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 글 잘쓰는 잘생긴 오빠-5- >
‘아뿔싸!’
서현은 크나큰 낭패감을 느꼈다.
마치 생리 시작날도 모르고, 생리대를 깜빡하고 외출한 수준의 낭패감이었다.
조교 강민주가 되바라진 1학년 여학생을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가운데, 서현이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어, 어디 갔지?"
그녀는 미친 여자처럼 책상 밑을 뒤졌다.
커다란 캐비닛을 열어 보질 않나, 심지어는 도훈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소형 냉장고까지 확인했다.
당연히, 도훈은 없었다.
"지금 이 행동, 납득 가능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앞으로 학교생활 피곤해 질 거야."
민주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도훈을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던 서현은, 도리어 본인이 독안에 갇히고 말았다.
"조, 조교 선생님 저 그게···."
서현이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궁색한 변명을 시작했다.
***
[매달린 자의 악력.]
‘매달린 자의 악력?’
[네, 지금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최상의 아이템입니다. 구매하시겠습니까?]
쾅쾅!
서현이 미친년처럼 문을 두들겼다.
그녀의 광기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심정이다.
‘그, 그건 얼만데?’
[700포인트입니다. 1회용 알약형태구요.]
‘젠장, 내 피 같은 포인트가!’
"조교선생님, 문 좀 열어 주세요!"
문 밖에서 들리는 고성에 민주가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누, 누굴까요?"
"1학년 서현일 거야."
"서현이요? 그 공부 잘하는 학생?"
"응. 예전부터 계속 날 스토킹 했는데, 뭔가 낌새를 채고 온 것 같아."
"그, 그럼 어쩌죠? 문 열지 말고 가만있을까요?"
쾅쾅-!
"들어가시는 거 봤거든요? 문 좀 열라고요!"
나는 부실 듯이 두들기는 문짝을 쳐다보며 말했다.
"가만있으면 오히려 소란을 피워 사람들만 끌어 모을 거야. 차라리 빨리 문을 열어줘야 해."
"그, 그럼 저와 주인님의 관계가···."
"넌 시간만 끌어줘."
"어, 어떡하시려고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입구만 막고 있으면 돼."
내가 창문 쪽을 힐끔 거리자 민주가 놀라서 만류했다.
"주, 주인님! 여긴 3층이에요. 혹시라도 뛰어 내릴 생각이라면···."
쾅쾅쾅!
"조교선생님!!! 문 좀 여시라고요!!"
"봤지? 저 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 내가 여기 있는 걸 들켰다간, 괜히 이상한 소문만 확산될 거야. 너나 나나 학교 생활 지장 안 받고 싶으면 어떻게든 들키선 안 돼."
"그, 그래도···."
민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물론 3층에서 뛰어내린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하면 어디 하나 부러질 지도 모른다.
"쉿-."
나는 민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내 걱정일랑 말고. 오늘 못 한 건 다음에 꼭 해줄게."
"네···."
민주가 굳은 표정으로 문으로 다가서자 나는 주저 없이 3층 창문을 열었다. 2층도 아닌 3층은 눈으로 보기에도 상당한 높이였다. 거기다 바닥은 시멘트.
머리부터 추락한다면 즉사할지도 모른다.
철컥-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입에다 아이템을 털어 넣고 과감히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뛰어 내리는 동시에 몸을 반전 시키며 층 사이를 구분하는 비좁은 몰딩 장식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꽈악-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손가락 겨우 두 마디나 될 법한 간격을 붙잡았는데, 그 미약한 힘이 내 무게를 버텨낸 것이었다.
‘우오옷! 악력이 이렇게 세 지다니!’
[서두르십시오. 아이템의 위력이 극히 짧습니다.]
‘그래.’
나는 야마카시를 펼치듯 손가락을 놓으며 다음 층으로 떨어졌다. 또 다시 몰딩부분을 잡아채며 연거푸 추락하자 어느새 1층까지 도착했다.
쿵-!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3층의 학과 사무실을 쳐다보았다. 누가 봤다면 스턴트 액션 영화라도 찍는 줄 알았을 것이다.
‘휘우-. 10년 감수했네. 바람피우다 창문으로 뛰어내린 남자 얘긴 들었지만, 그게 내 모습이 될 줄이야. 하여간 서현이 저 미친년, 두고 보자.’
손바닥을 탁탁 털며 돌아서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바, 방금! 뭘 한 거냐는?"
겨드랑이 부위가 흠뻑 젖은 돼지 하나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쳇. 하필 목격자가 있다니···.’
"제가 급한 일이 있어가지고요. 그럼 이만."
"거, 거짓말 말라는! 분명 3층에서 뛰어내리는 걸 봤다는!"
‘에이씨. 저 돼지 새끼가 사람 귀찮게···.’
나는 그대로 돌아서 줄행랑을 쳤다.
한참을 달리는데 로시가 말했다.
[주인님, 그만 멈추셔도 됩니다. 이제 안보입니다.]
‘헉헉! 괜찮겠지? 아이템 쓰는 걸 들켜 버렸는데···.’
[그냥 신기한 일을 봤다 여기겠죠. 3층에서 난간 붙잡고 뛰어 내려온 것뿐인데요.]
‘그게 정상은 아니잖아. 내가 무슨 암벽등반 선수냐?’
[어차피 주인님이 곧바로 도망쳤기 때문에 누군지도 모를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 하여간 박서현 저 집착녀 때문에 한참 좋다 말았네. 아 맞다, 내 노트!’
[지금 돌아가 봐야 입장만 애매해 집니다. 민주양이 알아서 챙겨주길 바래야죠.]
‘하긴.’
그때 깨톡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양희주였다. 그 빻녀말이다.
***
"설명해 봐요. 지금 이제 무슨 짓이죠?"
"죄, 죄송합니다 조교 선생님. 제가 큰 착각을 해가지고···."
서현은 창피한 마음에 접시 물에 머리라도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 질투에 눈이 멀어 아무 근거 없이 학과의 조교를 핍박하다니. 눈앞이 깜깜해지며,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렇게 예의 없는 학생으로 안 봤는데, 정말 실망스럽군요. 박서현 학생."
"죄송합니다."
서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그때 민주의 눈으로 도훈의 소설을 옮기던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차!’
급하게 옷을 추스르느라, 책상 위에는 벗어던진 팬티까지 놓여 있었다. 서현을 단단히 꾸중하려던 민주는 혹시라도 들킬까 봐 마음에 초조해졌다.
‘지금은 혼 낼 때가 아니야. 일단 쫓아 보내야지.’
"···그래요. 뭔가 사정이 있겠죠.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행동을 했다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네···."
"나가요."
"죄송합니다."
"당장!"
"네, 넵!"
민주의 불호령에 서현이 화들짝 놀라며 조교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동시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신경질 적으로 닫힌 문이 민주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아 서현은 속으로 뜨끔했다.
‘아, 망했다. 나 이제 어쩌지···.’
서현이 벽에 기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민주는 후다닥 팬티를 치웠다. 축축하게 젖은 팬티의 촉감에, 민주는 아까 일이 떠올라 가랑이 사이가 뜨거워졌다.
‘아···. 주인님이 오랜만에 민주를 예뻐해 줬는데···. 아참, 주인님은 괜찮으신 걸까?’
그제야 도훈에게 생각이 미친 민주가 후다닥 창가로 뛰어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전에 그곳을 떠난 도훈은 보이지 않고, 웬 돼지 한명과 말라깽이 학생 둘이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사하신 거겠지?’
민주가 내려 보던 두 사내는 애니메이션 동아리로 위장한 PK단의 똘마니였다.
"나, 나 방금 플레이어 본 것 같다는."
"진정하고 차분히 말해. 내가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뭘 봤다고?"
오탁훈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탁훈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얘기하자, 안경멸치가 눈빛을 반짝였다.
"3층에서 뛰어내리고도 아무렇지 않았단 말이지?"
"그, 그것도 스파이더맨처럼 막 벽을 잡고 휙휙-."
"호오. 기이한 일이군. 확실히 플레이어 일지도."
"그, 그지? 이 근처가 AU 잔흔이 가장 강했다는."
"본부에 보고 해봐야겠군. 옵져버 생활 3년 만에 드디어! 스고이 탁훈사마! 스고이데스!"
"흐흑. 그럼 우리도 이제 PK단에 정식으로 입단할 수 있는 거냐는?"
"모르지, 그건. 하지만 지난 번 제보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엔 분명해. 혹시 그 사람 얼굴은 기억나?"
탁훈이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 그게 너무 하늘 위에서 사람이 뚝 떨어지니까 놀라가지고···."
"아아, 하필 중요한 걸 까먹어 버렸군."
"확실한 건 남자였고, 키가 무척 컸다는."
"으음. 그걸론 단서가 부족하군. 가만 있자 여기가 사범대 1관이던가?"
안경 멸치가 건물을 두리번거렸다.
얼굴은 몰라도 단대만 알아도 충분히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두 사람은 흥분된 표정으로 애니메이션 동아리 십덕을 향해 뛰어갔다.
***
-희주 : 오빠, 수업중이세요?
도훈은 깨톡을 확인하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로시에게 거들먹거렸다.
"봤냐? 나한테 먼저 톡 보내는 거."
[허이고. 퍽이나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도훈 : 아니. 오후 수업 하나 있어서 쉬는 중이야. 왜?
-희주 : 아, 아까 남친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신경 쓰여서···.
-도훈 : 근데 남친은 언제 사귄 거야? 얼마 전까진 없지 않았어?
-희주 :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도훈 : 어쩌다?
-희주 : 아시잖아요. 술 먹고 놀다가···.
‘웃기고 있네. 술 먹고 놀다 자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희주양이면 능히 그럴 만하죠.]
희주에게 연이어 문자가 왔다.
희주 : 휴, 이게 다 오빠 때문이잖아요.
도훈 : 그게 왜 내 탓이야?
희주 : 솔직히 오빠랑 하고 나서 부턴 자꾸 그게 하고 싶은데, 근데 오빠는 또 바빠서 잘 안 만나 주니까.
도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햐, 핑계보소.’
도훈 : 그런 이유로 남친을 사귀었다고?
희주 : 몰라요. 솔직히 안 사귀고 싶었는데, 계속 귀찮게 굴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근데 좀 짜증나요.
도훈 : 왜?
희주 : 오빠랑 너무 비교되니까.
도훈 : 뭐가?
도훈은 이죽거리면서 계속 톡을 주고받았다.
희주 : 다 알면서 왜 물으세요? 당연히 속궁합이지.
도훈 : 남친한테 무슨 문제 있어?
희주 : 그게··· 어유, 톡으로는 다 말 못하겠고. 오빠 지금 어디에요? 만나서 얘기하면 안 돼요?
도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마지막 수업까진 아직 1시간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본래 학과실에서 육필로 적은 원고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서현이 끼어드는 바람에 일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
도훈은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 것보다도 민주와 떡을 치다 그만 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흐음. 꿩 대신 닭이라더니···.’
[주인님, 설마 희주양을?]
‘왜? 내가 뭘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자기가 먼저 보자고 하는데?’
[점점 뻔뻔함이 심해지시는 것 같군요. 희주양은 엄연히 임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오는 여잘 막을 순 없지.’
[허어!]
‘일단 들어나 보자고. 그래도 떡정으로 얽힌 인연인데, 남친이랑 트러블이 있다니 상담 정돈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물건 세우고 말하지 마십쇼! 설득력 없어 보이니까.]
로시의 핀잔에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훈 : 근데 너 남친이랑 같이 밥 먹으로 간 거 아니었어?
-희주 : 같이 먹다가 수업 있다고 먼저 갔어요. 여기 상대 뒤쪽인데 이쪽으로 오실래요?
-도훈 : 남자친구 있는 여자랑 단둘이 만나면 소문 이상하게 난다.
-희주 : 음···. 그럼 어떡하죠?
-도훈 : 기왕이면 조용히 볼 수 있는곳이 좋지. 눈에 띄지 않게.
-희주 : 그럼 노래방은 어떠세요?
-도훈 : 노래방?
-희주 : 네. 낮에는 시간당 8,000원이라 싸요. 조용히 얘기하기도 좋고.
‘퍽이나 얘기만 하겠다···.’
-도훈 : 그래. 먼저 가서 어딘지만 알려줘.
-희주 : 네. 연락드릴게요.
경영대 뒷편은 예전부터 상대 뒷골목이라고 해서, 대학생들의 먹자골목이 발달한 곳이었다. 싸고 맛있는 식당이 많다보니 후식으로 먹는 커피숍과 디저트 가게가 들어섰고, 그렇게 유동인구가 많아지다 보니 각종 유흥시설도 덩달아 발달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유흥이라고 해봐야 PC방, 당구장, 노래방등이 대부분. 그중에서도 노래방은 최근 뽑기방과 연계된 코인 노래방에 밀려 낮에는 최저 요금을 받고 있었다.
도훈은 희주가 알려준 건물을 찾아 지하계단으로 걸어 들어갔다. 확실히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낮부터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는지 가게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도훈이 카운터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알바생에게 물었다.
"혹시 12번방이 어디에요?"
"왼쪽 끝 방요."
"네."
알바는 게임에 빠져 도훈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핸드폰에 몰두했다. 자리만 지키는 수준인 알바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별로 신경도 안 쓸 것 같은 눈치였다.
도훈이 12번 방 앞에 들어서자 희주가 반주를 켜놨는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소파에 누워 있다가 도훈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오빠!"
누워있던 그녀는 팬티가 훤히 보일만큼 치마가 말아 올라간 상태였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도훈이 리모컨을 들어 반주를 중단시키며 말했다.
"여기가 너네 안방이냐? 왜 소파에 누워있어?"
"좀 피곤해서요. 어머, 지금 어딜 보세요?"
희주가 배시시 웃으며 치마를 끄집어 내렸다. 그러나 매끈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추임새였다.
도훈은 그녀의 뻔히 보이는 속셈에 동요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어차피 볼 장 다 본 사인데 무슨. 그나저나 톡으로 못할 얘기란 게 뭐야?"
도훈의 시큰둥한 반응에 소파에 다릴 올리고 있던 희주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원래 남자들은 다 그래요?"
"응?"
"아니, 남친이···."
< 398. 글 잘쓰는 잘생긴 오빠-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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