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489화 (462/2,000)

< 471. 교생 실습-15- >

[네?]

‘예쁘장하게 돌았어. 안타깝구만.’

[음, 자기애가 다소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돌았다고 하긴···.]

‘세상 모든 남자들이 자신의 매력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잖아. 20대 초반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객기라지만 과해도 너무 과해.’

[주인님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여자들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팩트잖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니까.’

[아이고, 어련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쟤는 아니지. 어리고 예쁘니 주변에서 우쭈쭈해줬겠지. 수학교육과 다닐 정도면 공부도 곧잘 했을 거고. 나중에 선생님 될 거 생각하니 1등 신부감이니 뭐니 어깨에 뽕이 가득 차올랐을 거란 말이야.’

[지금 분석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조금씩 모자라.’

[뭐가요?]

‘하나씩 격파해 볼까? 얼굴이 진짜 예뻤음 이미 아이돌 데뷔를 했어야 맞지. 요새 예쁜애 들이 누가 공부하니? 그냥 연얘인 해서 편히 먹고 살지.’

[그거야 그렇죠.]

‘또 공부를 진짜로 잘했으면 사범대 왔겠어? 의대나 약대 놔두고. 그냥 딱 그만큼만 잘한 거지.’

[공부와 관련된 것은 주인님이 가장 잘 아시니 반박할 수가 없군요.]

‘마지막으로 교사가 1등 신부감이란 것도 그래. 1등이 왜 1등이냐? 만만하니까 그런 거잖아. 솔직히 직업으로 치면 여의사나 여약사, 혹은 하나 못해 5급 공무원이나 여타 전문직 다니는 여자가 훨 낫지.’

[그치만 그런 여잔 드물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교사가 인기가 많은 거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어찌어찌 비비면 결혼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근데 사람들이 많이 선호한다고 최고의 신붓감이란 소리는 어불성설이야. 실상은 돈 많은 집 무직자 딸래미만 못한 게 현실인데.’

[오늘따라 왠지 신랄하군요. 혹시 전생에 여교사한테 까인 적이라도 있으신가요?]

도훈이 움찔 놀라며 대꾸했다.

‘까, 까이긴 뭘 까여? 결혼 전 소개팅으로 몇 번 만나본 게 단데.’

[왠지 날이 잔뜩 서 있어서 말입니다. 아님 말구요.]

‘아무튼 오진아 쟤는 너무 건방져. 몸매는 희주만 못하고, 얼굴은 정음이만 못 한 게 어디서 감히···. 확 따먹어 버릴라.’

[아이고. 드디어 본심이 나왔군요.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벌써 가시권에 걸린 여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누구? 박혜진이랑 연구부장 말고 더 있어?’

[담임 정현아도 있지요.]

‘아, 아. 현아샘은 그냥 하는 짓이 웃겨서 내버려 두는 거야. 나를 키워서 잡아먹고 싶다잖아.’

[어쨌든 벌써 세 명이 넘는데 오진아 양까지 어떻게 커버하시려고요? 미션도 없고 업적도 없는 상댑니다. 명분도 실리도 아무것도 없다구요.]

로시의 냉정한 조언에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 맘먹으면 자빠뜨리는 거야 일도 아닌데, 굳이 시간과 정력을 쏟을 필요는 없지. 업적이라도 걸려있으면 모를까.’

[업적요? 찾아보면 관련된 업적이 있는 것 같기도···.]

‘그래?’

[고귀하고 천박하게, 라는 위업입니다.]

‘그게 뭔데?’

[딱 진아 양 성격에 맞는 업적이죠. 도도하고 콧대 높은 여자를 공략해 주인님을 섬기도록 만드는 업적입니다.]

‘호오. 설명 띄워봐.’

[넵.]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20/108)

86. 고귀하고 천박하게 (도도하고 콧대 높은 여자를 당신의 육노예로 전락시킬 때 달성)

-당신이 정복 못 할 여자는 없습니다.

-자긍심이 높을수록 추락의 진폭은 극대화될 것입니다.

-업적 보상 : 상식 개변-(당신의 언령에 마법적인 힘이 깃듭니다.)

‘오. 진짜로 있네? 근데 업적 보상이 언뜻 이해가 안 되는데?’

[상식 개변 스킬은 ‘마인드 컨트롤’류 스킬입니다. 즉, 상대가 가진 상식의 일부를 조작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게 무슨 소리지?’

[가령 이런 식입니다. 상식 개변 스킬을 이용해 특정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날이 더울 땐 노브라로 다닌다.’ 라는 변형된 상식을 주입해 상대의 행동을 간접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다고?’

[물론 메저키스트의 밧줄처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명령은 불가능하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왠지 써먹을 데가 많은 스킬같은데. 근데 위업 설명이 조금 부실하군. 도도하고 콧대 높다는 기준은 뭐고, 육노예라는 것도 어디까지인지 모르겠고.’

[그것은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판별합니다. 오진아 양이 위업에 적합한 상대인지 확인해 드릴까요?]

‘어. 해줘 봐.’

[화면에 떠오른 위업 창의 상세보기 단추를 누르십시오.]

도훈이 위업창을 클릭하자 오진아에 대한 적합 여부가 판별되었다. 로딩창이 100%를 이루자 다음과 같은 화면이 떠올랐다.

성명 : 오진아

업적 가능 여부 : 가능

조교력 : 0/100

(조교력이 100을 찍게 되면 업적이 달성됩니다.)

[오진아 양의 업적 달성 여부가 가능으로 뜨는군요.]

‘그러니까 조교력이란 수치를 달성하면 고귀하고 천박하게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건가?’

[네. 또한 상식 개변 스킬도 얻으실 수 있구요. 중수까지 현재 4개의 위업이 남아있으니 3개까지 줄일 수 있겠군요. 하지만 조교력 100이라는 수치는 상당한 난이도입니다. 특히 오진아양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들은 자존감이 무척 높으니까요.]

‘상대가 박혜진이면 딱 좋은데.’

[박혜진 양과 같은 경우는 조교는 용이해도 업적 가능에서 부적합이 나올 겁니다. 해당 업적은 고귀한 사람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때만 가능하거든요.]

‘후후. 왠지 이번 교생실습엔 먹을 게 풍성한 느낌인걸?’

[여자는 음식이 아닙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오진아를 바라보는 도훈이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군침을 삼켰다.

***

연수가 끝난 뒤 담임과의 대화가 있었다. 하룻 동안 참관한 수업의 소감을 밝히며 피드백을 받는 자리였다.

사후협의라고 불리는 이 활동은 수업자의 의도가 실제 수업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듣고, 수업 설계의 문제점과 보완할 부분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담임인 현아는 한참 수업에 대해 설명하다 교무실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 교육청에서 급한 공문이 왔다고 교감 선생님께서 찾으시네. 교무실 후딱 다녀올 테니까, 둘이 얘기 나누고 있을래?

"네."

"다녀오세요."

현아가 사라지자 학생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교실에는 나와 혜진만 남게 되었다. 담임이 함께 있을 때는 말도 많고 활기차던 혜진은,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어색함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나 교실 뒤 환경 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 전 게시판 구경 좀 할게요."

"그래? 같이 보자."

나 역시 그녀를 따라 교실 뒤편으로 이동했다. 남중이라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의외로 교실에 걸린 미술 작품들의 수준이 뛰어났다.

"이야, 학생들 그림 잘 그리네. 얘는 만화가 데뷔해도 되겠다."

"정말이네요."

"혜진이 너도 그림 잘 그리니?"

"아, 아뇨. 전 예체능엔 그닥 소질이 없어서요."

혜진이 의례 자신감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뭐 잘하는데?"

"저요?"

"응. 여기 너 말고 누구 또 있어?"

일부러 단둘밖에 없는 자리임을 상기시켰다.

현아 샘이 교무실로 가면서 문을 닫고 가는 바람에 교실은 자연스럽게 거대한 밀실이 되었다. 복도 쪽으로 난 창문은 프라이버시 때문인지 불투명처리가 되어있어 안과 밖이 보이지 않았다.

"어, 없어요. 전···."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말이 돼?"

"그, 그러게요."

혜진이 쑥스러운 듯 이마를 문질렀다.

자신감이라곤 전혀 없는 이 아가씨를 어서 빨리 변모시켜야 겠다. 나는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 적성을 발견하지 못한 걸지도 몰라."

"아니에요. 어렸을 때 엄마가 이런 저런 학원에 다 보냈거든요. 미술학원, 음악학원, 심지어 발레 같은 것도 배웠어요."

"정말?"

"네. 그런데 어딜 가도 배우는 게 느려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영 재능이 없는 편이라고 하고···."

"아직 안 해본 것 중에 재능이 숨어있지 않을까?"

"안 해 본 거요?"

"가령··· 섹스라던가?"

"네?!"

혜진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며 덜덜 손을 떨었다. 겁많은 이 아가씨는 섹스의 섹만 나와도 부끄러워 죽으려고 했다.

"아··· 그게··· 음···."

[주인님, 이건 완전 성희롱인데요?]

‘성희롱이라니?’

[아니 그래도 친분도 없는 사이에 자꾸 섹스를 들먹이시면···.]

‘성희롱은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야 성립되는 거지. 니가 볼 땐 혜진이 불쾌해하는 것 같아?’

[음···. 글쎄요. 부끄러워하는 것 같긴 한데 기분이 나쁜 건지는 아리송 하군요.]

‘쟤는 맨날 당하고만 살아서 그런지 화내는 법을 몰라. 나도 미안하긴 한데 이렇게라도 가르쳐야겠어.’

[주인님의 욕구을 해소하시는 게 아니고요?]

‘정확히는 둘 다지. 나는 미션을 해결하고, 혜진이는 자존감을 높이게 될 거야. 두고 봐. 내가 저 어리버리한 성격을 고쳐놓고 말 테니까.’

"왜? 섹스해봤다지 않았어? 전 남친들하고?"

"음··· 마, 맞아요."

"그럼 잘 알겠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어, 없는 거 같아요."

"어떻게 알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혜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기어 들어갔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섹스는 남녀의 합이 잘 맞아야 되는 데 자기들이 못 했을 수도 있잖아."

"그, 그런가요?"

"응. 내가 아까 말했잖아. 넌 어딘가 모르게 색기가 있다니까?"

"그런 얘기 처음 들어봐요."

"그래? 내가 여자 보는 눈이 틀린 적이 없는데···."

넌지시 운을 띄우자 혜진이 덥석 물었다.

"도훈 오빠는 여자 많이 만나 보셨어요?"

"네가 볼 땐 어떤 거 같은데?"

일부러 가슴을 활짝 폈다. 숫컷 특유의 과시 동작에 혜진이 민망해 하며 대답했다.

"···많을 것 같아요."

"맞아. 많아. 그리고 경험이 많아서 여잘 딱 보면 어떤 스타일인지 감이 와. 내가 볼 땐 혜진이 넌 그쪽으로 재능이 넘쳐. 네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저, 정말로요?"

"애가 속고만 살았나? 사람 말을 왜 이렇게 못 믿지?"

혜진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 많이 속았어요."

"응? 진짜?"

"네···. 원래 좀 당하고 사는 편이에요. 제가 좀 어리숙해서···."

"전혀 그렇게 안 생겨서 의외네?"

"제가요?"

"응. 예쁘게 생겼잖아. 성격도 똑 부러질 것 같고."

"아, 아닌데···."

혜진의 자신감을 북돋우기 위해 없는 말이라도 지어내야 했다. 그녀는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왜 본인한테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그, 그게···. 음. 보시다시피···."

혜진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절벽.

볼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파른 낭떠러지가 있었다.

‘제길, 벗겨 놓으면 앞 판인지 뒷 판인지 구분도 안가겠구만.’

[주인님 마저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공략 대상한테 그런 얘길 차마 하진 않겠지만···. 근데 안봐도 뻔하다. 아스팔트에 껌딱지 하나 붙어 있겠네.’

[주인님! 표현 좀!]

나는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지언정, 결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콤플랙스를 가진 혜진을 위로했다.

"에이, 그런게 뭐가 중요해. 얼굴이 이뻐야 여자지. 가슴이 이뻐야 여자냐?"

[마음에 없는 소릴···.]

‘닥쳐. 나도 괴로우니까.’

"저, 정말요?"

"그렇다니까? 네 생각보다 남자들이 여자 볼 때 가슴을 보는 게 아니야."

"이제껏 사귄 사람들은 다 작다고 실망하던데요···."

"그놈들은 여자 볼 줄 모르는 거야. 사실 그건 살덩이에 불과하거든.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지."

"그게 뭔데요?"

혜진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빈유에 커다란 콤플랙스가 있는 여자에게, 가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 조금은 안도한 모습이었다.

"음. 배꼽 밑으로 한 뼘."

"배꼽 밑으로···."

혜진은 실제로 자신의 손을 내려 배꼽 밑으로 한 뼘을 재고 있었다. 이쯤 되니 맹한건지 멍청한건지 분간이 안갈 지경이다.

"하, 핫!"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혜진이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래. 거기. 어차피 중요한건 거기 거든."

"···으, 음. 오빠 좀 야한 사람 같아요."

혜진이 모처럼 자기 주장을 했다. 나름 최선을 다한 비난이었겠지만, 그마저도 너무 약했다. 나는 계속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야한 사람 맞아. 그래서 별로야?"

"아, 아니 그, 그런 것은···."

"내가 볼 땐 너도 충분히 야한 사람이야."

"제, 제가요?"

"응.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에요. 저, 전 그런 거··· 별로···."

나는 슬며시 교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문.

불투명 유리창.

교무실로 간 뒤 소식이 없는 담임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이제 혜진을 길들일 시간이다.

나는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으로 혜진을 쳐다보았다.

기세에 눌린 혜진이 움찔 놀라며 움츠러 들었다.

"지금이라도 확인 시켜줄까?"

"네, 네?"

"네가 실제로 얼마나 야한 사람인지 말이야."

"어, 어떻게요?"

"너···."

일부러 호흡을 끊으며 천천히 말했다.

긴장감을 올리고, 내 말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지금···."

꿀꺽-

혜진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게 보였다. 마른침을 삼키는 혜진의 표정이 잔뜩 겁을 먹은 토끼처럼 유약해 보였다.

"···젖었지?"

< 471. 교생 실습-1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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