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 애자매-40- >
5시 59분 58초.
5시 59분 59초.
6시.
‘됐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시계만 쳐다보던 희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의자에 걸어둔 코트를 멋들어지게 걸치더니 명품 백을 어깨에 메고 부장에게 꾸벅 목례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최 대리, 오늘은 웬일로 일찍 가?"
그녀의 상사인 부장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퇴근 시간 아닌가요?"
"아니···, 그 발주 넣는 거 벌써 마감한 거야? 양이 상당하던데?"
"아뇨. 시한이 정오까지라서 낼 출근해서 하려고요."
‘이상한데, 오늘따라?’
부장은 대머리를 덮은 주변머리를 긁적였다.
평소 맡은 바 임무는 끝까지 매조 짓는 희애가 서둘러 정시퇴근 하는 모습이 생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너 일가이기 때문에 근태와 관련해 눈치를 보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일처리 하나만큼은 깔끔하다는 평이었다.
‘혹시 새로운 남자친구라도 생긴 건가?’
부장은 단추가 두 개나 풀려있는 희애의 블라우스를 훔쳐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남직원들 사이에서 속칭 ‘핫바디’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그녀는, 어떤 사내라도 눈독을 들일만큼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사장의 딸이라는 신분 차이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방이었다. 지금이야 입사한지 얼마 안 돼 대리직위지만, 몇 년도 안 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자리가 예비 된 사람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도발적인 말투, 남자를 얕잡아 보는 시선은 대담한 사내마저도 기를 꺾게 만들었다. 부장인 자신조차 이렇게 조심스러운데, 일개 사원들은 그녀와 눈만 마주쳐도 알아서 기는 수준이었다.
‘크흠. 뭐, 급한 일이 있나보지.’
"그래. 되도록 내일까지 늦지 않게 마무리 해줘."
"그럴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희애는 자신의 애마인 미니쿠퍼에 시동을 걸었다. 차량 시계가 6:10분 가리키자 마음이 조급해 졌다.
‘과외 벌써 끝난 건 아니겠지? 오랜만에 밟아야겠는데.’
희애가 퇴근을 서두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막내동생과 카톡을 주고받다 우연히 도훈이 오늘도 과외를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하아-. 어젠 오랜만에 자궁이 터질 것 같았는데···.’
씨어터 룸에서의 파워 섹스를 떠올리자 희애의 그곳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평소 노팬티로 다니는 희애는 떨리는 엔진 진동에 자기도 모르게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 상상만으로 젖어 버렸어. 돌아가기 전에 붙잡아야지.’
도훈에게 냉큼 달려가기 위해 그녀는 풀 악셀을 때렸다. 차체는 작지만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외제차가 부앙-하는 소리와 함께 급출발했다.
***
수애는 점심부터 울리는 카톡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얘는 또 시작이네?’
자매 셋이 속해 있는 카톡 방에선 여느 때처럼 막내 미애가 징징거리고 있었다.
못난이 : 큰 언니, 올 때 나 속옷 하나만 사다 주면 앙데?
싸가지 : 바쁘니까 수애한테 부탁해. 나 오늘 야근 당첨이야.
못난이 : 둘째 언니는 맨날 읽씹 하잖아.
싸가지 : 그럼 전화를 하던가.
못난이 : 전화도 씹는다니까? 봐, 지금도 톡 보면서 무시하잖아.
싸가지 : 수애 올해 졸업반이라 논문 준비해서 그래. 너 언제까지 언니들한테 부탁할래? 그런 사소한 건 네가 후딱 나가 사와. 어제 아빠한테 차키도 돌려받았다면서?
못난이 : 외출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영어 과외 끝나자마자 연이어 수학과외 해야 한다고!
싸가지 : 수학이라니? 그건 주말에만 한다지 않았어?
못난이 : 도훈 오빠가 사정 생겨서 이번 주 건 땅겨서 하기로 했어.
싸가지 : 그렇단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가는 단톡창을 쳐다보던 수애는 ‘도훈’이라는 소리에 눈이 번쩍 띠였다.
‘도훈이가 오늘도 온다는 소리야?’
갑자기 잡고 있던 책의 글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젯밤 자위중인 자신을 덮친 뒤 천국을 보여준 도훈.
그가 연이틀 집에 온다니···.
수애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아아···. 설마 오늘도 자고 가려나?’
잠잠하던 수애가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수애 : 나 오늘 빨리 들어갈 거야. 내가 사다 줄게.
못난이 : 어? 수애 언니 시간 돼? 그럼 5시 전에 사 올 수 있어?
수애 : 스터디 빨리 끝나면. 근데 속옷은 왜?
못난이 : 요새 쇼핑을 못했더니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
수애는 타이밍이 공교롭다고 여겼다. 뜬금없이 새 속옷을 사달라는 것도 그렇고, 그게 도훈이 과외를 시작하기 전인 5시라는 것도 수상했다.
‘뭐지? 안하던 짓을 한다는 건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소린데···.’
도훈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사내다.
185가 넘는 큰 키에 탄탄한 몸매.
호감 가는 얼굴에 약간 중저음을 띄는 목소리까지.
여자라면 모두가 눈길을 뺏길만한 외모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의 우람한 물건.
그녀의 보물 1호였던 ‘트위스트 빅’을 우습게 만든 초대형 생체 딜도의 소유자. 게다가 그녀의 피학적인 성향에 딱 맞는, 지배적이고 잔혹한 특성까지.
수애는 오늘 하루만도 몇 번이나 도훈을 떠올리며 팬티가 젖어버릴 정도였다.
‘만에 하나 미애가 도훈이에게 흑심을 품는 거라면···.’
빠각!
그녀는 쥐고 있던 연필을 힘을 주어 부러뜨렸다. 이마에 핏줄이 돋을 만큼 성난 표정에선, 부모의 원수를 대면한 사람이나 지을법한 무시무시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감히 니 까짓게···.’
그녀의 빡치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톡방 속 미애는 계속 혼자 떠들고 있었다.
싸가지 : 그냥 옷장에서 꺼내 입어.
못난이 : 싫어. 큰 언닌 속옷도 몇 개 없잖아.
싸가지 : 그야 난 노브라가 편하니까 그렇지.
못난이 : 브라는 그렇다 치고 왜 팬티까지 없는 건데?
수애 : 야, 내거 입으면 너 죽어.
못난이 : 수애언니건 나한테 맞지도 않거든? 난 75C나 D만 입는 다고.
부들부들.
연필을 부러뜨린 수애가 메시지를 읽다가 끝내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우당탕 박살나는 소리에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 수애 쪽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장소를 망각한 수애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핸드폰이 떨어져가지고···."
떨어진 핸드폰을 다시 줍자 액정이 산산 조각 나 있었다. 그러나 액정이 금간 것보다도, 그녀는 가슴이 작다 무시한 동생이 미애의 말이 더 화가났다.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못난이 같은 게 희애 언니 닮아서 점점 싸가지만 없어지네. 재수한다고 불쌍해서 요새 오냐오냐 했더니 나를 우습게 본다 이거지? 너 오늘 진짜 뒤졌어.’
수애는 황급히 노트와 연습장을 챙기더니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도서관을 나오며 그녀는 깨진 액정 사이로 겨우 전화를 걸었다.
"나 수앤데 오늘 급한 집안 일 때문에 스터디 못 갈 것 같아. 미안해."
-얘, 오늘 너가 발표잖아. 갑자기 그러면···.
뚜-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수애는 학내로 들어온 택시를 붙잡았다. 도훈에 의한 질투심과 미애의 빈정거림에 의한 분노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수애였다.
"택시! 택시!!!"
평소 차가운 인상 덕에 "얼음미녀"라고 불리던 그녀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허둥대는 표정이었다.
***
도훈이 과외를 하러 간 사이 선희는 방으로 돌아가 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모님. 전화 받았습니다.
"뭐하고 있어?"
-회장님 모시고 경제인 원로 모임에 참석한 뒤 식사하러 왔습니다. 저는 김기사랑 별관에서 따로 식사중이고요.
"김 기사가 옆에 있다고?"
-네.
"그럼 밖으로 나와서 다시 전화해."
-알겠습니다, 사모님.
잠깐 기다리자 민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다시 전화 걸었습니다.
"빠릿빠릿해서 좋네. 내가 너 아끼는 거 알지?"
-네, 제가 사모님 덕에 이 자리에 있는 걸요.
"사람이 은혜를 받은 걸 잊으면 안 돼."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한참 변죽을 울리던 선희가 본격적인 본론에 들어갔다.
"민서 너 혹시 회장님한테 따로 언질 받은 거 있어?"
-네? 무슨···.
"이도훈에 대한."
-아직까진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네 임무가 뭔 줄 알고 있지?"
잠시 수화기 너머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답이 늦어지자 선희가 다시 재촉했다.
"뭐야? 대답 빨리 안 해?"
-죄송합니다, 사모님.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서. 네,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그렇게 느긋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달까지 그 새끼가 나한테 이혼서류 내밀게 만들랬잖아."
-저, 그게 생각만큼···.
"혹시 그 새끼 너한테 질린 거 아냐? 요즘 얼마나 만나?"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꿈틀.
대답을 들은 선희의 미간이 밭고랑처럼 패였다.
일주일에 한 번이상이라니.
남편이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본지 벌써 십수년 째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한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자기 몰래 바람을 피워대고 있다니···.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 최 회장과 머리를 맞대 꾸민 일이긴 하지만 도무지 열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요부인 그녀도 어쨌든 질투심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혼하자는 말은 꺼내봤어?"
-네. 몇 번 해봤지만, 아직까진 그 정도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혹시 피임하는 거 아니지? 애 생기면 생각 바뀔 수도 있다고 했잖아."
-피임은 별도로 안하고 있습니다.
"너 잘 들어. 이혼이 늦어지면 유산 상속도 늦어지고, 그럼 너 역시 국물도 없는 거야. 지금 네가 할 일은 회장님 수발드는 것보다 그 인간을 어떻게든 빨리 꼬드기는 거라고. 알아 들어?"
-···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회장님이 언질 안 했다니까 내가 대신 말해주는 건데 우리 작전을 조금 변경할 거야."
-어떤···.
"그 새끼 변태인 거 너도 알지? 그 새낀 자기 여자가 남한테 빼앗기려고 할 때 가장 흥분하는 스타일이야. 네토라레라는 정신병."
-네, 사모님.
"그러니까 질투를 유발시켜야 너한테 더 애착을 가질 거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니?"
-아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도훈을 꼬셔."
-네?
"이도훈 그 새끼한테 한 번 대줘."
-사, 사모님···.
"그리고 그 새끼한테 슬쩍 흘려. 흔들린다고. 잡아 달라고. 너도 솔직히 또래처럼 젊은 남자가 더 좋다고. 사장님이랑은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고백해."
-사모님 그건···.
"그러면 그 새낀 눈이 뒤집힐 거야. 아직까지 너한테 애정이 남아 있으니 뺏기지 않으려 무슨 짓이든 하겠지. 그때 이혼을 요구하란 말이야."
-정말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요?
"시간을 못 지키건 너야. 왜? 다시 예전의 가난뱅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얼마든지 그렇게 해. 마사지 숍에서 평생 카운터나 보면서 살아 보라고."
-······.
"못하겠지? 사람이란 게 원래 그래. 바닥을 맛본 사람은 다신 밑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법이거든. 그러니까 똑똑히 새겨. 이번 일 실패하면 너는 그대로 해고라는 걸."
-···알겠습니다. 사모님.
"오늘 도훈이 집에 와있어. 어제처럼 무슨 핑계를 대서든 자고 가라고 할 테니까 오늘 중으로 덮쳐."
-그럼 저도 자고 가라고요?
"너 우리 가족들 없을 때 집에서 떡 잘만 쳤잖아. 그 새끼랑.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죄송합니다 사모님. 그땐 어쩔 수 없···.
"됐어.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니까 겁먹지 마. 그 새끼가 덮쳤겠지. 씨발 새끼. 너랑 할 땐 꼴렸니? 잦이 빳빳해 지든?"
-사, 사모님.
씩씩거리던 선희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을 증오하는 만큼 한편으로는 남편의 행동에 질투를 느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남편의 취향에 맞춰 골라 뽑은 민서를 대할 때마다 유난히 흥분하는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들었다.
‘민서는 내가 시키는 데로만 했을 뿐인데···. 내가 왜 얘한테 화를 내지···.’
"민서야."
진탕치는 마음을 진정시킨 선희가 다시 평소의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네, 사모님.
"잘하자. 너가 잘해야 우리 둘 다 행복할 수 있어. 너보고 그 인간이랑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잖아. 너한테 이혼에 대한 책임을 묻지도 않을 거야. 앞으로 평생 일 안하고 살만큼 두둑히 챙겨줄게. 알았지? 우리 잘해야해."
-알고 있습니다, 사모님.
"아버님은 그 모임가면 항상 취해서 오셔. 만약 안 취해도 김기사가 운전할 때 숙취제에 수면제를 조금 탈거야. 그러니까 오늘 어떻게든 도훈이랑 합방을 해. 이해했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아버님 잘 모시고."
-네.
뚝-
전화를 끊은 선희는 한동안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도훈이 탐이 났지만, 민서에게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남편에게 첩을 붙여준 걸로 모자라, 이번엔 도훈까지···.
아내를 돌리는 최민식 만큼이나 자신도 이상성벽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조차도 심연이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평생 변태의 요구에 맞춰오다 보니 자신의 정신마저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두려워 졌다.
‘아니야. 어쨌든 도훈이는 내가 먼저 먹을 거야. 탈탈 털어 알맹이만 쏙 빼고 민서 주는 거니까, 괜찮아.’
선희가 자기 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
선희가 민서와 긴요한 통화를 하는 그 순간.
집으로 달려온 젊은 여성이 신발을 던지다시피 벗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 340. 애자매-4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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