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 도쿄 핫(TOKYO-HOT)-7- >
하지만 보영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2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스튜어디스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도훈이 통로를 지나다니는 다른 승무원에게 물었다.
"저기요."
"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까 커피 좀 갖다 달라고 했는데···."
"그러셨어요? 바빠서 깜빡했나 봐요. 제가 금방 전해 드릴게요."
승무원은 태도는 몹시 상냥했다. 몸매도 늘씬하고, 얼굴 또한 예뻤다. 그러고 보니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못 생긴 스튜어디스는 한 번도 못 본 같았다.
‘캬-. 이러니 스튜어디스들을 하늘 위의 천사라고 하는구나.’
[쯧쯧. 그저 여자만 보면···.]
‘인마. 꼴리게 생겼는데, 안 꼴려 주면 예의가 아닌 거야.’
[뉘에, 뉘에.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나저나 보영이는 뭐 하길래 이렇게 늦는담?’
도훈이 잠에들까 하던 참, 마침내 보영이 음료 카트를 밀고 도훈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커피 찾으셨죠? 늦어서 죄송해요."
보영이 다른 승객의 눈치를 살피며 도훈에게 말했다.
"누나 많이 바빠요?"
"예, 고객님. 좀 바쁘네요."
보영은 사무적인 태도로 커피를 따라 주었다. 그때 도훈의 건너편에 앉은 손님 역시 보영을 향해 주문했다.
"익스큐스 미. 고히 플리스."
"하이, 와까리마시따."
보영은 일본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에게 친절하게 응대했다. 도훈은 그녀가 살짝 등 돌린 사이 슬쩍 무릎 뒤를 손으로 터치했다. 보영은 움찔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따랐다.
‘크크. 만져도 아무 말 없네?’
도훈은 살짝 장난기가 동했다. 보영에게 커피를 주문한 일본인은 심심했는지 계속 보영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마, 난지 데쓰까?(지금 몇 시 입니까?)"
보영은 능숙한 일본어로 응대하며 동시에 스멀스멀 위로 올라오는 도훈의 손길을 차단했다. 더이상 도훈의 손이 엉덩이 쪽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밀어낸 것이었다. 유유히 강물을 떠다니는 오리가 물 속에선 쉼없이 발을 놀리는 것처럼, 일본 승객을 상대로 활
짝 미소짓는 보영 역시 등 뒤로는 도훈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도훈의 손이 엉덩이를 만지려 할 때마다 손등을 탁 치거나 손목을 잡고 끌어 내리며 완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어쭈, 지금 일하는 중이라 이거지?’
그녀의 계속된 만류에도 도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엉덩이를 더듬거렸다. 보다 못한 로시가 말렸다.
[적당히 하시죠, 주인님. 굉장한 민폐입니다.]
‘나도 아는데···. 진짜로 못 참겠어서 그래.’
[어휴, 그러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쩌려고요?]
‘누가 본다고? 다들 쿨쿨 자는구만.’
도훈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그의 위치는 뒷좌석 두 번째였기 때문에 바로 뒤만 아니면 자신의 행동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뒤에 자리한 승객들은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꿀잠에 취해 있었다.
도훈은 자신을 감시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더욱 과감하게 손을 뻗었다. 보영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 안쪽을 매만진 것이었다.
‘흐흐. 이러니까 마치 지하철 치한이라도 된 기분인데.’
[정말로 치한입니다.]
‘아무렴 어때? 우리가 보통 사이야? 룸 떡도 친 사이라고.’
그때 띠링- 하누 알람이 들려왔다.
도훈은 흥분한 나머지 일본어로 지껄였다.
‘요오시! 그란도시즌!’
[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장소가 바뀌면 미션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 진다고.’
[설마 이제껏 의도하신 행동이셨습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얻어걸린 거지. 설마하긴 했지만. 우선 미션부터 띄워.’
[넵.]
-소년이여, 치한이 되어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상대로 성적 흥분도를 100% 끌어 올리는 미션입니다.
*상대가 현재 근무 중이어야 하며, 반경 5M 이내에 최소 세 사람이 있어야만 미션이 성립합니다.
*성공 보상으로 1500포인트와 ‘에로마늄 팔찌’가 제공됩니다.
*상대가 불쾌감을 느낄 시 자동으로 미션이 소거됩니다.
*제시된 시간을 초과하면 자동으로 미션이 소거됩니다.
*남은 시간 : 1 Hour
‘크흑. 치한이 되라니···. 이거 완전 범죄 조장 미션 아니냐?’
[아닙니다. 조건 보시면 알겠지만 상대가 불쾌감을 느낄 경우 애초에 미션은 성립 불가합니다.]
‘오호, 그러니까 옛날에 지하철에서 했던 치녀를 찾는 미션과 비슷한건가?’
[그렇죠. 성적인 접촉이 발생한다고 무조건 범죄인 것은 아니니까요.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성립 조건은 강제성을 띄어야 합니다.]
‘오케이, 이해했어. 근데 에로마늄 팔찌는 무슨 아이템이야?’
[에로마늄 팔찌는 평상시엔 평범한 건강팔찌처럼 차고 다니다가 물건에 장착하는 순간 돌기 모양으로 변형되는 아이템입니다.]
‘오오, 쉽게 말해 부착형 해바라기네?’
[뭐, 그렇게 말하기도 하더군요.]
‘아이템 무지 마음에 드는데? 이번 미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겠어. 우선 보영이가 무슨 생각인지부터 들쳐봐야겠군.’
도훈은 곧바로 스킬을 발휘해 보영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아앗, 일하는 중인데 갑자기 이래 버리면···. 안 그래도 땅기는 날인데 이 자식 진짜···.}
보영의 본심을 읽은 도훈이 변태처럼 씨익 웃었다.
[보영양에게 살짝 치녀 기질이 있었군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손은 거부하지만,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거라고. 이번 미션 식은 죽 먹기겠는데?’
[아니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감시자도 없겠다. 보영이도 원하겠다, 뭐가 문젠데?’
[흥분도 100이란 수치는 여성이 오르가즘에 도달했을 때의 정도입니다. 삽입이 불가능한 지금 상황에선 결코 쉬운 수준이 아닙니다.]
‘뭐? 오르가즘? 어쩐지 미션이 쉽게 보인다 싶더라니···.’
[지금부터 미션과 연동되어 한시적으로 상대의 흥분도가 디스플레이에 표기됩니다. 현재 수치, 64. 긴장으로 인한 가벼운 흥분상태로 70이 넘어설 경우 애액의 분비가 시작됩니다.]
‘좋아. 어쨌든 간만의 미션이니 어떻게든 싸게 만들어야지.’
도훈이 각오를 다지며 연신 보영의 속살을 만지작거렸다.
***
‘근데, 이 자식 정말 겁도 없이···.’
보영은 한마디로 진퇴양난 이었다.
커피를 주문시킨 일본인은 심심했는지 계속 말을 걸어왔다.
도쿄는 자주 가봤느냐, 기내식은 뭐가 나오느냐 등···. 무료한 비행시간을 미인과의 농담으로 때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타는 VIP손님인 만큼 말동무를 해주는 것 자체는 상관없었으나 문제는 도훈의 손장난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가볍게 스타킹 위만 어루만지던 것이, 이제는 치마 속으로 들어와 사타구니 안쪽을 교묘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생리날이 가까워져 예민해져 있던 보영은, 도훈의 나쁜 손에 점점 흥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너무 집요한 손길이야. 게다가 저번에 한 번 자서 그런지 자꾸 그 때 일이···.’
물론 원나잇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룸에서 물고 빤 기억은 생전 처음인 보영이었다. 당시의 강렬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보영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졌다.
‘하-. 비행기만 아니었으면 마음껏 받아줬을 텐데···.’
몸은 도훈을 원했지만, 보영은 프로의식을 가진 여성이었다.
아무리 땡기더라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법을 알았고, 근무중에 자신의 성욕을 분출하고픈 마음은 결코 없었다.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겠어.’
도훈의 손에 몸을 맡겼다간 금방이라도 사달이 날 것을 우려했던 보영은 팔을 뛰로 빼 도훈의 팔뚝살을 세게 꼬집었다.
"아얏!"
느닷없이 살을 꼬집힌 도훈이 나지막한 비명을 터뜨렸다.
보영이 천연덕스럽게 도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도훈이 그녀의 거센 반발에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비행기에 모기가 있나봐요."
"모기요?"
"갑자기 뭐가 콕 쏘는데, 왠지 모기 같아가지고요."
"설마요. 저희 꼬레안 에어의 기체는 사시사철 방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기분 탓 일거에요."
보영의 능글맞은 답변에도 도훈이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런데 진짜로 모기가 있었다니까요? 자 봐요."
도훈은 보영에게 꼬집힌 부위를 보여주었다.
손톱자국이 심하게 남은 피부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도훈이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피빠는 모기인 거 보니까 분명 암컷일 거에요. 모기는 암컷만 피를 빤다니까."
도훈의 핀잔에 보영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호호. 얼마나 성가시게 굴었으면 모기가 그랬겠어요."
보영은 건너 좌석의 일본인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말투는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내용속엔 도훈의 심한 장난에 대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뭔가에 쏘였으니까 물파스라도 가져다 주세요."
"네, 잠시만···."
보영이 카트를 밀고 다시 캐빈 준비실로 사라졌다.
그 사이 도훈은 커피를 마시고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건너편의 일본 관광객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옆에 저 사람이 가장 문제군. 이제 커피까지 마셨으니 잠도 안자고 말똥말똥 깨어 있을 것 같은데···.’
[수면제 아이템이 있긴 하지만 딱히 섭취시킬 방법이 없군요.]
‘아, 그걸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어떤?]
‘메저키스트의 밧줄 말이야. 지난 번에 써보니까 꼭두각시처럼 조정할 수 있던데···.’
[상세 설명을 제대로 안 읽으셨군요, 주인님. 메저키스트의 밧줄은 충분한 호감도 상승이 이루어진 이후에나 사용 가능합니다. 80미만의 호감도에선 오히려 ?20의 패널티가 있거든요. 비호감을 사기 딱 좋은 아이템이죠.]
‘끄응. 그럼 뭐라도 추천해봐. 이대로 있다간 미션이고 뭐가 다 끝나버리겠어.’
[하아. 가장 좋은 아이템이 있긴 한데 너무 비쌉니다.]
‘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나, 라는 아이템인데 문을 통해 아공간으로 이동하는 종류입니다. 아공간 안은 고급 호텔처럼 꾸며져 있으며, 그곳에 들어간 순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못 합니다.]
‘오오, 시간과 정신의 방 같은 거네? 그건 얼만데?’
[35,000 포인트입니다.]
‘장난하냐?’
[그러니까 비싸다고 했잖습니까.]
도훈이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건너편의 일본이 심심했던지 도훈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메 마시떼."
"네, 안녕하세요."
"두 유 스피크 재패니스?"
"노. 아임 낫."
"아-, 시츠레이이타시마시타(실례가 많았습니다.)"
"오케이, 오케이."
도훈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일본인을 차단했다. 곧 그는 도훈에게 흥미를 잃고 가방에서 소설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뭔데?’
[지금 저 일본인이 책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에게 ‘삼매경’이라는 아이템을 주는 겁니다.]
‘삼매경?’
[네. 해당 아이템은 온전히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장치입니다. 주인님처럼 집중력이 뛰어난 경우엔 필요 없지만, 주의력이 산만한 사람들에겐 온 정신을 쏟아 책을 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오, 그런 아이템이 있어?’
[네. 책갈피 형태의 소모성 아이템으로 책의 아무 곳이나 장착하면 주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며 몰입도가 극도로 올라갑니다. 흔히 말한 독서삼매경에 빠져 눈 귀가 멀어 버리는 거죠. 지속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구입하시겠습니까?]
‘일단 해. 어떻게든 저 일본인을 격리시켜야 하니까.’
[넵. 구입하겠습니다.]
잠시 후 도훈의 주머니 속으로 플라스틱 형태의 무지 책갈피가 도착했다. 도훈은 책갈피를 손에 쥐고 있다가 일본인의 어깨를 툭툭 두르리며 말했다.
"헤이."
"음?"
"잇츠 어 프레슨트 포 유."
"오! 땡큐.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일본인은 도훈이 준 선물에 매우 감사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훈은 관광객에게 호의를 베푸는 한국인 흉내를 내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코리아 넘버 원."
"에스,에스! 코리아 넘버 원."
한참 고마움을 표시한 일본인은 책갈피를 책 사이에 끼워 넣더니 다시 독서에 빠져들었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침묵하며 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지금 발동 된 건가?’
[네. 해당 아이템은 책에 끼우는 순간 효력이 발휘됩니다. 한 번 사용하면 기능이 사라지고요.]
‘으으! 미션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투자해야 하다니···.’
[다행히 소모성 아이템이라 비용이 비싸진 않습니다. 난독증 환자를 위한 임시처방전 같은 거라서요. 해당 기능을 가진 지속성 아이템은 책갈피가 아닌 커버 형태로 되어 있으며 몰입의 정도와 시간 조절이 가능합니다.]
‘후후. 어쨌든 귀찮은 떨거지도 처리했으니 보영이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도훈은 어서빨리 보영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
준비실에 들어간 보영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마터면 팬티 버릴 뻔했네. 턴어라운드라 갈아입을 옷도 안 가져왔는데···.’
턴어라운드 비행이란 짧은 거리를 왕복하는 경우를 말한다. 레이 오버와 달리 해당 국가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챙겨온 짐은 무척이나 간소한 편이었다.
"비즈니스에서 뭔 일 있었니? 안색이 안좋아 보인다?"
같은 캐빈승무원 동기의 물음에 보영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별일은 무슨. 승객이 심심한지 계속 말 걸어서 말이야."
"또 작업 들어왔어?"
승무원이란 직업 특성상 남자 손님의 추파는 비번히 일어났다.
물론 추파가 추태로 변질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아니, 뭐 꼭 그런건 아니고."
보영은 조금 놀라긴 했지만 도훈의 손길이 싫진 안았다. 공개된 장소에서 추행을 당하는 것은 의외로 스릴 넘치고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 423. 도쿄 핫(TOKYO-HOT)-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