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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462화 (435/2,000)

< 444, 도쿄 핫(TOKYO-HOT)-28- >

***

도훈과 미키가 허름한 선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부야 시내에 위치한 고급 가라오케에선 또 다른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술자리에 모인 사람은 흔히 ‘가토 사단’이라 불리는 프로덕션 휘하의 감독들과 그를 따르는 후배 배우들.

안하무인인 성격에 걸핏하면 꼰대질을 해대는 가토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도 없던 이들은 난데없는 호출에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에게 찍히면 피곤해진다는 것을 여태껏 경험으로 지켜 봐왔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조센진!"

스트레이트로 양주를 때려 붓던 가토는 무척 열이 받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두 번씩이나 보란 듯 물을 먹었다. 자존심이 강한 가토에겐 참기 힘든 치욕이었다.

간신배처럼 그를 추종하던 감독 하나가 가토를 위로했다.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죠. 가토 선생님 같은 분이 신경 쓸 놈이 아닙니다. 끽해야 갓 데뷔작을 찍은 신인일 뿐인걸요."

"그래서 더 짜증 난다는 거야. 좆 같은 새끼. 누구 앞에서 잦이를 빳빳이 세워?"

남자 AV배우들에겐 고개를 쳐드는 것보다, 물건을 세우는 것이 더 도발적인 행위였다. 가토는 도훈의 두텁고 묵직한 물건을 떠올리자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눈치 없는 다른 감독이 대꾸했다.

"근데 확실히 실하긴 하더라고요. 카메라 발도 잘 받는 것 같고."

"뭐? 너 지금 그 조센진 편드는 거야?"

"아, 아닙니다. 편드는 게 아니고···."

말실수한 감독이 급히 항변했지만, 이미 빈정이 상한 가토에겐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펀하니 술이라도 퍼부으면서 위로를 받으려 했건만, 오히려 화만 돋우는 꼴이었다.

"이씨,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

"서, 선생님."

"꺼지라고! 확, 술병 던지기 전에!"

"예, 옙!"

가토가 실제로 양주병을 집어 드는 자세를 취하자, 겁먹은 감독이 도망치듯 물러섰다.

왁자지껄하던 술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술에 취해 흥분한 가토가 고래고래 소릴 질러댔다.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야! 미키 대표한테 붙고 싶은 놈들은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서, 선배님."

"가토 센세···."

이성을 잃은 가토가 씩씩거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감독이 그의 팔짱을 끼며 부축했다. 하가시라는 그의 오랜 측근이었다.

"자자, 다들 술 마시고 있으라고. 선생님께서 오늘 기분이 울적해서 그러는 거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알겠지? 선생님, 잠시 저랑 바람이나 쐬고 오시죠."

"놔! 이거."

"아유, 선생님. 밖에서 신선한 공기 마시면서 담배 한 대 피우시면 좀 나아질 겁니다."

가토는 마지못한 척 밖으로 끌려나갔다.

평소 자주 속내를 털어놓던 히가시에게 가토가 말했다.

"하여간 후배라는 놈들이라곤 하나같이 머저리 같은 놈들뿐이야. 사사키만 해도 그래. 뭐? 손가락 장인? 지랄 옆차기같은 소리하고 있네! 손가락 장애인 같은 새끼 같으니."

가토가 펄펄 열을 내자, 히가시가 이에 동조했다. 얄팍한 생김새 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맞습니다. 사사키 따위, 할 줄 아는 거라곤 손가락 장난밖에 없다 보니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죠. 놈은 그냥 3류에요, 3류."

"내가 가장 기분 나쁜 게 그거야. 얼마나 못났으면, 갓 데뷔한 신인 따위한테 밀리느냔 말이야. 100년 전만 해도 조센징들은 우리 발바닥을 혀로 핥으며 목숨을 구걸하던 놈들이었어. 아니, 30년 전만 해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후진국 놈들이었다고! 최근 들어 조금 잘나간다고 기고만장 해가지고는!"

가토는 도훈과의 대결에 은근슬쩍 국가적인 자존심을 내걸었다.

도훈에게 지는 것은 곧 일본인이 지는 것이며, 그를 쓰러뜨리는 게 일본인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라 믿는 것 같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질투를, 애국심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는 억지에도 능글맞은 히가시는 그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백번이고 맞는 말이지요. 열등한 조센진 따위에 저희가 하등 밀릴 것이 없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AV 분야에서 한국이 따라오면 100년도 멀고 말고요."

히가시의 동조에 기분이 다소 풀어진 가토가 담배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가 나를 견제하는 것 같아."

"대표가요?"

"그래. 내가 점점 부담스러운 게지. 따르는 후배들이나 감독들이 많으니까 대표로서 입지가 줄어드는 걸 못 견디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가토 선생님이 독립해서 따로 회사를 차린다면 지금의 미키 프로덕션이 당장 두 동강이 나버릴 테니까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따로 회사를 차리는 건 어떻습니까? 지난번 알아보라고 하신 판권 문제도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충분하겠던데요."

"으음···."

가토는 자신과 친분있는 감독들을 꼬드겨 실제 회사를 나갈 계획을 진즉부터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임무를 맡긴 사람이 바로 측근인 히가시였다.

히가시가 계속 말했다.

"회사 내에 미키 대표의 경영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너무 경영을 모르고, 구시대적인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한다는 거죠."

"그래? 근데 나도 같은 배우 출신이잖아?"

"에이, 가토 선생님이 미키 대표와 같은 레벨입니까? 출연한 레이블이 몇 배는 차이 날 텐데요. 미키 대표는 그저 시기를 잘 탄 2류였고, 가토 선생님은 업계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1류죠. 애초에 차원이 다릅니다."

후장이 헐도록 똥꼬를 빠는 아부였지만, 가토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긴 하지."

"아무튼 제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이젠 선생님이 나설 땝니다. 솔직히 우리가 언제까지 2류 출신 여사장의 밑이나 닦고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가오가 있지. 막말로 회살 먹여 살리는 건 거의 다 선생님 작품들인데 말이죠. "

나중에 프로덕션을 차리고 난 뒤, 높은 자리를 보장받은 히가시는 가토를 끊임없이 부추겼다.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결국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아부에 지나지 않았다.

밤바람에 살짝 술이 깬 가토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긴. 이제 때가 온 것 같아."

"맞습니다.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자존심 상해 안 돼."

"예?"

"미키가 나를 견제하기 위해 타국에서 신인 배우까지 영입해 왔잖아. 지금 타이밍에 나가버리면 놈에게 떠밀려서 내가 쫓겨나는 것처럼 보일 거란 말이지."

"당치 않습니다. 가토 센세가 어떤 분인데 감히···."

"그래. 나도 놈한테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 하지만 이건 배우로서 자존심의 문제야. 나갈 때 나가더라도 그 건방진 조센징의 콧대를 확 꺾어 버려야 겠다는 말이지."

"생각해 두신 방안이 있으신가요?"

"더는 머저리 같은 후배들을 믿지 않으려고."

"그럼···."

"놈을 내 손으로 직접 꺾어야겠어."

가토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좋아요, 말해봐요. 도훈군의 조건이라는 게 뭐죠?"

다리를 꼰 미키가 도발적으로 물어왔다. 짧은 치마 사이로 매끈한 허벅지가 드러나는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군침을 삼켰다.

‘캬, 다리 군살 하나 없는 거 보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더니, 바로 미키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도훈은 미키의 모습에서 방부제 미인이라는 한 연예인을 떠올렸다. 미스코리아 출신인 그녀는 4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키 역시 그 못지않은 동안이었다.

"말하면 뭐든 들어주실 건가요?"

"들어 줄 수 있는 종류라면, 얼마든지."

미키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만있자, 뭘 받아내야 최선일까? 한번 대달라는 건 오히려 미키가 바라는 일일 테고···. 이 기회에 개런티나 올려버려?’

도훈은 3편의 촬영으로 받게 될 계약금을 떠올렸다.

남은 대학 기간 생활비를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거액.

거기서 더 받아낼 수 있다면, 평소 사려고 했던 차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업적은 진작 달성하셨는데 뭘 더 받아내실 생각이신가요?]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건 몸 아니면 돈이겠지. 근데 둘 다 너무 속물 같아 보일 거야.’

[그럼?]

‘마음을 사야겠어.’

[···네?]

도훈의 뜬금없는 대답에 로시가 되물었다.

[마음도 거래가 되나요?]

‘아니. 내 말은 대표의 신뢰를 얻는 쪽이 장기적으로 더 좋다는 거야. 미키는 거대 프로덕션의 대표야. 여자라면 얼마든 대줄 수 있지. 가령 예를 들어 아까 본 육덕녀를 떠올려봐. 내가 그런 애를 공략하려면 대상을 물색하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유도하기 위해 갖은 용을 써야 하잖아. 사범대생 신분 때문에 제약도 많고.’

[그렇겠죠? 아무래도.]

‘하지만 미키 대표는 AV소속사를 운영하고 있어. 거기 얼마나 다양한 여자들이 있을 것 같아? AV여배우들은 10대부터 70대까지있어. 사람 취향이 다 제각각이라 아까 같은 육덕녀는 물론 임산부까지도 섭외가 가능하지.’

[서, 설마?]

‘그래. 그거야. 내가 미키 대표에게 얻어낼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까다로운 업적을 위한 여자들이야. 심지어 AV 배우니 촬영만 가능하다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지. 엄한 아가씨를 먹고 버린다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쉽게 말해 미키는 앞으로 내 업적 달성을 위한 포주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캬! 기가 막히군요! 어쩌면 차후 업적 달성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 여자를 물색하는 건 이제부턴 미키가 대신하는 거야. 나는 그저 용돈도 벌고, 떡이나 치면 그만인 거지.’

[놀라운 발상의 전환입니다!]

‘후후. 그래서 이번 거래에선 그녀의 마음을 살 거야.’

도훈이 테이블에 놓인 사케 잔을 집어 들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네?"

도훈의 뜬금없는 대답에 미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금적이나, 아니면 자신에 대해 외설적인 요구를 해올 것이라 예상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었고, 외설적인 요구는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훈이 바라는 것은 고작 한 잔의 사케였다.

"대표님이 절 좋게 봐주신 걸로 보답은 충분합니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바친다고 하죠. 이 사케 한잔으로, 기꺼이 칼이 되어 드리죠."

"아아···도훈 군은 정말이지···."

미키는 기분이 이상했다.

돈이든 몸이든.

둘 중 무엇을 요구했더라도 도훈에게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돈은 평생 써도 못 쓸 정도로 차고 넘쳤고, 남자들이란 기회만 있으면 여자를 탐하는 본능을 가진 족속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훈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한 잔의 사케였다.

그것이 오히려 미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도훈을 바라보는 미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것은 본능을 갈구하는 여자의 눈빛이라기보다, 연모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눈빛이었다.

"흠, 자세한 내용은 감독하고 계속 얘기하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도훈군은 정말 매력적인 사내로군요. 솔직히 탐나요. 내가 나이가 조금만 어렸어도, 도훈군을 꼬시고 싶었을 거에요."

"저를요?"

"네. 물론 나이 먹은 아줌마의 주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전혀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자꾸 나 설레게 할거에요?"

미키가 은근히 몸을 기대오는 순간, 선술집의 문이 열리며 오카모토가 들어왔다.

"다녀 왔습니다."

숙취 해소제를 사 온 오카모카가 자랑스럽게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눈치라곤 없는 사내였다, 오카모토는.

***

다음 날.

오전부터 야외 촬영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돌아온 도훈은, 오후에 있을 후속 시리즈의 대본을 읽고 있었다.

총 3부작으로 제작된 이번 시리즈는 ‘한국 대물남의 일본녀 폭격’ 컨셉으로 하숙집에 있는 모든 여성을 공략하는 게 주 포인트.

2부 주연을 맡은 상대 역은 ‘리카’라는 신인 배우로, 20대 중반임에도 10대 고등학생처럼 양 갈래 땋고 있었다.

"이번 편은 주인집 막내 딸을 면간하는 내용입니다."

"면간요?"

"네, 자고 있는 여자를 덮치는 장르로 무척이나 자극적인 소재죠."

"네."

"배경은 두 딸이 함께 자는 2층 침대입니다. 1부에 나온 시즈카씨가 1층에서 자고 있는데, 몰래 방문을 열고 들어온 주인공이 또 한 번 시즈카씨를 덮치는 거죠."

"시즈카 씨가 한번 더 출연하나요?"

"네. 지금 분장실에 있어서 리딩은 좀 늦게 참여한다고 하더라고요."

"아하, 근데 저분 실제로 고등학생은 아니죠?"

"하하. 당연히 아니죠. 미성년이 등장하는 것은 일본에서도 불법입니다. 그냥 그렇게 느껴지게끔 설정만 하는 거죠. 방에 책가방을 놓아둔다던가, 문고리에 교복을 걸어 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아하."

도훈은 맞은 편에서 열심히 대본을 읽고 있는 리카에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시즈카 언니에게 잘 들었어요. 저 보기보다 강하니까 거칠게 하셔도 괜찮아요."

얼굴뿐 아니라 몸도 작고 왜소한 리카였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듣던 도훈은 비로소 안심했다.

‘역시 AV배우라는 건가. 근데 얼굴만 봐선 완전 고등학생인 줄 알겠는데? 제대로 합법 로리네.’

[정말이지 AV 출연하는 여배우들의 스펙트럼은 엄청난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 취향이 다양하다는 거거든. 누구에겐 혐오스러운 몸매지만, 누군가에겐 그렇게 대꼴일 수가 없는 거야. 아무래도 리카는 페도필리아들을 타겟팅하는 배우 같아.’

[주인님 생각대로 미키 대표만 잘 구워삶음 어떤 여자와도 업적을 이룰 수 있겠군요.]

‘후후. 어젯밤 미키에게 점수 따 놓은 게 있으니 충분할 거야. 그나저나 오늘은 이층 침대를 오가며 자매 덮밥인 건가.’

[혼신을 다한 연기, 기대 하겠습니다.]

‘맡겨만 두라고. 배우마저 감동하게 만들어 줄 테니.’

도훈이 앳된 소녀 같은 리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 444, 도쿄 핫(TOKYO-HOT)-28-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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