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애자매-25- >
***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번화가의 한 술집.
화사하게 치장한 여대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난 그만 들어가 볼게."
"수애, 벌써 가?"
"클럽 안 갈 거야? 낼 수업 다 오후라면서?"
친구들이 붙잡았지만, 수애는 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 컨디션 영 별로네. 생리할 때가 다가와서 그런가."
"아···. 클럽은 3vs3이 딱인데."
"계집애. 생리 직전이 더 땡기는 거 몰라? 남자들이 귀신같이 알고선 더 달려든다니까?"
친구의 부추김에 수애는 울컥 짜증이 났다.
"야. 내가 그런 거 싫어한다고 했지? 난 그냥 춤만 추러 가는 거야."
"아, 알았어.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그래. 수애야. 몸 안 좋으면 먼저 가도 돼. 우린 다른 애 불러서 놀게."
얇은 코트를 걸친 수애가 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고 있는 의상이며 소품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여대생들은 절대 살 수 없는 값비싼 명품들이었다.
"나 먼저 간다."
"응. 조심히 가."
"다음에 봐."
수애가 술집을 나가자 둘만 남게 된 친구들이 곧바로 호박씨를 까기 시작했다.
"씨바, 완전 왕재수라니까? 들었냐? 그냥 춤만 추러 가는 거라니까아?"
한 친구가 수애의 목소리를 모사하며 비꼬았다.
다른 친구 역시 동조했다.
"저거 다 내숭이야. 쌍년. 얼굴 반반해서 헌팅 잘 들어 올까 봐 끼워줬더니, 지 없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못하는 줄 알아."
"그러게. 그러면서 남자들이 번호 딸라치면 겁나 도도하게 째려보잖아. 지가 무슨 공주야?"
"엄밀히 말하면 공주긴 하지. 우리 같은 서민들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잘사니까."
"듣고 보니 더 재수 없네? 에잇, 술이나 푸자. 오늘은 집에 가기 싫다."
"어머, 나도 그런데!"
두 사람은 꺄르르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한편 술집 밖으로 나온 수애는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거리로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저기···."
수애가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누구세요?"
"실례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너무 아름다우···."
수애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대로 남자를 지나쳐 버렸다.
뻘줌해진 남자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와, 씨 겨우 용기 내서 말 걸었더니 엄청 도도하네."
숨어서 지켜보던 다른 친구들이 그를 놀렸다.
"푸하하. 이 새끼 까인 거 봤냐? 존나 웃겨 대박!"
"인마, 사이즈 딱 보니까 텐프로 다니는 애 같던데 우리 같은 일반인을 상대나 해 주겠냐? 쟤 가랑이 벌리려면 하룻밤, 백 만원도 모자랄 걸?"
"근데 예쁘긴 겁나 예쁘다. 살면서 저런 미인은 처음이야. 나 완전 연예인인 줄 알았잖어."
"쩝. 예쁘면 뭘 해? 어차피 오르지도 못할 나문데. 우린 그냥 처진 시래기 같은 여자애들이나 열나게 보빨해야 겨우 한번 먹을까 말까야. 주제 파악하자."
"그건 그래."
"가즈아! 시래기 주우러!"
헌팅 하는 남자를 쌩하니 지나친 수애가 이마를 찡그렸다. 살짝 주름진 미간마저 그녀의 아름다움을 어찌하지 못했다.
‘싫다, 정말. 시내 나올 때마다 저런 날파리 같은 애들이 들러붙네.’
수애는 그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그녀는 오늘 친구들과 클럽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두 친구는 학과에서도 잘 놀기로 유명한 소위 날라리들.
그녀는 졸업반이 다 되어서 클럽이란 곳을 처음 갔다. 그마저도 안 간다고 한사코 거부하는 그녀를 두 친구가 겨우 설득해 데려간 것이었다.
태어나 처음 간 클럽은 무척 재밌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조명.
심장까지 울려대는 우퍼.
술에 취해 신나게 춤을 추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가 쫙 풀렸다.
물론 두 친구가 클럽을 가는 목적은 달랐다.
12시가 통금인 수애가 귀가하고 나면, 두 사람은 어느새 연락처를 주고받은 남자를 옆에 끼고 2차를 나갔다. 들리는 소문에 몇 차를 이동하더라도 마지막 장소는 꼭 모텔이라 했다.
수애는 그게 싫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대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클럽을 혼자 입장할 순 없으니 목적이 다른 친구일지언정 잠시 마나 동료가 되었던 것이다.
‘한참 벼르던 날이었는데···.’
오늘을 위해 수애는 한동안 일찍 귀가했다.
12시가 통금이라지만, 매번 늦게 들어갔다간 통금이 당겨질지도 몰랐다. 자신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무척 엄격했다.
물론 민식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큰 언니의 문란한 유학 생활이 들통난 뒤, 멀쩡히 어학연수를 하던 자신까지 강제 귀국 당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 날, 아버지는 이제부터 저녁 10시까지 무조건 집에 들어오라며 엄포를 놓았다. 지키지 않으면 집에서 용돈을 끊어 버리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던 것이 대학 3학년이 되자 11시로 연장되었고, 졸업반이 다 되어서야 12시로 늘었다. 친구들은 항상 일찍 집에 가는 그녀에게 21세기 신데렐라라며 놀렸다.
‘신데렐라는 무슨···. 그냥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지.’
택시 승강장에는 모범 택시 뿐이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택시에 올라 행선지를 밝혔다.
"아저씨, 한남동이요."
친절한 기사가 가벼운 안부 인사를 건넸다, 시크한 표정으로 차창을 응시하는 그녀를 보더니 이내 말 걸기를 멈추었다.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거지?’
서울의 밤거린 늘 불야성이었다.
1년 내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을 뿜었다. 술에 취한 젊은이들은 쌀쌀한 저녁 날씨에도 시끌벅적 웃으며 몰려다녔다.
무엇이 저리도 즐거운 걸까?
수애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눈에 띄게 예쁜 얼굴과 특유의 차가운 인상 덕에 어느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간혹 누군가 용기를 내 다가오면, 그녀는 늘 방어적으로 응대했다.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은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지만, 남자들은 그것을 단호한 거절이라고만 여겼다.
누구보다 인기가 많을 것 같지만, 그녀는 늘 혼자였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풍요 속의 빈곤.
그녀의 처지를 정확히 대변하는 말이었다.
‘근데 그 남잔 대체 뭐야?’
불빛에 반사된 차장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투영되었다.
훈훈한 외모, 듬직한 체격.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자신감 넘치는 표정까지.
그는 어딘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날 것 하나 없는 남자였지만, 자신에게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눈도 못 마주치던 남자들만 상대하던 수애에게, 그것은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쥐뿔도 잘난 것도 없으면서.’
그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은 늘 있었다. 그들 또한 수애에게 접근했지만, 그녀의 배경을 알고,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
아이돌처럼 예쁜 얼굴도 모자라, 대기업의 사장 딸이라는 엄청난 뒷배가 사내들의 기를 꺾었다.
열 번 찍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그녀.
나무에 비유하자면 그녀는 수령 300년 된 메타세콰이어였다. 10번 찍어 봐야 기스조차 안 난다.
"···지가 뭔데 날 똑바로 쳐다 보는데?"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운전에 집중하던 기사가 수애에게 물었다.
"네, 손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 아니에요. 저기 사거리에서 우회전요."
"네."
수애는 마침내 불쾌한 기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생리가 다가오면서 겪는 생리 전 증후군도 아니, 자신을 가식적으로 대하는 친구들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새롭게 막내동생의 과외를 맡게 된 도훈이라는 청년의 태도 때문이었다.
‘···묘하게 신경 쓰이잖아. 그 사람?’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네. 만오천원입니다, 오만원 받았습니다."
"잔돈은 괜찮아요."
"네?"
"그냥 가지세요."
쿵-
수애가 택시 문을 닫고 저택의 현관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어마어마한 저택의 규모를 보고서야 납득 할 수 있었다.
"이야, 저런 집에 사니까 오만원은 돈도 아니겠구나."
택시 기사가 운 좋게 받은 팁에 감사하며 차량을 출발시켰다.
***
집으로 들어온 수애는 거실에 있는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올렸다.
"저 왔어요."
그러나 어찌 된 일이지 항상 반갑게 맞아주던 아버지 민식이 그녀의 인사를 대충 받았다.
"어, 늦었구나, 수애야. 그러니까 말이지, 한 번은 내가 이탈리아로 출장 갔을 땐데···."
그녀의 아버지 민식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녁 10시가 넘은 것을 재차 확인한 수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시간까지 무슨 손님이람?’
그녀가 서 있는 위치에선 맞은편에 앉은 손님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문득 궁금증이 든 그녀가 굳이 거실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헙!"
수애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는 바로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사내, 이도훈이었던 것이다.
술이 되었는지 얼굴이 불콰해진 도훈이 돌처럼 굳은 수애를 향해 씽긋 눈인사를 했다.
‘아니, 저녁만 먹고 간다는 사람이 무슨 지금까지···.’
수애는 도훈의 눈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 주방에서 과일을 내오던 선희가 수애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수애 왔구나? 오늘 좀 늦는다더니 일찍 왔네?"
"친구들하고 바로 헤어졌어요. 저 잘게요, 엄마."
수애는 소파에 앉은 도훈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희가 그런 수애를 붙잡았다.
"얘, 수애야. 가는 길에 2층 손님방 이부자리 좀 펴줄 수 있니?"
"손님방이요?"
"응, 엄마가 좀 있다 하려 했는데 바로 네 옆방이잖니. 여기 도훈 학생이 오늘 밤 우리 집서 자고 갈 것 같아서."
수애는 쌀쌀맞은 성격이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은 착실히 듣는 아이였다. 특히 자신과 얼굴이 닮은 엄마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
"알았어요."
이층으로 올라가던 수애는 계단 아래로 도훈의 모습을 또 다시 훔쳐보았다. 그러자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도훈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흐익!’
시선이 마주 지차 놀란 수애가 후다닥 2층으로 뛰어갔다.
왜 그렇게 도훈을 의식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뭐냐고 쟤는···."
괜스레 도훈에게 짜증을 부린 수애는 2층에 있는 동생의 공부방을 노크했다.
똑똑-
"미애야 공부하고 있니?"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자 조명이 꺼져 있었다.
"제 방으로 돌아가 자나 보네."
본래 최 회장의 대저택에서 2층에 방을 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동생인 미애는 손님방 하나를 공부방으로 개조해 사용하는 중이었다.
사실 자신의 방도 1층에 있었으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수애는, 홀로 짐을 싸 들고 2층으로 방을 옮겼다.
"걔는 뭔데 우리 집서 자고 가는 건데?"
수애가 투덜거리며 평소 쓰이지 않는 손님방 문을 열었다.
저택이 워낙 넓다 보니 2층에 게스트 룸만 3개였다.
그중 하나가 미애의 공부방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손님방이 오늘 도훅이 묵고 갈 방이다.
"아씨, 짜증나. 아줌마들 있을 때 말했으면 미리미리 준비해 뒀을 거 아냐. 변덕쟁이도 아니고."
생각할수록 화가 점점 치미는 수애였다. 하지만 자신이 하지 않으면 어차피 엄마가 해야 할 일이다.
수능 공부 덕에 생활 리듬이 일정한 막내는 이미 잘 시간이었고, 맏언니 희애는 엄마가 부탁하건 말건 콧방귀도 끼지 않는 성격이다.
이불장에서 솜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펼치던 수애는 문득 자신의 방과 손님방이 몹시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그 자식 때문에 못 할지도···.’
사실 수애가 2층으로 방을 옮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소 시크한 차도녀의 모습을 보이던 그녀에게 ‘자위 중독’이라는 엽기적인 비밀이 있었던 것.
지금도 그녀의 침대칸 아래 공간에는 스무 가지가 넘는 수많은 자위기구가 꼭꼭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자위를 하다 절정에 치달으면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신음을 쏟아내는 버릇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다른 가족이 들을까봐 2층으로 이사한 것이었다.
평소 예민한 성격의 수애 였기에, 다들 조용한 데서 자려나 보다 했다. 물론 그녀의 맏언니 희애는 뭔가를 아는 사람처럼 실실 쪼갰지만.
침대 머리맡에 베개를 정리하던 수애는 불쑥 술집에서 친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계집애. 생리 직전이 더 땡기는 거 몰라?
"흥, 누가 그걸 모르는 줄 알고."
그녀는 일기 쓰듯 매일 같이 자위를 했지만, 특히 생리가 다가올 때면 더욱 성욕이 치솟았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아랫배에 아릿한 느낌이 들 때면, 보유한 자위기구 중에서도 가장 큰놈으로 해야지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밤 도훈이 이 방에서 자고 간다는 것이다.
"하여간 도움 일도 안 돼."
이부자리 정리를 마친 수애는 문득 침대에 눕는 도훈의 모습을 상상했다. 팬티 바람으로 쿨쿨 쓰러져 있는 도훈.
그 속에 든 양물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달았다.
‘하필 땡기는 날이라 그런지 이상한 생각이···.’
수애는 도훈이 잘 침대에 몸을 누웠다.
그의 맨살이 닿을 이불에 피부를 문지르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마치 침대에 도훈이 누워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 325. 애자매-2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