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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23화 (303/2,000)

< 305. 애자매-5- >

도훈은 그 뒤부터 민서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예쁘장한 얼굴 뒤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자, 민서라는 사람 자체가 역겹게 느껴졌다.

‘불륜 저지르는 년놈들하곤 상종하지 않겠어. 하여간 이기적인 것들. 자기만 즐기면 장땡이지. 남의 가정이야 파탄나건 말건.’

도훈이 침묵하자 어색함을 감지한 민서가 물었다.

"혹시 많이 긴장되요?"

‘긴장은 개뿔? 너랑 말도 섞기 싫어서 그런다.’

"···아뇨."

도훈이 차갑게 대답했다.

"후훗. 너무 긴장 안 하셔도 돼요. 저도 처음 비서일 시작할 땐 부자들은 저희랑 다른 세상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겪어보니까 똑같은 사람이더라고요. 사소한 것에 울고 웃고 화내고··· 그냥 돈이 아주 조금 많은 것뿐이에요."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민서의 배려에도 도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겉으론 호인인척 상냥히 굴며, 뒤로 호박씨를 까는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퍽이나 그렇겠지. 사장의 애첩이니 오죽하겠어? 부자들 많이도 겪어 보셨겠지, 그 몸뚱이로.’

도훈은 여전히 침묵했지만, 민서는 끈기 있게 대화를 건넸다.

"그런데 도훈 씬 몇 살이에요?"

"스물 셋요."

"군대는 다녀왔고요?"

"네."

"일찍 다녀오셨구나. 저도 사실 도훈씨만한 동생있어요. 동생은 올 봄에 영장 나왔다고 지금 휴학 중인데 허구헌 날 PC방 가서 게임만 하더라고요. 언제 철이 들는지. 도훈씨는 안그랬죠?"

도훈은 계속 말을 걸어오는 민서가 귀찮다는 듯 더욱 쌀쌀맞게 대답했다.

"저, 피곤해서 그런데 잠깐 눈 좀 붙여도 될까요?"

"아, 그러셨구나! 도착까지 20분 남았으니까 좀 주무세요."

도훈의 냉랭한 태도에도 민서는 괘념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되려 운전석에서 버튼을 조작해 시트를 뒤로 눕혀주기까지 했다.

"이게 더 낫죠? 편히 자요."

"······."

도훈은 아예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몸 전체를 차창 쪽으로 돌렸다.

[많이 언짢으신 모양이군요.]

‘당연하지.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이러는지.’

[알다마다요. 주인님께 불륜이 얼마나 큰 트라우만지. 하지만 민서 양에게 이렇게까지 화내실 필요가 있을까요?]

‘뭐? 그럼 범죄자인 줄 뻔히 아는데 웃으며 얘기할까?’

[불륜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뿐만 아니라 여타 선진국에서도 애초부터 형법의 대상이 아니었죠. 성적 자기결정은 헌법에서 보장한 행복 추구의 권리로···.]

‘거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죄가 맞든 아니든 남의 가정을 깨뜨리는 짓이 나쁜 짓인 것 분명하잖아? 법에 없으니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야?’

[아니요. 분명히 나쁜 짓이지요. 저 역시 도덕적으로 옳지 못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주인님이 주장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어 보이는 군요.]

로시의 계속된 말대꾸에 도훈은 버럭 화가 치밀었다.

‘야! 너 지금 말 다했어? 내가 그런 말도 못 할 처지라고?’

도훈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로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죠. 주인님이 양다리, 아니 문어다리로 순진한 처녀들 마음껏 농락하는 것은 괜찮고, 민서 양이 유부남과 바람을 피우는 것은 절대 용서 받지 못할 행위라는 건가요? 어딘가 모순되지 않습니까?]

‘아, 아니 그건···. 야! 난 적어도 남의 여자는 안 건드렸잖아!’

[글쎄요? 수아 양도 분명 기춘 군의 여자 친구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수, 수아는···. 그래, 수아는 유부녀가 아니었잖아! 결혼도 안한 여자랑 한 게 어떻게 불륜이야?’

[쯧쯧. 갈수록 변명이 구차해지는 군요.]

‘이게 진짜!’

[제 말은! 굳이 죄의 경중을 가린다면 주인님도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다만 주인님께서 전생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불륜이라는 행위에 지나치게 적대적인 감정을 보인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뭐? 내가 싫다는 데 어쩌라고?’

[문제는 주인님이 플레이어라는 점이죠. 주인님의 수많은 위업 중에 상당수는 불륜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거든요.]

‘뭐라고? 아니 어떻게 그런···.’

[업적 시스템이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점을 알고 계시죠?]

‘그건 전에 들었잖아.’

[과거 플레이어들 상당수는 노예를 소유했지만 그로 인한 패널티는 없었습니다. 1처 5첩 역시 문제되지 않았죠. 그 땐 그게 맞았으니까요.]

‘흐음.’

[하지만 지금 위와 같은 행위를 한다? 당연히 불법입니다. 사람의 인신을 구속하고 착취하며, 첩을 여럿 두면서 중혼을 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선 말도 안되지요. 신께선 플레이어의 힘을 악용해 그런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대한민국에서 불륜은 더 이상 형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인님의 위업 시스템에서도 그러한 부분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불륜과 관련된 위업이 적어도 20%는 상회할 걸요?]

‘뭐, 뭐라고?’

도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108개의 업적 중 20%면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니다.

[물론 불륜을 하고 말고는 당연히 주인님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이 업적에 포함된 이상,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동성애나 근친을 포기하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봐야 한 두 개의 업적밖에 안되니까요. 하지만 불륜관련 위업을

포기하는 것은 랭커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흐음···. 참으로 더럽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군.’

[시대가 바뀌었으니까요. 주인님이 20년 전에 플레이어가 되셨다면 당연히 해당 업적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21세깁니다. 불륜으로 구속되는 사람은 전혀 없구요.]

도훈은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그는 현재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마누라의 바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상간남에게 칼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어찌나 억울했던지 저승사자에 붙들리기 전까지 석 달 동안이나 구천을 떠돌았다. 바람 피우는 것들은 죄다 때려 죽여 버리겠다며 피 맺힌 결의를 다진 적도 있었다.

따라서 대물로 다시 태어나 플레이어의 힘을 갖춘 후에도 그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임자 있는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

-둘 째, 유부녀는 결코 안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첫 번째 원칙은 이미 기춘의 여자 친구를 빼앗으면서 깨졌다. 물론 그녀를 기춘에게서 해방시킨다는 동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바람이었다.

그리고 이젠 두 번째 원칙까지 흔들릴 처지였다.

로시가 밝힌 이유 때문에.

108개 위업 중 16개의 업적을 해치웠다.

하지만 지금까지 클리어한 업적보다 더 많은 업적이 ‘불륜’이라는 행위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기엔 앞으로의 길이 험난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즉 상위 랭커가 되길 포기하던가, 원칙을 깨던 가 둘 중 하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훈은 불륜의 피해자였다.

그런 자신이 누군가를 또 다른 피해자로 내모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것이야 말로 내로남불이 아닌가?

양다리에 삼다리에 문어다리도 상관없고, 메갈을 따먹건 조교를 시키건, 후장을 뚫을 지언정, 적어도 단란한 가정을 깨뜨리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후-."

도훈이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자 운전 중이던 민서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답답하세요? 창문 좀 내려드려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친절했다. 도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예쁘고 착한 민서가, 부인이 있는 남자와 바람피우는 나쁜 여자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기업 비서실에 근무할 정도면 분명히 똑똑한 재원일 것이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몸매도 훌륭하다. 게다가 성격까지 자상하고 배려심 깊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왜? 뭐가 아쉬워서 유부남을?

도훈은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확 까놓고 묻고 싶었다.

대체 왜 바람을 피우는 거냐고.

"저기···."

"네. 말씀하세요."

"혹시 담배 펴도 되나요?"

"여기 서요?"

"아뇨. 어디 잠시 내려가지고. 지금 좀 참기가 힘드네요."

"아, 그러시구나. 진작 말씀하시지. 저쪽 갓길에 잠시 정차할게요."

민서가 차를 갓길에 붙이고 비상깜빡이를 켰다.

도훈은 인도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운전석에 있던 민서가 내리더니 도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섰다. 굳이 밖으로 내린 이유는 도훈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보고 도훈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담배는 안태우시죠?"

"네. 저는 비흡연자에요."

"그렇구나."

"몸에 안 좋잖아요."

"그래도 바람피우느니 담배를 피우는 게 낫지 않아요? 하하."

도훈이 뼈가 섞인 농담을 던졌다.

순간 시종일관 차분하던 민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데없는 도훈의 말에 민서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당황했다.

"아, 아니 무슨 그런 농담을···."

민서가 주춤하자 도훈이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왜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서씬 아니에요?"

"흠···. 다 피우셨음 출발하죠. 회장님 기다리시겠어요."

민서가 도망치듯 차에 올랐다.

도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씩 웃었다.

‘쳇. 허둥대기는. 저렇게 양심에 찔려 할 거면, 뭣하러 바람을 피운담?’

[역시 주인님은 짖궂으시네요.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정은 새꺄, 딸치고 찍 싸는 게 사정이고.’

[아무튼 주인님께서 무쪼록 불륜 트라우마를 극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로남불 하자는 것이 아니고, 플레이어가 너무 가리는 것이 많으면 결코 상위 랭커에 오를 수 없으니까요. 막말로 불법도 아닌데 꺼릴 이유가 있습니까?]

‘그만. 그건 내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압박주지마. 알겠어?’

[···알겠습니다.]

다시 차를 탔을 땐 차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민서는 민서대로 수심 깊은 얼굴로 운전에만 몰두했고, 도훈은 그런 민서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서로의 머릿속은 안개처럼 복잡해졌다.

***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회장님께 기별 넣고 올게요. 만약 독서 중이시면 조금은 기다려야 할지 몰라요. 회장님은 하루 한 시간 이상은 꼭 책을 읽어야 직성이 풀리시거든요."

나는 휘황찬란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고 민서가 희미하게 웃더니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자 온 몸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푹신함이 밀려왔다. 정말이지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우아, 부자는 진짜 부잔가 보네."

거실에 있는 벽걸이 TV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100인치도 넘어 보였다 그 옆에 세워진 오디오 장치 역시 수천만을 호가 한다는 브랜드였다. 고풍스러운 응접 테이블과 곳곳에 있는 배치된 소품 하나하나가 값비싼 골동품처럼 보였다.

"어랍쇼? 저건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림일 텐데?"

벽에 걸린 그림이 진품이라면 수억을 호가할 것이다. 대기업 회장 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호화찬란할 줄은 몰라싿. 나로선 솔직히 기가 눌릴 수밖에 없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는데 2층 계단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가 새로 온 과외 선생님이야?"

"으, 응?"

"엄마 아까 외출해서 면접 보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걸?"

고개를 돌리자 깜찍하게 생긴 여자애가 계단에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치마 사이로 늘씬한 다리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어린 계집애가 치마 짧은 거 보소?

‘뭐지? 날 과외 선생으로 오해하고 있나?’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아니고 오빠구나? 미안. 암튼 당장 할 일 없으면 나 수학 문제 하나만 알려줘."

"어? 나 말이야?"

"어차피 할 거잖아, 과외. 얼른."

소녀는 자기 말만 마치고는 쌩하니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머뭇대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올 거야? 엄마한테 전화해서 확 짜르라고 한다?"

"가, 갈게."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그래도 나 때문에 애꿎은 친구 실업자 만들 순 없으니···.’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밖에 볼 때도 굉장히 크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이렇게 긴 계단을 올라가야하는 저택이라니···. 대체 땅값도 비싼 서울에 이 정도 사이즈면 얼마나 비싼 집일까?

2층에 올라 방문이 열린 곳으로 들어갔다.

머리띠로 이마를 드러낸 소녀는 의자에 앉더니 빈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면 돼."

‘뭐지, 저 싸가지? 고작해야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주제에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네?’

"아니, 나는···."

‘나는 과외 면접 온 학생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찰나, 소녀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오빠 가까이서 보니까 잘생겼다?"

"어, 어?"

"한국대 의대 다닌다며? 나 과외 선생 수십 번 바꿔봤는데 오빠처럼 젊고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

소녀는 무턱이나 당돌했다.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그녀는, 머리에 손바닥을 올리더니 수평으로 내 가슴까지 쭉 그었다. 키를 재는 동작이었다.

"우아, 오빠 키 크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네? 키가 얼마나 돼?"

"아니 나는 지금 과외를 하러 온 게···."

"아, 맞다 맞다! 얼른 이것 좀 풀어줘. 아빠가 오늘 모의고사 80점 넘기면 나 차키 돌려 준댔거든."

‘모의고사? 차키?’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학생이 차를 몰아?"

< 305. 애자매-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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