티로 출근하는 거야, 알았어?"
"···네, 네?!"
"분명 난 말했다. 내 말 거역하지 않을 거지?"
일방적인 전달을 마친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보자, 혜진아."
"네···."
혜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나는데 어느새 진아가 뒤로 다가와 물었다.
"두 분 엄청 친해 보이시네요?"
"네, 같은 반 교생이니까요."
"···글쿠나. 근데 방금 혜진이한테 뭐라고 하신 거예요?"
‘풉, 이건 좀 주제넘는 거 아니냐? 사적인 대화를 왜 자기가 궁금해 해?’
[그러게요. 아무래도 주인님에 대한 애정으로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정색하면 무안해할 테니까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그냥 몸조리 잘하라고요."
"그런 말을 굳이 귓속말로요?"
"아···. 그건 치마에 뭐가 묻었길래 알려 준 거예요. 아까 밥 먹다 뭘 흘렸나 보더라구요."
"아···."
진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대답했다.
"아, 그, 그러셨구나. 전 또···."
"근데 같은 반 교생끼리 안 친하세요?"
"저요? 저는 뭐···. 나이 차가 제법 나서···."
진아가 고갯짓으로 자기 반 교생을 가리켰다.
저번에 모였을 때 가장 나이가 많다는 복학생 형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긴 무슨. 너랑 나는 실제로 20년 차이다, 이것아.’
그때 계산을 마치고 나온 학년 부장이 밖에 나와 있던 교생들에게 말했다.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볼링장 하나 나올 거예요. 거기서 봅시다."
"네."
볼링장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아가 내 옆에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둘이서 나란히 걷게 된 게 어색하지 쭈뼛거리며 뒤를 졸졸 따라왔다.
‘밀당 몇 번에 아주 고분고분한 양이 되었구만, 그래.’
[호감도 상승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지요.]
‘그나저나 볼링이라니. 도훈이 볼링도 잘치냐?’
[딱히 즐겼던 스포츠는 아닙니다. 물론 기본 이상은 합니다.]
‘아쉽고만. 운동으로 점수 따는 게 가장 쉬운 일인데.’
[그보다는 체육 선생 태도가 조금 이상하지 않던가요?]
‘김봉두 선생?’
[네. 어딘지 모르게 주인님을 의식하는 느낌이던데요?]
‘나도 사실 조금 이상했어. 현아랑 수업 참관할 때도 그렇고, 아까 눈에 보이게 진아 밀어주려는 것도 그렇고···. 혹시 현아랑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정현아 태도만 보면 거의 천덕꾸러기 취급이던데요?]
‘하긴 처녀가 굳이 유부남을···. 그렇다면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건가? 거참, 아저씨 하여간.’
불륜에 대해 혐오스러운 감정을 가졌던 예전이라면 그의 부도덕성을 힐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 역시 겨 묻은 개가 되었으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남의 허물을 주장하기엔 내 허물이 너무 크다.
‘하긴 체육 선생 심정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네?]
‘원래 그런 거 있잖아. 왜 오피스 와이프라고. 같은 직장서 오래 얼굴 보다 보면 마누라보다 친해지기 마련이거든. 솔직히 아무리 예쁜 마누라도 계속 보면 물리기도 하고.’
[호오. 불륜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이 웬일로 체육 선생을 두둔하십니까?]
‘여전히 싫어하긴 해. 근데 이제와 내가 체육 선생 욕하는 건 내로남불이지. 그리고 체육 선생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그게 사실이라면, 교생 실습 간 그의 존재가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째서? 어차피 현아는 공략이랑 상관없잖아. 혜진이랑 연구 부장샘한테 각각 미션 하나씩. 그리고 진아한테 위업 걸려있는 거 아닌가?’
교생 실습의 공략은 모두 3가지다.
순종녀를 굴복시켜라, 미션으로 교생 박혜진.
도도녀를 응징하라, 미션에서 연구부장 김한솔.
마지막으로 오진아를 참교육 시키는 ‘고귀하고, 천박하게’ 위업.
현아는 실습반 담임에다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엮인 것 뿐.
이번 공략과는 하등 상관없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김봉두 선생이 주인님을 라이벌로 의식한다면, 주인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유의 주시할 겁니다. 불필요한 감시자가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랄까요?]
으음. 듣고 보니 로시의 말이 옳다.
공략과는 한 발 떨어져 있는 현아의 일방적인 관심이, 그녀를 몰래 연모하는 체육 선생을 자극했다. 따라서 체육 선생은 나를 의식하며 자꾸 참견을 하는 식이다.
로시가 계속 말했다.
‘어차피 공략과 무관한데 이번 기회에 정현아랑 확실히 선을 그어 버리시죠? 그렇다면 체육 선생도 더 신경 쓰지 않을 테고, 위업 달성도 용이할 텐데 말입니다.’
나보고 물러나라고? 나는 고민도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가는 여잘 잡지도 않지만, 오는 여잘 굳이 말릴 생각은 없는데?’
< 483. 교생 실습-2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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