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52화 (332/2,000)

< 334. 애자매-34- >

"민서 씨는 좀··· 이름을 직접 불려보기는 오랜만이라."

"그럼 회사에선 뭐라고 불렸어요?"

"회사에서? 그땐 그냥 정비서라고···."

"누나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우시면 그냥 비서님이라고 부를게요. 정비서님."

"아으, 그렇다고 무슨 님까지 붙여요."

"아무튼 정비서님은 지금 사귀는 사람 없는 거네요?"

"···그렇다고 봐야죠?"

민서가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눈을 마주치면 속내를 들킨다고 생각했던 걸까?

[상간녀 주제에 뻔뻔하군요. 사귀는 사람이 없다니···.]

‘어쩌면 제대로 된 대답일지 모르지.’

[네?]

‘사귀는 사이가 아닐 수도 있잖아. 가령 스폰서라던가.’

[후원을 주고받는 관계말인가요?]

‘그렇지. 따로 용돈을 받든, 아님 회사 내에서 지위를 보장받든. 뭐든 금전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거겠지.’

[그거야 말로 더 막장 아닌가요?]

‘막장이지. 한 쪽은 젊은 여성의 성을 착취하고, 한 쪽은 몸을 판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서 깊은 거래랄까?’

갑자기 눈앞의 민서가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겉보기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행세를 하지만, 실상 미모를 이용한 고급 창녀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나는 계속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상하다. 엄청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누가요? 저요?"

"네. 예쁘시잖아요. 엄청."

칭찬으로 그녀를 추켜 세워본다.

이것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마법.

입 발린 소리란 걸 알면서도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것이 호감 있는 이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예상대로 민서의 귀 밑이 더 빨개졌다.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근데 좀 차 안이 좀 덥지 않아요?"

민서가 황급히 파워 윈도우 버튼을 눌러 운전석 차창을 내렸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전 별로 안 더운데···. 그리고 말 편히 하세요. 저보다 한참 누나시잖아요."

"그래도 회장님 손님인데···."

"그건 어제까지였죠. 저도 이제 누나랑 동등한 입장이에요. 과외로 고용되었잖아요."

"아···."

"그러니까 같은 피고용인끼리 친하게 지내자고요."

"그, 그럴까?"

‘동등한 입장’이란 소리에 민서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 것 같다. 동질감을 주는 단어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근데 뭐하나 여쭤도 돼요?"

"뭔데?"

"사장님 말이에요. 어떤 분이세요?"

"···사장님?"

"네. 어제 같이 술 마셨거든요. 저녁에 집에 가려다 사장님한테 붙잡혀가지고."

"술 많이 좋아 하세요."

"그쵸? 어쩐지 엄청 맥이더라."

최 사장을 언급하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끝내 닫히고 만다.

"제가 보기완 다르게 술이 약하거든요. 두어 잔만 마셔도 완전 인사불성이에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자고 간 거구요."

"아··· 그랬구나."

"암튼 사장님 되게 호탕하신 것 같더라고요."

"음, 뭐 그런 편?"

"아무래도 과외 하는 학생 아버지다 보니까 부담되기도 하고. 회장님은 절 좋게 보시지만, 최 사장님은 또 초면이니까."

"으응."

민서는 최 사장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했다. 불륜관계에 있는 그에 대해 말을 아끼는 눈치다.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면 보통은 아닐 텐데···. 굉장히 조심스럽군.’

[주인님께 들키기 싫은 마음이겠죠.]

‘당연히 그럴 테지. 멀쩡하게 직장인 코스프레 하고 있는데, 스폰녀라곤 밝히지 못할 테니까.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볼까?’

"근데 회장님하곤 성격이 다른 것 같았어요."

"누구? 사장님?"

"네. 부자 사인데도 전혀 안 닮았달까? 회장님은 좀 깐깐하시잖아요. 맞죠? 정비서님은 가까이서 모시니까 잘 알겠네요."

"확실히 보통 분은 아니지, 회장님은."

"근데 어떻게 그 분 비서로 들어가게 된 거에요?"

무심결에 던진 질문에 민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창을 올리며 뜸을 들였다.

"바람 들어오니까 또 춥네. 근데 뭐라고 했어?"

"비서를 하게 된 계기랄까?"

"그냥 취직한 거야. 먹고 살려고."

"아···."

민서는 자꾸 질문을 던지는 내게 역으로 물었다.

"다들 그렇잖아. 먹고 살려고 일하지. 너도 그래서 교사되려는 거 아냐?"

"솔직히···. 네."

"아직 학생이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사회 나와 보니 세상에 쉬운 일이 없더라.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 일찍 하는 게 제일 빠른 길이더라고."

[재밌군요. 실제 나이 마흔이 넘은 주인님께 인생에 대해 조언 하다니.]

‘그러게. 근데 방금 전 좀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말입니까?]

‘비서로 들어간 경위 말이야.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는데···. 확인해 볼 방법이 없을까?’

[싸이코메트리 스킬로 적절한 물건을 찾으면 되는데···. 현재 수중에 없다면 확인하기 어렵겠지요. 아님 간만에 ‘내 귀의 도청장치’를 이용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그게 있지. 속마음을 보는 이어폰.’

[구매하시겠습니까?]

‘오케이.’

[내 귀에 도청장치 아이템을 구매하겠습니다. 잠시 후 지정된 위치로 아이템이 전송됩니다.]

슬쩍 스마트 워치를 보자 아이템의 설명의 띄워져 있었다.

[내 귀에 도청장치]이어폰, 200p

-'너의 목소리가 들려'아이템, 소모품 버전입니다.

-상대의 생각이 카툰 형태로 표시됨.

-사용횟수 5회.

잠시 뒤 바지 주머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나는 운전석에 있던 민서에게 양해를 구했다.

"정비서님. 잠시 여기서 공부 좀 할 수 있을까요?"

"응? 여기서?"

"네. 제가 버스타고 다닐 때 듣는 영어회화 강의가 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요. 안 빼먹고 꼬박꼬박 듣거든요."

공부하는 학생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통학 시간마저 쪼개 공부한다는 내가 대견했는지 민서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거야 얼마든지."

"그럼 잠시 이어폰 좀 꽂을게요."

난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 스피커 단자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어플을 실행시키는 척 뭔가를 꾹꾹 눌렀다. 물론 인터넷 창을 띄워 아무 기사나 클릭한 것에 불과하지만, 운전 중인 민서로서는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아이템은 준비 됐고, 이제 민서를 탐문해 볼까나?’

[질문 횟수가 정해져 있으니 신중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내가 포인트 허투루 쓰는 거 봤어?’

실제론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한참 뭔가를 듣는 듯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나는 문득 생각 난 것처럼 민서에게 물었다.

"참, 비서님 영어 잘하시죠?"

"여, 영어?"

"네. 대기업 입사하려면 토익 엄청 높아야 한다던데? 800점? 900점? 얼마나 되요?"

"아··· 음, 뭐 그 쯤 될거야? 요샌 손 놓은 지 오래라 기억이 잘 안 나네."

(헉! 갑자기 영어 물어보면 어떡하지? 나 토익 신발사이즈라는 거 뽀록날 텐데···. 무조건 기억안난다고 잡아 때야겠다.)

아이템을 실행하자 그녀의 머릿속 생각이 만화처럼 떠올랐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굉장히 신기해 보인다. 역시 천상계의 기술력이란.

‘신발사이즈면 300도 안 된다는 소리네? 어랍쇼? 이거 점점 수상해지는데?’

[그녀가 확실히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좀 더 캐물어야겠어.’

나는 자연스럽게 듣기를 멈춘 것처럼 민서에게 질문했다.

"대단하시네요. 저는 뭐 기업체 취직할 건 아니라 기본만 하고 있어요."

"맞다. 체육 선생님 한 댔잖아."

"네. 그래도 명색이 선생님인데 영어는 쪽팔리지 않을 정도는 해야 되니까. 어차피 저희는 임용시험으로 거의 결정되는 편 이거든요."

"그렇구나."

"근데 입사할 때 막 압박 면접 같은 것도 봤어요? 타과 졸업반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장난 아닌 것 같든데?"

"···뭐. 그런 편이지."

"왠지 비서님은 면접 잘 봤을 것 같아요."

"그런가?"

(아씨, 얘는 자꾸 왜 이런 것만 묻지? 계속 영어 듣기나 할 것이지···. 얼렁뚱땅 넘기자. 피부 미용숍에서 일하는 나를 사모님이 낙하산으로 꽂아줬다는 건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빙고.

역시 그랬군.

[사모님이라면 정선희를 말하는 거겠죠?]

‘웃기지 않냐? 이제 보니 최 사장이 아니라 정선희가 꽂아 줬다는 거잖아? 토익 300도 안 되는 전 피부미용숍 직원을 말이야.’

[확실히 수상쩍네요. 그럼 정선희는 제 발등을 찍은 셈 인가요?]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자기가 낙하산으로 꽂은 어리고 예쁜 여자가 남편이랑 바람이 났어. 게다가 회장 은퇴 이후론 한 집에 살다시피 하고 있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배경을 좀 더 캐봐야 겠는데요?]

초대남을 불러 아내를 돌리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첩을 붙여준 아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이건 단순한 불륜이 아니라 치정이 얽혀진 복잡한 사건이 분명하다.

게다가 가장 미심쩍은 사람은 바로 최 회장.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작금의 상황을 전혀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그는 모든 걸 알면서도 방관하는 것일까, 아니면 거대한 음모를 꾸민 장본인일까? 단순히 자매덮밥을 노리고 시작했던 위업은 진실에 다가갈수록 점점 추악한 냄새를 풍겨왔다.

그리고 그 비밀의 키는 정민서가 아니라, 바로 최 사모가 쥐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나는 점점 이 집안의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학교 다 왔네. 수업하는 곳이 어디야? 거기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에요. 이쯤에서 내릴게요."

"여기서? 강의동 까진 좀 먼데?"

"저는 상관없지만, 정비서 님이 난처하실거 같아서요."

"내가 왜?"

"혹시라도 저 아는 사람들이 여자 친구라고 오해할 수 도 있잖아요."

"여, 여자친구? 으, 음."

민서가 다시 귓불이 빨개졌다.

저럴 거면 그냥 귀에다 빨간 매직을 칠하지 그러냐.

"그, 그래. 불필요한 오해는 안사는 게 좋으니까. 그럼 여기서 내려줄게."

"네. 아침부터 태워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뭘, 같은 피고용인이잖아. 후후."

민서가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돌려주며 싱긋 웃었다.

치열이 고른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미소가 상큼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보면 참으로 괜찮은 아가씬데···. 불륜에 스폰에 더러운 오물통에 발을 담그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차를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살펴가세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민서가 손을 흔들더니 차량을 유턴해 되돌아갔다.

그녀가 말하는 다음이 오늘 저녁이란 걸 알긴 알려나?

"어쭈, 이 작가? 아침 일찍부터 웬 열?"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헤드록을 걸어왔다.

팔이 가는 걸 보니 여자애가 틀림없다.

"누, 누구?"

"누구긴! 하나 뿐인 니 동기지."

"···동기?"

그녀는 아디다스 삼선 츄리닝을 입고 온 오수정이었다.

"야. 얼른 풀어. 남들이 보면 오해한다고."

"쳇. 동기끼리 우정표현도 못하냐?"

"남녀 사이엔 애정표현으로 보이겠지."

"하여간. 작가님이라서 말도 잘하셔."

"근데 왜 자꾸 작가라고 불러?"

"너 요새 소설 쓰잖아. 소설 쓰면 작가지."

"무슨 소리야. 등단을 해야 작가지. 그리고 나 소설 쓰는 거 소문내지마라.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내 말에 수정이 배시시 웃었다.

뭔가 껀 수를 잡은 듯한 표정이다.

"싫은데? 학과에 소문 다 내 버릴 건데?"

"야! 너 진짜 이럴래?"

"흥. 그러게 누가 MT가서 간만 보래? 해주려면 끝까지 해주던가."

수정은 뭐가 오해하고 있다.

사디스트의 밧줄로 묶인 사이의 기억이 소실된 까닭이리라.

[역시 파이팅이 넘치는 군요, 수정양은.]

‘파이팅은 무슨.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나한테 푸는 거겠지.’

[뭐 어쨌든 주인님께 좋은 일 아닙니까? 스킬 포인트도 벌고, 근성가이 패시브로 정력까지 강화되니 일석이조죠.]

‘내가 여자가 없어서 못한 적 있냐? 맘 만 먹으면 학교에서도 일일 오떡도 치겠다.’

[그런데 왜 안하시나요?]

‘아직 애자매 위업이 남아 있잖아. 오늘 밤 거사를 치러야 할 것 같은데 괜히 헛심쓰기 싫다고. 한 번에 하나 씩만 가자.’

[한번에 12명을 돌려 먹던 주인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업적이었고 인마.’

일단은 안달 난 수정을 달래는 게 먼저였다.

"그땐 애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여자애들끼리 한 텐트에서 같이 자고 있는데 어떻게 해?"

"몰래 기어 들어오기라도 해야지. 더 스릴 있었을 텐데."

수정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쉬워 할 필요 없단다. 너 자는 동안 실컷 따줬으니까.

"근데 아침부터 수업이야? 1교시?"

"응."

"어젠 왜 도서관 안왔어 그런데?"

"일 있었어."

"여자 만났구나?"

강의 동으로 향하는 동안 수정과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도 같은 방향이었지 나와 나란히 걸었다.

"여자는 무슨. 알바 섭외 들어와서 면접보러 갔어."

"너 알바하게? 맨날 예습복습 한다더니 그럴 시간도 있어?"

꼬치꼬치 캐묻는 수정에게 자세히 말할 필욘 없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대신 1주일에 한 번만 가는 조건이야."

"에이, 기왕 할 거면 주 2회로 하지. 그럼 월급도 두 배로 받을 텐데. 과외비 받아서 누나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일주일 한번으로 백만원 씩 받는 걸 알면 기절하겠군.’

"그냥 친분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된 거야."

"참, 과외 하기로 했음 벌써 과외비 받은 거 아냐? 과외는 선불이잖아."

"그렇지."

"나 맛난 거 사줘. 흐흐."

"지금?"

"무슨 소리야? 수업 시작하려면 얼마 안 남았는데. 당연히 점심이지. 사 줄 거지?"

억척스럽게 달라붙는 수정을 보니 도무지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밥 한번 사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임용 공부도 잘 알려주는데.

"알았어."

"히히. 약속했다? 물론 맨입으론 얻어먹을 만큼 염치없진 않다고."

"무슨 소리야?"

"디져트는 내가 산다고. 이따 봐!"

< 334. 애자매-3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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