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3. 교생 실습-7- >
***
시간이 애매하길레 택시를 탔다.
잘해야 기본요금 정도 나올 거리.
오랜만에 정음을 본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뛰었다.
‘그때 컴퓨터 고쳐주러 간 뒤로 간만이네···.’
정음은 사실 공략이 끝난 아이다.
터프걸 공략 미션으로 첫 관계를 가졌고, 차후엔 마성의 소유자 업적을 위해 호감도 100을 찍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뭐랄까? 애완동물?
나를 진심으로 따르는 귀여운 아가씨라서 마음에 든다.
언제든 나만 볼 것 같은 순수하고 착한 아이.
내가 깡패에게 맞고 있으면 날라 차기로 나를 구해줄 것 같은 터프한 태권 소녀. 그리고 나에게 처녀를 바친···.
[명기라서 더 그런 게 아닐까요?]
‘응?’
[육정음양요. 타고난 명기잖습니까? 운동신경도 발군이라 습득력도 빠르고.]
‘그런 면도 없진 않지.’
정음과의 섹스는 항상 느낌이 좋았다. 타고난 조임에, 원하는 데로 맞춰주는 순종적인 성격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얼굴을 본다니 설레긴 하는데 왜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네?]
‘아니, 연휴 기간 마누라 몰래 혼자 일본에서 바람피우다 온 것 같은 느낌같아서.’
[하-! 한 여자에게 너무 정을 주시면 곤란합니다. 그래서야 어디 카사노바라고 불릴 수 있겠습니까?]
‘나도 알지. 업적 때문에라도 한 여자에 정착하면 안 된다는 거. 근데 도의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야.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느라 남자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고 있는데···.’
[혹시 압니까? 그것 때문에 지쳐서 뭔가 작심하고 말하려는 것일지.]
무심결에 던진 로시가 말에 덜컥 겁이 났다.
하긴 불쑥 만나자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민주나 유미 같은 애들이라면 진짜 몸이 달아 나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껏 정음이 먼저 섹스를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와의 섹스를 싫어한다기 보다, 부끄러움이 많아 찾지를 않는 것이다.
아무튼 절대 섹스가 목적은 아니다.
‘에이, 설마? 호감도가 100이나 되는데? 게다가 정액 중독으로 정음이는 나 말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라고.’
[호감도가 100이라 한들, 힘들어할 순 있죠. 사랑하면서도 사정상 헤어지는 커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흠.’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로시의 말이 걸린 가시처럼 가슴을 쿡쿡 쑤셨다. 이별 통보까진 아니더라도 관계 정리를 확실히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할 때만 실컷 따먹고, 단순한 선후배 사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양아치난 하는 짓이니까.
아까 담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의외네? 설마 여자친구 아직도 없는 거?
만약 정음이가 사귀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를 상처 주기도 싫지만, 사정상 얽매이기도 쉽지 않다.
사겨 놓고선 업적 깬답시고 몰래 바람피우고 다니기는 더 싫다. 그거야 말로 정음을 두 번 상처주는 일이다.
고민이 깊어질 때 쯤 택시 아저씨가 도착을 알렸다.
"손님, 여기서 내려드리면 될까요? 3800원입니다."
"4000원이요. 거스름돈은 괜찮아요."
택시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걸어가는 동안 자꾸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음이 무슨 말을 꺼낼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주인님 심박수가 너무 올라가는 데요? 괜찮으십니까?]
‘별로 안 괜찮은 거 같은데.’
[혹시나 정음 양을 잃게 될까 두려우신가요?]
‘솔직히. 그냥 난 친한 선후배 사이로 계속 남고 싶은데, 정음이에겐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려울 거야.’
[정말 그렇다면 어쩌시려고요? 잘라낼 자신이 있으신 가요?]
어쩐다.
사실 이대로 손절해도 큰 상관은 없다.
아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래야 맞다.
순진한 그녀를 가지고 논다는 죄책감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정음이 만큼은 포기 못 하겠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만나서 얘기를 들어 보시죠.]
만나기로 한 곳은 시내의 중심가였다. 약속장소에서 정음을 기다리는데, 정각에 딱 맞추어 정음이 나타났다.
"오빠!"
고개를 돌리자 상큼한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학기 초에 숏컷이던 머리는 단발 정도로 내려왔다.
적당한 길이의 체크 치마와 위에 받쳐 입은 아이보리색 블라우스가 무척이나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아.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아이구나, 정음이는.
"왔어?"
"죄송해요. 버스가 막혀서 조금 늦었어요."
"아니야, 시간 딱 맞췄는데.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근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속마음을 미리 열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정음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정음이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내일부터 교생 실습이시죠?"
"···어? 어, 그런데?"
"그래서 옷이라도 한 벌 사드릴까 하고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면서 얼굴에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정음이 걱정이 가장 쓸데없는 걱정구나.
"무슨 소리야? 네가 돈이 어딨다고?"
정음은 고작 20살 새내기다.
용돈 쓰기도 빠듯한 입장에서 옷을 사주다니···.
너무 무리한 일이다.
"저 알바비 받았어요."
"알바라니?"
"지난 번에 말한 태권도 사범이요. 시간 날 때마다 도장에서 진학반 애들 지도했거든요. 관장님이 고맙다면서 수고비 챙겨주셨어요."
아아···.가슴이 찌릿 울려온다.
힘들게 고생해 번 돈으로 내 옷을 사주겠다니.
나는 정음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인간일까?
"괜찮아. 내 옷은 내가 사 입어도 돼."
거듭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해맑던 정음의 얼굴이 시무룩해 졌다.
"그래도···.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요. 오빠 처음으로 실습나가시는 거잖아요. 비싼 건 못 사드리지만 성의니까 받아주셨음 좋겠어요."
"너 정말···."
말문이 막혀 나오질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단순히 가끔 만나 섹스하는 선배가 아니었다. 첫 교생 실습에 옷을 사입히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정음이 과감히 내 팔짱을 꼈다.
그녀의 말캉한 가슴이 물컹하고 팔꿈치에 부딪혔다.
"가요. 얼른. 저 저녁에 또 도장 가봐야 하거든요."
"정음아···."
"얼른요."
정음은 억지로 끌다시피 나를 백화점으로 데려갔다.
시내 중심가에서 보자고 했던 이유는 근처에 백화점이 있어서였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괜한 걱정을 했다니···.
오늘따라 정음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인다.
***
"이야, 역시 키가 훤칠 하시니까 뭘 입어도 잘 어울리시네요!"
매장의 직원은 정장을 걸치고 나온 도훈을 보고 칭찬을 연발했다. 물건을 팔기 위한 입발린 멘트였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도훈의 수트빨은 훌륭한 편이었다.
쩍벌어진 어깨에 잘록히 들어간 허리가 옷테를 살렸고, 길게 뻗은 다리 덕에 기장을 수선할 필요도 없이 완벽히 끝선이 떨어졌다. 정음 역시 수트를 입은 도훈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지 연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타이는 여자친구 분께서 직접 골라주시죠."
"네?"
무심결에 던진 매장 직원 말에 정음이 멈칫 거렸다.
도훈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래 정음아. 네가 골라줘."
"이, 이런 건 한번도 골라 본 적이 없어가지고···."
"네가 골라주는 거면 뭐든 좋아."
"남자친구분이 센스가 있으시네. 이쪽에 보이는 것들이 요번 시즌 신상입니다. 요샌 니트 타이가 대세거든요. 남자친구 분 얼굴이 하얀 편이라 어떤 색이든 잘 받겠네요."
정음은 애인 사이로 오해받는 것이 싫진 않은지 매장직원이 추천해준 가장 비싼 타이를 골랐다. 넥타이까지 완벽히 차려입은 도훈은 남성 잡지에 나온 모델처럼 멋있었다.
"오빠, 정말 잘 어울려요."
"그래?"
"네. 진짜로요."
"고마워. 정음아."
"그럼 이렇게 사시겠습니까?"
"네."
"잠시만요, 계산이···."
매장 직원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도훈이 일부러 중저가 매장을 골라 들어 오긴 했지만, 정장 한 벌에 넥타이까지 포함된 가격은 50만원에 육박했다.
"50만 4000원입니다."
도훈이 금액을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이거 너무 비싼데··· 셔츠랑 타이는 그냥 집에 있는 걸로 할게."
"아니에요. 그냥 주세요."
정음이 단호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신용카드도 아닌 체크카드였다.
연결된 통장엔 정음이 알바비로 모은 용돈이 들어 있을 것이다.
‘50만원이 누구 이름도 아니고···. 정말 이런걸 받아도 되는 걸까?’
도훈은 계산을 하는 정음을 보고 부담을 느꼈다.
물론 과거의 이정우 시절이라면 넥타이만 20~30만원이 넘는 명품을 사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생으로 다시 돌아가 보니 50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실감이 갔다.
옷을 판매한 직원이 상품을 포장하며 말했다.
"근데 남자친구분 취업하셨나 봐요? 아직 어려 보이시는데."
"저··· 남자친구가 아···."
"교생 실습 가요. 아직 학생이라."
"아! 예비 선생님이시구나? 이 옷 입고 학교 출근하면 학생들 꿈뻑 죽겠네요. 하하! 암튼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원이 정장 걸이에 옷을 챙기는 사이 도훈이 정음에게 물었다.
"너무 큰 돈 쓴거 아니야?"
"정말로 괜찮아요. 지난 번에 컴퓨터도 고쳐 주신 것도 고맙고 해서.."
"에이, 그게 얼마나 한다고···."
"오빠 정장 입은 모습 보니까 너무 잘 어울려요. 제 성의라고 생각하고 아무말 말고 받아주세요."
"허, 참···."
도훈이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저녁은 뭐 먹을래? 내가 살게."
"아···, 근데 좀있다 저 또 알바가 있어가지고."
정음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차라도 한 잔 하고가. 오랜만에 봤는데 이런 큰 선물을 받고 어떻게 그냥 보내?"
"그래요 그럼."
두 사람은 쇼핑백을 받아들고 백화점 1층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여행은 재밌으셨어요?"
"응. 일본은 한번 쯤 가보고 싶었던 나라라서."
"그러셨구나. 좋았겠다."
도훈은 문득 정음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여행 갔다 오면서 선물도 안사왔다니.’
[좀 그렇네요. 실습 잘하라고 정장까지 선물 받았는데···.]
‘젠장. 아이템으로 뭐 없나? 선물로 줄만한 거.’
[아, 아이템을요?]
‘그래. 남이 사용해도 되는 종류도 있잖아. 그런 거라도 빨리.’
도훈은 일전에 기춘에게 사용했던 ‘고개들어요, 용사님’ 담배를 떠올렸다. 그 사례를 생각하니 아이템을 꼭 플레이어만 사용하라는 법은 없었다. 특히 효과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종류라면 일반인이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선물용이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로시가 마켓창을 검색한 결과를 제시했다.
[디스플레이에 띄웠습니다.]
디스플레이에 3가지 아이템 목록이 떠올랐다.
[백옥 크림]화장품, 300p
-바르고 자면 피부가 티없이 맑고 깨끗해 집니다.
-지치고 활력 잃은 피부에 최고!
-20회 분.
[유혹을 부르는 립스틱]화장품, 500p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있는 동안 이성에게 호감도 +2가 올라갑니다. 단 동성에게는 ?3이 됩니다.
-립스틱의 색상은 대상자의 피부톤에 가장 어울리는 색으로 고정됩니다.
-닳아질 때까지.
[안마안마 해]의료기구, 1000p
-평범한 안마봉처럼 생겼지만 뭉친 근육을 말끔히 풀어줍니다.
-사람에게 마사지를 받을 것처럼 상쾌합니다.
*다른 용도로 사용 가능.
-충천 후 20분.
목록을 본 도훈이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다 사주고 싶지만 립스틱은 좀 아닌 거 같아. 안그래도 정음이 예뻐서 여자들한테 질투 많이 받는데, 동성에게 호감도 떨어지는 건 손해겠어.’
[생각보다 세심하시군요.]
‘백옥 크림이랑 안마기 내 가방에 전송시켜.’
[비용은 총 1,300 포인트입니다. 결재할까요?]
‘그래. 정음이한텐 다 줘도 아깝지 않으니까.’
"정음아."
"네?"
"실은 나도 너 주려고 일본에서 뭘 좀 사왔거든?"
정음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저, 정말요?"
"응. 있어봐."
잠시 아이템이 전송되자 도훈이 가방에서 물건을 꺼냈다.
고급스런 디자인의 크림이었다.
"이거 비싼거 아니에요?"
"아니야. 면세점에서 싸게 팔길레···."
[천상계의 아이템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물건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비싼 화장품보다 피부재생, 미백, 주름개선 효과가 탁월···.]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
"고마워요 오빠. 저한테 이런 걸 다···."
"아참 또 있어."
"또요?"
도훈이 이번엔 도깨비 방망이를 닮은 안마기를 꺼냈다.
"애들 운동 가르치느라 피곤하지? 요새 나온 신제품인데 엄청 효과 좋데. 의료기구는 일본이 유명하잖아."
"오, 오빠··· 이런 것까지···."
정음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자신을 생각해 선물을 사온 마음씨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도훈은 민망한 분위기를 환기 시키기 위해 안마기를 들고 정음의 옆자리로 갔다.
"한번 시험해 볼래?"
"여, 여기서요?"
"응. 충전식이라 20분 정도 사용할 수 있거든. 효과 좋을 거야."
도훈이 스위치를 켜자 지이이잉- 하는 떨림과 함께 안마기의 봉 끝이 진동했다. 사람들이 많은 커피숍에서 안마기를 사용하는 모습이 자못 우스꽝스러웠으나, 도훈의 정성에 감동받은 정음은 부끄러움도 잊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도훈은 안마봉을 들고 정음의 뒷 목과 어깨 주변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아아··· 진짜 시원해요, 오빠."
"그래?"
도훈은 내친김에 강도를 더욱 올렸다.
지이이잉!
짜릿한 감각에 정음이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아···."
정음의 신음을 듣던 도훈은 문득 야릇한 상상이 들었다.
‘가만···. 아까 설명보니 이거 용도가···.’
< 463. 교생 실습-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