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82화 (362/2,000)

< 364. 조각모음-2- >

사범대 도서관은 평소보다 사람이 빠져 있었다.

날이 좋아 다들 봄나들이라도 간 것일까?

‘근데 웬일로 수정이가 안보이지?’

[어제 교생실습 간다지 않았던가요?]

‘아, 맞다. 그랬지?’

오늘부터 4학년들의 교생실습 시즌이 시작되었다. 수정은 본가에서 가까운 곳으로 실습학교를 신청한 관계로, 한동안 학교를 못 나온다고 했었다.

‘자주 보던 얼굴인데 못 보니까 또 아쉽네.’

아마 평소보다 자리가 듬성듬성한 이유도 도서관 주 이용세력인 4학년들이 빠진 결과인 것 같다. 나는 좌우로 텅 빈 공간에 자릴 잡고 오랜만에 복습에 몰두했다. 요 며칠 애자매를 공략하느라 공부를 등한시 했다.

‘이게 뭐라고 몇 시간씩 공을 들여야 하는 건지, 원···.’

복습할 양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떨어진 지능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같은 양을 공부하더라도 시간이 배는 오래 걸렸다. 역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맞다. 무식한게 죄지.

3시간여를 빡세게 공부한 뒤에야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내용이 갈무리 되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을 보자 갑자기 서글퍼졌다.

‘아···. 의대생이랑 수학 문제 풀던 게 생각나네. 그때처럼 팽팽 머리가 돌아가면 얼마나 좋아?’

[아이템이라도 쓰시게죠?]

‘아니. 포인트 아깝다.’

자매 덮밥 당시 상당량의 포인트를 지출하고 말았다. 당시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이상으로 출혈이 컸다. 당분간은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어느덧 저녁시간.

슬슬 배가 고파오자 당이 떨어졌는지 머리가 잘 안돌아갔다. 남은 시간 쓰던 소설이라도 한 번 훑어보려고 했지만 뭐라도 먹고 해야할 것 같다.

대강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공부에 집중하느라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여느 때처럼 단톡 방엔 수백 통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신변잡기나 말장난, 어디선가 퍼온 짤방 같은 쓸데없는 메시지가 전부였다. 특히 남학생들은 자기들만 좋아하는 게임 이야기로 단톡 방을 점거하다 시피 했다.

-태영 : 낼 불금인데 ‘워그’ 달리실 분. 치킨 먹여 드립니다.

-희수 : 워그가 뭐야?

-중건 : 워 그라운드라고 있어. 요새 유행하는 게임. 피방 점유율 1위인 갓 게임!

-희수 : 근데 치킨은 또 왜 먹는데?

-중건 : 거기서 1등하면 치킨 각 뜨거든.

-희수 : 치킨 각? 뭔 소리야 대체?

-태영 : 야, 모르면 빠지시고. 암튼 아무도 없음? 나 요새 에임 물올라서 1일 1치킨 가능한데.

-번치리 : 나 스쿼드 좀 껴줘···.

-태영 : 오케이 접수!

-나연 : 너희들 불금인데 폐인처럼 게임 질이나 하려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클럽이라도 가, 이 화상들아! 여자친구 못 사귄다고 징징대지 말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클럽’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퍼뜩 잊고 있던 업적이 떠올랐다.

‘로시, 저번에 나이트클럽이랑 관련된 업적 있다지 않았던가?’

[‘맨몸으로’ 업적 말씀이신가요? 첫 만남부터 일절 스킬과 아이템을 쓰지 않고 여성을 공략해야 하는?]

‘어, 맞아. 어차피 국춘문예 출품작 때문에 자료조사 차 한번은 들러야 하는 상황이잖아. 가는 김에 겸사겸사 도전해 볼까?’

[근데 누구랑 가시려고요?]

끄응.

그게 문제다.

‘성수 형이나 우선이는 클럽하곤 전혀 거리가 멀 것 같은 얼굴이고···. 그나마 태영이가 가능성 있는데 이놈은 왠지 입이 쌀 것 같단 말이지. 나머지 애들은 같이 가자고 할 만큼 친하지도 못하고.’

그동안 여자들만 만나느라 남자들과의 인맥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주말에 나이트 같이 갈 친구 하나 없는 상황이라니···.

가만, 친구라고? 생각해 보니 대학 동기만 친구는 아니지 않는가? 분명 이도훈도 멀쩡히 중학교, 고등학교 나왔을 테니 대학 이후에도 연락 가능한 친구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로시, 이도훈 절친이 누구야?’

[절친요?]

‘아니, 뭐 불알친구 같은 거 있잖아.’

[아아, 대학 동기 말고 원래 친구요?]

‘응. 보통 아무리 붙임성이 없는 놈이지만 서넛 정돈 있을 거 아냐?’

[음···. 없진 않은데 군대를 다녀오면서 연락이 끊겼을 겁니다. 친했던 다른 친구들도 현재 대부분 군에 가있는 상황이고요.]

‘이런, 스물 세살들이란···.’

이 나이 대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에 가 있다. 도훈이 1학년 마치자마자 갔다 왔으니, 친구들 중에서도 제법 빠른 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현재 복무중이라는 소리.

그때 로시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나에게 말했다.

[아! 있습니다. 아직 군대 안간 친구가.]

‘누군데?’

[ROTC 후보생 하는 친군데 졸업 이후 임관이라 지금도 재학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처 대학에서요.]

‘ROTC면 머리 빡빡 깎은 애들 이잖아? 에이 씨, 나이트 가면 군바리 휴가 나온 줄 알거 아냐. 안 돼. 그런 애들 말고 좀 덜 친했어도 연락할 만한 친구는 없어? 기왕이면 양아치 같은 애들이면 더 좋고.’

[양아치요?]

‘응. 학창시절에 막 날 티 나던 애들 있잖아.’

[안타깝게도 이도훈 군은 그런 부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항상 운동과 공부만 착실히 하는 모범생이었죠.]

‘어우, 진짜 인생 재미없게 살았네.’

[전생의 주인님만 하실까요.]

‘야! 왜 난데없이 나를 들먹여?’

[근데 꼭 멤버가 있어야 나이트를 가나요?]

‘물론 혼자도 갈 수 있지. 근데 그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잖아. 이번에 나이트를 가려는 이유는 업적 도전도 있지만, 소설 진행을 위한 자료조사 목적도 있단 말씀이야.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여러 명이랑 같이 출격하걸랑.’

[아아···. 아니면 멤버를 따로 구해보심이 어떻습니까?]

‘어디서?’

[어디긴요. 인터넷이죠.]

으응? 나이트 갈 멤버를 인터넷으로 구한다고?

생각해보니 오래전 채팅이 성행하던 시절에 ‘번개모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채팅을 하다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Off-line으로 얼굴을 보는 것.

그 당시 나이트 번개 모임 같은 것도 성행했다고 들었다.

나는 즉시 핸드폰 검색으로 ‘나이트 번개’를 검색했다.

가까운 패스트 푸드점에 들러 햄버거를 시켜놓고 한참 검색한 후에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수하게(?) 나이트를 목적으로 번개 하는 모임을 소위 ‘조각모음’ 혹은 ‘조각’이라고 한다는 것. 이는 조각처럼 파편화된 개인이 서로 팀을 이뤄 당일치기로 파티를

구성한다는 뜻이었다. 검색한 김에 조각이 성행하는 근래의 채팅 사이트 역시 몇 군데 알아 낼 수 있었다.

‘키아,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주문이 나온 햄버거를 대충 입에 쑤셔 넣으며 조각 모음이 활성화된 채팅 싸이트에 가입신청을 했다.

닉네임을 적어야 한다는 소리에 한참 고민했다.

‘닉네임은 근데 뭘로 하지? 괜히 이름 같은 걸 공개했다간 곤란해 질 것 같은데.’

조각의 특징 중 하나는 익명성이다.

검색을 통해 알아본 결과 대부분 학교나 직장, 이름 같은 것은 서로 숨긴다고 했다. 혹시나 모를 뒤탈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한참을 고민 끝에 ‘불기둥’이라는 기가 막힌 닉네임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 사용 중이었다.

‘에이씨. 역시 핫한 키워드라 인기가 많구만.’

[앞에 접두사를 붙여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접두사?’

[네. 같은 닉네임이지만 좀 더 강한 느낌으로요.]

‘대물 불기둥?’

[그건 너무 흔해빠진 것 같은데요.]

‘딱딱한 불기둥?’

[식상합니다.]

‘옳지. 성난 불기둥은 어때?’

[오오. 그럴싸한데요? 왠지 야설을 다수 집필했을 것 같은 닉네임이군요.]

‘크크. 좋아, 이제부턴 성난 불기둥이다.’

다행히 성난 불기둥이란 닉네임을 쓰는 유저는 없었는지 곧바로 가입이 되었다. 순전히 조각을 위한 채팅 싸이트라 그런지 방제들이 상당히 직접적이었다.

-3 vs 3 신림동 홈런타자 대기 중-

-2 : 2, 와꾸 봅니다. 사진 인증 必-

-5명의 용자 모집 중. 골뱅이 레이드 ㄱㄱ-

-불광동입니다. 쩐 주 있음, 몸 만 오셈.-

-홍대 클럽 멤버 모집합니다. 칼 같은 N빵-

-내일 불금 달리실 분 있나요? 룸빵입니다.-

‘키아, 목요일인데도 엄청 할 일 없는 사람들 많구나.’

[저 아래 내일 조각 모임이 있군요.]

‘한 번 들어가 볼까?’

#성난 불기둥님이 입장하셨습니다. (6/10)

-클럽 매냐 : 안녕하세요.

-섹스피스톨 : 새로 오신 분 소개 좀.

-홈런만 친다 : 와, 저번에 국빈관 갔다가 내상 지대로 입었잖아.

-야왕 짜왕 : ㅋㅋ 닉네님 쩐다. 성난 불기둥이랜다.

-보픈각 : 어, 저 닉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입장과 동시에 5명이 동시에 대화를 쏟아내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핸드폰 타자가 익숙치않아 최대한 천천히 글을 남겼다.

-성난 불기둥 : 반갑습니다.

-섹스피스톨 : 새로 오신 분 나이가? 혹시 40대는 아니져?

-보픈각 : 아재 꼬추는 서요?

‘뭐라고? 내가 아잰줄 어떻게 알았지?

[그냥 농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

-야왕 짜왕 : 불기둥인데 오죽하겠냐? 게다가 성 났대잖아. ㅋㅋ 인증점.

-클럽 매냐 : 성기 노출 시 강퇴합니다.

-야왕 짜왕 : 캬, 내건 여자한테 참 좋은데···. 이거 보여줄 수도 없고.

#야왕 짜왕님께서 강퇴 당하셨습니다. (5/10)

-홈런만 친다 : 헉! 진짜 강퇴를.

-클럽 매냐 : 아까부터 영 거슬려가지고요. 우리 확실히 합시다. 내일 10시 집합해서 1차 걸치고 11시 입장합니다. 무조건 N빵이구요, 20대만 받습니다. 30대지만 동안입니다, 이런 개소리 안 통합니다.

클럽 매냐가 방장인 모양이군.

짤 없는 성격이다.

야왕의 강퇴 이후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섹스피스톨 : 근데 우리 몇 명이나 가요? 설마 다 가는 건 아니죠?

-클럽 매냐 : 여섯 명 넘으면 2팀으로 나누려고요.

-섹스피스톨 : 두 팀이요?

-클럽 매냐 : 원래 더블 팀이 홈런 칠 확률이 높아요. 중간에 선수교체도 용이하고, 봐서 테이블하고 룸하고 반반 갈라서 들어가면 비용도 아낄 수 있구요. 특히 야전에 테이블 하나 있어야 픽업도 용이하죠. 웨이터에게 찍어달라고 하면 되니까.

-보픈각 : 근데 우리 다시 다섯 명인데···.

#야왕 아님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6/10)

-야왕 아님 : 안녕하세요.

#야왕 아님 님께서 강퇴 당하셨습니다. (5/10)

-클럽 매냐 : 존나 진상이네. 강퇴 시켰는데 재가입해서 또 들어오는 거 봐. 저런 새끼 와봐야 개 진상 부림.

-홈런만 친다 : 맞아요. 저번 조각에도 먹튀새끼 때문에 존나 돈만 날렸잖아요.

-보픈각 : 먹튀라뇨?

-홈런만 친다 : 씨발 N빵하는 데 현금 없다고 지가 나중에 카드 결재한다고 현금 다 걷어가는 거예요.

-보픈각 : 헐, 그걸 그냥 줌?

-홈런만 친다 : 아니 지가 공무원이라고 신분증까지 보여주는데 믿을 수밖에 없었지. 근데 그게 위조였던 거야. 폰도 선불 폰이고. 룸에서 4명이서 팁까지 50넘게 나왔는데 마지막에 그 새끼 먹튀하고 튀는 바람에 개 내상입음. 홈런은커녕 안타도 못쳤는데···.

-보픈각 : 와, 대박. 완전 꾼만났네.

-클럽 매냐 : 우린 무조건 현찰 박치깁니다. 선불 결재하고, 추가로 술 시키거나 팁 줄 때도 그 자리에서 N빵하기로, 오케이?

-섹스피스톨 : 그냥 쯩까고 시작하는 건 어때요?

-클럽 매냐 : 서로 못 믿으면 애초에 조각 못해요. 어차피 신분증도 위조하는 마당에 쯩 봐서 뭐함? 그냥 현찰로 퉁 쳐요.

-섹스피스톨 : 오케오케, 그럼 여기 있는 분들은 내일 다 가시는 거죠? 성난 불기둥은 아까부터 말이 없으시네?

대화가 너무 빨리 오고갔다.

껴들 틈이 없구만.

-성난 불기둥 : 눈팅중입니다.

-클럽 매냐 : 나이랑 직업이라도 알려주세요. 전 27 보험 영맨.

-섹스피스톨 : 군 전역하고 알바 중이에요. 24이고요.

-홈런만 친다 : 아이고, 여그서 내가 제일 노땅인 것 같은디 스물아홉, 회사원.

-보픈각 : 그럼 제가 제일 영곈가요? 스물 둘 대학생여.

-섹스피스톨 : 헐? 대학생? 학교 어디임?

-보픈각 : 거기까진 비밀.

-성난 불기둥 : 저도 대학생입니다. 23.

#전설의 대물남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6/10)

-전설의 대물남 : 형 왔다, 대물이다.

-클럽 매냐 : 반말시 강퇴합니다.

-전설의 대물남 : 죄송합니다 발기중이라 흥분해가지고···.

-보픈각 : 님, 진짜 대물임?

-전설의 대물남 : 네, 좀 큽니다.

-섹스피스톨 : 자기 입으로 대물이라는 사람치고 큰 사람 못 봤는데? 실례지만 몇Cm 세요?

-전설의 대물남 : 하-. 이걸 보여줄 수도 없고.

-클럽 매냐 : 저 새끼 아까 야왕 그 새끼네.

-전설의 대물남 : 방장님, 방장님. 제발 자비좀.

-클럽 매냐 : 한번만 더 이상한 소리 하면 강퇴합니다.

-전설의 대물남 : 넵!

‘저 새끼 진짜 대물일까?’

[왜요? 갑자기 경쟁심 드십니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정도면 어디가서 꿀리진 않으니까요.]

‘흠, 하여간 익명 채팅이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만.’

-홈런만 친다 : 방장, 근데 조각 경험 많음요?

-클럽 매냐 : 한 달에 두어 번은 합니다.

-홈런만 친다 : 홈런 확률은요?

-클럽 매냐 : 에프터 홈런까지요?

-홈런만 친다 : 좌우당간.

-클럽 매냐 : 5할은 넘죠.

-섹스피스톨 : 오!

-보픈각 : 오! 수위 타자네.

-전설의 대물남 : 혹시 와꾸 인증 가능?

잠시 후 채팅방으로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 364. 조각모음-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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