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애자매-10- >
당시엔 시험이 고통스러웠다.
정해진 시간이 끝날 때까지 멀뚱히 앉아있는 순간이 너무나 지루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해봐도 갈비뼈가 눌려 잠이 들질 않았다. 팽팽 머리가 돌아가는 한창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시간은 마치 감옥 같았다.
왜 이렇게 오버하냐고? 이건 진심이다.
난 실제로 모든 시험을 20분 안에 마무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정정한다.
줄글이 많았던 언어 영역이 20분이라는 소리고, 문제가 짧은 수학의 경우 10분이면 OMR 마킹까지 끝냈다.
나에게 수능 수학 난이도란, 고등학생에게 사칙연산을 맡긴 수준이었다. 문제를 읽는 동시에 답이 나왔다.
계산과정? 증명? 검증? 그딴 게 왜 필요한가?
머릿속이 연습장이고 두뇌가 공학용 계산기였다.
특히 수능 보기 직전에는, 극도로 감각이 올라 문제를 채 읽기도 전 출제자의 의도와 적용해야 할 증명, 깨알 같은 함정까지 싹 다 파악이 될 정도였다.
한마디로 당시의 나는 수학의 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빠가가 된 이도훈의 몸뚱이에 이정우의 두뇌 능력을 온전히 갖춘 기억이 되돌아왔다. 하드웨어는 그대로인데 소프트웨어가 갱신되었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로시에게 물었다.
‘이상해. 기억이 돌아왔다고 어떻게 능력까지 복구되는 거지? 이정우의 때의 기억은 지금도 똑같은데 말이지.’
[그게 바로 천상계의 기술력이지요. 추억의 음료는 정확히 말해, 피그말리온 효과를 일으키는 도핑 약의 일종입니다.]
‘피그말리온? 그 위약 효과말야?’
[네. 사실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리미트가 깨어지고 나면 한계를 넘은 잠재력이 발휘되지요. 과거로 되돌아간 정신이 현재의 두뇌를 자극시켜 극한까지 끌어올린 셈이죠. 정신은 육체를 지
배하니까. 물론 아이템이 그것을 보조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만요.]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의 내 두뇌가 19살의 이정우와 동일 하다는 거지?’
[네, 100% 일치합니다.]
‘그거면 됐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드벤테이지는 충분히 준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내 목소리를 들은 의대생이 문제를 풀다 말고 코웃음 쳤다.
"풉, 허세 부리기는."
허세?
비록 이정우가 한남 소추의 상징이긴 했지만,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공부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천재였다는 사실을.
이제부터 진정한 능력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
도훈은 시험이 개시된 지 10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문제 풀이에 돌입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는 음료수를 한 병 들이키고 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시험감독을 하며 도훈을 훔쳐보던 미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도훈 오빠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니까 막 찍고 있구나. 저러면 OMR 카드에 한 줄로 기둥 세우는 거랑 뭔 차이야? 그냥 수학 좀 못 가르쳐도 되니까 무조건 도훈 오빠한테 과외 시켜달라고 조를걸. 괜히 대결을 시켜서.’
사실 미애는 도훈의 수학 실력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조건 명문대에 진학해야 한다며 아버지의 강권으로 시작된 재수. 하지만 아버지가 붙여준 과외 선생들이란 하나같이 늙은 사람뿐이었다.
몇 해 전 수능 출제 위원으로 들어갔다는 모 대학의 교수니 국어책 지문에 작품을 등재 할 정도로 유명한 문인이니 하는. 그나마 수리는 젊을수록 문제 풀이에 능숙하다며, 현역 대학생을 붙여주었다.
때문에 도훈이 과외 선생인 줄 알았을 땐 엄청 설랬다.
훤칠한 키와 어깨 깡패 스타일은 평소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웠다. 게다가 얼굴까지 훈훈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장난처럼 시작한 문제 풀이가 화근이 되었다.
못생긴 의대생을 내칠 명분이 필요했던 미애는, 도훈의 수학 실력을 과신해 대결을 부추겼다. 그러나 이미 승부는 명백하게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어머니가 이 황당한 대결을 별말 없이 수용한 이유도,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잉, 아무리 실력 좋아도 못생긴 대학생한테 배우긴 싫은데···.’
재수생인 미애는 대학생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먼저 대학에 간 친구들은 입학 한 달 만에 근사한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인스타니 페북에 자랑을 해댔다. 흐드러진 벚꽃, 실내 놀이공원 등 각종 데이트 장소를 배경으로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사진들을 보며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모른다.
나이는 진즉 대학생이었으나, 재수를 하며 멈춰버린 시계는 자신만 미성년자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았다.
자신도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서 훈남 선배도 사귀고, 짜릿한 데이트도 하고, 밤에는 자취방에서 단둘이 꽁냥거리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도훈은 최적의 상대였다.
잘생기고, 몸도 좋고, 심지어 공부도 잘했다.
그에게 공부 말고 다른 많은 것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테스트가 끝나면, 수학 과외는 여드름 난 피부에 못생긴 의대생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미애가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데 둘째인 수애가 우연히 거실을 지나가다 미애를 발견하고 물었다.
"뭐하니? 엄마는?"
"안방 올라갔어."
수애는 외출할 채비를 마쳤는지 곱게 단장한 차림이었다. 풀메이크업으로 화장한 얼굴은 아이돌 가수 못지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양끝에서 시험을 풀고 있는 두 사내를 보더니 동생에게 물었다.
"근데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응, 테스트 중이야."
"테스트라니?"
"나 수학 선생님 다시 구하잖아. 저 둘 중 더 잘하는 사람한테 맡기기로 했거든."
미애의 대답에 수애가 두 사람의 면면을 살폈다. 그중 한 명은 아까 머리를 감고 나오다가 우연히 마주친 남자였다.
‘저 사람은 아까 할아버지 손님이라던···. 그냥 과외 구하러 온 학생이었나? 참나, 난 또 뭐라도 되는 줄.’
"언니 근데 어디가? 좀 있다가 가족 식사한다던데?"
"들었어. 식사 끝나고 바로 나가려고."
수애는 한참 진귀한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나 집중한 두 사람은 수애가 온 줄도 모르고 시험지에 열중이었다. 평소 남자들에게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수애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남자들의 태도에 빈정이 상했는지 혀를 끌끌 차며 2층으로 올라갔다.
"···과외 하나 맡으려고 애쓴다 애써. 그깟 푼돈 뭐라고. 쯧쯧."
수애가 사라지고 잠시 후, 휘리릭 시험지를 넘기던 도훈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볼펜을 내려놓았다.
"시험 끝!"
"네?"
"시간 안재? 내가 먼저 풀었어."
"아, 아··· 네."
대결의 성패는 정확성이 최우선이었다. 다만 점수가 같을 경우에 한 해 더 빨리 푼 사람이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도훈이 먼저 시험을 마치자 의대생은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자신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크, 미친놈. 한참 멍때리다 10분 만에 대충 찍고는 끝이라니···. 알량한 자존심에 나보다 먼저 풀었다는 생색은 내고 싶었나 보지? 하여간 운동하는 것들은 뇌까지 근육으로 뭉쳐 있어가지고는.’
도훈이 시험 종료를 외치고 나서 의대생 역시 시험을 마쳤다. 기다리던 도훈이 말했다.
"내가 먼저 풀었어. 인정하지?"
"흥, 그래 봐야 답이 틀려선 아무 의미 없지. 참고로 난 수학 과외 경력만 5년째야. 가르치는 제자들 시험 칠 때 나 또한 수능을 보지. 참고로 지난 5년 동안 수능 치르면서 수학은 단 한 번도 틀려본 적 없었어."
의대생의 거드름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꼴랑 수능 수학 좀 다 맞았다고 자랑하는 거야? 전 과목 다 맞은 것도 아니고?"
"뭐라고? 넌 그럼 만점이란 거야? 수능 만점자가 무슨 체육교육과를 가? 그것도 국성대로?"
"남이사 국성대를 가건 말건? 오지랖은."
"흥, 언제까지 허세 부리는지 보자고."
한편 답지를 들고 두 사람의 시험지를 메기던 미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답안이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첫 페이지는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뒤로 넘겨도 마찬가지. 옆에서 채점을 지켜보던 의대생이 경악에 찬 얼굴로 물었다.
"뭐, 뭐야? 저 자식 지금까지 하나도 안 틀렸어?"
"네, 보시다시피 아직까진 동점이에요."
"그, 그럴 리가!"
마지막 문제까지 모두 매긴 미애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둘 다 만점이에요. 진짜 잘하시는구나. 아무리 모의고사라도 30분 만에 이걸 다 맞추시다니···. 어쨌든 점수가 똑같으니 먼저 푼 도훈 오빠가 이긴 거죠?"
의대생은 채점이 끝난 도훈의 시험지를 빼듯이 낚아채더니 눈을 크게 뜨고 시험지를 살폈다.
풀이한 흔적이라고 하나 없는 깨끗한 시험지. 공란 가득 수식이 정리된 자신의 시험지완 판이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훈에게 따졌다.
"야! 너 내 꺼 컨닝했지?"
"컨닝은 무슨? 내가 너보다 먼저 풀었는데?"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럼 푼 흔적이 하나도 없을 수 있어?"
도훈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넌 수학을 손으로 푸냐?"
"어, 어? 그럼 뭐로 푸는데?"
도훈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걸로 풀어. 머리는 손보다 빠르니까. 암산해서."
"알았다! 너 이 시험지 예전에 한 번 풀었던 거지? 맞아, 그러면 식을 쓸 필요도 없겠지. 답안을 외우면 그만이니."
의대생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시중에 돌고 도는 모의고사.
일전에 한 번 풀어 본 시험지라면 슬쩍 문제만 봐도 답이 떠오를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문제를 암산으로 풀어내 정확히 맞췄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 올림피아드 대상을 받았던 자신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쳇, 이 새끼 치사하게 잔머리를···. 어쩐지 문제 받고 지나치게 여유 부린다 싶더라니.’
도훈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증거 있어?"
"증거가 바로 이 시험지야! 어떻게 사람이 문제만 보고 답을 적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사람 머리가 다 똑같은 줄 아네, 의대생이란 놈이."
"뭐, 뭐라고?"
의대생은 화가 치밀었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덩치 좋은 도훈에게 덤비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폭력을 싫어하는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이었다.
그때 도훈이 말했다.
"그래, 네가 정 납득을 못하겠다면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내가 암산으로 푸는 걸 보여 줄테니까 확인해 보던가."
도훈이 문제집을 펼치자 의대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문제집으로 어림없어. 5회차 말고 다른 것도 이미 풀어 봤음 답을 다 알 거 아니야?"
"그럼 어쩌라고?"
"기다려. 내가 과외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문제집이 있으니까."
의대생이 가방에서 두툼한 파일 철을 꺼냈다. 이는 자신이 수학경시대회에 나가는 영재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특별교재였다.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외국 문제 파일을 일일이 다운받아 재편집한 자신만의 교본. 게다가 몇몇 문제는 숫자까지 바꿔 완전히 새롭게 된 문제도 있었다.
도훈은 의대생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거참 웃기는 놈일세. 로시, 아이템 복용 효과가 얼마나 남았지?’
[3분 후 효력이 사라집니다.]
‘그거면 충분해.’
"여기 있는 문제를 암산으로 풀면 인정한다는 거지?"
"당연하지."
의대생이 자신만만하게 문제를 들이밀었다.
‘흐흐. 이건 절대 못 풀걸. 외국 올림피아드 기출 문제를 변형해서 만든 문제니까.’
해당 문제는 대학 수학 이상의 이해력을 요구했다.
자신조차 처음 답을 구하지 못해 풀이를 보고 한참 고심해야 했다.
도훈은 의대생이 내민 문제를 눈으로 쓱 훑더니 바로 정답을 말했다.
"-1 이네."
"어억!"
"이딴 걸 문제라고 냈냐?"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걸 눈으로 보고!"
"말했잖아. 난 암산으로 푼다고."
도훈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던 의대생은 연거푸 최고 난이도의 문제를 내밀었다. 도훈은 내는 족족 곧바로 풀어내더니 마지막 문제를 보고는 쯧쯧 혀를 찼다.
"이거 니가 고친거지? 숫자를 이렇게 바꾸면 해가 안 나오잖아. 이건 불능이야. 정답 없어."
"무, 무슨 소리야! 괜히 못 풀겠으니까 그렇지?"
도훈은 불신하는 의대생으로 향해 처음으로 볼펜을 들어 수식을 풀어주었다. 그의 수식은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어 한눈에 보아도 완벽한 해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봐. 이러면 이차방정식이잖아. 이렇게 되면 미지수가 두 개 떨어지는데 어떻게 하나로 특정할 건데? 너 멍청이냐?"
두둥-!
의대생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살면서 처음 듣는 폭언.
‘나, 나보고 멍청이라고? 그것도 국성대 체육과 학생한테···.’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봐. 어쨌든 내가 이긴 거다? 아, 오랜만에 머릴 썼더니 골치가 다 아프네. 나 밖에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승부를 마친 도훈이 쿨하게 돌아섰다.
때마침, 로시가 아이템 효과가 끝났음을 알렸다.
[효력이 다 되었습니다. 휘유, 아슬아슬했군요.]
‘그러게. 풀이하다 막히면 어쩌나하고 겁나 쫄았잖아.’
[전 정말 감탄했습니다. 과거의 주인님이 이렇게 똑똑한 분이었을 줄이야. 새삼 다시 보게 되는 군요.]
‘언제는 지나치게 수식이 화려하다 해놓고선. 그나저나 의미 없이 포인트만 날려버렸군. 쳇, 저 의대생 새끼가 자존심만 안 건드렸어도!’
[과하긴 했지만 미애 아가씨에게 큰 점수를 딴 것 같으니 투자라고 생각하시지요. 아까 보니 주인님이 의대생을 몰아붙일 때 눈에서 꿀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랬어? 하긴 업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포인트야 아깝지 않지.’
집 밖으로 나간 도훈이 잔디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의대생이 힘없이 걸어 나왔다. 그는 도훈을 쳐다보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도훈은 떠나는 그를 향해 굳이 한마딜 덧붙였다.
"사람 겸손해야 된다. 공부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으으! 괴물 같은 자식."
의대생이 떠나고 잠시 후 미애가 나와 도훈을 찾았다.
"도훈 오빠. 엄마가 지금 식사하러 오래."
도훈을 부르는 미애의 목소리에 생기가 가득했다.
‘드디어 공략 대상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가.’
< 310. 애자매-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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