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95화 (275/2,000)

< 277. 오빠랑 MT갈래?-17- >

***

"어? 안에 누구 있었네?"

태영은 깜짝 놀란 나머지 반대편 입구 지퍼를 열었다. 여학생들이 쓰는 2인용 텐트는 여름철용으로 앞뒤에 입구가 달린 구조였다.

태영이 지퍼를 열고 안을 들여 보자 등 돌려 앉아있던 서현이 급하게 입가를 훔쳤다. 태영은 헌팅 계획을 들켰다는 게 당혹스럽기도 하고, 안에 있던 서현이 인기척도 안내고 숨어있었다는 사실에 확 짜증이 치밀었다.

"야, 박서현. 너 왜 몰래 남 대화 엿듣고 있냐? 안에 있음 있다고 기척이라 낼 것이지···."

그러나 서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이 없었다. 실제로 입안에는 뭔가를 머금은 듯 볼이 볼록했다.

"너 뭐 먹어?"

‘우이씨, 막 뱉으려고 했는데 저 자식은 왜 문을 열고 지랄이람?’

계속 대답을 안 했다간 의심을 살 것이 두려웠던 서현은 끝내 입 안에 머금은 정액을 삼켰다.

꿀꺽-

"크으."

비리고 걸죽한 정액을 들이킨 서현이 무심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태영이 오해해 소리쳤다.

"어어! 너 낮 술 먹었지?"

"아니야."

"방금 분명히 뭐 삼키는 거 내가 봤거든?"

"그, 그냥 간식이야."

"무슨 간식? 어, 입술에 묻어있네?"

‘헉, 씨발.’

태영이 입술을 가리키자 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훔치더니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요, 요거트였어."

"요거트라고?"

"그래 요거트. 배고파서 먹고 있었어."

"참나, 안에 있으면 인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몰래 숨어서 까먹는 건 뭔냐? 누가 보면 뺏어 먹기라도 한데?"

"내가 내 텐트에서 간식 먹겠다는데 니가 왠 참견이야?"

도를 넘는 태영의 지적에 서현이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한참 펠라를 하던 중에 허겁지겁 끝낸 것이 못내 아쉬운 그녀였다.

"그리고 너! 왜 여자 텐트 함부로 열어보니? 변태세요?"

"아, 아니 나는 그냥···."

할 말을 잃은 태영이 뒷걸음질 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평소 조용하던 서현과는 전혀 달랐다. 깨갱거리는 태영을 향해 서현이 지엄한 축객령을 내렸다.

"지퍼 확실히 닫아. 바람 들어오니까."

"미, 미안."

지퍼를 내리며 태영이 간청했다.

"근데 서현아, 우리 동기들 오늘 밤 헌팅하러 가는 거 다른 여자애들한텐 비밀로 해줄 거지?"

"내가 왜?"

"한 번만 눈 감아 줘. 우리가 남이야?"

"어, 남이야."

"에잇 진짜, 박서현 의리 없게 이럴래?"

"난 혼자 숨어서 요거트나 까먹는 의리 없는 여자맞거든? 됐고, 문이나 빨리 닫어."

뒷문을 닫은 태영이 난처한 얼굴로 도훈에게 다가갔다. 입구에 붙어 있던 도훈은 어느새 바닥에 앉아 지주끈을 고쳐 메는 중이었다.

"형, 어떡하죠. 안에 서현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뭘 어째? 학과 사람들한테 얼굴 팔릴 각오하고 무용과에 들이대든지, 안 되겠음 발 닦고 잠이나 자야지."

"혀엉! 그렇게 남 일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형도 같이 하는 거잖아요."

"난 솔직히 무용과 별로 관심 없어."

물론 도훈도 인접한 곳에 무용과 학생들이 있다는 제보에 흥미가 동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체육과 내부에서 달성해야 할 업적으로 힘을 분산시킬 상황이 아니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순간.

도훈은 뉴페이스 보다 위업을 택했다.

‘까짓 무용과···, 맘먹으면 언제든 자빠뜨릴 수 있으니까.’

주머니 속에 제 물건 끄집어내듯 여자를 따먹는 도훈이기에 할 수 있는 오만한 발상이었다.

결국 태영의 야심찬 계획은 시작도 전에 암초에 걸려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믿었던 에이스 도훈마저 시큰둥한데다, 자칫 MT와서 헌팅이나 하고 다니는 밝힘증 환자로 낙인찍힐 상황이었다.

태영이 풀 죽은 그때, 본부텐트에서 도시락을 수령한 정음이 돌아왔다.

"도훈 선배. 혹시 몰라 선배 것도 챙겨왔는데 저희랑 같이 드실래요?"

"진짜? 고마워 정음아.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어? 태영이 넌 여기서 뭐해? 오는 길에 보니 남자애들 지금 식사하고 있던데?"

"···별로 입맛 없어."

"그래? 별일이네? 서현아, 밥 먹고 하자."

바닥에 깐 돗자리 위에 정음이 도시락을 펼치는 사이 도훈과 서현 그리고 태영이 둘러앉았다. 다들 도시락을 열고 점심을 먹는 와중에, 멍 때리는 태영이 불편했던지 정음이 물었다.

"너 진짜로 밥 안 먹을거야? 도시락 가져오기 귀찮아서 그런 거면 내가 가져다줄까?"

정음의 배려에 서현이 발끈 했다.

"넵 둬. 자기는 손이 없니, 발이 없니? 알아서 가져다 먹겠지."

"그래도 배고플 텐데···. 아님 내거라도 같이 나눠 먹을래?"

정음은 굶고 있는 태영이 안쓰러웠던지 도시락 뚜껑에 자기 밥을 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훈은 두 사람의 마음 씀씀이에 정음 쪽으로 기울어졌다.

‘역시 우리 정음이가 최고구나. 착하기도 하지. 확실히 예쁜 애들이 성격도 좋다니까?’

"정음아, 버릇 나빠져. 주지 마. 야, 정태영. 얼른 너네 텐트로 가. 왜 성가시게 여기서 죽치고 있니?"

계속되는 서현의 핀잔에 태영도 열이 받았다.

어차피 무용과 헌팅도 엎어진 거, 될대로 되라였다.

"남이사 죽치건 말건 뭔 상관? 나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도훈이형 때문에 왔거든?"

"그럼 민폐 끼치지 말고 니 도시락이나 받아 오라고! 왜 애꿎은 정음이 꺼 뺏어 먹어?"

"남이 주는 것도 먹음 안 돼? 하긴 저렇게 식탐이 넘치니 숨어서 요거트나 까먹고 있었겠지. 남의 대화나 엿듣고."

정음은 갑자기 시비가 붙은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다.

"요거트라니? 서현이 너 요거트 있었어?"

"어, 어. 아니 가방 안에···."

"그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보다 못한 도훈이 나섰다.

"야! 니들 밥 먹는데 왜 그래? 너희들 내가 엄청 편한가 보다?"

"앗,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오빠."

"그리고 태영이 넌 잠깐 나 좀 보자."

도훈이 도시락을 두고 일어서자 태영이 고개를 숙이며 뒤따랐다. 정음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서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요거트 이야기는 쏙 빼놓고.

멀리 나무 뒤로 돌아 간 도훈이 태영을 나무랬다.

"정태영."

"넵."

"형이 좋게 대해주니까 아주 막 나간다?"

"아닙니다."

"거 헌팅이 뭐라고 밥 먹는데 소릴 지르냐? 밥 맛 떨어지게."

"죄송합니다."

태영은 바짝 긴장한 체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체육과의 엄한 군기를 떠올린 그는, 까딱하면 도훈에게 얼차려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훈은 그를 혼내는 대신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너 그렇게 여자 만나고 싶냐?"

"네?"

"아니면 왜 안달난 사람처럼 굴어? 없어 보이게."

도훈의 말에 태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형은 인기 많으시니까 잘 모르실거예요."

"뭐가?"

"까놓고 말해서 저희 동기 남자애들 과에서 찬밥이잖아요."

"그게 무슨 소린데?"

태영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여자애들 저희 동기들 남자취급도 안 해요."

"음."

도훈은 뜨끔했다.

태영이 가진 불만의 원인이 어쩌면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8선녀를 독차지하고 꽉 잡고 있으니 당연히 같은 1학년들은 닭쫓던 개 신세.

하나를 위한 전부.

하렘 왕국의 구축에는 필연적으로 도태된 사내들의 불만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왕 말문을 튼 태영이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동기 여자들이 형을 좋아하는 건 저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그렇게 하겠다는 데 어쩌겠어요."

"······."

"그래도 저희도 이제 막 대학 왔고, CC도 하고 싶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헌팅 하려는 거였어?"

"네. 저희라고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위로 여자 선배도 별로 없지, 그나마 여자들 많은 우리 학번은 동기들 남자 취급도 안 해주지. 진짜 이러다 여자 손도 못 잡고 군대 가게 생겼다니까요?"

태영의 말을 듣던 도훈은 살짝 양심이 찔렸다.

생각해보면 여자를 밝히는 태영에게 자꾸 빼앗기만 했다.

그가 이상형으로 여기던 BJ 하서윤도 홀라당 따먹고, 사찰 답사 가서는 그가 공을 들이고 있던 와세다 교환학생 료코마저 후르륵 접수했다.

"근데 기껏 세운 헌팅 계획에 서현이까지 초를 치니···. 저도 모르게 흥분했어요."

"쯧쯧."

"정말 죄송해요 형."

"니가 진짜로 여자가 궁하긴 한가보네."

"그렇다니까요."

"어차피 무용과는 서현이 때문에 물 건너 간 분위기고, 이를 어쩐다···."

도훈은 불쌍한 태영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군. 한지연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혹시 미술과는 어떠냐?"

"네? 미술과요?"

도훈의 말에 태영이 깜짝 놀랐다. 혼날 것을 각오하고 따라왔는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 도훈이 솔깃한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그래. 미술과도 여기로 MT왔거든. 무용과보단 덜하지만 거기도 심하게 여초야."

"그럼 미술과랑 헌팅을?"

"헌팅 아니고. 그래, 방팅이라고 하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어. 교양수업 때 친해진 애, 내가 연락처 갖고 있어."

"오오오! 역시 도훈이 형!"

"호들갑 떨지 마 인마. 물어봐서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

"형님, 꼭 부탁드릴게요. 지금 저희 동기들 잔뜩 기대하고 있어가지고···."

"알았어. 톡 보내고 답장 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네! 형!"

태영이 도훈을 구세주처럼 떠받들었다.

그가 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지는 꿈에도 모른 체.

***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 국성대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집합 신호에 한데 모였다. 어디선가 공수해온 유격용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도훈이 어수선하게 서 있던 학생들을 정렬시킨 뒤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체육과 15학번 이도훈입니다."

"와! 잘생겼다."

"멋있다!"

"쉿-"

도훈이 손가락을 세워 입에 붙이자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선글라스로 눈까지 가린 그는 어딘지 모르게 엄숙한 군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여러분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죠?"

"넵."

"MT는 멤버쉽을 기르는 트레이닝입니다. 동기애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빠르게 길러진다고 하죠."

도훈은 한껏 무게를 잡으며 교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과 훈련시 주의사항을 되새김질 했다. 평소와 다른 진지한 도훈의 모습에 다들 긴장한 체 본격적인 MT가 막을 올렸음을 실감했다.

"그럼 몸부터 풀고 시작합니다. 팔 벌려 뛰기. 100회."

"예, 예?"

"귀 안들립니까?"

"아닙니다!"

"100회 시작."

삑-삐빅-

도훈이 호루라기로 구령을 붙이자 4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일제히 팔 벌려 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운동을 전공으로 하는 체육교육과라고 한들 초장부터 100회는 굉장한 무리였다.

헉헉대는 학생들이 속출하며 정신력이 흐트러졌다.

삑-비빅-

"구십구!"

삑-비빅-

"백!"

결국 정신 줄을 놓은 학생 한명이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숫자를 연호하고 말았다. 도훈의 입매가 야비하게 비틀어졌다.

"방금 백이라고 했습니까? PT 마지막 구령은 말하지 않는 거 모릅니까?"

"잘하겠습니다."

"당연히 잘해야지. 그럼 다시 100회 시작."

"아, 쫌."

"지린다."

"작정했네, 아주."

얼결에 참여한 4학년들 사이에서 불평불만이 쏟아졌다. 다른 학년과 달리 도훈과 같은 입학동기인 그들은, 동기에게 받는 얼차려가 무척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도훈이 감정없이 다시 숫자를 올렸다.

"120회."

"야! 적당히 해."

"그래, 우리가 무슨 벌 받으러 여기까지 왔니?"

"150."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점점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갔다.

MT에서 교관의 명령은 절대적. 계속 개겨 봐야 도훈은 무한정 숫자를 올릴 기세였다.

"그럼 150회 시작."

삑- 비빅-

그렇게 끝없이 PT체조가 이어졌다.

잠시 쉬는 시간.

몸 풀기에서 벌써 녹초가 되어버린 학생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사이 3학년 회장과 부회장이 멀리서 담배를 태우는 도훈을 찾았다.

"야, 이도훈.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라이터 좀."

"그래요. 오빠 좀 심했어요."

도훈이 성수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 선글라스를 통해 학회장 마유미를 곁눈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유미, 간만이군. 얘도 오늘 밤 눌러줘야 하나? 대체 몇 명이나 상대해야 하는 거지?’

"안 그래도 3,4학년은 이쯤하고 열외 시키려고 했어요."

"정말?"

성수가 반색했다. 아무리 체력 좋은 그라도 거듭된 얼차려에 혼쭐이 난 모양이었다.

"저도 사실 부담되거든요. 동기들도 있고, 저보다 선배까지 있는데···. 그래도 시작부터 열외 시키면 1,2학년이 불만 가질테니까."

"뭐, 그정도면 참을 수 있지. 간만에 운동도 하고 좋았어."

"성수 오빠, 담배 연기 저쪽으로."

"앗, 미안."

"대신 3,4학년은 저녁 좀 미리 준비해 주세요. 제가 그 사이 후배들 빡시게 굴리고 올게요."

"그래그래. 체육과 MT라면 이 정도는 되야지. 역시 도훈이가 맡길 잘했어. 막 전역한 티가 난다."

군대 얘기가 나오자 유미가 호기심을 보였다.

"설마 남자들은 군대가서 매일 이런 훈련 받는 거예요?"

군대를 잘 모르는 유미의 질문에 성수가 과장을 섞었다.

"당연하지. 대한민국 군인 쉽게 되는 게 아냐. 매일 10km 산악구보에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300개씩은 기본이야."

"와···."

유미는 도훈이 가진 정력의 근원을 오해했다.

‘어쩐지 체력이 보통이 넘더라니. 군대가서 남자가 된다더니 이런 거였구나···.’

"아, 맞다. 쉬는 시간 몇 분 남았냐."

"5분 전이요."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늦어도 좀만 봐주라."

성수가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자 둘만 남게 된 유미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양을 떨었다.

"교관니임. 훈련 끝나고 저녁에 저랑 술한잔 하실 거죠?"

"응?"

"낮에는 제가 당했으니까, 밤에는 도로 갚아드려야죠."

"너네 텐트에 다른 여학생 있지 않아?"

"후후. 텐트 밖이 더 스릴 있잖아요."

유미가 도훈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도훈은 넘쳐나는 여자들의 요구에 슬슬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교통정리가 필요하겠군. 이래선 몸이 다섯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야.’

< 277. 오빠랑 MT갈래?-1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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