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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461화 (434/2,000)

< 443. 도쿄 핫(TOKYO-HOT)-27- >

‘오오, 이게 웬 공떡이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더니만, 열심히 골뱅이를 팠더니 이런 개꿀 보상이!’

그때.

똑똑-!

누군가 대기실 문을 노크했다. 나와 마이가 서로를 눈을 쳐다보며 당황하는 사이 익숙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카모토 데쓰,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바지 지퍼를 내리려던 마이는 죄짓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물러섰다. 하여간 저 대머리 타이밍하고는!

마이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는 사이.

대기실 문이 열리며 오카모토가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오피스룩 차림의 미키대표도 함께였다.

내 얼굴을 보며 환히 웃던 미키 대표는 방 안에 있던 마이를 발견하더니 살짝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이가 여긴 웬일이지?"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촬영 끝내고 잠시 인사나 나눌까 해서요."

마이는 증거랍시고 커피를 머리 위로 들어 보였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미키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키는 거 같았다.

"···별일이군. 촬영 끝나면 늘 탈진할 것 같다며 곧장 퇴근했던 것 같은데."

"하핫, 제가 그랬나요?"

머리를 긁적거리는 마이의 표정에서 난처함이 묻어나왔다. 애초 남자 배우 대기실에 여배우와 단둘이 있는 상황 자체가 오해를 피하긴 힘들었다. 더욱이 그 둘이 막 찐한 19금 촬영을 끝마친 애로 배우라면.

"할 말 있어서 오신 것 같은데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bye!"

도망치듯 물러서는 마이의 뒷통수를 미키대표는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왠지 눈빛만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응시다.

‘쩝, 좋다 말았네.’

[애초에 장소가 좋지 못했습니다. 뻔히 사람들 다 있는 회사 휴게실이라뇨.]

‘하긴. 그냥 저녁에 숙소로 놀러오라며 약속이나 잡고 끝낼 걸 그랬네.’

뒤늦게 후회를 하는데 미키가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나에게 경고했다.

"도훈 군. 사내 규정은 알고 있겠죠?"

"네? 아···네."

"배우들끼리 사적인 관계는 허용되지 않아요."

"저··· 그냥 인사만 나눈 건데요?"

"처음엔 다들 그렇게 시작하죠. 오해를 살만한 행동은 삼갔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꾸중을 듣게 되자 살짝 짜증이 났다.

‘웃기고 있네. 호시탐탐 나를 따먹으려는 사장이 젊은 여자에게 질투하려는 것으로 밖에 안보이는데···.’

[뭐 어쨌든 대표 입장에서는 충분히 저런 충고를 할 수도 있겠죠.]

‘쳇. 하여간 인기가 많아도 문제고만.’

[원래 미남은 피곤한 법이랍니다, 주인님.]

"암튼,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하루 여러 편 찍는 일은 5년 차 베테랑도 소화하기 힘든 일인데···."

"뭐, 실제로 씬을 찍은 건 한 편 뿐인걸요."

"어쨌든요. 참, 어차피 밤에는 숙소 가야 하니까 별일 없죠?"

"네?"

"기왕 일본 왔는데 술이나 한잔 사려고요. 아, 오해는 말고. 이쪽에 오카모토씨도 함께 갈 거니까."

마이를 쫓아낸 뒤라 자기도 찔리는 게 있었는지 미키가 오카모토를 대동한 술자리를 제안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네 뭐···. 그러죠."

***

시부야의 야경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의 밤거리도 불야성이라고 하지만, 아직 도쿄에 비빌 수준은 아니었다.

오카모토가 미키의 차를 대리로 운전하는 사이 나는 뒷좌석에 앉아 넋을 놓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예쁘죠?"

"네."

"난 이곳에서 태어 나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자랐어요.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죠."

"예···."

미키 대표의 눈이 살짝 감성에 젖어 있었다.

"AV배우를 체험해 보니 어땠어요?"

"그냥. 아직까진 재밌네요. 신기한 것도 많고."

"다행이네요. 부푼 꿈을 안고 도전한 어린 친구들도 쓴맛만 보고 그만두는 경우가 부지기순데."

"그래요?"

"AV배우는 보통의 연예인과는 달라요. 달라도 많이 다르죠."

"어떤 부분에서요?"

미키가 대답을 머뭇거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의 날 보면 대답이 되려나요?"

"네?"

"값비싼 외제차. 높은 빌딩. 회사의 대표. 가질 수 있는 건 다 이뤘죠. 하지만 지금껏 혼자잖아요."

"아···."

"사람들은 AV배우에 열광해요. 벗은 몸을 보여주고, 간드러진 신음소리를 내면 기꺼이 지갑을 열죠. 팬 사인회도 가고, 굿즈도 열심히 사모아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

"속으론 몸 파는 창녀랑 다를 바 없다고 여기거든요."

"흠."

"난 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에요. 사실 여자로서 AV를 찍는다는 건 밑바닥까지 다 보여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돈을 잘 벌면 뭐하나요, 얼굴은 팔릴 대로 팔리고···. 어떤 남자가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고 싶겠어요?"

자책하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성공한 사람들에겐 저마다 명과 암이 있다지만, 미키 대표에겐 유독 그 어둠이 짙게 드리운 것 같았다.

"휴, 내가 쓸데없는 소릴 했네요. 요새 회사 일로 골머리가 좀 아파 가지고···."

"회사 일요?"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는 데 동참했다.

"직원 하나가 말을 안 들어서요. 정확히 말하면 소속 배우가."

"아···."

말 안해도 대충 누군지 알 것 같다.

사사건건 시비를 트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배우.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미키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는 가토에 대한 이야기같다.

어느새 우리는 허름한 선술집 근처에 도착했다.

화려한 도심을 지나 굳이 이런 변두리까지 온 이유는, 우울했던 미키 대표의 밝아진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쨘! 여기가 제 단골 술집이에요."

"아, 그래요?"

"무명 시절엔 돈이 별로 없었거든요. 힘들 때 술을 마시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죠. 하지만 여기 아저씨는 외상도 받아 주더라고요."

허름한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간 미키가 해맑은 소녀처럼 인사했다.

"오까상!"

미키가 아저씨라고 부른 사내는 이미 환갑도 훌쩍 넘은 나이로 보였다.

"이랏 사이 마세! 미키!"

하지만 나이에 비해 굉장히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였다. 이마엔 일본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건을 두르고, 팔을 잔뜩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는 미키를 발견하더니 마중 나와 인사했다.

슬슬 일본어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는 통역기 아이템을 가동시켰다.

"오늘은 무슨 일로 줄줄 달고 왔어? 맨날 혼자 오더니만?"

"에이, 제가 또 언제 맨날 그랬어요. 이쪽은 기억나죠? 우리 회사 직원."

"오카모토 데스."

"어어. 그 대머리구만."

"대머리 아닙니다. 이마가 조금 넒은 편이죠."

"어, 그게 대머리라는 거야. 저 젊은 친구는?"

"네, 이번에 영입한 신인이에요. 잘 생겼죠?"

"호오. 딱 미키 취향인 것 같은데? 반갑네."

"아, 말씀 못드렸네요. 일본말을 잘 못해요. 한국인이 거든요."

"간꼬쿠인?"

선술집 주인의 눈초리가 살짝 올라갔다.

혹시나 혐한 감정을 가진 사람인건 아니겠지?

"반갑네, 젊은 친구. 우리 가게에 와서 영광이군."

다행히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그의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자, 이쪽에 앉아요."

"네."

나와 미키 오카모토는 오뎅 바 앞에 나란히 앉았다. 맛있는 국물 냄새가 피어오르며 위장을 자극해 온다.

"그래, 술은 뭘로 드릴까?"

"가볍게 사케 한 잔만 하려고요."

"좋지, 사케. 안주는?"

"맛있는 걸로 주세요. 오뎅 먹고 있을 게요."

"그래, 그러라고."

술집 주인이 사람좋은 미소를 띄우며 안쪽으로 자취를 감춘 사이 미키가 나에게 오뎅 꼬치 하나를 건넸다.

"들어봐요. 내가 이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안주에요."

"네, 감사합니다."

배가 고파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뎅은 정말로 맛있었다. 특히 매운 고추가 풀어진 간장 베이스 소스는 짭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이었다.

"와, 맛있네요."

"그죠? 내가 왜 이집에 자주 오는 지 알겠죠? 아, 오카모토도 들어요."

대표의 눈치를 살피던 오카모토도 오뎅을 한입 베어 물었다.

"오이시!"

우리 셋은 사케가 나오기 전에 꼬치를 수북히 쌓게 되었다.

"아저씨랑은 정말로 오랜 사이에요. 내가 무명일 때부터 단골이었으니까 거의 한 20년도 넘은 것 같아요."

"그렇겠네요."

"그때랑은 사는 집도 변했고, 타는 차도 바뀌었지만 딱 하나 달라지지 않는 건 이 가게서 먹는 오뎅과 사케죠."

"네."

허름한 선술집이지만 미키는 이곳에 애정이 많은 듯했다.

"참, 아까 그 얘기는 뭐에요? 말 안 듣는 직원 이야기요."

"아···. 괜찮아요. 이건 도훈군이랑은 별 상관없으니까."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오카모토가 끼어들었다.

"가토 상입니다."

"앗, 오카모토!"

"대표님. 도훈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만 해도 계속 도훈 군을 괴롭히는 데요."

예상을 했던 일이라 놀랍진 않았다.

"가토씨면 그 유명하신···."

미키도 이미 이름이 언급되어 버렸기 때문인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정말로 골칫거리죠."

오카모토가 부연 설명하듯 살을 덧붙였다.

배우로 유명해진 그가 회사의 실권을 차지하려 한다.

미키 대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감독들을 휘두른다 등등···.

아마도 숨겨진 비화가 더 있을 것 같지만, 어쨌든 드러난 행동만으로도 반역에 가까운 행위였다.

나는 따지듯 물었다.

"그럼 왜 가토를 짤라 버리지 않으세요? 이 회사의 대표시잖아요?"

한숨을 푹 쉬는 미키 대신 오카모토가 대답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왜요?"

"프로덕션과 배우는 묘한 관계에요. 신인일 땐 프로덕션이 갑이죠. 작품을 배정하고, 출연료를 지급해주고. 사실상 프로덕션에서 밀어주지 않는 배우는 뜨기도 힘들거든요. 하지만···."

오카모토는 한참 이 바닥의 생리에 대해 알려주었다.

갑을 관계라는 게 보통의 회사들처럼 영속적이지 않다. 사실상 프리랜서에 가까운 배우들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부터 오히려 태세가 역전된다.

다른 소속사로 옮기겠다.

게런티를 올려달라.

대우가 부족하다 등등 쉽게 말해 역갑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토씨는···. 이미 이 바닥에선 알아주는 스타입니다. 남자 배우로서 그만한 실력과 명성을 갖춘 이는 손에 꼽을 지경이지요. 실제로 회사 매출에 상당 부분을 기여하고 있기도 하구요."

요컨대 가토의 입지가 너무 올라가면서 발생 되는 문제라는 소리였다. 몸값이 오른 가토는 점점 오만방자하게 변해갔고, 그것을 적절한 때 쳐내지 못한 지금에 이르러선 오히려 회사가 일개 배우에게 휘둘리는 상황이었다.

"대표님. 이제 더는 두고 봐서는 안됩니다. 가토 씨가 아무리 대단한 배우라지만, 그 때문에 회사 위계가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

미키가 괴로운지 말없이 사케를 들이켰다.

셋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미키는 유난히 술잔을 많이 비우는 형국이었다.

‘흠, 저러다 취하겠는데?’

[주인님이 취하는 것보단 낫죠. 주인님의 약점 중 하나가 술이 잖습니까?]

확실히.

이도훈 이 녀석은 잘생기고 물건도 실 한 반면, 체격에 비해 지나치게 술이 약한 축이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간의 해독기능이 떨어지는 모양으로, 술 때문에 뻗어서 정신을 몇 번 잃고 나니 나도 모르게 술을 자제하게 되었다.

오카모토의 계속되는 성토에 얼굴이 불콰해진 미키가 마침내 단언하듯 소리쳤다.

"안 그래도 정리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네? 정말이십니까?"

"단. 지금 이 상태로는 안돼요. 그가 회사를 옮기거나 따로 차려 나간다면 따라가겠는 후배들이 너무 많아요."

미키가 현실적인 부분을 이야기했다. 사실 가장 화가 나는 사람은 자신일 텐데, 회사가 이익이 되는 방향을 위해 인내하는 모습이 어엿한 경영자처럼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일 처리 해선 안 돼요. 칼을 뽑아들 땐 항상 뒷일을 생각해야 하죠."

그렇게 말을 마친 미키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대안을 찾은 것 같군요."

"제가요?"

"네. 도훈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어떤···."

"나는 가토를 축출할 거에요. 거기 힘을 보태줬으면 해요."

[주인님, 위험합니다. 자로고 남 일에는 끼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긴 한데, 나도 가토 그 자식이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어차피 일주일도 안되 끝날 일입니다. 굳이 가토와 척을 질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공짜는 아니지.’

[네?]

나는 미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저에겐 무슨 이득이 있죠?"

"···네?"

"저한테 부탁하신다면서요. 아마 제 역할이 필요한 거겠죠? 어차피 전 알바 겸 놀러 온 거예요. 칼춤을 쳐야 한다면 기꺼이 칼이 되어 드릴 용의는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제가 얻는 건 뭐냔 말이죠."

나의 노골적인 요구에 오카모토는 당황했고, 미키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도, 도훈군···."

"잠깐. 긴히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오카모토씨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시겠어요?"

말은 부드러웠지만 쉽게 말해 오카모토는 나가 있으란 소리였다. 눈치가 빠른 오카모토가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전 그럼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 음료 좀 사오겠습니다. 편의점이 좀 멀어서 한참 걸리겠네요."

오카모토가 선술집 밖으로 나가자 미키가 한쪽 팔을 바에 기대며 긴 머리를 한차례 흔들었다. 하얗게 드러난 목선이 너무나 매끈해 20대 못지않게 팽팽했다.

"보기완 달리 협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군요, 도훈 군. 어디 그럼 우리 거래를 한 번 해볼까요?"

미키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다는 기분이 든건, 내 착각이었을까?

< 443. 도쿄 핫(TOKYO-HOT)-2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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