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34화 (314/2,000)

< 316. 애자매-16- >

정선희가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건 제가 안 되겠는데요?"

"네?"

"도훈 군. 호의가 지나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 들어봤죠? 저는 지나친 겸손 역시 오만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희도 자부심 있는 집안이에요. 제 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런 푼돈 받고 일한다는 거, 솔직히 자존심 상해요. 무시당하는 기분이라고요."

도훈은 처음으로 정선희에게서 부잣집 마나님 포스를 느꼈다. 항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십수년 넘게 재벌집의 며느리로 살아온 사람이다. 상류 사회엔 그들만의 룰이 있다. 그것을 건드리자, 그녀가 마침내 감정을 드러냈다.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딱 잘라 백 만원. 그 이하로는 안 돼요. 대신 과외비가 부담스럽다면 다른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건 어때요?"

"어떤?"

선희가 중재안을 제시했다.

"실은 시아버님께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지병이 있으셨는데 최근 사고를 당하면서 더 악화 되셨죠."

"아까 얘기할 땐 정정해 보이시던데요."

"손님 앞이라 평소보다 무리하신 거예요. 아픈 내색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 여기시니까."

확실히.

최 회장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김 변호사라는 인물과 끊임없이 통화했다. 정비서 말에 따르면 유산 상속과 관련된 문제라는데, 아마 앞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예감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럼 저에게 하실 부탁이라는 건···."

"아버님께서 도훈 군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더군요. 원래 낯을 가리시는 편인데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에 봤어요."

정선희가 도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니 과외 오실 때만이라도 그분의 말벗이 되어 주셨음해요. 차 한잔하고 가도 좋고, 가능하면 식사도.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죠? 일주일에 한 번 뿐인데."

‘이거 참, 거절하면 나만 쓰레기가 되는 건가?’

도훈은 정선희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시아버지의 말벗이란 명분일 뿐, 실제론 자신을 섹벗으로 만들기 위한 밑밥이라는 걸. 하지만 교묘한 언변과 가증스러운 연기로 인해 거절하기 어려웠다.

[대단한 집념이군요. 이중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쩜 사람이 저리도 표리부동한지···.]

‘저런 성격쯤 되니 초대남이랑 뒹굴면서 딸아이들 앞에서 뻔뻔하게 나설 수 있었던 거지. 그런 짓을 벌이는 여자가 어지간한 멘탈이겠어?’

[그나저나 어떡하시겠습니까? 딱히 주인님이 손해 볼 건 없는 조건 같은 데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과외만 해서는 막내딸 외에 다른 자매들은 공략하기 어려울 테니까. 일단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줘야지.’

생각을 정리한 도훈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고마워요, 도훈 군. 아버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그녀는 당신을 서서히 타락시킬 예정입니다. 음모에 빠뜨려 약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거참,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도훈의 승낙에 선희가 기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과외는 이번 주부터 가능한가요?"

"이번 주는 제가 선약이 있어서, 다음 주부턴 안 될까요?"

"그건 너무 늦는데···. 혹시 평일 중 가능한 날은 없을까요? 내일이라도요. 이미 수학 선생님이 교체된 상황이라 다른 과목에 비해 너무 진도가 더디거든요."

"내일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주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여기 전화번호랑 계좌 좀 남겨줄래요? 과외비는 원래 선불로 드리는 거니까."

도훈은 선희가 내민 메모지에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빨래도 기다려야 하니 잠시 미애 학생 좀 보고 오겠습니다. 내일 바로 수업하려면 사용할 교재라든가 학습 수준도 파악해야 하니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의자 앉아있던 도훈이 몸을 일으키자, 타이즈 아래 감춰진 대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희는 가랑이 사이에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봐야 안 뚫린다, 음란한 아줌마야.’

"아···! 도훈 군은 정말 크군요."

"뭐가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선희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키, 키 말이에요."

‘참나,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지.’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네. 중간에 과일이라도 올려보낼게요."

선희는 물러나는 도훈이 아쉬웠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가 대물인 것은 똑똑히 보았다.

주기적으로 방문한다는 약조도 받았다.

이제 그는 독 안의 든 쥐 신세였다.

물론 도훈은 그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

최 사모의 방을 나선 나는, 2층 계단에 오르기 전 퍼뜩 최 회장 생각이 났다.

‘맞다. 최 회장의 정보창도 확인해야 하는데···.’

강화된 정보 창은 기존 스킬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최 회장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선, 지금 그의 정보를 들여야 보아야 한다.

‘로시, 원나잇 아큐브 얼마나 남았어?’

[대략 40분 가량입니다.]

‘좋아. 스킬이 남아있을 때 최 회장의 것도 마저 확인해야겠어.’

커다란 호텔 전경을 연상시키는 최 회장의 저택은, 곳곳에 방이 가득해 언뜻 봐선 미로처럼 복잡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최 회장이 있던 위치를 기억해 냈다.

이윽고 다다른 최 회장의 서재.

대화 중인지 서재에선 최 회장과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러나 방음이 잘 되어 무슨 내용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문 앞에 바짝 붙어 정보창을 실행시켰다.

‘최 회장 정보창 띄워.’

[거리가 멀어 정보를 읽어 들일 수 없습니다.]

‘음, 5M보다 멀리 있는 모양이네. 이를 어쩐다?’

방을 잘못 들어간 척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쥐새끼같이 여기서 뭘 엿듣고 계실까?"

헉?!

너무도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희, 희애 씨."

"씨는 무슨···. 둘이 있을 땐 반말하래도."

"저택이 넓어서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너, 거짓말은 잘 못 하는구나? 길 잃은 사람이 왜 문가에 귀를 바짝 붙여 엿듣고 있는데?"

[그녀는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는 군요.]

눈치 빠른 로시가 정보창의 공략팁을 알아서 읊었다.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자 희애가 강제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랑 따로 얘기가 필요할 것 같지 않아?"

‘으읏, 제기랄. 왜 희애가 다가오는 것을 경고 안 했어?’

[죄송합니다. 너무 급작스러웠습니다. 복도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왔거든요.]

로시의 말마따나 희애가 끌고 간 곳은 최 회장의 서재에서 멀지 않은 방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방을 나오던 중 회장의 서재를 염탐하고 있던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옆구리를 찌르는 희애의 명령에 죄수처럼 어두운 암실로 들어갔다. 어둑한 조명 탓에 암실인 줄 알았는데 천장부에 설치된 빔프로젝트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 였구나! 설마 회장 서재 옆이 씨어터룸이 있을 줄이야.’

이건 예상 밖이다.

독서를 즐기는 최 회장의 취향에 따라, 사운드가 웅장한 씨어터 룸은 당연히 저택 구석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벽면 구조가 엠보싱 처리된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즉, 씨어터 룸은 개인 연주실처럼 흡음재를 설치해 소음을 차단시킨 공간이있다.

‘무슨 가정집에 이런 시설이···.’

나를 방으로 들이민 희애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너 뭐하는 애니?"

희미한 스크린 불빛에 의지해 희애가 다짜고짜 물었다.

로시는 곧바로 변경된 공략 팁을 읊었다.

[그녀는 당신을 정비서의 끄나풀로 여기고 있습니다. 대답을 똑바로 못할 시 호감도의 대폭 하락이 우려됩니다. 라고···.]

‘뭐? 정비서의 끄나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는 희애 양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아버지와 불륜관계에 있는 정비서가 회장의 유산에 욕심을 낸다고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데려온 주인님 역시 처음부터 의도된 접근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게 말이 돼? 내가 회장을 구한 것은 최 회장이 직접 증언했잖아?’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상황의 조성부터 시나리오를 짰다고 가정한다면, 사람 하나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요.]

‘헐, 나를 지저분한 유산 다툼에 끼어든 협잡꾼으로 의심하단 말이야? 괘씸하기 짝이 없구만? 대물님을 뭘로 보고.’

[우선 오해부터 푸시지요. 호감도가 하락하면 자매 덮밥 위업 확률도 그만큼 줄어들게 됩니다.]

"무슨 소리야, 다짜고짜?"

나는 곧바로 들이받았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간 의심만 증폭될 뿐이다.

내가 큰소릴 치자 희애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다 봤는데 발뺌할 거야? 네가 왜 할아버지랑 김 변 대화를 엿듣는데?"

서재에 있던 다른 사내가 아까 통화하던 김 변호사였던 모양이군. 하필 타이밍 하고는···.

"엿듣다니? 노크하고 들어가려다 손님이 있는 것 같아서 잠깐 소리를 들은 것뿐이라고."

"···거짓말."

강하게 결백을 주장했지만, 희애는 좀처럼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계속 상영 중이던 영화를 중단시켰다. 멈춰진 스크린 속에 침대에서 뒤엉킨 남녀가 보였다.

"그건 왜 쳐다보는데?"

"화면에 띄워져 있길래. 혼자 영화 본다더니 취향하고는···."

"예, 예술 영화라고!"

희애가 모처럼 당황했다. 나를 불러들인 게 하필 씨이터 룸이었고, 상영 중인 장면이 하필 선정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래, 예술···. 누가 뭐래?"

"너, 말 돌리지 마. 나 이거 할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 참,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그녀는 당신의 당당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공연한 의심을 했는지 걱정합니다.]

나는 반격을 시작했다.

"잘 들어. 내가 여기 들어와서 하필 저 장면을 봤어. 그리고는 너를 평소에 포르노를 즐겨보는 여자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저거 예술 영화래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우연히 네가 본 한 장면만 가지고 내가 대화를 훔쳐 들었다느니, 정체가 의심된다느니 그러면 나도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할아버지한테 말한다고? 아니, 오히려 내가 먼저 말해야겠다. 이 집안 손녀들은 대뜸 사람 의심부터 하느냐고.

몹시 기분이 불쾌하다고 말이야."

나는 당장에라도 서재로 나갈 것처럼 방음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제야 희애가 다급히 나를 돌려세웠다.

"미, 미안. 내 오해였어."

"오해 좋아하시네. 멀쩡한 사람 이상하게 만들고선 그냥 오해라면 끝이야? 그게 최씨 집안의 사과법인가? 빚을 지지 않는다는 건 가훈이 아니라 회장님만의 좌우명이었나 보군."

거침없는 독설에 기가 센 희애가 끝내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집 안 사람들 모두 최 회장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천방지축 까불던 희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최 회장에게 밉보이는 것이 그녀에겐 상당한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진짜 미안. 요새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정비서 때문에."

나는 이쯤에서 엄포를 그만두었다.

이젠 몰아붙이기보다 살살 달랠 타이밍이다.

"정비서가 왜?"

희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안일이라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아무튼 정식으로 사과할 게. 내가 널 오해했어."

"흐음, 알았어. 나도 기분 풀렸어. 근데 저 영상 좀 어떻게 해봐."

여전히 빔 프로젝터는 벌거벗은 남녀가 뒤엉킨 장면을 쏘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커다란 여자의 가슴이 확대된 모습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희애는 다소 여유를 되찾았는지 평소의 느긋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영상 보니까 꼴리니?"

"흥, 전혀."

"전혀라고 말하기엔 너무 티 나는데? 근데 너 바진 또 언제 갈아입은 거야?"

한창 말다툼을 하느라 희애는 그제야 내 바지가 바뀐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빤히 대물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선희의 왕성한 성욕을 가장 닮은 여자가 장녀인 희애다.

"바지에 차를 쏟아서···, 잠시 빌려 입었어."

"근데 왜 그렇게 작아? 어? 이거 내 바지 아니야?"

"몰라. 너네 어머니가 입으라고 주셨을 뿐. 어쩐지 여자 바지라 꽉 끼었구나."

"이게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입고 있네?"

"왜 벗기기라도 하게?"

"내가 못 벗길까 봐?"

[그녀는 당신의 대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참고로 나 팬티도 안 입었다. 팬티까지 싹 다 젖었거든."

"잘됐네. 기왕이면 꼬추도 보고 좋지."

"방금 발언, 성추행인 거 알지?"

"그럼 넌 허락 없이 남의 물건 가져갔으니 점유물이탈이니?"

갑자기 희애가 덮쳤다. 나는 날쌘 동작으로 희애에게서 벗어났다. 꽉 막힌 씨어터 룸을 두고 아웃복싱을 하듯 코너를 빙빙 돌았다.

"바지 안 내놔? 그거 내가 아끼는 바지라고!"

"팬티도 안 입었다니까?"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다시 희애가 두 손을 벌린 체 다가왔다. 나는 잽싸게 몸을 웅크려 피한 뒤 시어터룸에 설치된 쇼파 베드 위로 뛰어올랐다. 그때 발바닥에 뭔가 밟히며 멈춰있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하필 리모컨의 재생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었다.

"하아앙, 아아아앙-!"

과장된 신음 소리가 쩌렁쩌렁 벽면을 울렸다. 7.1채널 하이파이의 고음질이 만들어낸 밀도 높은 사운드에 나도 모르게 영상으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잡았다!"

그 순간, 희애가 츄리닝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대물이 코끼리 아저씨처럼 코를 덜렁거렸다.

< 316. 애자매-1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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