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 글 잘쓰는 잘생긴 오빠-15- >
정음의 태도가 질투라는 화약고에 불을 당겼다.
아드레날린의 과다 분비에 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것 봐라? 발뺌도 않네? 진짜 둘이 뭔가 있는 거 아냐?’
[어휴, 주인님. 제발 쫌! 지금 엄청 찌질하게 굴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찌질? 찌질이라니? 내가 뭘?’
[평소엔 그리 냉철하시던 분이 어째 정음양 앞에서 사춘기 좃고딩 마냥 안절부절 못 하시는 겁니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십시오!]
객관적이라.
로시의 충고에 겨우 흥분을 가라 앉혔다.
질투라는 강렬한 감정에 홀려 내가 뭔가를 놓쳐버렸을까?
아무리 대물이 되고, 초능력을 가지게 되어도 인간이란 사소한 감정에도 이리 흔들릴 수 있는 거구나.
애써 냉정을 유지한 나는 차분하게 스킬을 준비했다.
‘로시, 마음의 소리 준비해.’
[넵.]
"찬우는 그냥 친구라고요."
{오빠가 정말 질투하는 걸까? 세상에···. 평소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니, 이런 모습 처음이야. 은근 귀엽잖아?}
정음의 진짜 속내를 듣게 되자,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들으셨죠? 세상에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어떻게 일편단심인 정음양을···.]
‘아, 아니 나는···. 야, 그럼 그 새낀 뭔데? 왜 정음이랑 둘이 차 마시고 밥 먹고 하는 거냐고?’
[남녀가 둘이 만나면 다 사귀는 건가요?]
‘내 기준으론 그래! 남녀사이엔 친구가 있을 수 없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사회가 킹카라는 놈이 고자가 아닌 이상에야 정음을 보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다. 최근의 정음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한 번씩 쳐다볼 정도로 예뻤다.
처음 새내기 티를 벗어나지 못하던 패션도 점차 세련미를 자아냈고, 타고난 고운 피부에 옅은 화장이 조화를 이루며 미모에 물이 올랐다는 평이었다.
더욱이 여타 여자들처럼 단순히 마른 몸매가 아니라,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하고 쫀득한 슬랜더 체형에 표정과 몸짓에서도 사랑스러운 여인의 향기를 풍겼다.
이런 정음을 두고 어떤 사내가 음심을 품지 않는 다는 말인가?
"찬우는요, 음, 뭐라고 해야지 하지?"
{이런 말 하면 오빠가 날 이상하게 보려나? 게다가 말 못할 비밀이라고 했는데···.}
‘비밀이라니? 정말 고자인거냐?’
[제 생각엔 그보다는···]
"이거 어디가서 절대 말하면 안돼요?"
정음이 신신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난 어디 가서 남 얘기 안 해."
"사실 찬우는요···. 남자를 좋아한데요."
"헉!"
[이런!]
‘아뿔싸, 고자가 아니라 게이였구나!’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정음이 황급히 손가락을 세워 ‘쉿’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오빠, 진짜로 비밀이에요. 알았죠? 찬우가 절대 남들한텐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속삭이는 정음의 입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정음이 말하는 내용보다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입술만 쳐다보게 되었다.
"음···. 친해지고 나서 그러더라고요. 사실 자긴 여자한테 흥미가 없다나? 어렸을 때부터 그랬데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화장도 살짝하고, 꾸미고 다녔는데 오히려 그 모습에 여자들이 더 꽃미남 같다는 둥···."
{아이참, 내가 오빠 문제로 연애 상담한다고 속 얘길 먼저 꺼내는 바람에 찬우도 커밍아웃 한 건데···. 거기까진 말 할 필요 없겠지?}
‘나 때문에 연애상담이라고?’
[제 추측엔 주인님의 방치 플레이로 적잖이 속앓이를 했던 모양입니다. 호감도 100이면 얼굴만 봐도 눈에서 꿀이 떨어질 텐데, 최근 주인님의 외도(?)로 자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한마디로 찬우는 좆만 달렸지, 여자친구 같은 존재로군.’
대체로 게이들은 여자들과의 대화에 능숙하다고 알려져 있다.
뭇 남성들이 가지지 못한 섬세한 지점을 포착해 내고, 같은 여자들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제시하기 때문이라나?
[그런거죠. 여자들이 하나 쯤 가지고 싶어 하는 게이 남사친이랄까? 이제 오해가 좀 풀리셨습니까?]
‘아아, 정말로 부끄럽구만···.’
[근데 왜 그렇게 흥분하신 겁니까? 주인님이 질투심에 불타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인데···. 확실히 정음양에 대한 애정이 보통은 넘는 모양이군요.]
‘난 원래 내가 바람을 피우면 폈지, 내 여잔 절대 안 뺏기는 주의거든.’
말을 해놓고도 뭔가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제의 희주만 봐도, 새 남친을 사귀든 말든 콧방귀도 안 뀌던 나였다. 분명 로시도 모순을 깨달았을 텐데도 더 이상 따지고 들진 않았다.
"음? 오빠 제 얘기 듣고 있는 거예요?"
"아니. 안 듣고 있는데."
"네?"
"그냥 네 입술만 보여서."
"아, 앗!"
정음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새빨게 졌다. 그때 쯤, 마음의 소리 스킬 사용시간이 끝나며 더 이상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오질 않았다.
하지만 이제 스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녀는 투명한 유리처럼 훤히 속내를 내비추고 있었으니까.
"부, 부끄럽게···."
"정음아."
"네?"
"그간 바빠서 연락 못한 거 미안해."
"아니에요. 바쁘신 거 다 알아요.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신 다면서요."
"응. 그것도 있는데 최근엔 공모전 준비한다고 계속 소설만 썼거든."
"소설이요?"
정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딸만 셋인 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이트에서 텐 프로 셋을 폭격하고 다니라 바빴다고 어떻게 진실을 밝힐 수 있단 말인가?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되기도 하는 법.
순수한 정음에겐, 언제까지나 좋은 모습으로만 남고 싶었다.
"아, 태영이한테 얼핏 들은 거 같아요. 오빠 정말 대단해요!"
"대단은 무슨.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그래두요! 글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정말 오빤 다재다능 하신 것 같아요."
"아니야, 정말. 그냥 재미삼아 한 번 써 본 거야."
"실은 전 레포트 하나도 제대로 못 써서 맨날 버벅대거든요. 하필 어제 컴퓨터까지 고장나가지고···."
"응? 컴퓨터가 고장 나?"
"그게 최근 들어 자꾸 이유 없이 다운이 되더니 이젠 켜지지도 않아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오늘 동네 수리 기사님 부르기로 했어요."
동네 컴퓨터 수리점이라고?
부품이나 안 빼 가면 다행이겠군.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멀쩡한 부품 고장 났다며 바꿔치기 하고, 운영체제 하나 깔아놓고 몇 만원씩 받아 챙기는 악덕 업주들이 떠올랐다.
"정음아, 그냥 부르지 마."
"네?"
"내가 고쳐줄게. 오빠 컴퓨터 잘 고쳐."
"엇, 정말요?"
"그래. 말 나온 김에 지금 가보자. 너희 집 어디랬지?"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정음은 갑작스러운 나의 제안에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그녀에게 별로 잘해준 것도 없이, 한결같은 사랑을 받는 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방치하다니···.
"왜? 집에 데려가긴 좀 그래? 부모님이랑 같이 산댔나?"
"네. 근데 오늘은 두 분 다 늦으신다곤 했는데···."
"어차피 컴퓨터 고치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릴 거야."
"바, 방도 안 치워가지고···."
"괜히 돈 들이지 말고. 내가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고마워요, 오빠."
그렇게 얼결에 나는 방과 후 정음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
정음은 자취를 않고, 자택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30분 넘게 지하철을 타고 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단 둘이 지하철을 타고 가니 왠지 데이트를 하는 기분에 정음은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근데 오빠 컴퓨터도 잘 하세요?"
"응. 어렸을 때 제법 가지고 놀았거든."
물론 이는 도훈의 기억이 아니라, 이정우의 기억이다.
컴퓨터, 특히 하드웨어를 다루는 데 취미가 있었던 이정우는 흔히 말하는 컴덕후에 가까웠다.
‘별일이군. 이런 재주를 써먹을 날이 오다니.’
"들어오세요."
정음이 아파트 비번키를 누르고 도훈을 안내했다. 살림을 하는 가정집이라 그런지 현관 앞에 신발이 한 가득이었다.
"집이 좀 어지럽죠?"
"아니? 되게 깔끔한데? 어머니가 되게 청결하신 가봐."
도훈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정음의 집은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베란다 한켠에는 실내 식물들이 우거졌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잠시만 거실에서 기다리세요. 제 방 좀 치우고 올게요."
"응. 그래."
정음이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분주하게 움직였다.
도훈은 잠시 소파에 앉아 방정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거참, 옛날엔 왜 여자들 컴퓨터 고쳐 줄 생각을 못 했을까? 이렇게 쉽게 집으로 따라올 수도 있는데···.’
[그때는 정말 ‘컴퓨터 기사’만 했을지도···.]
‘음, 인정.’
"오빠, 들어오세요."
"어."
정음의 방은 전형적인 여대생의 방이었다.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훈은 침대 위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놀라 물었다.
"어? 저거 혹시 너야?"
사진 속의 인물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목마를 탄 사람이 합판을 들고 있고, 정음으로 추측되는 여성이 공중제비를 돌며 격파를 시도하는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
"아, 네···, 태권도 시범단 할 때···."
"이야! 엄청나네. 저런 발차기가 되는 구나."
도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겉으로 보기엔 귀엽고 예쁜 여대생이 정음에게 저런 놀라운 운동신경이 숨어져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긴 태권도 국대까지 준비했다고 했던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구나 정음이는 정말···.’
"부, 부끄러워요. 괜히 걸어 놨네."
"아니야. 정말 멋있다. 참, 고장 난 컴퓨터는 어딨어?"
"네. 저기 책상 밑이요."
도훈이 책상 밑에 놓인 컴퓨터를 확인했다.
"혹시 십자드라이버 있으면 갖다 줄래?"
"네네!"
정음이 공구를 챙기러 가는 사이 도훈은 컴퓨터 연결선을 모두 뽑아 본체를 끄집어냈다. 배치된 형태만 봐도 왠지 고장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지를 많이 먹은 것 같은데···.’
"오빠, 여기요."
정음이 신기한 눈으로 도훈이 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도훈은 능숙한 솜씨로 본체 옆 면 케이스를 뜯어내더니, 훅 하고 퍼져 나오는 먼저 덩어리에 코를 막았다.
"어우, 여기서 작업하면 안 되겠다. 베란다로 끄집어내야겠어."
"네."
도훈의 예상대로 정음의 컴퓨터는 오랜 기간 먼지 청소를 않고 방치해 내부의 공기 순환이 막힌 것 같았다.
"컴퓨터 부품은 원래 잘 고장 나지 않아. 특히 CPU라 램 같은 것은 반영구적이라 할 만큼 수명이 오래가지."
"그렇구나."
"보통 이렇게 뻗는 건 열관리를 잘 못하는 경운데··· 여기 봐봐, 쿨러에 먼지가 한가득 이잖아."
"으으! 언제 저렇게 먼지가 들어갔죠?"
"조금씩 쌓이다 보니 뭉쳐진 거지. 사놓고 한 번도 청소 안했지?"
"···네."
"가끔씩이라도 먼지를 털어줘야 해. 써멀구리스도 다 말라 버렸겠다. 아마 컴퓨터가 계속 다운되는 이유는 내부 공기흐름이 막혀서 발열을 못 잡아서 그럴 거야. 온도가 오르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동으로 뻗어 버리거든."
"우아! 오빠 진짜 똑똑하세요."
"이런 건 뭐 기술이랄 것도 없지."
도훈은 능숙한 솜씨로 먼지를 털어내고 내친김에 부품을 일일이 분해 조립했다. 그 사이 정음은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와 도훈에게 건네며 신기한 눈으로 도훈의 수리 과정을 지켜보았다.
"다 됐다. 이제 연결해 보자."
"네!"
컴퓨터를 원래 자리에 놓고 연결선을 꽂자 컴퓨터가 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러나 윈도우 진입까지의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메인 하드를 SSD로 바꿔줘야겠다."
"스스디가 뭐에요?"
"음, 그러니까 구형 하디디스크보다 읽고 쓰는 속도 빠른 저장 장친데, 이것만 바꿔도 체감속도가 엄청 달라지거든. 윈도우도 설치한 지 너무 오래 되서 잡다한 게 너무 많이 깔려있다."
도훈은 단축키를 활용해 가며 빠르게 시작프로그램 몇 가지를 정리했다. 세팅을 마치자 정음의 컴퓨터는 예전처럼 다운되지도 않고, 상당히 쾌적해져 있었다.
정음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대단해, 정말 도훈이 오빤. 컴퓨터도 잘하는 구나.’
그녀가 볼 때 도훈은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
얼굴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글도 쓰고, 컴퓨터까지 잘 고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음은 응큼한 상상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그때 도훈이 넌지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무슨 생각하니?"
"아, 앗!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도훈이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정음을 밀어 붙였다.
뒷걸음질 치던 정음은 침대에 걸려 넘어지며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으앗!"
"뭐야? 들어오라는 건가?"
"아, 앗, 오, 오빠아!"
도훈이 천천히 정음을 위에 내리 눌렀다.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정음을 내려다보자, 정음이 민망함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도 컴퓨터랑 똑같은 거 같아."
도훈이 뜬금없는 소릴 했다.
"···네?"
"오랜 동안 방치하면 먼지가 쌓이듯이 꽉 막혀 버린단 말이지."
정음이 도훈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다.
"아앗···."
"그땐 이렇게 분해해서···."
도훈이 정음의 상의 단추를 천천히 끌렀다.
< 408. 글 잘쓰는 잘생긴 오빠-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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