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 애자매-8- >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도훈을 발견하고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가슴을 내보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천히 젖은 머리를 넘기더니, 도훈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쯤 되자 민망해진 쪽은 오히려 도훈이었다.
그는 곧바로 시선을 회피한 채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여인은 물속 계단을 통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없는 나신.
그녀는 도훈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유유자적하며 비치베드로 다가왔다. 도훈은 난데없는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했다.
‘뭐, 뭐야? 왜 알몸으로 이쪽으로 오는 건데? 설마 미친 여잔가?’
[주인님이 이토록 쩔쩔 매시는 모습은 오랜만이군요.]
‘야! 내 반응이 정상적인 거야! 비정상은 저 여자라고!’
도훈의 머릿속으로 방금 전 훔쳐 본 여인의 나신이 박제된 것처럼 떠올랐다.
흠뻑 물에 젖은 피부, 큼지막한 젖가슴, 그리고 벗은 몸을 노출하고도 뻔뻔할 정도로 태연한 표정까지.
여자가 도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물었다.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데 누구시죠?"
도훈의 시선 아래로 여자 몸에서 흘러내린 물이 뚝뚝 떨어져졌다. 고개를 들면 올 누드의 여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게 저, 최 회장님 초대로···."
"아, 할아버지 손님이구나? 난 또 엄마 남친이 간도 크게 집까지 찾아 왔네 했네."
도훈은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엄마 남친 이라니? 이건 또 뭔 소리야?’
[저분이 최 회장이 손녀라면 최 사장의 부인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요?]
‘그 정돈 나도 알아들었어! 내가 궁금한 건 저 여자 말이 정말로 사실이냐는 거라고!’
헐벗은 모습을 외간남자에게 보여주고도 대수롭지 않아 하는 처녀. 숨겨진 남친이 있다는 최 사장의 마누라.
그리고 최 사장과 불륜 관계인 정비서.
그런 정비서를 노예처럼 업신 여기는 최회장.
나열된 사실들이 도훈의 머릿속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주고받은 대화 속에 너무나 엄청난 비밀이 담겨있었다. 도훈은 점점 미스테리가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대체 얼마나 막장인거야 이놈의 집구석은?’
"그런데···. 계속 그렇게 있으실 거예요?"
충격에 빠진 도훈을, 헐벗고 있던 여자가 환기시켰다.
"···네?"
"제 비치 타올 말이에요. 깔고 앉고 계시잖아요."
도훈이 흠칫 놀라 밑을 보니, 엉덩이에 커다란 수건이 깔려 있었다.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온 것은 타올 때문이었던 것이다.
"으앗,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도훈은 얼른 엉덩이에서 수건을 끄집어 여자가 있는 방향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앞을 보지 않고 바통을 주고받듯 내민 손이 하필 여자의 도톰한 엉덩이를 누르고 말았다.
물컹!
"흐억!"
"···후후. 고마워요."
‘뭐, 뭐가 고맙다는 건데? 이 여잔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나?’
수건을 받아든 여자가 타올로 전신을 둘렀다.
"이제 됐어요. 초면인데 인사나 하죠? 전 최희애라고 해요."
"이, 이도훈입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하는 도훈의 모습에 희애가 따지듯 물었다.
"이도훈씨? 사람 볼 땐 얼굴 보면서 얘기 해야죠."
‘크헉, 진짜 미친 여잔가? 왜 민망하게 자길 보라는 건데? 에이, 모르겠다. 자기가 보라고 했으니 나중에 시선강간이니 뭐니 허튼 소린 안 하겠지.’
도훈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 젖은 머리를 털어내는 희애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치 타올로 몸을 가리긴 했지만 노출된 부위가 미니 원피스를 방불케 할 정로 아슬아슬했다. 위로는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고, 아래는 허벅지 깊숙한 곳이 슬쩍 슬쩍 비추었다.
희애는 자신의 몸을 힐끔데는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손님이시라고요?"
"네."
"잘생기셨네요."
뜬금없는 칭찬에 도훈이 말을 더듬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남자가 그렇게 숫기가 없어요? 여자 벗은 모습 처음 봐요?"
[우오, 저런 캐릭터는 또 처음이군요. 도발적이랄까, 과감 하달까···.]
‘그런 수준이 아니야. 완전히 똘기가 있는 여자 같아.’
[그나저나 주인님 보고 숫기가 없다니··· 무척 건방진 발언 아닙니까? 미래의 난봉왕을 뭘로 보고.]
‘생각해보니 그러네? 솔직히 일부러 쳐다 본 것도 아니잖아?’
희애의 당돌한 행동에 당황하던 도훈은 슬슬 본연의 멘탈을 되찾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한테 휘둘릴 레벨은 한참 지났다.
그는 침대 위의 폭군이자, 숫처녀를 유린하는 강탈자.
맨투맨은 물론이거니와 12 VS 1 까지도 능히 버티는, 짐승 같은 정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자신을 얕잡아 보는 희애의 태도가 괘씸해진 도훈은, 마침내 반격을 돌입했다.
"···벗은 걸 처음 본 건 아니고, 희애 씨는 처음이니까요."
도훈의 대답에 희애가 묘한 표정으로 눈웃음 쳤다. 도훈이 가만 보니 웃을 때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남자의 방심을 뒤흔드는 데가 있었다.
‘아주 색기가 철철 넘치는 구나. 희애가 장손녀 맞지? 그 스물여섯이라는.’
[맞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몸매 하나는 끝내주네. 저렇게 잘빠진 여잔 희주 이후로 처음이야. 저 당찬 자신감의 근원이 바로 몸매 때문이겠지?’
그 순간 도훈은 오늘 마주친 ‘애자매’의 면면을 떠올렸다.
인형 같은 외모에 깜찍 발랄한 막내 미애.
성격은 제법 까칠하지만 얼굴은 가장 예쁜 차녀 수애.
그리고 백치미가 느껴지는 표정에, 핫 바디를 보유한 장녀 희애.
‘자매들이 하나 같이 미인이로군. 역시 잘사는 집 딸자식 다워.’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할아버지가 상당한 재력가잖아. 그럼 아들도 돈이 많겠지?’
[그런데요?]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가 미인을 차지하는 게 자본주의라는 제도거든.’
[호오, 마치 전생의 주인님처럼 요?]
‘인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아무튼 씨가 구려도 밭이 좋으니 딸들도 예쁠 수밖에. 게다가 한창 외모에 예민한 젊은 애들이니 관리에 얼마나 돈을 쳐 바르겠어?’
[아하, 그래서 잘사는 집 딸들이 예쁘다는 결론인가요?]
‘뭐 꼭 그렇다기 보단, 상대적으로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지.’
"후훗. 재밌는 분이네요, 도훈씬. 혹시 몇 살이세요?"
"전 스물 셋입니다."
"동생이구나.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난···."
"올해 스물여섯이시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정비서한테 들었어요."
"···쌍년이 쓸데없는 소릴."
순간 도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희애가 중얼대는 소리가 또렷이 귀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예? 방금 뭐라고···."
"응? 아냐. 혼잣말 했어. 근데 너 이거 떨어뜨린 거 아니니?"
희애가 도훈의 발치에 떨어진 담배를 줍기 위해 쪼그려 앉자, 순간 타올이 훅 벌어지며 가랑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도훈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뻔히 그곳을 쳐다보았다.
[오, 주인님! 역시 상남자시군요!]
‘보라는데 봐 줘야 예의가 아니겠어? 아까부터 일부러 보여주는 모습이 노츨증 환자 같은데 말이지.’
도훈의 시선을 느낀 희애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담배를 그대로 입에 물었다.
"내가 펴도 되지? 불 좀 붙여 줄래?"
"아예, 뭐."
도훈이 천연덕스럽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희애는 한껏 연기를 들이키더니 도훈의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저런 건방진 계집애가 감히 주인님께!]
‘놔 둬.’
[네?]
‘쟤,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를 우습게 보는 거라고. 예쁘고, 젊은 데다, 돈까지 많으니 남자들이 얼마나 쩔쩔 맸겠어? 그러니 알몸을 보이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지.’
[아···.]
‘상대를 동등하게 취급 안하는 거야. 로시 너라면 개, 돼지 앞에서 알몸을 보인다고 부끄럽게 여기겠어?’
[설마 그런···.]
‘저런 애들은 휘둘리는 상대한텐 전혀 매력을 못 느껴. 오히려 휘둘러 버려야지.’
연기를 맡은 도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희애가 입에 문 담배를 뺏었다.
"냄새 맡으니까 저도 피고 싶네요."
그리고는 그대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도훈의 대응에 희애가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 엄청 재밌는 애구나?"
"그래요?"
"응. 할아버지 손님이 너처럼 어린 것도 처음이고···. 하여튼 재밌네."
그때 멀리서 정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애 아가씨! 수영장에 계세요? 회장님께서 식사 준비하시랍니다!"
민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희애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것은 누군가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씨··· 재수 없게."
혼자 중얼거린 희애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았어! 갈게!"
다시 멀리서 민서가 대답했다.
"회장님 손님도 함께하니 늦으면 곤란해요."
"글쎄, 알았다니까!"
희애가 빼액 소리쳤다. 잠시 씩씩거리던 희애는 어느새 표정을 바꿔 도훈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너 우리 할아버지한테 되게 잘 보였나 보다?"
"네?"
"할아버지가 가족식사까지 초대하는 손님은 흔치 않거든. 무슨 사인데?"
"음, 그게···."
도훈의 대답하려하자 희애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니다. 어차피 식사자리서 듣겠구나. 그때 얘기해줘."
"네."
"난 그럼 잔소리 더 듣기 싫으니 옷 입으러 갈게. 여기서 나 만난 건 비밀이다?"
"그래요."
"그리고 너···."
희애가 시선을 물끄러미 내리더니 도훈의 바지춤을 향해 말했다.
"그건 좀 집어넣지? 크다고 유세떠는 것도 아니고."
"아!"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부푼 대물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까 가랑이가 벌어진 것을 본 뒤 자기도 모르게 텐트를 쳤던 것이다.
"후훗-. 귀엽기는. 그럼 좀 있다 봐?"
도훈을 골려준 희애는 그대로 타올을 두른 채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
[정말 대단한 여자군요.]
‘으으. 하필 그때 발기가 되어서는···.’
[생리현상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아무튼 주인님을 농락하는 여자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쳇, 그래봐야 잦이 박으면 헐떡대는 암캐일 뿐.’
[그거야 그렇죠. 한데 저 정도로 개방적인 성격이면 이번 자매덮밥 공략은 식은 죽 먹기겠는데요?]
‘그건 장담 못 해. 저렇게 대놓고 흘리는 애들이 오히려 더 식성이 까다로운 경우가 많으니까. 그리고 자매끼리 쓰리썸이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어려울 걸.’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나는 담뱃재를 털며 생각에 잠겼다.
이 집 안 사람들은 이상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있다. 사장과 불륜관계인 정민서도 그렇고, 각기 개성적인 세 손녀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최 회장의 저의가 가장 의심스럽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민서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네, 사장님 회장님께서 저녁 드시러 오시라고···."
이크, 왜 밖에서 통화를 하는 거지?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빠르게 몸을 숨겼다.
수영장 주변에 세워진 커다란 조경수에 몸을 숨기자 반대편에서 핸드폰을 든 민서가 천천히 수영장 쪽으로 걸어왔다.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요. 네, 어제 말했던 그 대학생요."
사장이란 호칭으로 보아 민서가 통화 중인 사람은 최 사장으로 생각되었다.
‘흐음. 회장 비서가 사장에게 통화를 하는데 숨어서 통화를 한다라···.’
"그런데···, 사모님께서 오늘도 불시에 외출을···. 네, 아뇨. 김기사가 수행했습니다. 네, 네."
민서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조심스럽게 통화를 이어갔다.
"사장님. ···네, 오빠. 죄송하지만 이번 주말 약속은···. 아뇨.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
통화를 엿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로시, 저번에 쓴 음향증폭 스티커 쓸 수 있나?’
[현재로선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리 부착을 시켰으면 모를까 거리가 너무 멉니다.]
‘흐음. 아쉽군.’
통화를 마친 민서는 수영장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희애 아가씨가 또 숨어서 담배를···. 사장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민서는 꽁초를 주워 들고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쪼그려 숨어있던 조경수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이르자 응접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등을 보이고 앉은 사람은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정면에서 보이는 여자애는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막내 손녀 미애. 그리고 그 옆에는 꾀죄죄한 청년 하나가 안절부절 못한 채 손에 든 커피 잔을 부들거렸다.
"엄마, 이 사람 말고 더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미애야, 내가 말조심하랬지? 미안해요, 학생. 우리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이쪽에 계신 선생님은 수학이라면 전국에서 알아주는···."
"엇! 그 오빠다! 엄마 저기! 제가 말했던 그 오빠에요!"
미애가 벌떡 일어서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바람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과외를 구하러 온 의대생의 눈빛엔 적대감이 이글거렸고, 미애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나를 반겼으며, 나를 향해 뒤돌아선 여인은···.
‘헐, 저 사람이 미애 엄마?’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리고 말았다.
그녀는 스물여섯 살 먹은 딸을 두었다곤 믿기 어려울 만큼 젊고, 우아한 미시였던 것이다.
< 308. 애자매-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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