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 글 잘쓰는 잘생긴 오빠-14- >
***
"어제 파일 보내면서 요강 확인해 보니 다음 주 발표라더라."
"입상하면 대박이겠네요. 상금만 500만원이던데···."
"뭐,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지."
도훈은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작품에 현실성을 기하기 위해 안 가던 나이트까지 다녀올 정도였다.
태영이 은근슬쩍 도훈을 부추겼다.
"형이라면 충분히 입상하실 거예요. 그럼 500 땡겨 받는다고 생각하고 오늘 점심은 형이 쏘는 걸로?"
도훈은 태영의 뻔한 수작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얼씨구. 하여간 넉살도 좋다니까.’
처음부터 후배에게 얻어먹을 생각이 없었던 도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먹고 싶은 거 말만 해."
‘물론 공짜는 아니야. 한동안 뜸했던 학과 사정도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까.’
식당에 들어간 도훈은 태영에게 근황을 물었다.
"연애 사업은 잘 돼 가냐?"
"지지부진이에요. 여자들은 왜 제 매력을 몰라줄까요?"
도훈은 이미 답을 알 것 같았지만, 직설적인 표현보다 우회적으로 충고했다.
"좀 더 여유를 갖는 게 어때?"
"여유요?"
"그래. 조급하고 안달 내 하면 상대도 그걸 느끼게 되거든. 밀당의 법칙이라고 알지? 가까이 당기면 멀어지고, 밀어내면 오히려 다가오는 법이라잖아."
"에이, 그건 형처럼 잘생긴 사람들이나 써먹는 수법이죠. 저같은 오징어가 밀어내 봐요, 그냥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 버리지."
태영은 분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야잘잘이니 될놈될이라는 말처럼, 이 세상은 타고나는 게 절반 이상이다.
연애도 마찬가지. 잘생기고 훤칠한 사람에게는 이지모드지만, 못생기고 쥐뿔도 없는 사람에게는 헬모드인게 연애라는 게임이다.
‘도훈이형은 잘생겼으니까 밀당이니 뭐니 할 수 있는 거지. 내 주제에 무슨···.’
"참, 형 그 소식 들었어요?"
"응?"
"사회과 킹카랑 육정음이랑 썸타는 거."
"뭐어?"
도훈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러나 너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네. 요새 동기들 사이에 제일 핫한 얘기거든요."
"재밌겠는데? 자세히 말해봐."
"그러니까, 그게 일주일 전인가?"
태영이 육정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정음은 여느 때처럼 열심히 교양수업을 듣고 있었다.
운동 재능은 차고 넘치지만, 머리가 순백에 가까운 그녀는 아무리 집중해도 교수의 강의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어휴, 저게 지금 우리나라 말은 맞는 거니?’
수업이 지루해진 정음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깨톡 대화창을 살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도훈과의 마지막 카톡을 수시로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칫. 진짜로 먼저 연락 하는 법이 없구나 오빤···.’
그녀는 마지막 대화가 끊어진 부분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먼저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았지만, 맨날 자신이 보채면 도훈이 도리어 싫어할 것 같았다.
같은 체육관 언니 오빠들의 충고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마. 남녀 사이는 먼저 안달 내는 쪽이 지는 거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약자라고.
-여잔 좀 튕길 필요가 있어. 너가 너무 받아주니까 상대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도훈에게 메시지를 남길까 고민하다 핸드폰을 덮었다.
‘그래. 이번만큼은 오빠가 날 먼저 찾도록 해야겠어. 절대로 먼저 연락 안 할 거야.’
그녀가 각오를 다지는 그때 교수가 그녀를 지적했다.
"거기, 핸드폰 만지는 학생 일어나 봐요."
"네, 네?! 저, 저요?"
정음을 지적한 교수는 그녀에게 면박을 줄 요량으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그걸 뭐라고 한다고?"
"아, 저 그게···."
정음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누군가 옆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한계효용의 법칙"
"네?···"
"저 봐.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고 폰만 만지니까···."
"하, 한계 효용 법칙입니다!"
"으응?"
교수는 불쑥 정답을 말하는 정음에 무안해져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 그래. 맞았어요. 앉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계 효용이란···."
교수가 다시 강의를 이어가자 정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잖아도 체육 실기만으로 사범대에 입학했다는 꼬리표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던 그녀에게, 방금 전의 선방은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정음이 고개를 돌려 정답을 알려준 남학생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알려줘서."
"아니에요. 뭘, 그런 걸 가지고···. 근데 체육교육과 맞죠?"
"네? 절 아세요?"
"당연하죠. 저도 사범대 다니거든요. 전 사회교육과 박찬우라고 해요."
태영의 이야기를 전해 듣던 도훈은 그쯤에서 잠시 대화를 중단시켰다.
"···박찬우?"
"네. 나름 유명한 얜데 모르셨구나."
"왜 유명한데?"
"사회과 1학년 킹카로 한창 끝발 날리고 있거든요."
"그래? 근데 내가 다른 과 1학년까지 다 알 순 없지."
"듣기론 고등학생 때 길거리 캐스팅까지 받았다나? 암튼 엄청 잘생겼어요. 얄미울 만큼."
"그래?"
도훈은 살짝 의문이 들었다.
‘로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문어다리 어플에서 경보가 울리지 않은 거지? 일전에 재벌집 망나니 자식이 여동생에게 접근했을 땐 경보가 울렸었잖아?’
[해당 신호는 주인님의 어장이 위협받을 때만 나는 경보음입니다. 음심을 가진 상대가 불순한 접근을 시도할 때만요.]
‘가만, 그럼 사회가 킹카인지 뭔가 하는 놈은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란 소리야?’
[아마 그러니 경보도 울리지 않았겠죠?]
‘그럼 놈이랑 썸 탄다는 얘기는 뭔데?’
[일단 더 들어보시죠.]
도훈은 정음에게 접근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살짝 열이 받았다. 하지만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태영에게 물었다.
"근데 걔랑 정음이가 썸타는 사이라고?"
태영이 계속 이야기를 전했다. 그 일을 계기로 박찬우와 친해진 정음은 그와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튼 정음이도 호감이 있긴 있나 보더라고요. 최근 자주 붙어 다니는 걸 보면. 하여간 성격이 좀 왈가닥이긴 해도 얼굴이 예쁘니까 남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네요."
태영은 정음의 소식을 전한 뒤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도훈은 그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게 지금 뭔 경우야? 정음이가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다니?’
[최근 주인님이 어장관리를 등한시 하긴 했었죠. 애자매 건도 그렇고 나이트 조각건도 그렇고···. 학과 여자들은 재쳐두고 계속 밖으로만 나돌았으니까요.]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정음인 호감도 100을 찍은 사이라고!’
[호감도 100을 찍더라도 너무 방치해버리면 수치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뭔가 이상하군요. 주인님에겐 호감도 하락을 방지하는 ‘마성의 소유자’ 패시브 스킬이 있으니까요. 100을 찍은 이상 절대 호감도가 내려갈 일은 없을 텐데···.]
‘음, 다음 수업에 어차피 만나니까 한 번 물어봐야 겠군.’
사람들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습관이 있다. 손에 쥔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당장 없는 것에 욕심내는 경우다.
도훈은 자신의 무분별한 위업 욕심으로 인해 정말 소중한 인연을 소흘히 했다는 자책감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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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몇 번을 봐도 이건 백퍼 공모전 탈락 각인데···."
체육과 대학원생 임안영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소설을 한 시간 째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체육과 조교이자 같은 대학원생인 강민주가 건네 준 도훈의 소설이었다.
"이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란 말이지. 솔까말 요즘 같은 시대에 공모전같은 데 입상해 봐야 뭐하냐고. 꼴랑 상금 좀 받고 이력서에 커리어 한 줄 추가하는 거밖에 더 돼?"
그녀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민주 하는 거 봐선, 누구 작품인지 알려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공모전에 입선할 내용은 절대 아니고··· 확 내가 대신 연재 싸이트에 올려버려?"
그녀는 도훈의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었다.
이전에 한 번 출판으로 용돈벌이를 했던 그녀로서는, 도훈의 작품이 100% 시장에 통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같은 작가가 봐도 재밌는 작품이라면 독자도 충분히 재밌을 것이다.
"그래, 뭐. 내가 표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반응만 좀 보려는 거니까···."
안영은 새로 아이디를 판 뒤 연재 사이트에 도훈의 작품을 쪼개 올렸다. 자기 작품도 아니지만, 벌써부터 기대감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신작을 발표한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흐흐. 누군지 모르지만, 너 나한테 나중에 밥 한 번 거하게 쏴야 할 거야."
***
태영과 점심을 먹고 강의실에 들어가자 정음과 서현이 먼저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현은 어제 민주에게 잔뜩 혼이 났기 때문인지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정음은 언제나처럼 해맑게 인사했다.
"오셨어요, 선배! 태영이도 같이 왔네?"
눈치 없는 태영은 내 마음도 모르고 정음에게 농을 던졌다.
"이야. 너 요새 좋은 일 있나 보다? 얼굴 완전 폈는데?"
"응? 내가?"
정음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교수가 들어오면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뒷 열에 앉은 나는 정음의 뒤통수만 쳐다보면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으으. 제기랄, 신경 쓰여서 공부가 안 되네.’
[의외의 모습이군요. 남녀 관계에 무척 쿨 하신 분인 줄 알았더니···.]
‘이게 쿨하고 자시고 할 일이냐? 지금 엄한 놈이 육정음을 흔들고 있는데?’
[정 불안하시면 확인해 보시면 되잖습니까? 정보창 뒀다 어디 쓰시게요?]
‘아아, 그렇지. 정보창. 호감도부터 체크해야 겠어.’
나는 오랜만에 정음의 정보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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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육정음 (비처녀, 일시 20세 2개월)
나이 : 20 #열혈 #태권소녀 #백치미
호감도 : 100/100
개방성 : C
성감대 : 젖꼭지, 겨드랑이, 발가락.
*애무 포인트 : 그녀는 관계 중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욕지수 : 중간.
공략팁
*이미 공략을 완료하셨습니다.
*위 대상을 공략하여 ‘밀당의 달인’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푹 빠진 상태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쓴데도 믿을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을 좋아하지만, 연락이 뜸한 당신에게 섭섭함을 느낍니다. 가끔씩 애정을 표현해 주세요.
-추천멘트 : "정음아, 니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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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호감도는 여전히 100이었다.
아까 말한 대로 마성의 소유자 패시브 덕분인지 전혀 관리를 못했음에도 티끌만큼의 하락도 없었다. 그렇다면 최근 썸을 탄다는 사회과 킹카라는 자식하곤 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로시. 혹시 호감도가 두 사람 모두에게 열리기도 하나? 그러니까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야?’
[호감도는 상대방에 대한 성적 허용도를 말합니다. 보통 80 이상이 넘어가면 섹슈얼한 관계를 허용한다는 지표일 뿐 누군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호감도가 80 이상인 사람이 둘이면 두 사람하고 관계를 할 수 도 있다는 거야?’
[당장 주인님이 여러 여자와 관계하고 있잖습니까?]
‘아니 나는 업적 때문에 그런 거잖아!’
[아니면 희주양을 예로 들 순 있겠네요. 진입장벽이 낮은 그녀라면 70만 호감도가 넘어도 관계를 허용할지 모르죠.]
‘그러니까 불가능은 아니라는 소리네?’
[물론 그렇지만 정음양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난잡한 성생활을 즐길 것 같은 타입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정보창만으론 확신할 수 없다는 거군. 안되겠어. 수업 끝나면 정음이랑 따로 얘기를 해봐야지.’
나는 수업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호감도가 100인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안감이 드는 것은 어째서 일까? 다른 여자라면 몰라도 정음을 빼앗기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정음이만큼은 안 된다.
암, 안되고 말고.
"으아! 수업 끝!"
"태영이 넌 이제 동아리 가?"
"응."
"선배, 저 먼저 가볼게요."
서현이 평소와 달리 도망치듯 물러섰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태영이 혼자 중얼거렸다.
"서현이 아까부터 영 저기압 같다? 뭔 일 있었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 가봐."
"별일이군. 암튼 나 먼저 간다."
"그래."
"정음이 너···. 아니다. 암튼 잘해라!"
"뭐래는 거야 쟤는?"
서현과 태영이 물러나자 이제 둘 만 남게 되었다.
정음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오빤 이제 도서관 가시죠?"
"아니."
"아···. 약속 있으세요? 혹시 배구 연습하는 날인가?"
"그런 거 없어. 너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네, 괜찮아요."
나는 정음을 데리고 한적한 벤치에 앉았다.
오늘따라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에 괜히 질투심이 폭발했다.
‘설마 그 사회과 킹카에게 잘 보이려고 입은 옷은 아니겠지?’
나는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까 태영이랑 점심 먹다가 들었는데, 너 요새 남자 만난다더라?"
"제가요? 무슨 남자요?"
정음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문했다.
그러다 "아~"하고 말을 이었다.
"혹시 찬우 말씀하시는 거예요?"
"걔가 그렇게 잘생겼다며?"
추궁하는 나의 태도에 정음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니,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지고 말았다.
"오빠,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 407. 글 잘쓰는 잘생긴 오빠-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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