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50화 (330/2,000)

< 332. 애자매-32- >

다시 문밖에서 정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건 문 앞에 놓고 가요. 씻는 건 2층 샤워실 이용하세요."

"저기, 잠시 만요."

도훈이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방문을 열자 이른 아침부터 풀 메이크업으로 치장한 나온 민서가 서 있었다. 프릴이 들어간 아이보리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 치마가 산뜻한 느낌이 들게 했다.

‘휘유, 아침부터 숨 막히는 고만.’

"왜요?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죄송한데 제가 잠이 덜 깨서 모닝커피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을지···."

도훈의 부탁이 생뚱맞다고 생각했는지 민서가 모처럼 피식-웃었다.

도훈은 민서의 미소가 불륜녀 답지 않게 새초롬하다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아줌마들 아침 차리느라 바쁘니까 제가 직접 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물러서려던 민서는 무심결에 시선을 아래로 돌리다 발딱 일어선 도훈의 바지춤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설마 지금 텐트 친 거야?’

건장한 청년이라면 당연한 생리 현상이자만 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흠흠! 아무리 회장님 손님이지만··· 신경 좀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예? 무슨?"

"아니에요. 그럼 씻고 계세요."

민서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1층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도훈이 그녀의 굴곡진 뒷태를 보며 씩- 웃었다.

[방금 일부러 그러신 거죠?]

‘말이라고.’

[왜요? 불륜녀라고 더럽다 하실 땐 언제고···.]

‘그땐 그때고, 민서에게 호감을 사 놓아야 업적 달성에 유리할 것 같아서 말이야.’

[텐트 친 바지를 보고 호감을 느낄 여성이 있다고요?]

‘글쎄···. 왠지 그녀라면 좋아할 것 같았거든.’

[이것도 혹시 플레이어의 육감인가요?]

‘뭐, 그렇다고 해두지. 어쨌든 반응도 나쁘진 않은 것 같고. 일단 씻자.’

도훈은 수건을 들고 2층 샤워실로 향했다.

한편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던 민서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뭐야, 쟤는···. 사람 민망하게서리.’

그녀는 어젯밤 갑작스런 조기출근 통보를 받고 새벽부터 일어나 단장했다. 내용인즉슨, 김 기사 대신 도훈을 통학시키라는 것. 김 기사는 아침에 최 사장을 출근 시켜야 하니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소리에 민서는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 아침 일찍부터 지 학교 데려다 주려고 생고생인고만···.’

민서는 살짝 짜증이 일면서도,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딱히 도훈이 변태 같다는 생각보다 참으로 건강한 청년이구나 하는 마음 정도였다.

주방에 들른 민서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며 생각했다.

‘느낌이 쌔 하단 말이지? 어제부터 자꾸 나를 도훈이랑 엮으려고 느낌은 기분 탓일까?’

어제 저녁 늦게 연락을 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정선희 였다.

하잘 것 없는 그녀를 발탁해 지금 위치까지 올려준 장본인.

따라서 민서에겐 선희의 명령이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키면 뭐든 해야 하고, 거부란 있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자기가 불러놓고 늦잠이나 자고 있다니···.’

집으로 출근해 정선희를 찾았으나 그녀는 완전히 뻗어 있었다. 주방 이모에게 듣기론 새벽까지 큰 딸 희애와 술을 마시느라 인사불성 상태라고 했다. 조식도 차리지 말라 했다나?

결국 민서는 최 회장에게 해당 내용을 대신 전달했고, 다른 가족보다 일찍 조식을 드는 최 회장이 도훈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왠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둘 다.’

선희에 의해 발탁 된 민서는 최 회장의 개인비서 임무를 수행했다. 사실 말이 비서지, 거동이 불편한 최 회장의 수발을 드는 몸종 역할이었다.

그렇지만 학벌도 변변찮고, 가난한 집안의 실질적 가장 역할을 맡고 있던 민서에겐 그마저도 천금 같은 기회였다. 최선을 다해 회장을 섬기던 어느 날, 그녀를 발탁했던 정선희-회사 사람들은 그녀를 최사모라고 불렸다.-가 그녀를 따로 불러 물었다.

-너, 돈 많이 벌고 싶지?

-네?

-지금 월급 받아서가지고 언제 너네 집 빚 갚으려고? 동생 운동한다며? 목돈 필요하지 않니?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안 돼 잠시 피부미용 샵 알바를 전전하던 자신에게 명함을 주고 간 날에도 선희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런데서 일하긴 아까운 얼굴이네···. 시간 되면 나랑 얘기 좀 할래요? 좋은 일자리 하나 소개해 줄 까 하는데.

선희가 제안한 일자리란 바로 대기업의 비서였다.

화려한 스팩을 가진 명문대 출신들마저 들어가려고 줄을 선다는 자리.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한 회사 빌딩이 마음에 쏙 들었다.

출근 카드를 목에 걸치고 지나가면 사람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일부러 커피숍에 갈 때도 패용증을 착용할 정도였다.

낙하산이라는 동료들의 수군거림과 비아냥거림에도 꿋꿋이 버텼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코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월급이 무려 5배나 뛰었다. 돈이 없어 운동을 포기하려던 동생에게 힘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쪼그라든 집구석에 한줄기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민서는 바보가 아니었다.

예쁘장한 외모 말곤 아무것도 보잘 것 없던 자신에게, 선희가 이런 기회를 준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저보고 회장님을···.

다 늙어빠진 회장.

말이 좋아 대기업 오너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에 불과했다.

민서는 선희의 비밀스런 요구가 회장의 몸 수발을 드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최근에도 국내 유수 대기업 회장의 은밀한 성생활이 기사화 된 적 있듯이,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찾는 동물이었다. 아무리 늙어도 사내는 수컷이다.

그러나 선희의 제안은 전혀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아니, 내 남편을 유혹해 줬으면 하는데.

-네? 사, 사모님···.

충격적인 제안.

해머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았다.

세상 천지에 자기 남편에게 첩을 붙이려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할 말을 잃은 그녀에게 선희가 말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줘. 절대 섭섭지 않을거야. 회장님도 묵인하실 거고.

애초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선희의 지원과, 최 회장의 동조 아래 민서는 손쉽게 민식과 비밀스러운 애인 관계를 맺었다. 특히 최 회장이 건강 문제로 일선에서 물러난 후 집안에 머무르는 일이 잦아지면서, 민식은 더더욱 쉽게 그녀를 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민서는 민식을 딱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심으로 반하거나,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남의 가정사에 너무 깊숙이 끼어드는 게 두려웠다.

최 사모의 적극적인 부추김이 있었다 한들, 결국 그녀는 임자 있는 남편을 꾀어 바람을 피우는 나쁜 여자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 이유조차, 지금의 일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다분히 이기적인 목적.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드는 날이 잦아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최 회장의 유산 상속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슬슬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말은 않고 있지만 조만간 선희가 자신을 한 번 더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고 멍 때리고 있니? 커피 다 내려놓고선?"

"네? 아, 네."

아침을 차리던 주방이모가 멀뚱히 서있던 자신을 깨웠다. 민서가 황망해하며 트레이에 커피 잔을 올렸다.

"얼레? 회장님이 커피도 드셔?"

"아뇨."

"그럼 누구 갖다 주려고?"

"2층 손님요."

"아···. 아침 같이 먹는다는 그 총각?"

"네."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길레. 혹시 만나면 물어봐줘. 아침 한식으로 차릴 건데 괜찮겠냐고."

"아유, 뭘 또 물어요. 호텔 메인 쉐프까지 하셨으면서···. 그냥 주는 대로 처먹으라고 할게요."

"호호, 난 정비서 깍쟁이 같지 않아서 좋더라?"

"네?"

"아니 먹물 많이 묻은 사람답지 않게 털털하다고. 그래도 회장님 비선데 좋은 대학 나왔을 거 아냐?"

"하하, 그런가요?"

민서는 애써 난처한 표정을 숨기며 주방에서 물러났다. 딴에는 자연스럽게 넘긴다고 했는데 괜히 자격지심이 들며 뒤통수가 따가 왔다.

이 집에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굉장히 유능한 재원으로 알고 있다.

실상은 여기서 일하는 사람 중 자신이 가장 못난 사람일 것이다. 하다못해 차를 모는 김 기사조차 전직 대통령 경호팀에 근무했던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평범해 보이는 주방 이모는 5성급 호텔 쉐프 출신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민서는 이 자리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고액의 연봉을 받고, 좋은 옷을 입고,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스스로도 대단해 지는 착각이 들었다. 과거야 어찌됐던, 이제 자신은 국내 100대 기업 오너의 개인 비서였다.

‘정신 차려, 정민서. 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민서가 각오를 다지며 도훈이 있는 2층으로 올랐다.

회장의 의중이 무엇이건, 선희가 무슨 흉악한 음모를 꾸미건 상관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비겁하지만, 그것이 정민서가 처한 현실이었다.

***

"흐음, 살짝 가슴 근육이 빠진 것 같기도?"

전신 거울로 보는 몸매가 어딘가 미흡해 보였다. 처음 몸을 승계 받았을 때의 조각 같던 몸매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그럴 수밖에요. 사실 전주인은 운동 중독에 가까웠거든요. 헬스장도 다니다 말다 해버리시니···. 정확한 근손실률을 측정해 드릴까요?]

‘그게 가능해?, 한 번 해줘.’

스마트워치에 -신체 스캔 중- 문구가 떠올랐다.

잠시 후 로시가 말했다.

[처음 몸을 받은 3개월 전과 비교하니 1.7% 정도의 근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대흉근의 손실률이 가장 많네요.]

‘그래? 몸무게는 거의 그대론 던데?’

[그렇다면 더 문제죠. 근육이 빠진 만큼 지방이 꼈다는 소리니까요.]

‘하아, 이게 어떻게 만든 몸인데···.’

[어떻게라뇨? 전 주인이 열심히 키워놓은 몸을 날름 했을 뿐이면서.]

로시의 비꼬는 말에 순간 짜증이 났다.

‘야! 너 아침부터 시비 털래?’

[아뇨.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운동에도 좀 신경을 쓰시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기왕 좋은 몸을 받아놓고 방치하다니···. 전 주인께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난 그냥 학교에서 운동하는 걸로 충분할 줄 알았지.’

[부족합니다. 헬스 근육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부위를 자극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 운동을 쉬면 금세 빠져버리거든요.]

‘근데 헬스장 다니려고 해도 시간이 나야 말이지. 공부도 해야 되고 여자도 만나야 되고···. 아, 운동 생각하니 갑자기 송미나 따 먹고 싶네. 요새는 왜 연락이 뜸하지? 뭔 일 있나?’

[그러고 보니 송미나 양에게서 습득한 보디빌딩 적성이 있지 않습니까? 평소 맨몸운동만 틈틈이 해줘도 유지는 충분할 겁니다.]

아, 그게 있었지.

운동적성.

무의식 중 발현되는 나의 사기 스킬.

배구를 하면 나도 모르게 스파이크 점프를 하고 있고, 무심결에 차는 발차기마저 노련한 유단자의 실력을 발휘한다. 어제 보니 단순한 발소리마저 발레 하듯 소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송미나의 보디빌딩 적성은 어떤식으로 적용될까?

샤워를 마친 나는 맨몸으로 화장실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 펴기 동작을 취해 보았다. 단순한 맨몸 운동같지만, 생각외로 다양한 부위의 근육이 사용되는 전신운동에 가깝다.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엎드리자 본능적으로 자세가 잡혔다.

완벽한 팔각도, 최적의 움직임.

‘오호, 이런 것이군? 몸풀기로 서른 개만 땡겨 볼까?’

오랜만에 가슴근육이 뻐근해 지는 느낌이 좋았다. 특히 송미나에게서 습득한 보디빌딩 적성이 발현되면서, 자극이 필요한 부위에 꼭 맞는 자세가 취해졌다.

팔굽혀 펴기를 마치고 다시 일어서 거울을 보니 펌핑 된 가슴근육이 빠빵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덩달아 자극을 받았는지 복근도 울퉁불퉁 식스팩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햐, 정말 몸매하나는 기똥차구나. 멋있다 이도훈."

[명심하십시오. 유지 관리,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쉬운 길이라는 것을요.]

‘오케이. 앞으론 틈틈히 해야겠어.’

기분이 좋아진 나는 팬티만 입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밖으로 나왔다. 순간적으로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착각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어머나!"

갑작스러운 여자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여기 최 회장 집이였지?’

앞을 보니 쟁반에 커피를 들고 온 정민서가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뭐, 뭐에요! 정말, 제가 그렇게 신경 좀 써달라고 하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제 집인 줄 착각해서···."

"어, 얼른 가리던가 해요."

도대체 뭘 가리라는 걸까?

나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팬티 위를 둘렀다.

그러자 민서가 다시 지적했다.

"아, 아니 그 위에요."

"아···."

수건을 들어 상체를 가려 보았지만, 워낙에 덩치가 좋은 탓에 한 번에 가려지질 않았다.민서가 얼굴이 뻘게진 체로 커피를 내밀었다.

"바, 받아요."

"네. 감사합니다."

***

커피잔을 건네는 민서의 손이 파르라니 떨렸다.

남자의 벗은 몸을 처음 본것도 아닌데, 조각같은 그의 몸매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뭐, 뭐야 진짜. 왜 저렇게 멋있는 거야 쟤는. 얼굴만 잘생긴게 아니라 몸매가 무슨···'

도훈을 보는 민서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

< 332. 애자매-3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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