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 도쿄 핫(TOKYO-HOT)-13- >
***
다음 날 아침.
미키 프로덕션 사옥의 1층 흡연 부스엔 젊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그 조센징 얼굴 봤어?"
"아니, 사사키 넌?"
"나도 아직. 어젯밤 늦게 도착했다는 말만 들었어."
‘손가락 장인’이라고도 불리는 사사키가 담배를 연달아 물며 대답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특징인 그는, 미키 프로덕션 소속의 젊은 남자 배우 중 최근 가장 핫한 3인 중 하나였다.
"근데, 그 한국놈이 놈이 그렇게 커? 왠지 과장 아닐까?"
"아니야. 나도 우연히 PD 통해서 관련 자료를 확인했는데 사이즈는 확실했어."
"자연산은 맞아? 확대 아니고?"
"혹시 몰라 클로즈업 때 정지해 놓고 봤거든. 실리콘 모형도 아니고, 확대는 더더욱 아냐."
사사키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는 시원하게 머리를 삭발한 요시다라는 배우였다. 강간이나 조교 기획물이 특기인 그는, 특유의 찢어진 눈매가 전형적인 범죄자 인상을 풍겼다.
타고난 외모 덕도 있지만, 배역에 몰입했을 때 펼치는 메소드 연기는 그가 진성 사디스트임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 많았다.
그때 멀찌감치 잠자코 듣고 있던 잘생긴 청년 하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흥, 아무리 그래 봐야 기획용 엑스트라일 뿐. 부카케맨이랑 다를 바 없지."
사사키와 요시다의 대화에 끼어든 그는 미키 프로덕션의 남자 배우 중 비주얼을 담당하는 고로였다. 잘생긴 외모로 여배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그는, 특유의 빈정대는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미키 대표가 어디 보통 여우야? 단물만 쏙 빼먹고 탈탈 털어서 한국으로 쫓아 버리는데 불알 두 쪽 건다."
"고로, 혹시 긴장하고 있는 거야?"
사사키의 물음에 고로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뭐? 내가 왜?"
"듣자 하니 배트맨 가면을 벗은 놈의 얼굴이 생각보다 수려하다더라고. 여기서 이미지상 가장 겹쳐지는 사람이 고로 너잖아? 안 그래?"
사사키는 평소 고로의 잘난 외모에 열등감이 심했다.
특히 지난 작품을 함께 찍으려 했던 여배우가, ‘난 고로 쪽이 더 좋아.’라고 담당 피디에게 뺀찌를 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뒤로부터, 은연중 그를 시기하고 있었다.
더구나 보빨과 손기술이라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자신감을 가진 그였기에, 잘생긴 외모로 실력 이상의 과대평가를 받는 고로가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허여멀건 한 얼굴 하나 믿고 겁나 까분단 말이지. 그렇게 잘랐으면 아이돌이나 할 것이지, 아이돌 기획사에서 사고 쳐서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B급 주제에···.’
사사키의 공격에 고로가 곧바로 반격했다.
"글쎄? 정작 긴장해야 될 사람은 오히려 사사키 너 아닐까?"
"내가? 난 포지션 상 겹치는 게 전혀 없는데?"
"무슨 소리? 나도 그 영상 봤거든? 대단하더군, 그 분수 쇼. 그건 절대 연출이 아니었어. 솔직히 시오후키 기술만 보면 너보다 훨씬 나아 보이던데?"
"뭐라고? 말 다 했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요시다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뭐하냐, 너희들? 조센징이 우리 일자리 뺏으러 왔는데 같은 동포끼리 싸우기나 하고."
"저 자식이 말을 띠껍게 하잖아."
"먼저 시비 턴 게 누군데?"
두 사람은 요시다의 만류에도 말싸움을 그칠 줄 몰랐다. 그때 흡연 부스로 또 다른 배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범한 인상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세 배우가 화들짝 놀라며 인사했다.
"앗, 안녕하십니까!"
"가, 가토 선배!"
"오랜만에 나오셨군요!"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미키 프로덕션에서 레전설로 통하는 어마어마한 거물, 가토였다.
지금껏 3,000명이 넘는 여배우와 잠자리를 했으며, 지금도 그와 배역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 예약이 내년까지 줄 서 있다는 살아있는 전설.
부득이 스튜디오 촬영이 있는 날이 아니면 사옥으로 얼씬도 않는 그의 등장에, 옥신각신하던 세 청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어, 불."
가토가 담배를 입에 꼬나물며 명령하자, 사사키가 곧바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세 사람은 가토가 한 모금 빨아들여 다시 내뱉을 때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만큼 젊은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가토의 존재감은 절대적. 그도 그럴 것이 현역 배우 중에선 그를 동경해 이쪽 업계에 투신한 사람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특히나 미키 프로덕션에서 이 일을 시작한 남자 배우들이라면, 예외 없이 가토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와 달리, 그는 절정의 정력을 타고난 변강쇠.
11 VS 1로 벌어진 섹스 그라운드 특집에서 11명의 현역 여배우를 동시에 보내버린 절륜한 정력은 지금까지 회자 되고 있었다. 편집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시작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촬영된 2시간 반짜리 영상에, 야동 매니아들은 ‘섹신 가토’라는 최고의 찬사를 남겼다.
그런 전설적인 배우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세 사람은 바짝 긴장한 체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뭔데 그렇게 호들갑들이야?"
담배를 피우던 가토가 한참만에 말문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이번에 계약하러 왔다는 한국 배우 얘기 좀 하느라고···."
가토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사옥 출입이 드문 그로서는 금시초문인 듯했다.
"한국 배우? 여자 신입이야?"
"아, 아닙니다. 남자배웁니다."
"호오. 뭔 상황인데?"
가토가 흥미를 보이자 요시다가 짧게 내용을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가토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런 일로 이렇게 쫄아 있단 말이야? 요새 늬들 잘나간다더니 다 헛소문이었구만?"
"쪼, 쫄지 않았습니다."
"그냥 얘기만 좀···."
"여봐 여봐, AV 배우는 입을 털 게 아니고 이걸로 말해야지."
가토가 사사키의 고환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갑작스럽게 물건이 잡힌 사사키가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감히 대선배의 터치를 거부할 생각은 못 한 체 몸을 비틀며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으으···!"
"응? 좆만 크면 다냐? 그럼 진작 서양 배우들한테 방 빼주고 물러나야지."
"아, 아닙니다!"
"선배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고로는 자기와 말다툼을 하던 사사키가 고통받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가토가 고로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하, 얼굴만 믿고 까분다는 놈이 너로구나?"
"욱!"
"다들 똑똑히 들어. 물건 크고 잘 생겨봐야 다 헛거야. 내가 예전부터 누누이 말했잖아. 남자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뭐라고?"
"저, 정력입니다!"
눈치 빠른 요시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지. 정력. 그래서 내가 늘 단백질 보충제랑 철분 보조제 빼먹지 말고 먹고 운동 열심히 하랬잖니."
"네, 넵!"
"얼마나 자신감이 없으면 고작 한국산 뉴페이스 따위에 긴장해 가지고···. 짜식들."
"죄, 죄송합니다!"
"시정 하겠습니다."
한참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쏟아낸 가토가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 한국 놈은 언제 슛 들어간다던?"
"촬영 계획은 아직 모르겠고, 위에서 대표님하고 얘기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누님 얼굴 뵌 지도 오래됐는데 한 번 구경이나 가볼까?"
가토가 흡연 부스를 나서며 다시 한번 후배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야."
"네!"
"운동 꼬박꼬박해라. 나처럼 롱런하고 싶으면."
"네, 넵!"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흡연 부스의 통유리를 통해 엘리베이터에 오른 가토를 보며 사사키가 말했다.
"어흑, 진짜 불알 터지는 줄."
"난 젖꼭지 뽑히는 줄 알았잖아."
"쯧,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왜 대선배 앞에서 눈치도 없이 싸워가지고···."
"낸들 올 줄 알았냐?"
"근데 가토 선배는 무슨 일로 온 거래? 스튜디오에서 촬영 잡혀 있던가? 요샌 야외 기획물 아니면 거의 안 찍는 거로 아는데?"
"나야 모르지, 뭐."
세 배우는 갑작스레 등장한 가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제 조건을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미키의 집무실 안에선 도훈과 오카모토, 그리고 미키 세 사람이 계약사항을 조율하고 있었다. 영어로 직접 대화를 해도 되지만, 계약서 군데군데 필기를 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오카모토가 팬을 잡은 체 통역을 맡았다.
대표인 미키는 어제보단 수수한 옷차림이었는데, 그래도 상체가 깊숙이 패인 티셔츠를 입고 있어 윗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였다.
"흐음, 그러니까 얼굴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
"네. 신분 노출은 곤란해서요. 그래서 그때 성방 찍을 때도 가면을 썼던 것입니다.···라는 군요."
도훈의 한국어를 오카모토가 동시통역하면서 계약이 진행되었으므로 평소보다 시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도훈이 얼굴 노출 불가라는 옵션을 두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미키 역시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미키가 그 이유를 물었다.
"꼭 그래야만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 오해는 마세요. 제 입장을 관철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잘생긴 얼굴을 감추는 게 안타까워서."
"평생 이 일을 할 것도 아니고, 나중에 얼굴 팔리면 곤란한 직업을 갖게 될 예정이라서요."
"···으음, 그렇군요."
미키는 고민했다.
도훈이 제시한 옵션은 사전에 오카모토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얼굴을 확인하기 전이었으므로, 도훈의 훈훈한 얼굴을 보고 난 지금으로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아쉽단 말이지. 저 정도 외모면 고로만큼은 아니어도 여성 팬들 사이에서 충분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텐데···.’
흔히들 AV를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여성 팬들도 두터웠다. 여배우의 얼굴을 보고 품번을 고르는 남자와 반대로, 여자들은 남자 배우의 얼굴을 세세하게 따졌다.
그런 면에서 도훈의 외모는 충분히 여성층을 공략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좋아. 어차피 종신도 아니고 단기 계약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하고, 다음에 옵션을 조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겠군.’
속으로 계산은 마친 미키가 최종 계약에 승인했다.
"좋아요. 사정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할게요."
미키가 볼펜을 들고 주요사항에 밑줄을 그으면, 오카모토가 동시에 그녀의 말을 통역해 전달했다.
1. 이도훈(이하, 을)은 3편 이상의 작품을 촬영하기로 한다.
2. ‘을’이 정해진 기한 안에 작품 수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다음에라도 할당된 몫을 채운다.
3. 촬영을 마치면 ‘갑’은 ‘을’에게 정해진 보수를 지급한다.
4. 보수의 지급은 마지막 촬영이 끝난 순간 일괄 지급한다.
5. 특약으로, 얼굴의 노출은 절대 불가 한다.
주요사항을 체크한 미키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특약을 더 적어넣었다.
"여섯 번째, ‘을’은 헤어 포르노에 동의한다."
"헤어 포르노면···."
"노모자이크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특약 사항을 집어넣은 미키가 말했다.
"어차피 얼굴을 가렸으니 상관없지 않겠어요?"
"그렇긴 한데···."
도훈이 로시에게 물었다.
‘혹시 나중에 영상을 보고 PK단이 나를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물건만 보고서요? 얼굴을 본대도 모를 겁니다. PK단이 플레이어를 색출하는 방식을 감안하면 절대로요.]
‘그래? 그럼 안심하고 사인해도 되는 거지?’
[전 3편이나 찍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남은 기간은 고작 6일인데 가능하시겠습니까?]
‘풉-. 그딴 건 식은 죽 먹기지. 맘먹으면 하루에도 찍을 수 있을걸?’
[과연 생각대로 될지···.]
‘왜? 내가 몸 팔리고 돈 떼일까 봐서 그래? 걱정 마. 막말로 나는 위업만 달성하고 가도 남는 장사야. 그리고···.’
도훈은 푹 패여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미키의 상체를 똑바로 쳐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저 건방진 사장 구멍에 기필코 태극기를 꽂아 버릴 테니까. 내 좆 맛 한번 보고 나면 계약금뿐 아니라,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받아낼 수 있을 걸.’
[단단히 벼르고 계시군요.]
‘당연하지. 내 대물을 보고도 말짱한 사람은 저 여자가 처음이야. 하여간 기회만 되면 결단을 내 버릴 테다.’
"알겠습니다. 싸인 하겠습니다. 어디다 하면 되죠?"
오카모토가 사인할 곳을 손으로 짚었다.
"이곳, 그리고 이곳입니다. 도장이 없으니 직인은 인주로 대신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계약을 마친 도훈을 향해 미키가 환영의 인사를 영어로 건넸다.
"단기계약이긴 하지만 정식으로 우리 회사 직원이 된 걸 환영해요, 도훈군."
"네,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 저야말로."
"그럼 첫 촬영 일자는 언제죠?"
"왜요? 벌써 몸이 근질근질 한가요? 하긴, 어젯밤 조금 힘들었겠군요. 그렇게 바짝 달아올랐었는데···."
미키의 놀림에 도훈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젠장. 이걸 뭐라고 받아친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카모토가 깜짝 놀라 말했다.
"가, 가토 상. 지금은 계약 중이라···."
"얼레, 방을 잘못 찾았네. 근데 계약이라고? 누구랑? 아하, 저 친구가 이번에 뽑혔다는 신입이구나?"
가토는 미키 대표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 없었다.
노크도 않고 대표의 집무실을 멋대로 드나드는 행동부터가 그가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는 오카모토의 만류에도 안으로 휘적휘적 들어오더니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를 쳐다보고 말했다.
"벌써 계약 끝났네? 누님, 신입도 뽑혔는데 신고식 한 번 화끈해야 해야 하는 거 아니요?"
미키는 통제 불가인 가토를 보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저 골칫덩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길 또 왔담?’
< 429. 도쿄 핫(TOKYO-HOT)-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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