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 애자매-6- >
"응? 나 학생은 맞는데 재수생이거든? 면허도 있어."
알고 보니 깜찍해 보이는 소녀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올해로 스무살인 재수생이었다. 워낙 앳돼 보이는 외모에 나도 모르게 고등학생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기야 열아홉살이나 스무살이나 겉만 봐선 구분이 안 가는 게 정상이지.
"아···."
재수생이라고 나이를 밝힌 여학생은 탁상시계를 보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앗! 곧 아빠 오겠어! 빨리 이거 하나만 풀어줘, 응?"
그녀는 내 팔을 억지로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그 와중에 봉긋한 가슴이 팔뚝에 물컹하고 부딪혔다.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배시시 보조개를 만들어 웃어 보였다.
‘어린 것이 발칙하기는. 가만있자, 그나저나 아빠라는 사람이 설마 최회장은 아닐 테고 아마 최사장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딸내민가 보군. 근데 최사장이 늦둥이를 낳았나? 아까 싸이코메트리 영상으로 봤을 땐 나이가 제법 들어 보였는데···.’
여학생이 가리킨 문제는 역행렬 연산 문제였다.
아이큐가 빠가로 바뀌긴 했지만, 전형적인 문제의 풀이 기법은 경험적으로 외우고 있는 상태였다. 문제를 보는순간 나도 모르게 해법이 튀어 나왔다. 역시 수학은 암기다.
"음, 이 문제는 그러니까···."
수식을 대충 설명하자 여학생은 대번에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항! 그거랑그거랑 곱하면 되는 거였어? 아이씨, 반대로 해서 답이 안 나온 거구나."
최사장의 딸은 겉보기엔 발랑 까진 것처럼 보였지만, 보기보다 영특한 편인 것 같았다. 대략적인 수식만 설명해주자 혼자서 술술 문제를 풀어 나갔다. 어쩌면 빠가도 변해버린 나보다 계산 속도는 훨씬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이렇게 곱해서···."
대충 폼을 보니 재수학원은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과외 선생을 불러 독학을 하는 모양이다. 책장위로 수북이 쌓여있는 문제집들이 상당했다.
그러고 보니 나보고 한국대 의대생이냐 물었던가?
전국 상위 0.001%만 갈 수 있는 의대생의 과외 페이는 얼마나 하는 걸까? 나도 과거 한국대 다닐 적 과외를 제법 했지만, 이 정도로 부잣집은 처음이라 쉽사리 감이 오질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녀가 볼펜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와, 다 풀었다! 오빠 진짜 짱 잘 가르친다? 엄마한테 말해서 당장 계약하라고 할게."
점점 오해가 깊어지는 것 같다.
그때 1층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훈씨 어디 계세요? 화장실 가셨나?"
‘이크, 민서구나. 나를 찾나보군.’
나는 벌떡 일어서 재수생에게 말했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난 과외 구하러 온 학생이 아냐."
"엥? 그럼?"
"그게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
말하는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민서가 끝내 전화를 건 모양이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민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씨, 어디 있어요? 회장님 지금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집이 하도 커서 잠시 둘러보고 있었어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다시 재수생에게 말했다.
"암튼,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오빠 이름이 도훈이야?"
"응? 어."
"만나서 반가워. 난 미애라고 해. 최미애."
뜬금없이 자기소개를 마친 미애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지? 나랑 악수하자는 건가? 무척이나 제멋대로인 계집애다. 나는 악수를 하는 대신 미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파이팅을 외쳤다.
"힘내, 재수생. 그럼 난 이만."
"어디가게?"
"누가 나 찾아서 지금 가봐야 해."
"정비서 말이지?"
"응."
"혹시 오빠 정비서 남친이야?"
"아닌데."
"그럼?"
"초대받은 손님이랄까? 아무튼 나 간다."
더 이상 여기 있다간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 서둘러 방을 나섰다. 계단으로 내려가자 민서가 1층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도드라진 선정적인 포즈였다.
"이층 가셨어요?"
"아, 네. 화장실 좀 찾느라고."
"화장실은 1층에도 있는데."
"집이 너무 넓어서 못 찾았어요."
정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어린애 꾸중하듯 말했다.
"도훈씨. 회장님 손님이긴 하지만 마음대로 집을 돌아다니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유념해 주세요. 집안에 워낙 고가의 물건이 많거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네."
"지금 회장님 서재에 기다리고 계세요. 이쪽으로···."
민서가 사무적인 톤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 아까 담배 피며 나눈 대화 이후 나에 대한 태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
‘흥. 불륜녀 주제에, 띠껍게 굴긴.’
나는 민서를 따라 걸었다.
검은 스커트 아래로 민서의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걸음걸이 하나에도 교태가 넘쳤다.
‘쯧쯧. 저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니 나이 먹은 사장이 가만 둘리 있나.’
[민서 양에게 굉장히 비판적이시군요.]
‘당연하지. 나쁜 짓을 하고 다니니까.’
[좀 솔직해 지십시오. 주인님도 은근 관심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저 불륜녀한테?’
[주인님의 시신경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저 역시 공유하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다면 왜 아까부터 계속 민서양의 몸매를 훔쳐보고 계시죠?]
윽, 이 눈치 빠른 녀석.
‘그건 사내로선 본능 같은 거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어쨌든 주인님 원칙대로면 민서양은 유부녀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파탄낼 가정도 없는 여자가 아닙니까?]
‘됐다. 여자가 지천에 깔렸는데 굳이 저런 여자한테···.’
한참 로시와 옥신각신 하며 걷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끈나시를 입은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샴푸를 마치고 나온 것인지 머리엔 하얀 타올을 두르고 있었다.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꺄악! 누, 누구야?"
앞서 걷고 있던 민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가씨!"
"이 사람 뭐야?"
"회장님 손님이세요."
"할아버지?"
그녀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더니 황급히 가슴 앞을 가렸다. 속옷 보인 것도 아니면서 호들갑은···. 가슴도 얼마 안 큰 것 같은데. 젖은 머리에서 뚝뚝 물을 흘리던 여자가 민서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언니! 손님 왔으면 왔다고 귀뜸이나 해주지는!"
"정말 죄송합니다. 씻고 계신 줄 몰랐어요."
"어휴, 진짜! 내가 못 살아."
그녀는 씩씩거리며 방안으로 뛰어갔다.
의도치 않게 불청객이 된 기분이다.
"누구···?"
"회장님 둘째 손녀분이세요."
"아."
"저택에 대가족이 모여 살거든요. 삼일 전 일본 가신다고 출국했는데 오늘 집에 온 줄 몰랐네요. 많이 놀라셨죠?"
"아닙니다."
‘부잣집 딸래미 아니랄까봐 성깔 하고는. 그나저나 얼굴은 아까 그 재수생보다 훨씬 성숙한데? 대학생쯤 되려나?’
[주인님! 위업입니다, 위업!]
‘어?’
[관련된 위업이 있다고요!]
‘무슨 소리야?’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자매 덮밥 말입니다! 디스플레이에 띄워 드리겠습니다.]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16/108)
94. 자매 덮밥.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를 한 공간에서 동시공략 시 달성, 같이 할래? 위업 포인트 누적.)
-당신은 참으로 공평한 사내입니다.
-업적 보상 : 아이템 증정
「마법의 팬티」 - 착용하는 동안 정액 생산량을 왕성하게 증가시킵니다. 임신확률 최대 3배까지 증가.
‘아아! 맞다. 기억났어. 이런 위업이 있었지?’
[역시 장소를 바꾸니 바로 생성되는 군요.]
‘그러니까 아까 보았던 발칙한 재수생하고, 저 싸가지가 둘이 자매라는 거지?’
[민서 양이 방금 본 여자 분을 둘째 손녀라고 했으니, 처음 본 분은 아마도 막내 손녀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가만, 둘째? 그럼 한 명이 더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죠. 최소 삼자매인 것 같군요.]
‘호오라. 이거 흥미진진한데?’
오랜만에 위업 알림.
특히 이번 위업은 하수3레벨로 직행할 수 있는 17번째 위업이다. ‘마법의 팬티’라는 아이템은 현재로선 쓸모없어 보이지만, 레벨업 시 주어지는 보상만 해도 다른 보상이 필요 없을 정도다.
‘흐흐. 재수 좋은 놈은 넘어져도 처녀 치마폭 속이라더니···. 죽을 뻔한 노인네 도와준 보답을 이렇게 받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민서가 복도 끝의 커다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녀가 문에 노크를 했다.
똑똑-
"회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민서가 문고리를 잡더니 나를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마치고 안으로 걸어갔다,
최회장의 서재는 소설가의 방처럼 벽면이 온 통 하드커버의 책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한 가운데 깔린 레드 까펫과 고급의 원목으로 만든 커다란 책상은 그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대변하는 듯 했다. 최회장이 앉은 자세로 나를 환대했다.
"오, 드디어 왔구만. 미안허이, 내 다리가 아직 이 모양이라···."
자세히 보니 그는 의자가 아닌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휠체어에서 도로로 굴러 떨어지던 걸 구해줬던 기억이 난다. 거동이 불편한 걸까?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건 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참, 정양아."
회장은 정민서를 정양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무슨 다방 레지를 호명하는 느낌이다.
"가서 차 좀 내 오거라. 혹시 즐겨 마시는 차가 있는가?"
"전 커피면 다 좋습니다.."
"그럼 커피 한 잔이랑 난 쌍화차로 한 잔."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민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서재를 나섰다.
이제 커다란 서재엔 나와 최회장 둘 만 남게 되었다. 처음 볼 때와 무척 달라진 모습에 조금은 주눅이 든 게 사실이다.
‘환자복이 아닌 양복을 입고 있으니, 확실히 대기업 총수다운 아우라가 나는 구나. 처음 봤을 땐 평범한 늙은인 줄만 알았더니.’
"거기 앉게나."
"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최회장이 독대하는 모양새였다. 최회장이 입을 열었다.
"미안허이. 연락이 늦은 걸 양해해 주게나."
"아닙니다."
"정양한테 대충 들었겠지만 자네에게 사례를 하고 싶어 불렀다네."
최회장은 나에게 무척 호의적으로 보였다. 손주의 재롱을 지켜보는 할아버지 같은 눈빛이랄까? 이것이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 때문인지, 마성의 지배자 패시브로 인한 호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둘 다 일까?
"괜찮습니다. 특별히 사례를 받으려고 한 행동도 아닌걸요."
그것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 할 때 받을 보답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정중히 사양하자 회장이 다시 말했다.
"물론 알지, 알다마다. 그때도 나를 구해주고는 말도 없이 가버리지 않았던가? 간호사에게 급히 연락처를 물어 오라고 시켜놓고도 연락이 닿질 않아 혹시나 일부러 다른 번호를 알려 준 줄 알고 낙심했다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간호사가 끝자리 전화번호 하나를 잘못 알려줬지 뭔가?"
"그러셨군요."
‘그럼 박지애 덕에 연락이 늦춰진 거였군?’
"그런 자네라면 사례를 받지 않을 것은 예상 했었네. 하지만 나에겐 적지 않은 세월동안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다네."
"원칙이요?"
"받은 것은 기필코 갚아준다. 라는 것이지. 그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일세."
최회장의 눈빛은 너무도 진지해 살짝 숨이 막힐 정도였다. 어찌 보면 그에게서 느껴졌던 친근감은, 나와 동류(同流)인 사람에게 느끼는 동질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가···. 왠지 나와 비슷한데.’
"그러니 곧 죽을 늙은이 부탁 한 번만 들어주게나. 듣자하니 아직 대학생이라 하던데, 내 자네 졸업 때까지 등록금을 대주고 싶네만."
회장은 굉장히 완고했다. 평생을 기업인으로 살아 온 노익장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괜찮은 조건입니다, 주인님. 학비를 대주면 주인님도 더 이상 방학 때 알바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학비야 애초에 낼 생각 없었어. 장학금 받으면 그만이야.’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때 문이 열리며 민서가 트레이에 차를 가져왔다.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일로는 사례를 받을 순 없습니다."
커피를 내려놓던 민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조언대로 행동하지 않는 나의 태도를 질책하는 표정이었다.
"허허. 젊은이 고집이 보통이 아니군.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나는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최회장에게 대답했다. 이런 말을 할 때 조금이라도 건방지거나 오만해 보인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다.
"실은 회장님처럼 저에게도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도움을 줄 땐 절대 보답을 바라지 말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 회장님을 도와드린 것으로 사례를 받게 된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누군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돕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이번에 받게 될 도움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주인님께 그런 원칙도 있으셨습니가? 그저 난봉꾼인줄로만 알았는데···.]
‘인마. 내가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 줄 알아? 맨 앞의 제안은 최회장이 나를 시험한 거라고.’
[정말요?]
‘당연히. 내 그릇을 한 번 떠보는 거야. 앞으로 남은 학비라고 해봐야 돈 천만원 조금 넘을 걸? 그거 받고 떨어질 건지 묻는 거라고.’
물론 이는 혼자만의 추측이다. 하지만 기업으로 일가를 이룬 최회장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기왕 보답을 받을 거면 학비 정도로 만족해야 되겠어?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노인네한테?’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시군요. 거기서 한 번 더 튕길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최회장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야해. 다른 걸 떠나서 업적까지 걸린 마당에 쉽게 떨어지면 곤란하거든.’
예상대로 최회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나 보다.
"허허허! 내가 청년을 너무 어리게 봤구만. 그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스물 셋입니다."
"셋이면···. 희애랑 동갑이던가, 정양아?"
< 306. 애자매-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