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애자매-9- >
태어나 고생이라곤 안 해봤을 것 같은 곱디고운 손.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우아한 자태가 나를 한순간에 벙어리로 만들었다. 아니, 아줌마가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대단히 기품있는 여성이군요! 장성한 딸을 셋이나 둔 어머니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네요. 혹시 최 사장이 나이 어린 부인에게 재가를 간 걸 까요?]
‘아냐. 자세히 봐봐. 예쁜 얼굴은 수애를, 볼륨 넘치는 몸매는 희애를 닮았잖아. 순백색 피부는 막내랑 흡사하고.’
[오, 듣고 보니 그렇네요. 묘하게 세 딸을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그게 아니지. 딸들이 엄마의 장점을 하나씩 물려받은 거겠지.’
[돌려 말하면 세 딸이 가진 장점을 모두 갖춘 여성이군요. 어쨌든 참으로 미인입니다.]
‘내 말이. 첫째가 스물여섯이니 20대 초반에 애를 낳았더라도 지금은 못해도 40 후반이라는 소린데···. 어쩜 저렇게 동안이지?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30대 후반이래도 억울 할만한 미모네요.]
"혹시, 아버님 손님이시라는 분?"
최 사장의 와이프는 목소리마저 고혹적이었다. 입술을 여는 순간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 하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미시는 태어나 처음 봐.’
[흐흐,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유부녀는 절대 안 건드린다면서요? 예쁜 미시를 보니 마음이 동하시나요?]
‘뭐, 뭐래! 그만큼 예쁘다는 소리지. 크흠.’
최 사장 와이프의 미모에 홀려 한참 얼이 빠져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려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미애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엄마! 저 오빠가 아까 수학 문제 풀어준 그 오빠야. 내가 만난 과외 선생님 중 최고로 잘 가르치더라니까? 솔직히 여기 의대생 아저씨보다 실력 더 좋을걸?"
미애의 발언에 의대생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저씨란 호칭이 마음에 안 든 것일까, 아니면 평가절하하는 미애의 태도가 거북했던 걸까?
둘 중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갑작스레 끼어든 나로 인해 부푼 마음으로 찾아왔을 고액과외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
최 사장 와이프는 듣기 민망했던지 미애를 나무랐다.
"미애야. 엄마가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래도 그러니."
나 또한 남의 밥그릇 뺏을 생각은 없다.
본과 공부도 바쁜 의대생이 과외를 다닐 정도면 형편이 곤란하다는 소린데, 괜스레 박힌 돌을 빼낸 굴러온 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별것 아니었어요. 대학생이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였거든요."
"저기, 실례지만 어느 대학 다니세요?"
"저요?"
"네. 어디 의대 신데요? 우리 학교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자존심이 상했는지 의대생이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자식, 좋게 넘어가려는데 왜 갑자기 시비람?’
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국성대학생입니다."
"네? 국성댄 몇 년 전 학부 없애고 의전원만 있지 않나? 아, 혹시 치대생? 아님 약대?"
"아뇨. 전 체육교육과 다니는데요."
전공을 밝히자 갑자기 의대생의 얼굴에 노골적인 우월감이 떠올랐다.
"아~, 체육교육과? 거긴 실기로 가는 데잖아요? 수능은 2등급만 맞아도 되고. 아니, 국성대면 3등급 정도려나? 맞죠?"
의도가 뻔했다. 너무 뻔해 기가 막힐 정도다.
설마 저 나이 먹고 수능 성적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 할 줄이야. 고삐리들이나 하는 유치한 서열 놀음에 벌컥 화가 치밀었다.
‘건방진 새끼. 감히 누구 앞에서···.’
난 공부에 관해서라면 자부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다.
이정우 시절 천재 소릴 귀에 진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것도 천재 중에서도 보기 드물다는 ‘노력하는 천재’라는.
그 드높은 자부심을 ‘한낱 의대생’ 따위가 깎아내린 것이다.
그것도 예쁜 미씨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오기가 솟구쳤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의대생은 여전히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아니, 뭐 난 이 학생이 수학 엄청 잘 가르친다길래 같은 의대생인 줄로만 알았죠."
"국성대 체육교육과 다니면 고등학교 수학도 못 가르친다는 소립니까, 지금?"
언성을 높였지만 건방진 의대생은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놈은 내 말을 무시하더니 쪼르르 사모에게 말했다.
"어머님. 제 자랑 같아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저 고등학교 때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입상을···."
"이봐, 내가 지금 묻잖아."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미애 엄마는 중간에 낀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했고, 미애는 남자들 사이에 벌어진 자존심 대결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이봐? 너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몇 살이고 자시고, 그깟 올림피아드 좀 나갔다고 재는 거야?"
"뭐라고?"
그때 미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뼉을 쳤다.
짝-!
"자자, 싸우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어요? 둘이 수학 문제 풀어서 더 잘하는 사람한테 과외를 맡기는 거로. 어때요?"
과연 스무살 철부지다운 해법이다. 내가 동의 여부를 밝히기도 전에 의대생이 어이없는 듯 물었다.
"뭐라고? 나랑 저 국성대생이랑? 그것도 수학 문제로?"
‘하-. 저런 아름다운 씨발 새끼를 봤나. 잘해봐야 본과 3학년밖에 안 돼 보이는 핏덩이가 감히 하늘 같은 선배를 두고.’
[참, 주인님도 한국대 나오셨죠?]
‘나오기만 했냐? 입학 수석, 졸업도 수석. 아주 레젼설을 찍고 다녔는데. 아직도 후배들 사이에선 내 필기 노트가 족보로 돌아. 무려 2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리고 우리 때만 해도 자연대 떨어진 애들이 울면서 가던 곳이 의대였다고!’
[어쨌든 지금은 빠가잖습니까? 너무 무리 마시죠.]
‘로시! 너까지 이럴래? 존심 상해서 이대론 못 넘어가. 저 시건방진 자식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겠어.’
[무슨 수로 말입니까?]
‘그건 니가 찾아야지!’
[아니, 무턱대고 그렇게 찾으라고 하시면···.]
‘남은 포인트 다 날려도 되니까 방법을 찾아! 당장!’
[네, 넵! 바로 마켓 검색 시행하겠습니다.]
"국성대 다닌다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진짜 붙어봐요?"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수학 문제로 붙는다니까 그러지. 난 참고로 수능 문제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는 몸이라고."
어쭈?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르네?
누군 틀려봤냐? 고작 한국대 의대 좀 갔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니가?
"그럼 빨리 풀기로 가죠. 누가 더 빨리 정확히 푸는지. 어때요?"
[주, 주인님 정말 어쩌시려고···.]
‘넌 얼른 찾기나 하라니까? 나 쪽팔려 죽는 꼴 보고 싶어?’
[네넵! 검색 중입니다.]
의대생은 최 사장 와이프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모님, 어떻게 할까요? 진짜로 해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대답했다.
"우리 미애가 고집이 워낙 세서··· 제 말도 잘 안 들어요. 그리 하세요."
"알겠습니다. 들었지?"
"나도 귀 있어."
잠시 후 2층을 다녀온 미애가 모의고사 문제집 두 권을 들고 왔다. 과외를 위해 여벌로 쟁여둔 모양이었다.
"자, 그럼 두 분 선생님 떨어져 앉으시고."
졸지에 면접시험에 치르게 된 나와 의대생은 널찍한 응접 테이블 양 끝에 앉았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데도, 의대생은 컨닝 방지를 위해 들고 온 가방으로 칸막이를 세웠다.
‘얼씨구. 이 새끼가 진짜 가지가지 하네.’
"모의고사 5회로 갈게요. 그럼 시이-작!"
시험이 시작되자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최 사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응접실에는 나와 건방진 의대생, 그리고 심판 역할의 미애만 남게 되었다.
의대생 놈은 미애의 구령에 미친 듯이 샤프를 굴렸다. 나 역시 대학 이후 처음으로 수능 모의고사를 풀게 되었다.
‘지까짓 게 감히 나를 능멸해?’
오기가 발동해 덤빈 시험이었지만 1번 문제부터 막혔다. 해법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도통 계산이 되질 않았다. 내가 이 정도로 돌대가리가 되었을 줄이야.
‘으으! 로시, 얼른! 저 새끼 벌써 첫 장 넘어갔어!’
[자, 잠시만요, 찾았습니다! 이런 아이템은 어떠십니까?]
‘디스플레이 띄우지 말고 직접 설명해. 볼 시간도 없어.’
[넵. 행운의 오각 연필이란 아이템입니다. 오각형 모양의 연필을 굴리면 오지선다형 문제의 정답을 알려줍니다. 가격은···.]
‘야! 문제가 객관식만 있냐? 주관식은 다 버릴까?’
[아차차! 그럼 다시···.]
벽면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의대생 놈은 여전히 첫 장에 머물러 있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일부러 기지개까지 켜 가며 하품까지 했다.
"하암, 어제 MT 뒷풀이 갔다가 술을 너무 마셨나? 영 피곤하네. 얼른 풀고 잠이나 때려야지."
"MT는 너만 갔다 왔냐?"
"어? 또 반말한다?"
다시 시비가 붙자 미애가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더니 우릴 꾸짖었다.
"대학생분들, 시험 보는 데 잡담 금지에요."
거참, 누가 선생 될 사람이고, 누가 학생인지 모르겠군.
[주인님. 이건 어떻습니까? 굴절의 돋보기안경이라는 제품인데 반사광을 통해 비춘 내용을 확대해 보여줍니다. 마침 의대생 옆에 설치된 창문에 희미하게 시험지가 비치고 있으니 이 안경을 이용해···.]
‘나보고 컨닝하라는 소리야?’
[지금 컨닝이 대숩니까? 일단 문제부터 풀어야지요.]
‘그 말이 아니잖아! 이건 속도전이라고! 상대방 걸 보고 배끼면 한 박자 느릴 수밖에 없어! 무조건 먼저 푼 사람이 이긴단 말이야!’
[아! 제가 잠시 규칙을 깜빡했습니다. 주인님이 하도 보채시니까 정신이···.]
‘그게 인공지능으로서 할 소리냐?’
[금방 다른 제품을 찾아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점점 피가 말랐다.
시험이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지만 나는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오늘따라 덤벙대는 로시는 자꾸 엉뚱한 아이템을 추천했다.
아! 천하의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시험에서 지다니!
감독관처럼 주위를 돌며 시험지를 힐끔거린 미애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격한 풀이 속도에 이미 승부가 기울었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공부를 잘하는 지적인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타입인 것 같다.
즉, 이번 대결의 성패가 단순히 자존심 구기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차후 자매 덮밥 위업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
나는 보다 조급해졌다.
‘아오! 왜 이렇게 굼떠? 시간 다 가겠다!’
[주인님. 혹시 이정우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내가 누구였는지 몰라? 노력하는 천재 이정우야! 시험의 신, 불패의 제왕, 수석은 나의 것!’
[수식어가 지나치게 화려하시군요. 아무튼, 찾았습니다.]
‘뭔데?’
[특정한 과거의 시점으로 기억을 되돌려주는 아이템입니다.]
‘기억?’
[네, 주인님의 경우엔 영혼이 전이 되었기 때문에 환생 전 이정우의 기억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나보고 지금 시간여행이라도 하라는 소리야?’
[아닙니다. 해당 아이템은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 않습니까? 아무리 슬픈 기억도, 좋았던 추억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흐릿해지기 마련. 하지만 이 ‘추억의 음료’를 마시게 되면 주인님이 원하는 특정한 시점으로 기억을 되돌려 줍니다. 마치 어제 그 일이 있었던 것처럼요. 가격은 1,000 포인트입니다.]
‘넌 그런 아이템이 있었으면 왜 이제야 말하는데? 진작 알려줬음 지금껏 빠가로 살 필요도 없었잖아?’
[아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보군요. 해당 아이템은 나온지 3일밖에 안 된 신상입니다.]
‘신상이라니?’
[원래 아이템 마켓은 지구에 있는 인터넷 쇼핑몰과 흡사합니다. 인기가 많은 제품은 스테디셀러에 오르내리고, 안 팔리는 제품은 재고 떨이 행사도 하죠. 또 분기 단위로 새롭게 개발된 상품이 입고 되는데, 며칠 전 상당 수의 아이템들이 새롭게 입고 되었습니다. ‘추억의 음료’ 역시 막 출시된 따끈따끈한 제품이고요.]
‘아···.’
[참고로 말씀드리면, 본 아이템의 효력은 20분 정도입니다. 20분 동안 특정 시점의 기억이 활성화되었다, 효력이 끝나면 원상 복구됩니다. 아마 자주 사용하시기엔 가격부담이 크실 겁니다.]
‘어쨌건 20분 동안은 이정우로 살았던 시점의 기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거지?’
[네. 주인님의 과거는 환생 전의 이정우니까요. 사실 이런 경우는 이례적이긴 한데, 어쨌든 원칙상 그렇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내 머리가 가장 빠릿빠릿하던 시절.
그때가 언제였을까?
‘···정했어. 열아홉. 수능시험 보기 직전의 이정우의 기억으로.’
[알겠습니다. 타임 세팅에 맞게 재료를 배합한 뒤 호주머니로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남은 포인트는 대략 1,000포인트입니다.]
잠시 후 주머니가 불룩해지더니 박카스 크기의 아이템이 도착했다. 갈색으로 이루어진 표면은, 약국에서 흔히 파는 제품처럼 보였다.
마개를 따는 소리가 들리자 열심히 수학 문제를 풀던 의대생이 빈정거렸다.
"얼씨구? 각성제까지? 별짓 다 하는 구만, 진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음료를 마시는 순간,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능을 위해 고사장을 사전 방문하던 게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오오···. 이것이 바로 추억의 음료!’
[주인님, 지금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없습니다! 추억의 음료의 효력은 20분입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연필을 쥔 나는 피식 웃었다.
‘로시. 너 왜 내가 항상 올백 맞으면서 시험 보기 싫어했는지 모르지?’
[그건 왜 그렇습니까?]
‘문제를 하도 빨리 푸니까 할 일이 없어져 내리 잠만 잤거든.’
오랜만에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보자 나도 모르게 벅찬 희열이 끌어 올랐다.
그래, 이 느낌이다.
내 두뇌의 최전성기.
열아홉살의 이정우.
< 309. 애자매-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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