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 애자매-33- >
"곧 식사가 준비될 거예요. 회장님은 무조건 한식만 드시는 데 괜찮죠?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베이컨이나 샌드위치 같은 건 기대하지 말아요."
"얻어먹는 처지에 뭘 가리겠어요.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혹시나 도훈이 까다롭게 굴면 곧바로 쏘아붙이려 했던 민서는 별다른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흥, 몸만 좋은 게 아니라 식성도 좋네.’
"그럼 마저 옷 입고 내려와요."
"저 근데, 커피는···."
"아, 맞다. 자요."
도훈이 커피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자 상체를 가리고 있던 수건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또 다시 조각 같은 그의 몸이 노출되자, 민서가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어쩜···. 보기만 해도 심장 떨려 죽겠네.’
도훈의 몸매는 자신과 내연 관계인 민식과 뚜렷하게 대비되면서 더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흔히 스파이더 형 몸매라고 불리는 올챙이배에 팔다리가 가는 민식과 달리, 도훈은 완벽한 역삼각형 체형에 범처럼 날렵한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울룩불룩한 복근과 두터운 대퇴근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하늘 땅 만큼 비교되는 두 사람.
아마 물건의 차이도 상당할 것이다.
‘아까 텐트 친 걸 보니 거기도 엄청 커 보이던데···. 몸 좋은 애가 물건까지 실해도 되는 거야? 완전 반칙이네.’
객관적으로 민식의 물건 역시 작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길이는 다소 짧지만 상당한 두께를 자랑했다. 뚱뚱한 몸매치곤 비교적 선방한 편이지만, 그렇다 해도 웅장한 도훈의 대물에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민식에겐 없는 젊음.
스물 셋이라는, 육체적으로 최전성기를 달리는 도훈과 50대 중반에 이른 민식 사이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저렇게 어리고 힘 좋은 아이랑 하면 어떤 기분이려나?’
민서가 이제껏 사귀었던 사람은 모두 연상이었다. 남동생이 있던 그녀는, 동생뻘의 남자에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도훈을 처음 보았을 땐 이성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하지만 지켜보면 볼수록 그는 어딘가 달랐다. 분명 동생 또래 밖에 안 되는 나이임에도, 희한하게 연상과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딱히 얼굴이 조숙한 편도 아닌데 어딘지 모를 성숙함이 느껴졌다. 여러
모로 흥미로운 사내였다.
"커피 고마워요, 민서 씨."
커피를 받든 도훈이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도훈의 환한 미소에 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민망해진 그녀가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귀밑까지 달아오른 걸 도훈이 보았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 그럼 늦지 않게 와요. 회장님 기다리는 거 싫어하시니까."
돌아선 민서가 빠르게 말하고는 1층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역시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 한 순간에 민서 양을 매료시키셨군요. 대체 비법이 뭡니까? 정보창도 안 보시고 호감 포인트를 찾아내다니.]
‘아까 우연히 내 몸 보고 군침을 삼키더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민서가 나를 불륜남하고 비교하는 거구나 하고.’
[호오. 완전 매의 눈이신데요?]
‘솔직히 그렇잖아. 최 사장이라는 놈, 돈 많은 거 빼면 별 볼일 없는 꼰대지. 심지어 그가 가진 부마저 최 회장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자신만만하게 입 터는 것에 비하면 수컷으로서 가진 매력은 전무하다는 거야. 벗겨 놓고 보면 나한테 비교가 되겠어?’
[한데 어째서 민서 양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늙은 최 사장과 바람을 피우는 걸까요?]
‘뭐겠어? 다 돈 때문이지. 여잔 남자보다 훨씬 현실적이거든. 경제적 기반을 갖춘 남자에게 느끼는 안정감은 무시 못 하는 법이니까.’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도훈은 씁쓸하게 답했다.
‘전생의 내가 비슷한 처지였잖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괜찮아. 이미 지난 일이야. 아니 끝난 일이지. 어차피 이정우는 이제 없으니.’
[주인님···.]
‘물론 바람난 마누라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어. 그년은 그냥 쌍년이야.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년.’
[맞습니다. 욕먹어도 쌉니다. 그런 여자는.]
‘솔직히 돈만 보고 결혼한 여자가 나에게 정이나 있었겠어? 거기다 좆까지 작았으니 제 나름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겠지. 대물이 되고 나서 확실히 깨달았어. 여자들이 섹스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는걸. 잘생긴 남자에게 얼마나 쉽게 몸을 허락하는지도. 솔직
히 이정우는 오쟁이를 져도 할 말 없는 놈이었지.’
[그건 결코 주인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연히 내 잘못 아니지. 작게 태어난 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굳이 따지자면 부모님 잘못이지. 하하, 방금 건 농담이야. 우리 부모님은 그래도 비상한 머리를 물려 주셨잖아. 그게 지능에 몰빵된 게 문제였지만.’
[흐음···.]
‘이젠 이정우라는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어. 난 이도훈이야. 아무거나 잘 먹는 이도훈. 그게 음식이 아니라 여자를 의미 한다는 걸 민서가 알아챘는지 모르겠군.’
[오,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으신 겁니까?]
‘그냥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네 말마따나 헌법에서도 위헌판결을 받은 불륜 때문에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 위업이 걸려있다면 상대가 어떻든 상관없어. 불륜녀라면 더 환영이지. 그런 애들은 좆방망이로 흠씬 두들겨줘야 해.
어디서 감히 남의 가정을 파탄 내려고?’
[그렇다면 정선희도···.]
‘아니. 말했다시피 업적이 걸려있을 때만이야. 굳이 정선희를 따먹고 싶진 않아. 나에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잖아?’
[그래도 매력 있지 않으십니까? 애자매의 장점을 모두 섞어 놓은 희대의 요부인걸요.]
‘땡긴다고 다 먹고 다니면 발정난 개랑 다를 게 뭐야? 난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을 거야. 정선희는 아냐.’
[그래도 주인님이 생각을 고치셔서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바뀌는 건 없어. 여전히 임자 있는 여잘 건드리고픈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위업과 미션이 걸릴 때면 이제 나도 망설이지 않을 거야. 내가 당했기 때문에 갚아주겠다는 저열한 복수심이 아냐. 플레이어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지.’
[훌륭합니다.]
옷을 모두 갈아입은 도훈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때마침 민서가 회장의 휠체어를 끌고 오고 있었다.
"도훈 군. 좋은 아침이구만."
"안녕히 주무셨어요?"
"집에서 잤다는 소식을 오늘 아침에야 접했다네. 내 그럴 줄 알았으면 일찍 잠드는 게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는걸요."
"하하, 그래도 손님 대접은 제대로 한 것 같아 다행이구만. 앉게. 차린 건 얼마 없네만, 드셔보시게."
"차린 게 없다니요, 완전 진수성찬인데."
결코 입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한정식 풀코스에 가까운 요리가 깔린 식탁을 보면, 누구나 도훈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부잣집 아니랄까봐 아침부터 상다리가 휘어지는구나.’
도훈이 착석하자 최 회장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도훈 군은 제때 아침은 챙겨 먹는 편인가?"
"아니요. 혼자 살다 보니 거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손녀들하고 비슷하군."
"헌데 다른 가족 분들은 안 오시나요?"
"이 시간에는 항상 혼자 먹는다네. 현업에 종사할 땐 이보다 더 일찍 먹었지. 오너끼리 조찬모임이 있었거든."
"조찬···모임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사장이나 회장이 아무 일도 안하고 논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의 말씀이야. 새벽 6시 조찬 모임에 나가 매일 각계 전문가들을 불러 아침 수업을 들었다네. 환갑이 넘은 늙은이들
끼리 말이야."
"아···."
"최고 결정자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면 하루아침에도 수십억의 손해를 볼 수 있어.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법이지. 내 결정 하나에 직원들의 명줄이 달렸으니까. 이것 참,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먼. 늙으면 잔소리만 늘어서는
···"
"아닙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식사를 이어가는데 회장 옆에 기립해 있던 민서가 스케줄을 알려왔다.
"회장님, 오전에 자서전 집필 관련하여 인터뷰가 있습니다. 창업 시기의 역경과 그 극복과정을 중심으로 여쭙겠다고 작가 분께서 알려오셨습니다. 오후에는 라이온스 클럽에서 자선 행사 관련해···."
"그건 정양이 알아서 해."
"네?"
"돈 몇 푼 쥐어주고 보내란 말이야. 또?"
"네, 이어서···."
민서는 식사 중에 한참 회장의 하루 스케줄을 읊었다. 회장은 밥을 떠먹으면서도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첨언을 하거나, 곧바로 수정사항을 지시했다. 민서는 들고 있던 수첩에 빠르게 받아 적으며 회장의 말을 일일이 기록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면서 저 정도 스케줄을 소화하다니··· 노익장이 대단하군. 하긴 저렇게 부지런하니 이만한 기업을 이뤘겠지만.’
[사장이라던 아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군요.]
‘최민식? 그 놈은 이미 텄어. 내가 회장이라면 절대 아들한테는 안 물려주고 싶을 거야.’
[외동아들이니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런 식으로 2세, 3세까지 이어지는 와중에 회사에 망조가 드는 거야.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재벌들의 고질적인 문제랄까.’
도훈이 말없이 밥을 먹고 있자, 최 회장이 그를 챙겼다.
"이거 참,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를 범했구먼."
"아닙니다."
"도훈 군이 가족같이 편해서 말일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자네가 우리 가족이 된다면 참 좋겠는데···. 어디, 손녀들 중에 마음에 드는 아이는 없던가?"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어제 처음 본 사이라."
이미 애자매 중 둘이나 공략해낸 도훈이지만, 회장 앞에선 순진한 척 연기를 했다. 그러자 회장이 뜬금없이 물었다.
"혹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건 아닌가?"
"네?"
"이쪽에 정양이라든가 말이네."
"···예?"
도훈은 도무지 회장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왜 난데없이 정비서가 튀어 나왔을까? 당황하긴 민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 회장님."
"어제부터 생각했는데 두 사람 무척 잘 어울리더구먼. 어차피 정양도 지금 사귀는 남자 없지 않나?"
"그, 그렇긴 한데. 도훈군은 이제 대학생이고···."
"대학생이 어때서? 나이가 중한가?"
회장은 민서의 대꾸를 일축하더니 다시 도훈을 향해 말했다.
"솔직히 말해면 변변찮은 우리 손녀들보다 여기 정양이 훨씬 훌륭한 아가씨라네. 괜히 내 비서라서 하는 말은 아니고."
도훈은 자꾸 민서를 엮으려는 회장에게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수상한데? 왜 갑자기 불똥이 이리로 튀는 거지? 회장의 꿍꿍이가 대체 뭘까?’
[그러게 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손녀사위를 삼고 싶다던 양반이 난데없이 자기 비서를···.]
‘그건 처음부터 거짓말 같았어. 아무리 생명을 구해줬다고 대뜸 자기 손녀를 주려는 사람이 어딨어? 하물며 계산도 빠른 늙은인데.’
"허허. 정양도 썩 나쁘진 않나 보구만. 오랜만에 귀여운 얼굴이 됐어."
"회, 회장님 저는···."
"우스갯소리 한 거야. 아침에 등교해야 한댔나?"
"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9시부터 바로 수업이 있어서요."
"그러시구만. 정양아, 김 기사 대신 도훈 군 좀 모셔야 드려라."
"알겠습니다. 바로 차량 준비 시키겠습니다."
정비서는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듯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보며 최 회장이 다시 물었다.
"어때? 하는 짓이 제법 귀엽지 않나? 얼굴도 곱고 영특한 아이라네."
"자꾸 그러시니 부담스럽습니다."
"아아, 부담같은 건 갖지 말게. 난 그냥 두 사람이 잘 어울려서 한 말이니."
거듭되는 최 회장의 밀어주기에 도훈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확실히 뭔가 있어. 정보 창이라도 열어볼까?’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지금의 정보 창 스킬로는 공략과 상관없는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겁니다. 괜한 짓입니다.]
‘흐음. 분명 의도가 있는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식사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막내 과외 하러 올적에도 배고프면 언제든 사양말고 말하시게."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도훈이 예의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밖으로 나갔다. 저택 주차장에 민서가 차를 대기 시켜 놓고 있었다. 도훈이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혹시 최 회장이 자식과 불륜관계인 민서를 떼놓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걸까?’
[호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일단 민서를 캐보면 뭔가 나올지도.’
***
"고마워요."
"뭐가요?"
"아침 일찍부터 저 데려다 주셔서요."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걸요. 그리고 공짜 아니에요."
"네?"
"저도 월급 받고 하는 거예요."
"아하."
단 둘이 차를 타고 가는데도 민서는 어제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어색함이 사라진 건 오늘 아침의 일 때문일까? 슬쩍 찔러봐야겠다.
"근데 진짜 사귀는 사람 없어요?"
"예? 뭐라고요?"
민서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지만, 나는 한 번 더 또박또박 물었다.
"누나 진짜 남자친구 없냐고요. 아까 회장님이 물어 보실 때 그랬잖아요."
"누, 누나라니···."
운전대를 잡은 민서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하면 얼굴에 확 티가 나는 구나. 저렇게 솔직한 사람이 어떻게 사장과 몰래 불륜을 저지르는 것일까? 들켜도 수십 번 들켰겠는데···.
"저보다 누나 맞지 않아요?"
"마, 맞긴 한데 호칭을 갑자기 바꾸니까 적응이 안 되서."
"그럼 그냥 민서씨 라고 부를까요?"
< 333. 애자매-3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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