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42화 (322/2,000)

< 324. 애자매-24- >

***

옷을 갈아입은 도훈이 2층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 소파에 앉은 멀끔한 장년 남성이 보였다.

‘저 사람이 최 사장.’

도훈은 딱딱히 굳은 표정을 애써 풀었다. 그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그동안 주워들은 정보로 인해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금수저만 물고 태어났지, 본연의 능력이라곤 전무한 사내.

그 와중에 회장의 비서와 바람을 피워대는 불륜남.

거기다 아내를 꼬아 초대남까지 부르는 상상 초월의 네토라레 성향까지. 저런 저급한 남성이 하필 애자매의 아버지라니, 인생의 행복이란 돈만으로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는 대표적인 하급 인간이다.

"여보, 이 분이 아버님을 구해주셨다는 용감한 학생분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도훈입니다."

"반갑네. 난 최민식."

민식이 소파에 일어서더니 도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이는 50대 중반쯤 되었을까?

셔츠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뱃살과 깊이 들어간 이마의 M자 라인이 전형적인 50대 사업가 모습이었다. 더구나 동안인 아내와 함께 서 있으니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아내는 무슨 연예인 수준인데···. 이건 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도 아니고. 딸들이 엄마를 닮아 천만다행이네.’

악수를 마친 민식이 도훈에게 말했다.

"안 바쁘면 잠시 얘기나 하다 가지?"

"예."

"여보. 아줌마들 다 퇴근 했어?"

"네, 30분 전에요."

"이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그럼 수고스럽지만, 당신이 차 좀 타와 주겠어?"

"수고는요. 도훈 군은 아까처럼 커피로?"

"괜찮습니다. 아까 많이 마셔서 더 마셨다간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하하. 혈기 넘치는 나이라 안 그래도 잠 못 이룰 텐데···. 나도 저 나이 땐 불끈불끈했거든."

"여, 여보. 그래도 아버님 손님이신데···."

"왜?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참, 이름이 도훈 군이랬지? 나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도훈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초장부터 반말 찍찍 던져놓고선 이제 와 허락을 구하다니.

"···네. 편히 하세요. 나이로는 아들뻘이나 마찬가진데."

"어휴 진짜 이 양반이···. 미안해요, 도훈 학생. 우리 그이가 원래 격의 없이 사람을 대하는 편이라. 이해하죠?"

"아, 네 뭐."

선희가 대신 사과했지만, 도훈은 그러잖아도 불편했던 감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격의 없기는, 그냥 개념이 없는 거겠지. 아무리 나이 차가 많이 난다고 초면부터 반말 찍찍 뱉는 예의하고는. 제 아버지랑은 다르게 품위라곤 쥐뿔도 없는 인간이군. 쯧.’

"가만, 이럴 땐 차를 마실 게 아니라 술을 한잔해야 하는 거 아냐? 여보, 저번에 중국 출장 가서 사 온 술 있지?"

"술요? 이 시간에?"

"왜? 요즘 대학생들 술 좋아하잖아. 도훈 군은 어때?"

"제가 술이 좀 약해서. 내일 학교 수업도 있고요."

"허허, 말통으로 위장에 때려부어도 끄떡없이 생겨가지곤 의외로군. 이 사람아, 술은 마시면서 느는 거야. 젊은 친구가 영 사회 생활할 줄 모르는 고만."

"여보! 쫌!"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만 양주로 부탁해. 안주는 아무거나."

선희가 안절부절못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도훈은 점점 눈앞의 사내가 고까워졌다.

‘되도록 선입견을 안 가지려고 했지만, 정말 하는 짓이 가관이구나. 이런 자식을 남편이라고 떠받드는 선희가 불쌍할 지경이야.’

[주인님. 제발 표정 관리 하십시오. 대립각을 세워 좋을 것은 없습니다. 위업을 생각하셔야지요.]

‘후읍-. 알곘어.’

"그래. 아내한테 대충 들었네., 아버지가 사례금 준다는 걸 마다하고 막내딸 과외를 맡기로 했다지?"

"네. 실은 과외도 본의 아니게···."

"하하! 자네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은근히 셈이 좋구만. 일시불로 한 방에 땡기느니, 연금처럼 나눠 받겠다는 거잖아. 명분도 그럴싸하고."

"···예?"

도훈은 민식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말뜻을 이해 못 했다기보다, 지금 저 말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하는 노여움 때문이었다. 도훈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민식이 바로 말을 덧붙였다.

"하하, 농담일세 농담. 내가 초면에도 농담을 곧잘하는 편이거든. 자화자찬은 아닌데, 외국 바이어들 한테 조크가 뛰어나다는 소릴 자주 들었어."

‘···지랄 옆차기하고 있네. 저딴 농담을 초면에 던질 정도면 대체 얼마나 무식하다는 소리야?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최 회장이 근심이 많을 만해.’

어쨌든 도훈은 대기업 사장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신의 권능을 부리는 플레이어 입장에선, 그런 감투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다.

"저에게 돈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회장님의 사례금을 받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런 일을 금전으로 보상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외 역시 어머니께서 부탁해서 한 것이고요."

도훈의 차분한 대답에 민식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어딘가 비꼬는 표정.

"아이고! 이런 훌륭한 청년을 몰라 봤구만, 그래. 내가 참으로 경솔했네. 그렇지. 이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가치도 얼마든지 있는 법이거든."

"······."

"근데 말일세. 돈이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네."

"예?"

"어설프게 돈이 많아 봐야 당연히 행복하기 힘들지. 고작 40평대 아파트, 1억 미만의 외제 차, 휴가 때나 가끔 나가는 해외여행. 그런 정도론 원래 행복하기 힘들어."

"음···."

"내 어린 친구니까 특별히 인생의 진리 하나 알려줌세. 돈은 말이야, 정말 많으면 행복도 살 수도 있다네."

최민식이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훈계를 시작했다.

"자네 차는 있나?"

"아직 없습니다."

"좋은 차 타고 싶지?"

"전 그냥 굴러만 가도 상관없는 데요."

"그래도 기왕이면 외제 차가 낫잖아. 벤츠, 아우디, BMW 그런 거 탐나지 않아?"

"······."

"돈만 있으면 그런 차를 얼마든지 살 수 있지. 나처럼 차고에 3,4대씩 박아놓고 기분에 따라 골라 타는 것도 가능하고. 부럽지 않나?"

‘이런 씨발, 듣고 있으니 귀가 썩어 버릴 것 같네.’

[조금만 참으십시오. 원래 개는 개소리밖에 못 짖는 법이니까요.‘

‘습습 후후- 심호흡, 심호흡.’

"그럼 자네 집은 있나?"

"지금은 원룸에 전세로···."

"하긴 대학생이니 그런 게 보통이겠지. 하지만 돈이 아주 많다면 한강이 훤히 내려 보이는 조망권 좋은 오피스텔에 살 수도 있을 거야. 아니지, 그냥 나처럼 서울 한복판에 저택을 짓는 것도 가능해. 여기엔 개인 수영장도 있다네. 수영장은 혹시 구경해 봤나?"

"네, 아까 돌아 다니다···."

"부럽지 않던가?"

도훈은 점점 이마에 핏발이 서는 것을 느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20대 대학생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는 민식의 꼴불견이 그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갔다.

‘금수저 하나 물고 태어난 게 인생의 유일한 자랑인 새끼가··· 진짜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참다못한 도훈이 결국 한마디 했다.

"비싼 차도 좋고, 집도 넓으면 살긴 편하겠네요.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본인이 느끼는 만족감이 아닐까요? 저는 차가 없어서 학교까지 매일 걸어다니고, 집도 좁아 방 한 칸이 전부지만 한 번도 불행하다 느낀 적 없습니다."

도훈의 당찬 대답에 이번에도 민식의 볼이 씰룩거렸다.

‘이런 햇병아리 같은 자식. 얼굴도 반반하고 키도 훤칠하니 세상이 만만해 보이지? 하여간 어린 놈들은 저렇게 철이 없어서야···.’

"그래? 뭐 그것도 사람 나름이니···."

민식은 주방에서 안주를 준비하는 소리를 듣고 도훈에게 바짝 몸을 기울였다.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는 자세였다.

"사실 아내 옆에 없어 하는 얘긴데, 돈이 많으면 여자도 마음껏 살 수 있다네."

"···네?"

"생각해 보니 차나 집 같은 건 자네한테 별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도 그 나이 땐 여자가 세상의 전분 줄 알았거든."

"음···."

"애인은 있나?"

"아뇨. 아직."

"좋아하는 사람은?"

"호감이 있는 사람은 있죠."

"돈이 많으면 그런 여자 마음도 살 수 있다네."

"저는 그런 식으로 연애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하. 재밌군. 나랑 내기해도 좋아."

"뭘 말입니까?"

"돈으로 사지 못하는 마음이란 없다고."

"······."

"내가 올해로 50 중반이야. 이젠 살도 붙어서 배도 나오고 머리도 많이 벗어졌지. 외모만 따지면 20대 어린 여자애들에겐 비호감 일거야. 하지만 이런 나라도 얼마든지 예쁜 여대생을 만날 수 있다네."

"음."

"전혀 못 믿겠다는 눈치군. 진짜라니까? 제아무리 잘나가는 퀸카? 20년 넘게 순결을 지켜 온 처녀? 그딴 거 다 소용없어. 가격만 맞으면 누구에게나 가랑이 벌릴 수 있는 게 여자란 존재거든."

울컥.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만 테이블 아래라 민식이 보진 못했다.

‘이 개새끼 그냥 한 대 쳐버리고 때려쳐? 도저히 못 듣고 있겠는데?’

[흐음. 저야 주인님이 되도록 위업을 완수하셨음 하는 마음이지만. 저도 점점 역겨워지는군요.]

‘어떻게 이딴 새끼가 한 집안의 가장인 거지? 이런 놈의 손에 일성 같은 대기업이 굴러가고 있다고?’

[자리라는 게 능력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우, 진짜, 한 번 만 더 참아본다.’

"내말은, 그만큼 돈이 무섭다는 거야. 아직 실감이 안 들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생각날 거네. 아, 그때 일성 그룹 최모 사장이 나한테 그런 조언을 했었는데 하고 말이지. 하하하!"

"···네."

"아무튼, 자넬 만나게 돼서 기쁘구만. 이제 막내 딸 과외도 맡게 되었으니 우리 집안과 오래오래 연을 이어가 보자고."

"네. 뭐."

"혹시 아나? 우리 미애가 자네 덕에 한국대라도 입학하게 되면 내가 근사한 외제차 한 대 뽑아줄지? 참, 그래도 취등록세는 자네가 내야 하네. 하하핫! 원래 경품에 당첨되도 부가세는 별도잖는가. 하핫!"

‘지랄 육갑을 떨고 있네. 미애가 왜 그렇게 당신을 평가했는지 짧은 대화만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군. 최민식, 당신은 이런 호사를 누릴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진짜 최저이자 최악의 남자.’

[저도 동감합니다. 꼴값을 가지가지로 떠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개소릴 충고랍시고 들었다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군. 이 집안 딸들을 덮밥으로 먹는 것으로 부족하겠는데? 어떻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없을까?’

[잠시만요. 적당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뭔데?’

[‘파워 글러브’라는 아이템입니다. 이걸 끼고 때리면 고통이 골수까지 침투해서 몇 달간은 골골댑니다.]

‘인마. 진짜로 때리는 거 말고. 저 못된 버릇을 고쳐줄 만한 걸로 말이야. 아니. 어차피 저 버릇은 개도 못 줄 테니, 그냥 골통 한 번 먹일 수 있는.’

[그렇다면 주인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있긴 하죠.]

‘뭐?’

[그의 마누라를 뺏는 겁니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아마 충격이 상당하지 않을까요? 돈이면 뭐든 다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내가, 돈도 없는 어린 청년에게 예쁜 마누라를 홀랑 뺏기고 나면?]

‘나보고 지금 불륜을 저지르란 소리야?’

[스스로에게 너무 족쇄를 채울 필욘 없습니다. 주인님이 하면 로맨스니까요.]

‘하여튼 말은 잘해. 근데 그 방법으론 안 될걸?’

[왜요?]

‘생각해봐. 저치에겐 네토라레는 정신병이 있어. 아내를 외간 남자들한테 돌리면서 만족을 느끼는 거 말야. 내가 지 와이프를 따먹고 있으면 옆에서 잔뜩 흥분가지고 딸딸이 칠 인간이야. 그게 어떻게 복수가 되겠어?’

[아차! 그건 미처 생각 못 했군요.]

도훈이 로시와 대화를 나누는 중 선희가 쟁반에 양주와 안줏거리를 가지고 왔다. 허리를 숙이며 쟁반을 내려놓는데, 상의 사이로 깊은 가슴골이 비추었다. 고의로 도훈을 향해 가슴을 드러낸 선희가 말했다.

"혹시 몰라서 잔도 챙겨왔어요. 도훈 학생도 생각 있으면 같이 들어요."

"아···.네. 그럼 한 잔 정도는."

도훈은 계속 생각했다.

‘안 되겠어. 곱게 위업만 마치면 물러나려고 했는데,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어쩌시게요?]

‘일단 세 딸부터 모두 농락해 줘야지.’

[희애 양은 이미 공략하셨으니, 미애양 차례인가요?]

‘아니. 아직 한명 더 있잖아.’

[아! 수애양 말씀인가요? 아까 외출하고선 아직 안 돌아 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여기서 외박한다.’

[네? 학교는 어쩌시게요?]

‘학교야 내일 아침 정상적으로 등교하면 돼. 잠만 여기서 자고 간다는 거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수애는 공략하기 힘들지도 모르니.’

[역시 주인님다운 응징 방법이군요. 최 사장의 금지옥엽 같은 딸들을 모두 공략해 그에게 좌절감을 선사하시겠다는 대담한 발상!]

‘어차피 위업도 연계가 돼 있고 말이야.’

[혹시 정선희는 여전히 보류인가요? 딸의 경우도 충격이 크겠지만 아내마저 꾀어낸다면 집안의 모든 여자를 헌납한 꼴일 텐데요.]

‘아니지. 그에겐 아내보다 더 소중한 여자가 있잖아.’

[네? 누구···. 설마 정민서?]

‘맞아. 저 인간은 아내보다, 자기 애인을 뺏기는 걸 더 싫어할 놈이거든. 돈으로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웃기고 있네. 내가 좆으로 여자의 영혼을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말겠어.’

도훈이 이를 부득 갈았다.

모처럼 그의 좆방망이가 응징의 단매를 보여줄 시간이었다.

< 324. 애자매-2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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