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 조각모음-4- >
도훈은 당시 염라대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은 고작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하급 신일뿐이라는.
그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건 신이 한명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신.
그 밑으로 하급 신.
그리고 그 밖에 무수히 많은 인격신들.
그런 신들이 관장하는 세계가 바로 천상계라는 것이 로시의 설명이었다.
‘맞다! 저번에 플레이어가 신이 될 수 있다더니 설마 그런 의미였어? 레벨 오르면 설명해 준다며?’
[본래 중수부터 제공되는 정보지만 어차피 후원 시스템을 알게 되었으니 미리 말씀드리죠. 사실, 어떤 식으로 신이 탄생하는 지는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제 권한을 넘어서는 정보니까요. 다만 최근 랭커 채널 사이에서 108위업을 모두 달성한 플레이어
가 신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썰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일전에 제가 한번 PK단의 유래를 설명해 드린 적 있었죠?]
‘바벨탑을 쌓아 올린 그 역적 무리들 말이지?’
[네. 그때 신의 진노를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108개의 업적을 모두 이뤄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플레이어였습니다. 아마 그것을 근거로 떠드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낭설일 뿐입니다. 새로운 신의 탄생은 오직 신께서 관장하시는 부분이니까요.]
‘근데 듣고 보니 앞뒤가 안 맞는데? 만약 플레이어가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라면, 스스로 신이 되겠다는 플레이어들에게 왜 철퇴를 내리신 거지?’
[그들은 자신이 가진 힘의 근원을 착각하고 오만함에 도취되어 반기를 든 자들입니다. 신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신을 대신하려 했었죠.]
‘아아, 이해했어. 한마디로 주인을 문 개꼴이로군. 신께선 그걸 용납하지 못한 거고.’
[네.]
‘그나저나 플레이어라는 것은 그럼···.’
[네, 어쩌면 신이 될 수 있는 자격시험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다차원에 걸쳐있는 하위 종족의 후보자들을, 신격으로 승급시키는 일종의 트레이닝 과정이랄까요? 물론 이 또한 추측일 따름입니다만···.]
도훈은 햄버거 먹다 깨닫게 된 충격적인 진실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런 씨팔, 그럼 섹스만 존나 해대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단 소리야?"
도훈의 호들갑에 주변에 있던 손님들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도훈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푹 숙인 체 도망치듯 페스트 푸드점을 빠져나왔다.
‘우씨, 쪽팔려.’
[그러게 왜 갑자기 소릴 지르고 그러십니까?]
‘너라면 안 놀라고 배기겠냐? 인간에게 신이란 절대지경의 존재였어. 그런데 그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확대해석입니다.]
‘확대해석이라고?’
[설사 저 가설이 맞다 쳐도, 주인님은 ‘신’이라는 범주를 지나치게 넓게 잡으셨다는 소립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 드리면, 같은 영장류에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와 개코원숭이 사이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유일 신’과 그 밑의 하위 신 사이에도
그 만큼의 격차가 존재하지요.]
‘하필 예를 들어도 개코원숭이가 뭐냐.’
[그보다 적절한 비유는 없습니다만?]
‘요컨대 신이라고 불리지만 다 같은 신은 아니다?’
[당연하지요. 신께선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근데 내가 알기론 인류는 수십억 년 전 단세포 생물에서 진화한 걸로 아는데? 창조론은 진즉 한물 간 이론이라고.’
[허면, 그 단세포 생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그거야 우연한 아미노산 같은 단백질이 결합되면서···.’
[그 우연을 일으킨 사람은요?]
‘······.’
[인간들은 하나만 생각하지 둘은 모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지요. 우주가 탄생하고, 태양계가 만들어지고, 인류가 원시 세포로 부터 진화했다는 것은 명징한 과학적 진리입니다. 하지만 태초에 우주를 누가 탄생시켰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해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죠. 저는 지금 그 해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듣고 보니 또 그렇네. 근데 왜 신께선 또 다른 신들을 만드시는 거지?’
[그분의 하해와 같은 깊은 뜻을 저 같은 미천한 존재가 헤아릴 순 없습니다만, 아마도 우주가 지나치게 넓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신께선 말 잘 듣는 하급 신을 뽑아 자기 시다바리로 부리려는···.’
찌릿-!
[신성 모독입니다.]
‘크흑! 깜짝이야! 먹은 거 다 토할 뻔 했잖아!’
[그러게 입조심 하셨어야죠.]
도훈은 전기충격을 당한 손목이 욱신거리는 지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을 뱅글 돌렸다.
‘근데 후원 시스템은 대체 뭐야? 로시 네 말마따나 신이 한명이 아니고 무수히 많다고 치자고. 신께서 일정 자격을 충족한 자들을 하위 신으로 임명했다고 쳐. 근데 그들이 왜 플레이어를 후원하는 거지? 설마 신들에게 있어 플레이어란···.’
도훈은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아 말을 중단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이,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도 불경스러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가 뭐요?]
‘아, 아냐. 쓸데없는 소리였어.’
[흠. 싱거우시긴.]
‘그나저나 도서관에 다시 갈랬는데, 이 기분으론 글이 써질 것 같아. 그냥 집에나 가야겠다.’
도훈은 소화도 시킬 겸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걷는 동안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신이 만든 세상.
게임 시스템.
그리고 후원자의 존재.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어쩌면···. 플레이어란 신이 만든 게임 속 세상을 살아가는 캐릭터일 따름인 걸까? 그리고 다른 신들은 그런 플레이어들을 BJ방송 보듯 구경하는 방청객인 거고?’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인생의 순간들이, 어떤 이에겐 한낱 유희거리에 불과한 게임 속 세상이라니.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왜 태어났고,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이야말로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 신세지 않는가? 자신들에겐 하나의 세상이지만,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겐 그저 즐거움을 주기 위한 관상용 동물에 불과한.
‘허 참, 알면 알수록 이해가 안 되는 족속들이구만. BJ한테 별 풍 쏘듯 포인트를 날리는 신격이라니···. 그럼 난 신들 사이에선 19금 성방러인 셈인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어, 별풍 더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예?]
‘아까 메시지 화면이나 다시 띄워줘 봐. 정신없어가지고 내용을 다 못 읽었어.’
[알겠습니다. 디스플레이에 띄웠습니다.]
도훈은 생각했다.
누군가 세상이란 게임을 만들어 내고, 재미삼아 특별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을 투입하고, 또 그들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존재가 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어차피 이것은 자신에겐 현실이라며.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래. 너희들에겐 한낱 게임일지언정, 나에겐 이게 리얼이야. 원숭이 구경하듯 얼마든지 관찰해 보라고. 언젠간 나도 너희와 같은 자리에 올라서 있을 테니까. 내가 바로 섹신 이도훈이야!’
★천상의 메시지★
-피땀눈물 신의 축복-
"당신의 굳건한 의지가 피땀눈물 신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습니다. 피땀눈물 신은 당신을 응원코자 이번 업적에 4000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달성 조건 : 36시간 내 ‘맨몸으로’ 업적의 달성.
보상 : 4000포인트, 피땀눈물 신의 가호.
실패 시 : 피땀눈물 신이 당신의 의지박약에 실망하여 관심을 철회합니다.
‘흐음. 36시간이란 제한조건이 붙어있군.’
[네. 후원 신들은 주인님만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말은 다른 플레이어들도 위와 같은 메시지를 받고 있다는 소리네?’
[그렇죠. 중수 이상의 플레이어부터는요. 참고로 인기가 아주 많은 플레이어들은 여러 신들에게 동시에 후원을 받기도 합니다.]
‘근데 신이란 사람의 이름이 뭐 저래? 제우스니, 하데스니 하다못해 브라흐마니 비슈누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도 많잖아?’
[저것은 신의 진명(眞名)이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채팅방에서 닉네임을 만들 듯 자신의 개성에 따라 붙인 별칭일 뿐이죠.]
‘아하! 그나저나 피땀눈물이라니···. 왠지 굉장히 근성 있을 것 같은 별칭이군.’
[본인의 취향이 반영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련성은 있을 겁니다.]
‘가만, 4000포인트가 업적 달성 시 받는 보너스라면 옆에 신의 가호란 건 뭐야?’
[터치하시면 상세 정보가 나올 겁니다.]
도훈이 디스플레이를 터치하자 상세 정보가 열람되었다.
*피땀눈물 신의 가호
-당신의 근성이 피땀눈물 신을 감동시켰습니다. 이에 피땀눈물신은 당신이 업적을 추가로 달성할 때마다 추가 포인트(+500)을 증정키로 약조하였습니다. 이 가호는 피땀눈물 신이 당신에게 관심을 철회할 때까지 유효합니다.
‘우오옷! 이게 정말이야? 업적 달성마다 500포인트씩을 준다고?’
[네. 설마 신께서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그나저나 첫 가호부터 정기 후원이라니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행운이군요.]
‘아, 그럼 가호마다 내용이 다를 수도 있어?’
[물론이죠. 능력에 버프를 걸어 주기도 하고, 마켓에선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아이템을 하사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정도로 신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이야, 후원 시스템 최고네! 이제부턴 포인트 팍팍 쌓이겠는데?’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응?’
[왜 중수 등급부터 후원 시스템이 열리게 되었는지를 아셔야 한다는 겁니다.]
‘흐음···. 혹시 난이도 보정?’
[정답입니다. 역시 똑똑하시네요. 주인님 레벨이 오르는 만큼 이에 대응해 미션 난이도도 따라 올라갑니다. 남은 업적 또한 이전에 달성한 것보다는 어려워지겠죠. 먼저 끝낸 업적은 비교적 달성이 쉬웠다는 의미니까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또한 일전에 말씀드린 PK단 문제도 있습니다. 여전히 주인님은 하수레벨이라 별 상관없겠지만 중수부터는 슬슬 PK단의 접근이 시작될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충분한 군자금이 필요하겠지요.]
‘거참 이러다 살기 위해 떡치게 생겼네.’
[그러게 왜 그런 소원을 비셨습니까? 주인님 업적이 지금처럼 된 것은 다 주인님 소명 탓입니다.]
‘난봉꾼이 뭐 어때서? 니가 5Cm 실잦이의 슬픔을 알어?’
[저에겐 물리적인 배출기관이 무의미하기에···.]
‘배출기관이라니! 작은 고추도, 엄연히 고추야!’
[아, 예.]
‘이 새끼가 진짜.’
[주인님.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내일 걸린 업적에 대해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이번 업적은 4000포인트의 보상에 장기적인 후원까지 걸려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분발해 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도훈은 퍼뜩 조각 채팅방을 떠올렸다.
로시와의 대화에 열중한 나머지 상당한 시간동안 잠수를 타버린 것이었다.
‘헉, 방장 짤 없는 성격이던데 설마 강퇴시킨 건 아니겠지?’
도훈이 다시 채팅 어플을 열자 방장이 올린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모든 멤버들이 방을 나간 상황이었다.
‘깨톡 오픈채팅으로 접속하라고?’
도훈은 검색을 통해 오픈 채팅이 무엇인지 찾았다.
기존 단톡방과 달리 프로필 사진부터 이름까지 모두 익명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직접 연락처를 주고받았다간 신상 털릴 위험성이 있으니 익명성을 담보할 수 있는 연락방안을 고안한 것이리라.
도훈이 안내된 오픈 채팅 주소로 접속하자 벌써 나머지 멤버들을 깨톡 방에 접속해 있는 상황이었다. 몇몇이 안부 인사를 건넬 뿐 아까처럼 활발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장소까지 결정된 마당이라 다들 자기 볼일을 보는 것 같았다.
‘호오. 신기하긴 하네. 전화번호 하나도 모른 체 여럿이 만날 수 있다니. 그나저나 방장 저 새낀 대체 얼마나 조각을 많이 한 거야?’
아이돌 같은 외모.
수려한 말 빨.
거기에 다양한 유흥경험까지.
어쩌면 방장은 이제껏 도훈이 만난 어떤 상대보다 막강한 사람일지 몰랐다. 순전히 여자 꼬시는 능력만 보면 단연 으뜸일 정도. 강력한 라이벌 앞에 도훈이 살짝 위축되었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하긴 여자 한명 두고 싸우는 서바이벌도 아닌데 뭔 걱정이야? 능력이 봉인 되더라도 어떻게든 한명만 꼬시면 끝나는 거야. 이런 훌륭한 물건 가지고 여자 하나 못 후리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도훈이 바지 겉으로 대물을 움켜쥐며 의지를 다졌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여성이 그런 도훈을 보더니 치한을 본 것처럼 "꺅" 소릴 지르며 도망쳤다.
"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왠지 여러모로 망신을 당하는 하루였다.
***
"페스트 푸드점에서 미친놈처럼 소릴 지르니 않나, 길가다 치한 취급을 당하질 않나. 오늘 일진이 왜 이렇게 사납지?"
길 구석에서 담배를 뻐끔거리며 도훈이 중얼거렸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었으나 도훈은 괜히 재수가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래. 이럴 땐 또 한 발 빼줘야지. 애자매 후유증으로 며칠 쉬었더니 그새 운 빨이 다 됐나 보구만."
도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헬스장을 떠올렸다.
‘흐흐. 오늘은 미나 트레이너한테 개인 레슨이나 받아볼까?’
미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잦이분쇄녀. 그녀와 헬스장에서 뜨거운 밤을 보낸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여러모로 바쁜 나머지 헬스장에 들르지 못해 그녀의 강력한 쪼임 맛을 못 본지 오래였다. 도훈이 설레는 마음으로 헬스장에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남자 트레이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엇, 이도훈 회원님? 요새 왜 그렇게 얼굴보기 힘들어요? 헬스장 끊은 줄 알았잖아요."
"안녕하세요. 요새 좀 학교 행사가 많아가지고."
"운동 자꾸 빼먹으면 근육 빠져요. 젊으니까 잘 못 느끼겠지만, 원래 만들긴 어렵고 망가뜨리긴 쉬운 게 몸이라고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저 근데 미나 코치님은 PT 중이신가요?"
"어? 소식 못 들었어요?"
< 366. 조각모음-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