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 조각모음-14- >
도훈의 다급한 요청에 혜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오빠 번호를 주세요."
혜미가 자기 폰을 내밀자 도훈이 빠르게 번호를 찍었다.
여자들이 나가자 샤대생이 곧바로 투덜거렸다.
"아! 한창 잘 되는 중이었는데···. 형, 지켜보기만 한다면서요?"
"어차피 니가 졌어 인마."
"왜요? 기둥이 쟤도 마지막에 겨우 번호 받은 거잖아요. 저도 막 물어보려던 참이었다고요."
샤대생이 흥분해 소리치자, 방장이 말문을 막았다.
"일단, 중간에 끊은 건 시간이 아까워서야. 니들 저 정도로 만족할 건 아니잖아?"
일전에 미모의 스튜어디스 그룹을 만났던 터라 당연히 만족은 불가능했다. 더 예쁜 여자들을 두고 굳이 평범한 여자를 고를 필요는 없었다. 할 말을 잃었는지 샤대생이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무, 물론 그런건 아니지만."
"그리고 너랑 기둥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뭔 줄 알아?"
"뭔데요?"
"여자가 만약 조금이라도 너한테 마음이 있었으면 그런 소리 듣고도 절대 자리를 안 뜬다는 거야. 너도 봤을 거 아냐? 기둥이 파트너 마지못해 일어선 거."
"읏···."
"게다가 번호도 자기 폰에 직접 받아갔지."
"그게 왜요?"
"여자들이 상황 모면하려들 땐 일부러 번호 하나씩 틀리게 알려주는 경우가 많아. 실수한 척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자기 폰에 직접 번호를 받는 경우는 얘기가 달라. 그건 진짜로 연락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거든."
"아···."
"뭐, 어쨌든 이만하면 연습은 충분히 한 것 같고··· 우리 잠시 쉬었다 갈까?"
"쉬다뇨?"
"짜식, 단톡방 좀 봐라.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니까? 애들 방금 부스 들어 왔덴다. 마중이라도 나가야지. 그래도 한 팀인데."
"아···."
"계속 앉아만 있었더니 뻐근한데 무대 좀 밟아 보자고. 마실간 김에 수질검사도 좀 하고."
방장이 일어서자 도훈과 샤대생도 따라 나섰다.
그때 도훈의 폰으로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
-??? : 정우 오빠 번호 맞나요?
룸을 나서려는데 문자가 왔다.
모르는 번호지만 단박에 혜미라는 걸 직감했다.
‘생각보다 적극적인데?’
도훈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도훈 : 응, 맞아. 혜미구나.
-혜미 : 미안해요. 더 있고 싶었는데 친구가 눈치를 줘가지고. 오빠 혹시 한국대 다닌다는 그 오빠랑 친해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친하지도 않았기에 곧바로 손절했다.
-도훈 : 그닥? 그냥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야.
-혜미 : 그렇구나. 그 오빠 좀 변태 같아요.
-도훈 : 무슨 소리야?
-혜미 : 자꾸 제 친구 허벅지를 만지려 했다잖아. 싫은 티를 냈는데도 계속요.
‘이 사칭 새끼가 혼자 발기 탱천해가지고.’
방장 말이 옳았다.
한명이 스프링 시키면 다 같이 튕겨나간다. 진상의 트롤링이 팀플을 망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흥, 어차피 방장이 눈치 안줬어도 알아서 도망쳤겠군.’
-도훈 :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랑 얘기하느라 정신 팔려서 보지도 못했네. 친구한테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도 그러지 말라고 할게.
그때 방장이 슬쩍 옆구리를 찔렀다.
"누구랑 문자 질이냐? 혹시 방금 걔?"
"예, 연락이 와서요."
방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칼답하지 말고 적당히 받아주기만 해. 계란은 한바구니 담는 거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렴풋 뜻을 짐작했지만, 일부러 되물었다. 놈은 누군가가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조금만 비위를 맞춰주면 놈의 노하우를 빼먹는 건 일도 아니다.
"나이트 와서 제일 병신 같은 짓이 한 여자한테만 목매는 거야. 특히 연락처 받았다고 계속 문자질 하다 보면 다른 여자들한테 눈총사기 십상이지. 근데 생각해봐. 너한테 번호 주는 얘가 너한테만 줬다는 보장이 어딨냐?"
"아···"
"일단 최대한 분산 투자를 해. 마지막에 뒤통수 맞기 싫으면. 남자들이 여잘 재듯이, 여자들도 남자들 간보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해. 일단 연락처 받았으면 흐름 끊기지만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라고. 일종의 보험인 셈이랄까?"
"고마워요, 형. 형한테 정말 많이 배우네요."
일부러 저자세로 나가자 놈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강아지처럼 쓰다듬었다.
"내기 이긴 보상으로 특별히 코치해 주는 거야. 잘 해라. 방금처럼만 하면 홈런 치는 건 일도 아니니까."
좆만한 새끼같으니.
어디서 건방지게 대물님 머리를.
하지만 지금은 힘을 숨길 타이밍이다.
대물님이 잦이를 숨기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나는 거들먹거리며 앞장서는 놈의 뒤통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기둥아. 화장실 안 갈래?"
그때 뒤 따라오던 샤대생이 나에게 물었다.
"혼자가기 뻘쭘 하다."
"그럴까요?"
마침 맥주로 팽만해진 방광을 비울 타이밍이었기에 사칭 샤대생과 화장실로 향했다.
남자 화장실은 완전 너구리 소굴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희뿌연 담배 연기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겁나게 펴대네 구만. 혹시 담배 있냐? 나 다 떨어져 가지고."
‘이 새끼가 무슨 맡겨 놓은 사람처럼 구네?’
다행히 입장 전 새로 충전했기에 담배는 두둑했다. 나는 담배를 건네며 소변기 앞에 섰다. 샤대생이 내 옆 자리에 서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씨발, 다 된 밥이었는데."
"뭐가요?"
"몰랐냐? 나 옆에 파트너 허벅지 만지고 있었잖아."
‘병신 새끼. 그거 추행이야, 인마.’
하지만 일부러 티를 낼 필욘 없었다.
"진짜로요?"
"그렇다니까? 딱 거기에 손가락 넣으려는 순간 방장 형이 막은 거라고. 아, 떡각 오지게 섰는데."
샤대생은 술이 제법 들어갔는지 처음과 달리 입이 걸걸해 졌다. 특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없다보니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씨발, 좆같다 진짜. 야, 그리고 너 너무 방장한테 굽신거리지 마. 어디서 옷 팔이 새끼가 얼굴 좀 반반하다고 존나게 가르치려 들어, 재수 없게."
‘누가 누굴 흉보는 건지···.’
"흠."
"아까 봤지? 스튜어디스 들어올 때 젤 예쁜 여자 자기 옆에 딱 앉히는 거. 나보다 형이라서 암말 안했는데, 그딴 식으로 개인플레이 하면 같이 조각 못하지."
"그런가요?"
‘자기가 했던 짓은 생각도 못하는 군.’
오줌을 다 싼 샤대생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세면대 앞의 화장실에서 머리에 물을 묻히며 스타일링을 다듬었다. 손이나 좀 씻고 해라 새끼야.
"어차피 팀플이네 이지랄 해도 이 바닥은 각개 플레이야. 그러니까 너도 양보하지 말고 맘에 드는 애 있으면 바로 들이대. 먼저 따먹는 놈이 장땡이니까."
‘지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훈수는.’
오줌 빨을 한창 세우는데 거울을 보고 있던 샤대생의 표정이 갑자기 사색이 되었다. 놈은 전화가 걸려온 폰의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씨발, 좆됐다."
"왜 그래요?"
"여친이야. 아까 잔다더니 왜 갑자기 전화질이지?"
어쭈, 꼴에 여친도 있었어?
"받지 마요. 노래 소리 다 들릴 텐데."
"안 돼. 존나 집착 쩔어서 안 받으면 계속 전화한다고. 좆됐네 진짜. 야. 나 잠깐 밖에 나가서 전화 받고 올 테니까 말 좀 전해줘라. 알았지?"
"네."
샤대생이 후다닥 튀어나갔다.
화장실에 홀로 남게 된 나는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저 녀석도. 여친 있는 새끼가 나이트는 대체 왜 오는 거야?’
[글쎄요···. 그걸 주인님이 하실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야. 나도 여자는 많지만 공식 커플은 아니잖아. 난 떳떳하다고.’
[눈 가리고 아웅 하기가 이런 거군요, 주인님.]
‘거기까지.’
혼자 밖으로 나가자 길게 줄을 늘어선 여자들이 보였다. 남자 화장실과는 다르게 여자 화장실은 대기열이 긴 편이었다.
‘고추도 없는 것들이 무슨 소변을 저렇게 오래 보는지, 원.’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단톡방 메시지를 확인했다. 뒤늦게 들어온 멤버들이 자신들이 자리 잡은 위치를 메시지 창에 남겨 놓았다.
"어? 너 아까 그 캐디 아니니?"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화장실 앞에서 죽치고 있던 여자 중 하나였다. 스튜어디스 김보영. 주변이 어두워 몰랐는데, 그녀가 나를 용케 알아본 것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해?"
"화장실 왔는데요."
"룸에도 화장실 있지 않아?"
그녀는 심심했는지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구면이라 익숙하기도 하고, 그녀의 정보창을 들여다 본 터라 불쑥 음심이 발동했다.
‘로시, 얘는 업적이랑 상관없지 이제?’
[네. 이미 스킬을 사용하셨으니까요.]
‘기분도 꿀꿀한 데 에피타이져나 먹을까?’
[지금요?]
‘못할 건 또 뭐야? 얘 나한테 호감 있다고 했잖아?’
[물론 정보창에는 그렇게 나오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업적도 남아있는데 괜히 무리하시다간.]
‘무리는 무슨. 너 푸드 파이터들이 식전에 아무것도 안 먹는 줄 알지?’
[네?]
‘걔들도 위장 풀기 위해서 식전음식 다 챙겨먹는다고. 나도 오늘 밤을 위해 대물에 기름칠 좀 해야겠다 이거야.’
[대단하십니다, 정말.]
"잠시 스테이지 구경한다고 나왔어요."
"아항."
"누난 근데 왜 혼자 있어요?"
"애들 다 부킹 끌려 갔자너. 근데 너 왜 나보고 누나라고 해? 내 나이 아니?"
"그냥 누나 같아서요."
"풉-. 웃긴다 얘. 아깐 어버버 거리더니 말도 곧 잘하네?"
"아깐 미인 앞이라 긴장해서 그랬어요."
"이젠 미인처럼 안보이니 그럼?"
보영이 긴 생머리를 젖히며 미모를 뽐냈다.
‘어쭈. 내 앞에서 예쁜 척 하는 것 봐라?’
[확실히 주인님한테 호감 있다니까요.]
‘슬슬 찔러볼 타이밍인가?’
"조명이 너무 어두컴컴해요. 맞다,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저희 룸 화장실 이용하세요.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정말?"
"네, 다 스테이지 나갔어요. 한참 뒤에나 올 걸요?"
그녀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 그럼."
"이쪽이에요."
그녀가 겁도 없이 나를 따라왔다.
이것 참, 쉬운 여자구만.
***
"너 허튼 수작 할 생각 마. 알았지?"
룸에 다시 돌아온 보영은 도훈에게 단단히 일렀다.
"제가 뭘요?"
"밖에서 소리 듣는 거 아니지?"
"저 변태 아니거든요?"
"변태가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니 그럼?"
보영이 새침하게 말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흐흐. 말투가 톡톡 쏘는 게 귀엽네. 이게 그 츤데레라는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저러면 자기가 귀여운 줄 아나보지.’
[근데 지금 뭐하십니까?]
‘왜? 소리 좀 들어보려고.’
[주, 주인님···.]
도훈은 화장실 문 앞에 귀를 바짝 붙이고 내부를 염탐했다. 치마를 내리는 듯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쏴아-" 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캬! 오줌빨 소리 좋고!’
[주인님, 진심으로 변태 같습니다. 지금 그 표정요.]
‘변태면 또 어때? 사람은 누구나 변태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곧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문에서 귀를 떼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잠시 후 용변을 마친 보영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너 들었지?"
"아닌데요?"
"근데 왜 문 앞에 서있어?"
"혹시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곤란해 질 까 봐요. 지키고 있었어요."
"어쭈, 말은 잘해. 물 좀 마시고 가야겠다. 얼음물 있지?"
"네, 들어오세요."
보영은 거침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소파에 걸터 앉더니 소파 뒤로 허리를 젖혔다.
"아이고 삭신이야. 엊그제 하루 종일 서 있었더니 온 몸이 다 뭉쳤어."
도훈이 얼음물을 건네며 말했다.
"비행기 타는 거 힘들어요?"
"말이라고 하니? 특히 장거리 비행은 진짜 죽어. 때 되면 기내식 내줘야지, 음료수 달라면 줘야지, 비즈니스 석에선 무슨 라면을 끓여 달라지 않나."
"라면도 끊여줘요?"
"메뉴에 있잖아, 컵라면. 비행기 안 타 봤니?"
유학 시절에 많이 타봤다 이것아.
"제주도는 가봤죠."
"풉-. 너 캐디 맞네."
"아니라니까요?"
"골프 연습생들이 해외를 얼마나 많이 나가는데?"
"전 국내팝니다."
"웃겨, 진짜. 이렇게 말 잘하는데 아까는 왜 그렇게 얼어 있었을까?"
"말 했잖아요. 누나가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그러자 보영이 피식 웃으며 흘러나온 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겼다. 행동 하나하나가 남자의 시선을 잡아 끌 줄 아는 여자였다.
"진짜? 근데 어쩐다니, 난 잘생긴 남자를 더 좋아하는데."
보영이 도훈을 도발했다.
남자를 살살 긁으며 질투를 유발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맞다. 아까 그 오빠 잘생긴 오빠는 뭐하는 사람이래?"
[주인님, 휘둘리지 마십시오.]
‘나도 알어. 본심도 아니면서 엄청 튕기는구만. 아주 탁구공이야.’
"직업요? 의류 유통 쪽일 걸요?"
"그럼 사장님이네?"
"네, 아마도."
"이야, 잘생긴 오빠가 돈까지 잘 버네. 그런 사람이 이런 델 왜 왔을까?"
보영은 계속 도훈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도훈은 꿈쩍하지 않았다.
반응하면 할수록 그녀의 장난기가 심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꼭 이런 델 목적이 있어야 오나요?"
"왜? 남자들 뻔하잖아. 룸 잡고 양주 시켜고, 있어보이게 앉아 있는 거. 다 여자 꼬실려고 하는 거잖아."
"그럼 누나는 왜 왔는데요?"
"나? 나도 남자 꼬시러 왔지."
보영이 배시시 웃었다.
도훈은 그 앵두 같은 입술에 대물을 처박아 넣고 싶어졌다.
< 376. 조각모음-1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