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 도쿄 핫(TOKYO-HOT)-5- >
성수를 만난 도훈은 실습 중인 오수정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수정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실습 시작전에 본 뒤론 연락도 못 했네.’
오랜만에 수정에게 연락해 볼까 폰을 꺼낸 도훈은 부재중 통화를 보게 되었다.
<미키 프로덕션
‘응? 이 번호는···?’
그 번호는 지난번 성방 당시 도훈을 컨택 하려던 스카우터의 연락처였다. 쪽지에 남긴 번호만 저장해 놓고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서윤을 통해 번호를 알아낸 놈들이 같은 번호로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이 새끼들··· 감히 서윤이를 협박했다 이거지?’
도훈은 처음 자신의 번호를 건네준 서윤의 행동이 서운했지만, 그녀의 입장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오랜 수험생활 끝에 겨우 원하는 공무원이 되었는데,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자꾸 연락해 오는 것은 엄청난 공포로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나 아픈 아버지까지 함께 있는 와중이라면.
‘서윤이가 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본인역시 굉장히 고충이 컸을 테지. 그보다는 그것을 꼬투리 삼은 이놈들이 더 악질이야.’
도훈은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독서실 아래 도착해 미키 프로덕션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자 곧바로 일본어가 들려왔다.
-모시모시, 오래 나니 얏떼른다로우···.(내가 뭐하는 거지?) 여보세요? 혹시 바토만 사마?
‘바토만? 배트맨을 말하는 건가? 하여간 니뽄 새끼들 발음하고는···.’
"제 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도훈은 시작부터 시비조였다.
놈들이 비겁하게 서윤이를 협박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이므니다!
"인사는 됐고요, 묻는 말부터 답하시라고요. 제 번호 어떻게 아셨냐니까요?"
-아, 그것이 같이 촬영한, 아니 방송하셨던 동료분께 여쭈어서···.
"동료 번호는 어떻게 아셨는데요?"
-스트리밍 업체에 문의했스므니다.
"물어본다고 바로 BJ의 개인 정보를 넘겼다는 건가요?"
-아, 저희가 일본에 유명한 AV 레이블 제작 업체라 밝히니까 2차 저작권 어쩌고 하면서 계약에 관련된 건은 본인들이 직접 위임한다 하더군요.
"그런데요?"
-근데 저희가 여자 배우 쪽을 찾는 게 아니고, 함께 출연한 게스트와 접촉하려고 한다니 BJ 신상에 대한 부분은 대외비라고 안 알려 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번호를 알아낸 거죠?"
-저희 대표님께서 바토만님을 만나고 싶은 의지가 워낙 강해 통 크게 양보하셨습니다. 만약 바토만님 캐스팅이 성사된다면 해당 업체에 소속 BJ와도 따로 계약할 수 있다고요. 그러자 그쪽에서 번호를 넘기더군요.
도훈은 대강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이유가 됐건 비겁하게 상대를 협박해 번호를 얻어내는 사람 하곤 어떤 대화도 할 수 없어요."
-혀, 협박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당신들이 자꾸 찾아가겠다고 했다면서요? 제가 지금 없는 말 지어 냈어요?"
-아아,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을 미키 프로덕션의 스카우터라고 밝힌 상대 남성은 자조치종을 설명했다.
***
안도 미키.
8~90년대를 주름잡던 당대의 포르노 스타이자, 일본 최대 포르노 레이블 <도쿄-핫>에서 가장 비중 있는 프로덕션 중 하나로 꼽히는 ‘미키 프로덕션’의 총 대표.
그녀는 한국 스카우터를 통해 알게 된 "대물 배트맨"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놀라운 피지컬, 절륜한 테크닉.
무엇보다 아시안에선 쉽게 보기 힘든 크고 아름다운 대물까지.
최근 불기 시작한 일본 내 혐한 기류에 편승해 한국녀들을 공략하는 내용의 레이블이 범람하자, 미키는 오히려 역발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한국 남성이 일본녀를 무자비하게 공략하는 내용이었다.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부터 부하직원들의 반발에 부딪혔지만, 미키는 업계 생활을 오래 이어 온 특유의 감으로 그것이 NTR을 즐기는 메저키스트 성향의 시청자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직감했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혐한의 바탕엔 한국인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되고 있어요."
"열등감요?"
"삼성이 소니를 넘어서고, 올림픽 같은 커다란 국제대회에서 일본은 언제나 한국에 밀려왔죠. 그 뿐인가요? 최근 한류 열풍이 동아시아를 강타하고, 헐리웃에 이어 빌보드까지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겐 절대 안 된다는 열패감에 휩싸여
있어요."
"끄응···."
"즉, 같은 아시안으로서 우리보다 잘나가는 한국인들이 싫다는 거죠. 특히 초식남으로 변한 일본 남자보다, 남자다울 땐 남자다우면서도 의외로 섬세한 한국 남자들을 일본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단 말이에요."
"그럼 대표님께서 그 열등감을 자극시키겠다는 겁니까?"
"맞아요. 네토의 기저에 뭐가 깔려있겠어요? 항거할 수 없는 상대에게 자신의 것을 뺏기는 무력감이죠. 여기서 뺏기는 건 일본여자고, 당하는 쪽은 일본 남자. 바로 국제적인 NTR인 것이에요."
"아아! 하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NTR은 정신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요."
"세일즈를 할 땐 타겟층을 확실히 잡아야 해요. 남들 다 하는 걸 따라가면 진흙탕 싸움에 끼어드는 꼴밖에 안 돼죠. 한마디로 레드오션에 뛰어드는 거라구요. 하지만 이건 블루 오션이죠. 아무도 없어요. 게다가 상대는 정말이지 일본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한국 남성이구요."
"저희 일본에도 그 정도 인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있겠죠. 혼혈들. 하지만 그들은 반 쯤 서양인이에요. 순수 한국인과는 차원이 다르죠. 받아들이는 느낌도 다르고."
"아아···. 대표님이 뜻이 이렇게 확고하시니···."
"절 한 번 믿어봐요. 전 맨 몸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에요. 이번 기획 무조건 통해요. 그러니 그 친구를 꼭 캐스팅해주셔야 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접촉하세요. 업계 최고 대우를 보장하고."
대표의 특명을 받고 한국에 온 스카우터는 필사적이었다.
힘겹게 기획안까지 통과된 마당에 정작 캐스팅 될 남자 주연만 확보가 안 된 상황이었다. 그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끝내 BJ가영의 개인 정보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BJ가영은 묵묵부답이었다.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저 이제 그 일 그만 뒀으니까."
가영이라 불린 BJ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나중에는 아예 연락까지 차단해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스카우터는 절박한 마음에 공중전화를 이용해 전화를 걸었다.
당시 서윤은 동사무소에서 업무 중이었는데, 핸드폰 전화를 업무상 전화로 착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전화응대를 하고 말았다.
"네, 월곡동사무소 하서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통화가 연결되자 스카우터는 다시 한번 사정했다. 제발 대물 배트맨과 접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안되면 찾아가서 사정이라도 하겠다고.
한참을 꿈쩍 않던 서윤은 상대방의 찾아오겠다는 말에 겁을 먹고 말았다. 특히 자신의 근무지까지 실수로 말하는 바람에 자칫하다간 과거의 잘못을 빼도 박도 못하고 들킬 상황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서윤은 도훈의 연락처를 넘기고 만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협박이라뇨? 정말로 당치도 않고 말고요.
사정을 듣게 된 도훈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거참, 서윤이도 칠칠맞게서리···.’
"무슨 소린 줄은 알겠어요. 아무튼 저한테 왜 연락하셨는데요?"
-아, 바토만 사마. 우선 절대 귀하에게 불리안 제안을 하려는게 아닙니다. 저희 프로덕션은···.
"됐고,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혹시 저희 신작에 참여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업계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업계 최고 대우라는 게 어느정도죠?"
스카우터가 금액을 제시하자 로시가 곧바로 환율을 적용해 금액을 일러주었다.
‘헉, 진짜 그 금액을 준다고?’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일본에서 포르노 배우가 굉장히 인기 있는 직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남자 배우에게까지 그만한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국도 어느정도 경제 규모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인건비에선 여전히 비교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떡을 치는데 돈까지 준다는 거지? 국춘문예 상금보다 훨씬 크잖아 이건?’
[잘하면 4년 등록금을 한 방에 땡길 수 있겠는데요?]
도훈은 두근거리는 심정을 애써 가라앉히고 다시 말했다.
"우선, 제 조건부터 말할게요."
-네.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저는 사정상 얼굴을 팔리면 안돼는 상황이에요."
-팔려요?
"음, 그러니까 설사 촬영에 동의하더라도 얼굴을 공개할 순 없다고요."
-아···. 그 부분은 대표님과 한 번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군요.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촬영에 얼마나 걸리는 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많이 낼 순 없어요. 저도 따로 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촬영배우가 꼭 전업일 필욘 없습니다. 일단 그 부분도 대표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만나는 것은 어떠신지?
"오늘은 안 돼요."
-그럼 내일은···.
"일단 제가 제시한 조건이 가능하다면 만나는 것으로 하죠."
-네. 그럼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스카우터가 말한 금액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말도 안돼. 떡치고 거금까지 받는다니? 거기다 업적까지 달성할 수 있는데···.’
[서윤양이 의도치않게 주인님에게 큰 기회를 제공한 셈이군요.]
‘결과적으론 그런 셈인가? 아무튼 나에겐 나쁘지 않겠어. 아, 내 정신 좀 봐, 내일 시험 준비해야지.’
[넵. 마지막까지 힘내십시요!]
도훈은 최선을 다해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끝마친 그날 오후, 예상대로 스카우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미키 프로덕션
발신인을 확인한 나는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혹여나 통화 내용을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 대학을 벗어나 한적한 까페에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여보세요?"
-베토만 사마. 접니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대표님께서 직접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저를 직접요? 대표님이 한국에 와 계신가요?"
-아닙니다. 다른 기획 작품 준비로 일본에 계십니다. 혹시 가능하시면 도쿄에 잠시 들르실 수 있으실까요? 왕복비행기 편부터 숙박까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뜻밖의 제안.
모처럼 일주일이라는 황금연휴를 맞은 상황이라 더욱 공교로웠다.
‘···일본엘 직접 간다고?’
과거 이정우 시설 일본에 몇 번 가본적이 있었다.
깨끗한 거리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딱히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제가 말한 조건을 수용 가능하단 말씀인가요?"
-그 부분은 대표님이 바토만님을 직접 뵙고나서 결정하신다고 합니다.
"그럼 확정은 아닌거네요?"
-물론 시간 낭비가 되지 않도록 별도의 여비 또한 챙겨드리겠습니다. 만약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관광만 하시고 가셔도 충분하게끔요. 또 바토만 사마께서 신경쓰시는 신상에 대한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지켜드리겠습니다.
‘흐음,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니냐?’
[제가 볼 땐 그렇습니다. 잘 되면 대박이고요.]
‘여자에 업적에 돈까지···. 확실히 나쁘진 않단 말이지? 못해도 일본 관광하면 그만이고.’
[그렇죠. 절대 손해는 아닙니다. 힘든 중간고사도 끝났으니 이번 기회에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구요.]
‘하긴···. 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긴 하지.’
대학에 복학한 이후 쉼없이 달려왔다.
새터부터 MT, 애자매부터 나이트까지.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때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쉬었다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때마침 황금 연휴 기도 하고 말이지.’
"알겠습니다."
-오오, 제안을 수락하시는 겁니까? 덕분에 겨우 체면을 차리는 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언제 쯤 가능하시나요? 저는 오늘 당장이라도 괜찮습니다. 대표님께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셔서요.
시간을 확인하자 오후 2시였다.
그래도 외국엘 나가는데 아무 준비 없이 갈 순 없었다.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저녁 비행기로 가능할까요?"
-네. 몇 시로 예약해 놓을까요?
"음, 인천 공항 7시 이후걸로요."
-알겠습니다. 비행기편 예약해 놓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여권이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과거 도훈군이 미국 방문할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여권이 있습니다. 다른 가족 모두가 미국에 살고 있으니까요.]
‘아아, 그렇지.’
여권을 챙기고, 그밖에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약간의 외환도 준비했다. 아무리 상대가 편의를 제공한다 해도 개인적인 비상금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사이 스카우터에게 몇 번 문자가 왔다. 티켓 발권을 받아야 하니 이름과 여권 번호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괜히 신상 알려줬다고 문제가 되진 않겠지?’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된다면 플레이어로서 응징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주인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이템을 이용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으음, 그렇군.’
여행 채비를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자 어느덧 시간은 6시가 넘어 가고 있었다. 경험상 국제선은 1시간 전에 출국심사까지 끝마쳐야 했기에 서둘렀다.
‘그나저나 간만에 외국 나가네.’
[예전엔 자주 다니셨나요?]
‘밥먹 듯 갈 때도 있었지. 미국에서 유학생활도 하기도 했고.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외국 나갈 때마다 마누라 년이 상간남 불러서 떡쳤을 거 아냐? 아씨 갑자기 스팀받네.’
불우했던 과거를 떠올리자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둘 다 응분의 죄값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로시가 나의 마음을 아는지 위로했다.
‘이젠 염려 마십시오. 주인님이 설사 외국에 나가 있다고 한들, 주인님의 여자들은 결코 주인님을 배신하지 않을테니까요.’
[당연하지. 대물맛을 본 이상 뭐···.]
그때 로시가 나에게 급히 말했다.
[앗, 저 시계탑 밑에 있는 사람이 혹시 스카우터 아닌가요?]
< 421. 도쿄 핫(TOKYO-HOT)-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