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25화 (305/2,000)

< 307. 애자매-7- >

최 회장의 옆에 서있던 민서가 차렷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바짝 긴장한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녀는 회장을 무척이나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희애 아가씬 올해로 스물여섯입니다. 셋이면 수애 아가씨랑 동갑입니다, 회장님."

"아아, 그랬었나? 나이를 먹으니 이제 손녀들 나이도 가물가물하는구먼."

‘첫째 이름이 희애고 아까 마주친 둘째가 수애라는 얜가? 그러고 보니 재수생은 미애라고 했는데···. 어째 손녀들 이름에 모두 "애"자 들어가네? 애자매 시리즈야 뭐야?’

"도훈군. 난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든다네. 혹시나 교재 하는 아가씨가 없으면 내 손녀사위 삼고 싶구먼. 허허허!"

"회, 회장님!"

갑작스런 회장의 제안에 민서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로 회장에게 말했다.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아드님께 먼저···."

"뭐? 내가 손녀 사윗감 하나도 못 고른다는 거야, 지금?"

"그, 그런 말씀이 아니고···."

회장이 언성을 높이자 민서가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곤 하지만, 방금 전 태도로 보아 노인네가 가진 입지가 여전히 상당한 것처럼 보였다. 경험상 저런 경우는 경영에선 물러서되 유산은 아직 상속하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역시, 사람이 나이 먹고도 대접받으려면 돈을 쥐고 있어야지. 뭘 좀 아

는 노인네로군.

정 비서를 일축한 최 회장이 다시 나에게 말했다.

"어떤가? 한 번 만나 볼 의향은 있는가? 우리 손녀들이 변변찮긴 해도 며늘아기를 닮아 얼굴은 무척 곱다네."

"어르신 저는···."

"왜 그러나? 혹시 만나는 처자가 있는 게야?"

"그건 아닙니다만, 저에겐 그 제안이 더 부담스럽군요."

"허어! 부담 같은 거 갖지 말래도 그러네. 내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하는 소리니."

‘이놈의 노인네가 무슨 뚜쟁이 귀신이 붙었나? 처음 본 사람한테 왜 손녀를 소개시켜 준다고 난리야?’

[어쨌든 손해 볼 것 없지 않습니까? 위업도 걸린 마당에요.]

‘그렇긴 한데, 준다고 덥석 물면 그거야 말로 없어 보이는 거야. 일단 사정을 더 알아보고.’

그때 최회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최회장이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그래, 김변. 중요한 얘기 아니면 손님 접대 중이니 나중에···. 뭐라?"

전화를 받던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한참 전화를 받던 회장은 잠시 폰을 내려놓더니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네. 중요한 전화가 와서. 잠깐 전화 좀 받고 오겠네."

"제가 도와 드릴까요 회장님?"

"아니. 혼자 할 수 있어."

휠체어를 끌어 준다는 것도 마다한 회장은 한 손으로 레버를 움직여 휠체어를 조작했다. 알고 보니 그가 앉은 휠체어는 전동으로 움직이는 기종이었다.

"어, 그래 계속 말해."

회장은 휠체어를 이동해 서재 밖으로 연결된 베란다로 나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우리에게 통화내용을 들려주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갑자기 둘만 남게 되자 뻘쭘해진 내가 민서에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굉장히 바쁘신가 보군요."

"아마···. 변호사일 거예요. 요즘 상속문제로 복잡해서."

‘상속? 하긴 나이가 나이니 만큼 슬슬 준비 해야겠지. 근데 뭔가 복잡하다는 걸까? 일성 그룹은 후계자가 이미 정해진 기업이 아니었나?’

내가 알기론 일성은 가족회사에 가까웠다.

창립자인 회장은 기업을 주식회사로 상장하지 않고 모든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고, 실제로 경영을 맡은 사장 자리도 하나 뿐인 아들에게 승계했다.

‘가만, 하나 뿐인 아들?’

쌔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최 회장은 손녀가 셋이다. 그 말은 최 사장에게 자식이 없다는 소리. 한마디로 그의 손녀사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건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혹시 아까 화장실에서 본 여자 분이 손녀 분이세요?"

"네. 둘째요."

"둘째면···. 첫째도 있다는 소리네요?"

"맞아요. 손녀분이 모두 세분이세요. 각각 3살 터울이고요."

"그럼 남자 형제는 없나요?"

계속된 물음에 민서의 눈꼬리가 가늘어 졌다.

"···왜요? 갑자기 관심이 생기셨나요? 회장님 앞에선 그렇게 점잔 빼시더니."

예상외로 공격적인 반응이다.

그녀의 배경을 몰랐다면 겉 다르고 속 다른 나의 태도에 반감을 가져 그런 줄 착각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정보창을 통해 이미 그녀가 최 사장과 불륜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호라,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것은 몹시도 지저분한 그림이었다.

늙어가는 최 회장.

아직 후사가 마땅히 없는 최 사장.

그리고 최 사장의 애첩 정비서.

‘···게다가 유산 상속은 현재까지 진행 중이고 말이지.’

그제야 최 회장이 손녀딸을 소개시켜준다고 했을 때, 움찔 놀라던 정비서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만약 최회장이 죽기 전 손녀사위가 생긴다면 유산을 둘러싸고 또 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꼴 일테니.

‘흐음, 왠지 지저분한 싸움에 끼어든 모양샌데?’

[구체적이 증거도 없이 지나친 억측 아닙니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는 군.’

[대체 어쩌시려고요?]

‘나에게 돈은 그닥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 돈이 필요했음 일성보다 훨씬 큰 기업인 삼현그룹의 고은성을 꾀었겠지.’

[하긴, 주인님이 맘만 먹는다면 세상 어떤 여자도 자빠뜨릴 수 있으시겠죠.]

‘단, 이걸 잘만 이용하면 위업도 달성하면서, 짭짤하게 용돈벌이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좋은 계획이 있으십니까?]

‘일단 민서랑 얘기부터 마무리하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거에요. 실은 아까 2층 올라갔을 때 다른 손녀 분도 본 것 같아서."

"2층이면···. 미애 아가씨?"

"화장실 찾는데 갑자기 방으로 부르더라고요. 수학 문제 좀 풀어 달라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마도 저를 면접 온 과외선생으로 착각했나 봐요."

"아···."

민서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때마침 통화를 끝낸 최 회장이 다시 휠체어를 움직여 되돌아왔다.

"미안하게 됐구만. 급한 전화라···. 손님을 초대에 놓고 면목이 없네 그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생각은 해 보았나?"

"그게 좀 갑작스러워서···. 아무래도 어르신께서 주선하는 자리니 부담되기도 하고."

"허어."

"실은 이쪽에 계신 비서 분께서 식사만 한 끼 하자고 해서 온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례니 소개니 말씀하시니 솔직히 당황스럽네요."

회장은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너무 마음만 앞섰구먼. 도훈 군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말나온 김에 저녁이나 들고 가게나. 정양, 식사는 어떻게 되고 있나?"

"주방에서 준비 중입니다."

"가족 식사로 할 테니 손녀들까지 다 오라고 해."

"네? 두 분이서만 드시는 게 아니고요?"

"내가 지금 자네한테 같은 말 두 번 해야 되나?"

최 회장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민서가 바짝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그럼 가족 식사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봐."

"네."

민서가 허둥대며 서재를 나섰다. 왠지 비서라기보단 노예에 가까워 보인다. 정양이라고 부르는 호칭도 이상하고. 둘 사이에 남모를 비밀이 있는 걸까?

민서를 내보낸 회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애로운 미소로 나에게 말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어 다행이구만."

"회장님 그런데 가족식사라면···."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원래 우리 가족은 저녁은 다 같이 먹는 게 가풍이거든. 손님이 왔을 땐 종종 같이 들기도 하고."

"아···,네."

"그러니 부담같이 말고 함께 하시게나. 혹시 식사 때 마음에 드는 손녀가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도 좋고."

‘처음부터 이 속셈이었나? 그런데 왜 나에게 자꾸 자기 손녀를 엮으려는 거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

[글쎄요. 정말로 주인님을 손녀사위 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닐지?]

‘아서라. 저 노인네 머릿속엔 능구렁이 수십 마리가 들어 있을 걸? 저런 성취를 이룬 사람이 그렇게 단순 할 것 같아? 분명 노림수가 있는 거야.’

[의심이 많은 것도 병입니다, 주인님.]

‘정보 창으로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은데 쿨타임 때문에 쓰지 못하는 게 아쉽군. 뭔가 다른 방법 없을까?’

[너의 목소리가 보여, 이어폰을 쓰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건 너무 티 나잖아. 노인네랑 둘뿐인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으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한참 무슨 꿍꿍인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최 회장이 물었다.

"그나저나 도훈군은 꿈이 뭔가?"

"꿈이요?"

"그래, 꿈. 이제 대학생이면 한창 꿈을 펼칠 나이가 아닌가? 혹시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전 세계 여자를 따먹고 다니며 카사노바를 능가하는 난봉왕이 되는 겁니다."

···라고 말했다간 지금껏 쌓아온 좋은 이미지가 허사가 되버리겠지.

"전 체육 선생님이 되는 게 꿈입니다."

"체육 선생?"

"네. 그래서 사범대 체육교육과에 다니고 있고요."

"허허. 좋은 꿈이군."

‘좋기는 개뿔. 미남 박명한 이도훈의 유일한 소원이 그것뿐이라 대신 들어주는 거지. 안 그러면 다시 저승으로 끌려갈지 모르니까.’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를 일궈 낸 최회장에게 체육교사라는 직업은 너무나도 소박한 소원일 것이다. 하지만 최회장은 제법 진지한 태도로 나에게 말했다.

"나도 한때는 포부를 크게 갖고 거창한 꿈을 이루는 게 멋져 보일 때도 있었네. 하지만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다 부질없더구먼. 너무 많은 것을 갖게 되면 그만큼 근심도 늘어나는 법이랄까···. 이런, 내가 젊은 친구에게 쓸데없는 소릴 했군. 미안하네, 늙으면 이

렇게 잔소리만 늘어가지고, 원."

최 회장의 표정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거대한 저택에 사는 그가, 좁은 원룸에 사는 나보다 훨씬 공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탓은 왜 일까?

"그러고 보니 체육 전공이라 그렇게 몸이 좋았구만? 즐겨하는 운동이라도 있는가?"

"평소엔 헬스를 하는 편입니다. 배구 동아리도 들어 있고요."

"운동 좋지. 나도 소싯적엔 운동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도 선생이 될 사람이니 공부도 소홀히 마시게. 자랑은 아니네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8할이 저기 있는 책 덕분이라네."

최회장은 벽면을 둘러싼 책장을 가리켰다. 아까 민서가 했던 얘기로 보아 단순히 장식용도로 놓아둔 책은 아닌 것 같다. 아무렴, 책만큼 좋은 건 없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허허. 자네는 예의도 무척 바르고만. 나에게도 자네 같은 손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손주분이··· 없으신가요?"

호구조사 시간이다.

"내 박복해 아들하나만 겨우 건사했다네. 자식 놈은 딸만 셋을 낳았고."

"아···."

"며늘아기가 손주 한 번 보려고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는데 내리 딸만 낳더구먼. 인력으론 안되는 일도 있는 법이니."

"그래도 요즘엔 딸이 더 인기라던데요?"

"나도 손녀들을 좋아한다네. 문제는 이대로는 그룹을 이어갈 후계자가 없으니···."

역시 그것이었나?

최 회장은 늙고 병들어 가는 자신을 보며 뒷일을 걱정했을 것이다. 아들인 최 사장 역시 적지 않은 나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죽기 전 믿을 만한 손녀사위를 들이는 것일 터.

‘그래서 자꾸 자기 손녀를 만나보라고 했던 걸까?’

[이건 엄청난 희소식 아닙니까? 지금 최 회장이 주인님은 차차기 후계자 감으로 낙점하고 싶다는 거잖습니까?]

‘후계자는 무슨···. 김칫국 마시지 마. 이 정도 집안이면 혼사도 엄청 들어 올 텐데, 나 같은 게 뭐라고.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뭐가 말입니까?]

‘그 유산 말이야.’

[네?]

‘자꾸 변호사랑 상의하면서 상속을 미루는 모습이 수상쩍지 않았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생각해봐. 아들이 하나뿐이니 언젠간 가진 재산을 다 물려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죠.]

‘근데 뜬금없이 손녀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흐음. 그러니까 최 회장이 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인님을 이용하려 한다고요?]

‘그렇지. 어쩌면 그에겐 그럴듯한 배우가 필요한 걸지도. 꿈이 교사인데다 돈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지. 어차피 쓰다 버릴 엑스트라라면.’

[하지만 회장이 그렇게까지 자식을 견제하면서 얻으려는 게 뭘까요?]

나는 최 회장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감정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복잡해 보였다. 어찌 보면 늙은이의 교활함 같고, 혹은 속세에 미련을 버린 해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글쎄다. 그게 뭐건 간에 나랑은 상관없지. 적당히 어울려 주는 척 하면서 내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거야.’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최회장은 번호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거참, 김변 이 사람 성격하고는 내가 다시 연락한대도···."

"여기서 통화 하세요. 제가 나가 볼게요."

"으, 응?"

"저 때문에 굳이 베란다까지 나가지 마시라고요. 실례가 안되면 잠시 집안 구경 좀 해도 될까요? 벽에 좋은 그림 많이 걸려 있던데."

"아, 그래주겠나? 미안하구만.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정양에게 부탁하시게."

"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왔다.

***

도훈은 저택을 나와 마당에 이르렀다. 갑자기 담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저택의 앞마당은 풋살장 만큼 넓었다. 잔디와 조경용 수목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구석에는 개인 수영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야, 이런 거 보면 돈 많은 게 좋긴 좋은 것 같기도···."

도훈은 담배를 꼬나물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개인 수영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도훈이 수영장 주변에 설치 된 비치 베드에 걸터앉는데, 갑자기 물속에서 한 여성이 솟아올랐다. 아마도 물 밑에서 잠수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뜨억!"

여성과 마주친 도훈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그대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물속에서 나온 여성이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307. 애자매-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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