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71화 (351/2,000)

< 353. 애자매-53- >

***

‘민서가 진퇴양난에 빠졌군.’

[확실히요. 정선희의 명령에 따라 주인님을 유혹하려는데 하필 최민식이 끼얹어진 꼴이군요.]

‘뭔가 구린내가 나지 않아?’

[네?]

‘정선희는 왜 하필 나랑 민서를 엮으려는 걸까?’

[음···. 글쎄요. 부부는 닮는다더니 남편을 따라가는 것일지도?]

‘응?’

[민식은 아내마저 돌리는 엄청난 변태지 않습니까?]

‘그렇지. 진성 네토라레. 바람둥이보다 역겨운 새끼.’

[어쩌면 정선희도 그런 사상에 물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로시 네 말은, 선희한테도 네토라레 성향이 있다는 거야?’

[그렇죠. 자신이 품은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빌려주면서 쾌락을 느낄지도.]

물론 나 역시 그런 생각은 잠깐 했었다.

가정폭력이 대물림 되듯,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피해자는 누구보다 잔인한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남편의 남다른 NTR 성향 탓에 수 많은 초대남들에게 유린당했던 선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런 취향을 갖게 되었다는 로시의 의견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아냐. 이상해. 아내를 돌리는 남편 얘긴 많이 들어봤어도, 남편을 공유하는 아내는 듣도 보도 못했어. 더구나 아까 희애 의식하는 거 봤지? 그녀에게 정말 네토 성향이 있었다면, 큰딸에게 그런 질투심을 보일 리가 없지.’

[오.]

‘선희는 근본적으로 소유욕이 강한 여자야. 딸에게도 양보하기 싫은 나를, 몸종이나 다름없는 민서에게 빌려준다라···.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

[흐음, 그것도 그렇네요.]

‘어쩌면···.’

여러 정황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치정 싸움이 아니다. 변태적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 전혀 다른 노림수가 감춰져 있다.

‘···선희가 진짜로 노리는 건 혹시 최 회장의 유산이 아닐까?’

[유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선희는 남편 몰래 시아버지와 붙어먹은 여자잖아. 그것도 둘 사이에 낳은 딸을 20년 동안 기르기까지 했지. 남편을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뻐꾸기 남편.

남의 씨인 줄도 모르고 정을 쏟아가며 기른 자식이, 알고 보니 자신과 하등 관계없는 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 그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 모른다.

그러한 짓을 대범하게 벌이는 여자라면, 결코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추리를 이어갔다.

‘최근 들어 최 회장은 부쩍 건강이 염려되는 상황이야. 매일 변호사를 불러 유산 상속 논의를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렇죠. 아까도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더라고요.]

‘로시, 네가 최 회장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죽고 나면 막대한 유산을 누군가에겐 물려줘야 해. 무려 국내 100대 기업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의 경영권을. 그런데 외동인 줄 알았던 최 회장 자식이 알고 보니 두 명이란 말이지.’

[단독승계가 아니란 소리죠?]

‘그래. 최 회장은 갈등했을 거야. 물려 줘봐야 수년 내로 회사를 말아먹을 게 뻔한 무능한 자식과,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는 스무 살의 막둥이 사이에서 누굴 후계자로 세울 지 고민되지 않겠어?’

[대체로 장자계승이 원칙 아닌가요?]

‘지금이 무슨 왕정 시대냐? 하물며 조선왕조 때도 장자가 물려받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어. 기왕이면 능력 있는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라고.’

로시가 반박했다.

[하지만 지금의 추리는 너무 나간 것 아닙니까? 미애양은 겨우 스무 살입니다. 더욱이 재수생이기까지 하죠. 딱히 능력이 있다고 평하기엔 보여준 게 너무 없는데요?]

‘맞아. 최미애는 보여준 게 없지. 하지만 최민식은 이미 실패 사례를 너무 많이 보여줬거든.’

[아···.]

‘어차피 둘 중 하나에서 골라야 한다면, 최악보다 차악을 뽑는 게 최선이겠지. 이건 정치인들 뽑는 선거랑 똑같아. 이미 머저리로 판명된 못난 아들보다, 아직 보여준 건 없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미애가 더 혹하지 않겠어?’

[흐음.]

‘게다가 미애는 막둥이지. 그것도 엄청난 늦둥이. 대게의 아버지들은 막내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평소 자식임을 내색할 수 없었던 최 회장이라면, 미애에 대한 애정의 크기가 어마어마 했을 거야.’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최민식에게 유산을 주면 녀석은 십중팔구 회사를 망칠 인간이야. 평생을 쌓아온 부가 3대를 못 가서 무너질 판이지. 하지만 가능성이 남아있는 미애라면 전혀 다르지. 미애가 경영수업을 받을 동안 전문 경영인을 붙여 잠시 회사를 맡기고, 충분한 준비가 되었을 때 일선으로 복귀시키는 경우의 수가 있으니까. 반면 민식은 절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지 않을 거야. 일단 운전대를 잡으면 낭떠러진 줄 알면서도 엑셀을 때려 밟을 위인이니까’

[그럴듯한 그림입니다. 근데 이게 정선희의 계략과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거죠?]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이제껏 모은 퍼즐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최 회장 대면했을 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렇죠. 그때 상향된 정보 창으로 속마음을 들여다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고···. 아무튼 지금 정황으로 봐선 최 회장은 나를 음모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 같아.’

[음모요?]

‘민식을 내칠 장기 말로.’

[호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여기서부턴 살짝 비약이 섞여 있어.’

[그래도 말씀해 보시죠. 흥미진진하군요.]

‘정선희가 왜 마사지숍에서 카운터나 보던 민서를 남편에게 붙여줬다고 생각해?’

[초대남 그만 부르고 젊은 여자랑 바람이나 피우라고요?]

‘아니. 그런 진성 네토라레가 여자 하나 붙여줬다고 변태 짓을 멈추진 않겠지. 실은 민서가 첫 번째 장기말이었던 거야.’

[정말요?]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그래. 이대로 최 회장이 노환으로 죽고 나면 최민식이 고스란히 유산을 물려받을 테고, 그때는 정말 파국이지. 민식의 세상이 열리는 거야. 가진 능력이라곤 아버지의 재산을 야금야금 탕진하는 능력밖에 없던 놈에게, 금고 열쇠가 통째로 넘어가게 된 셈이랄까.’

[참으로 비극이군요.]

‘그래서 내 생각인데, 최 회장과 정선희가 서로 짝짜꿍을 맞춘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민식을 자연스럽게 후계자에서 탈락시킬 수 있을까 하는.’

[그 키 맨이 정민서라고요?]

‘그렇지. 회장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예쁜 여비서니 호색한인 민식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을 테지. 심지어 은퇴하고 집에서 머무르는 상황에선 회사보다 더 자주 마주칠 테고.’

[그거야 그렇죠.]

‘그렇게 둘을 정 붙여서 민식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만드는 거지.’

[그 말은 정선희가 이혼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민서양을 미끼로 썼다는 건가요?]

‘아마도.’

[하지만 그렇다 한들 후계 구도가 바꾸는 부분이 있을까요? 오히려 며느리인 정선희만 떨어져 나간 꼴이 될 것 같은데요?]

‘아니지. 정선희가 최민식과 공식적으로 갈라서면, 또 다른 족보가 만들어지는 거잖아.’

[또 다른 족보라뇨?]

‘미애라는 막강한 후계자의 친모이자, 최 회장의 유산을 공식으로 승계할 수 있는 정식 부인.]

[헉!]

‘그래. 이건 정말 개족보야. 개족보도 이런 개족보는 듣도 보도 못했어. 아무튼 그게 민서를 발탁한 이유였을 거야. 첫 번째 장기 말의 역할.’

[아! 그래서 최 회장이 민서를 정양이라고 함부로 불렀던 거군요?]

‘그렇지. 처음부터 둘은 정상적인 회장-비서 관계가 아닌 거야. 최 회장 입장에선, 민서는 쓰다 버릴 고급 창녀에 지나지 않았겠지.’

[과격한 표현이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시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민서의 활약은 지지부진했겠지. 어제 모습만 봐선 민식이 아내와 갈라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거든. 놈은 그저 아버지의 비서를 섹파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 버릴걸?’

[그럼, 두 번째 장기 말의 역할은 뭡니까?]

‘나? 뻔하지 않겠어? 민서와 민식의 사이를 불 붙이는 불쏘시개.’

[불쏘시개요?]

‘나는 민식을 흔들기 위한 조커 패였을 거야. 숨겨둔 애인이 젊고 잘생긴 대학생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를 조급하게 만드는 거지. 봐라, 네가 태도를 확실히 해주지 않으니 내가 이렇게 흔들리지 않느냐 하는.’

[흐음. 질투심 유발작전이군요.]

‘민식은 선희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사내야. 갖고 싶은 여자는 강제로 덮쳐서라도 쟁취하고, 외간남자에게 자기 여자를 돌릴지언정 절대 뺏길 생각은 없어. 그렇게 멋대로 굴어도 여자가 자길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거든.’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상탭니다.]

‘여자를 전혀 인격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지. 그에게 있어 여자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해.’

[사람이 장난감이라니···.]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빌려줄 수 있는 거겠지.’

[어쨌건 주인은 자기니까요?]

‘맞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능욕을 당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 오히려 옆에 서서 잔뜩 흥분해가지고 딸딸이나 치고 있을 놈이지. 마치 자기가 빌려준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처럼.’

[와, 이건 정말···.]

‘아무튼, 조금 억측이 있을 수 있지만 대략 이런 그림일 거라고 봐. 정선희도 나를 민서에게 주고 싶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 남편에 대한 증오가 더 큰 거지. 그래서 장기말이야. 게임을 이기려면 아끼는 기물이라도 희생시켜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이래야 아귀가 맞아.’

[참으로 대단한 추리가 아닐 수 없군요. 그렇다면 주인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장기 말이 되진 않겠죠?]

‘안 그래도 고민하는 중이야. 어쨌든 나야 자매 덮밥만 완수하면 목표는 달성하는 셈인데, 이 막장 집구석에서 벌어지는 작태가 너무 꼴불견이라 가만 지켜볼 수만 없단 말이지?’

[하면···.]

‘그리고 솔직히 선희나 민서나 둘 다 죄가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최민식이야 말로 이 판의 최종 흑막이야. 이대로 곱게 물러나기엔 놈이 저지른 과오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어.’

[그렇긴 하죠. 아내를 외간남자에 돌리질 않나, 아버지 비서랑 내연관계를 유지하지 않나, 그러면서 자기 딸들은 남들이 손도 못 대게 애지중지하고···. 말하고 보니 참으로 내로남불의 전형적인 작자로군요.]

‘야. 마지막 말은 빼. 나도 찔리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하면 로맨스라니까요?]

‘그건 너랑 나만 인정하는 거잖아? 나도 내가 개새낀 건 잘 알거든?’

[엇,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이 새끼가?’

[이크, 민서양이 집으로 들어옵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군요.]

‘야, 말 돌리지 말고.’

[지금은 민서양에게 집중할 때입니다.]

‘너 좀 있다 보자.’

"화장실은 다녀왔니?"

"네. 가족이랑 통화는 잘하셨어요?"

"뭐 그냥···."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아, 아니야. 그냥 쓸데없는 생각 좀 하느라."

"고민이 있으면 옆 사람과 나누는 게 좋데요. 말해봐요. 들어드릴게요."

민서가 소파에 털썩 걸터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나는 그녀 옆에 살짝 떨어져 앉았다. 처음부터 너무 접근하면 경계할 것 같았다.

"이제부터 우리 의남매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응?"

"무슨 남매 사이가 그래요? 즐거운 일 있을 땐 함께 웃고, 슬픈 일은 나누고 그래야죠."

"······."

나는 조금 더 거리를 좁히며 민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게 가족이니까."

"가, 가족이라니. 너무 나갔어 너."

"왜요? 의남매는 가족 아닌가?"

나는 손톱 끝을 세워 천천히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자극적인 터치에 민서의 표정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가, 가족끼리 이러는거 아니야."

"이러는 거라뇨? 제가 뭘 어쨌다고?"

"막 손 함부로 잡고···."

"에이, 손 가지고 뭘 그래요. 손이 성감대는 아니잖아요?"

"그, 그래도."

"사실 저도 여동생 있어요."

"여동생?"

"네. 미국에. 유학 때문에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아···."

"여동생 어렸을 때 울고 있으면 이렇게 손 많이 잡아줬어요."

나는 기억에도 없는 소릴 지껄였다.

혜은이와의 추억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건 어렸을 때잖아."

"왜요? 지금도 가끔 만나면 포옹하고 그러는데. 얘가 제법 미국 물을 먹었는지 스킨십이 자연스럽더라고요."

"으, 남매끼리 그렇게 되니? 나도 내 동생은 싫진 않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던데···."

"남매가 오붓하면 좋은 거죠. 안 그래요?"

조금 더 바짝 다가선다. 이제 어깨가 붙는 거리.

남자끼리라면 질척댄다고 서로 어깨 빵을 날릴 간격이지만, 남녀 사이에서 지금의 거리는 연인에게나 허용된 공간이다.

민서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는 게 느껴진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최민식 때문에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상황에서 타켓이 먼저 들이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을 거다.

흔들리는 순간, 나는 민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안아드릴게요, 누나."

문득, 최민식을 엿 먹이고 싶어졌다.

< 353. 애자매-5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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