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오빠랑 MT갈래?-13- >
***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내일 MT를 대비해 짐을 쌌다.
‘1박2일이라고 했으니 속옷이랑 세면도구도 챙겨가야겠지?’
다행히 지난 주말 사찰 답사를 간 적이 있었으므로 짐 싸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복기해 필요한 물건을 빠뜨리지 않고 차곡차곡 백 팩에 담았다.
도훈은 짐을 싸면서 이번 위업에 대해 로시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것으로 12개째 위업 달성인가? 레벨업까진 얼마나 남은 거지?"
[하수단계에선 7개 단위로 승급합니다. 지난 번 10번째 위업에서 하수2레벨에 오르셨으니 앞으로 5개 위업을 더 달성하셔야 합니다.]
"5개라···. 이번 MT때 최대한 많이 땡겨야 겠군. 어떤 게 가능하지?"
[밀당의 달인, 같이 할래, SM마스터의 ‘S도달도’, 주지육림을 펼쳐라 정도가 유력합니다. 만약 숨겨왔던 나의···. 업적에 도전하신다면 단번에 5개의 업적도 불가능은 아니겠지요.]
"가만, 숨겨왔던 나의···.가 뭐였지?"
[그 왜 남학우와···.]
"야! 내가 그 거 말하지 말랬지? 그건 때려 죽어도 안 한 다니까?"
[불과 1시간 전 메갈녀까지 공략하신 주인님답지 않군요.]
도훈이 속옷을 거칠게 백 팩에 쑤셔 박으며 대답했다.
"현미는 최소한 봊이라도 달렸지! 남자랑 비역질을 하라니 차라리 다시 뒤지고 만다! 안 해!"
[그래도 현미양과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도훈은 말을 멈추고 현미의 그곳을 떠올렸다.
꿈에 나올 것처럼 맑고 투명한 외음부.
향긋한 채취가 올라오던 속살.
적절한 쪼임과 과하지 않는 애액까지···
먹기 딱 좋은 봊이였다.
"진짜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가 따로 없지. 신께선 왜 그런 얼굴에 명기를 함께 주셨을까? 역시 균형의 저울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걸까?"
[마치 주인님이 외모는 볼품없어도 머리는 똑똑했던 것처럼 말입니까?]
"아무리 못난 사람도 하나 쯤 장점이 있기 마련이잖아. 다만 현미는 언밸런스가 심했어. 그 점이 아쉬워."
[어쨌든 인내심을 발휘해 공략을 완성하신 점을 저는 높게 사고 싶습니다. 주인님께 점점 프로의 향기가 묻어나온 달까요?]
"야부리, 털지 마시고. 그래도 남자랑은 절대 안 할 거니까. 참, 말나온 김에 이번에 받은 보상 좀 설명해봐. 아깐 대충 들어서 잘 모르겠어."
[무모한 도전 위업으로 받게 될 보상은 "운 빨 대폭발" 스킬입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재능모방자와 같은 페시브 스킬이며, 관계 직후 1시간 동안 행운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행운도가 올라가면 뭐가 좋지? 가령 복권 같은걸 사면 되는 건가?"
[물론 그것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당첨확률을 높일 뿐 여전히 확률은 제로에 수렴합니다. 행운도가 10배가 올라도 10장을 구매해 얻을 확률을 1장으로 얻는 정도랄까요?]
"뭐야 그럼? 그렇게 대단한 페시브도 아니었잖아?"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행운이란 요소는 삶의 전반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일단 한 번 경험해 보시면 다른 점을 느끼게 되실 겁니다.]
"좋아. 당장 내일이면 확인해 볼 수 있겠지."
[그나저나 이번 MT 때 위의 위업을 달성한 복안은 있으십니까? 참가인원 수를 고려할 때 이목을 피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도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장소의 도움을 받았지."
[장소라뇨?]
"우리가 가는 곳이 바로 대형 텐트촌이거든."
[아아···]
"인원이 워낙 많아서 15동 쯤 필요해. 가장 큰 건 10인용, 작은 건 2인용. 비용을 절감하려고 집에 텐트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장비 챙겨서 오고, 부족한 건 거기서 임대로 빌려주는 글램핑 장을 이용하기로 했어."
도훈은 MT준비와 관련된 회의 내용을 떠올리며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텐트가 분산되어 있으니 큰 방을 함께 사용했던 새터 때보다는 유리한 조건이군요. 하지만 그것으로만 되겠습니까?]
"아직 말 안 끝났어."
[넵, 제가 성급했습니다.]
"중요한 건 이번 MT를 우리학년이 주도한다는 거야. 3학년들은 교생실습 전 주라 정신없어서."
[네.]
"그렇다면 텐트의 배치나 인원편성도 우리학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소리지."
[오! 설마 그러면···.]
"맞아. 몰아주기를 할 거야."
도훈의 설명을 듣던 로시가 의문을 제기했다.
[다 좋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 텐트 편성권이 있을까요? MT를 주도하는 2학년 과대는 엄연히 정우선 학생 아닙니까?]
"맞아. 그래서 우선이랑 딜을 볼 거야. 내일 텐트 구성은 멤버쉽 트레이닝 받는 조 단위로 나눌거라고."
[왜냐하면 주인님께서 바로···.]
"그렇지. 내가 바로 이번 MT교관이거든."
도훈의 계획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확보했다.
같은 조끼리 한 텐트를 쓰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한마디로 어느 텐트에 누구를 넣을지는 도훈 맘대로라는 소리다.
[키야! 주인님의 잔머리는 과연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발한 구상을 하셨습니까?]
"인마, 내가 아이큐 좀 떨어졌다고 진짜 머리 빠가 된 줄 알아? 남들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야. 반대로 시간만 충분하다면야 이 정도 견적은 뽑아내지."
짐을 모두 싼 도훈은 내일의 텐트 멤버를 어떻게 구상할지 고민하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동시에 달성할 위업이 많아 왠지 기대가 되는 MT였다.
***
아침 일찍부터 학교로 향했다.
주말인데도 대형버스 주차장 부근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상당수의 단과대가 이번 주말을 MT일로 잡은 탓이다.
‘그러고 보니 지연이네 미술과가 우리 과랑 장소가 겹친다 했던가?’
멀리서 버스에 오르는 타과 학우들을 보며 한지연을 떠올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도훈 오빠."
"응?"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지연이다.
쯧쯧, 너도 양반은 못되는 구나.
나는 누가 볼 새랴 소리 죽여 말했다.
"야, 친한 척 마라."
"왜요?"
"우리 과 애들 볼까봐 불편하니까."
"참나, 걱정도 많으시네. 같은 교양수업 듣다 친해졌다면 되죠."
지연은 쉽게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난 야근병동 이후로 나에게 부쩍 친한 척 하는 게 느껴진다. 하여간 남녀가 한 번 살 섞고 나면 순식간에 거리감이 좁혀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적당히 간격을 유지한 채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다친 덴 다 나았고?"
"응, 오빠가 병문안 와준 덕분에요."
지연이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날 좋긴 좋았나 보네.
"근데 너 왜 나한테 오빠라고 불러? 실제론 나보다 누나아냐?"
나이를 콕 찝어 지적하자 지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녀는 잠시 인상을 굳혔다가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입매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목소리 톤에 살짝 냉기가 서렸다.
"그러면 막 반말할까? 내 위장신분이 21살 송이든 인데?"
"거참, 양심도 없네. 대체 몇 살을 후려치는 건지···."
"야이 씨!"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한 한지연이 폭발했다.
그러고 보면 얘도 투기 종목을 오래 배워 그런지 은근 다혈질 같다.
"적당히 해라. 고급 정보 건네주려고 일부러 찾아온 사람한테···."
"고급정보라고?"
귀가 솔깃했다.
그녀의 정체는 나를 감시하러 파견 된 삼현그룹의 경호팀 소속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새로운 정보가 갱신된 것일까?
"왜? 이제 좀 궁금해졌어?"
"그런게 있음 진작 말했어야지. 우리 뭐 좀 마시면서 얘기할까?"
"그럼 아침이니까 뜨거운 아메리카노?"
"커피? 좋지."
나는 지연을 데리고 주차장 인근 건물로 이동했다. 로비엔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판기를 본 지연이 뒤에서 궁시렁 거렸다.
"어으, 무슨 좃고딩도 아니고···. 나보고 이런 싸구려 커피나 마시라고? 대학생도 이런 건 안 마시겠다. 너 내 연봉이 얼만 줄은 아는 거야?"
"그런거 관심 없구요."
"야, 그냥 누나가 살 게. 나 믹스 먹으면 배탈 난 단 말이야."
"커피숍 갈 시간 없어. 너넨 몰라도 우리 관 15분 뒤 출발이야."
"칫. 그럼 나 그냥 캔이나 뽑아줘."
"얼마든지."
우린 커피와 음료수를 각각 뽑아들고 잠시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고급 정보란 게 뭔데?"
"그걸 맨입으로 알려달라고?"
"방금 음료수 샀잖아."
"꼴랑 음료수가지고?"
"허허. 너한텐 꼴랑이지만 나한텐 이것도 지출이야. 내 용돈이 얼만 줄 은 아는 거야?"
그녀가 했던 톤으로 그대로 돌려주자 지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여간 대학생들이란···."
풉-.
삼현그룹 소속이라고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가 있긴.
아서라. 나도 죽기 전엔 너보다 잘나갔거든?
"아무튼 이걸론 부족해. 너도 알겠지만, 나 너랑 이렇게 만나는 것도 엄청 무리하는 거야. 팀장님한테 걸리는 순간 바로 모가지 떨어지거든."
"김문수···. 말인가?"
"알아? 우리 팀장님?"
"본인이 자기소개 하더라고. 예전에 고성민이랑 얽혔을 때."
지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호오."
"김문수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야?"
"왜? 니 스타일이야?"
"장난치지 말고."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내 정체도 파악했던 것처럼."
그거야 정보창 덕에 안거지.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 알지. 다만 몇 가지 미심쩍은 걸 확인하고 싶어서."
"고급 정보도 그냥 달라, 팀장님에 대해서도 알려 달라···. 질문 많은 사람치고는 너무 성의 없다 생각하지 않아?"
말을 마친 지연이 음료수를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자연스럽게 쇄골로 어이지는 바디라인이 한눈에 들어온다.
프린팅 된 흰 티 위로 붉은 체크치마와 청자켓을 걸친 그녀는, 당장 캠퍼스를 배경으로 화보를 찍어도 어울릴 만큼 예쁘다. 늘씬한 몸매에 은근한 볼륨감이 옷맵시를 더욱 살리며 나도 모르게 전신을 훑어 내려갔다.
‘어제 메갈녀 보다가 지연이 보니까 눈이 다 정화되는 것 같네. 얘도 비쥬얼 하나는 역대급이라니까?’
"어떻게 성의를 보일까 그럼?"
지연이 스스로 팔짱을 꼈다. 벌어진 청자켓 사이로 가슴이 솟아오르며 육감미를 과시했다.
"우리 MT같은 데 가는 거 알지?"
"응."
"나 오늘밤 혼자 잘 거야."
"그래?"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딴청을 피우자 이번엔 지연도 배짱을 튕겼다.
"어유, 그럼 나도 입 꼭 다물어야지."
"알았어, 알았어. 시간 내서 갈게."
"아싸!"
"우선 김문수 팀장부터 알려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냥. 싹 다. 내가 아는 거랑 맞춰보게."
"김문수 팀장은···."
지연이 김문수에 대해 설명했다.
나이 34.
전직 군인.
심지어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이라고 한다.
"외인부대? 거길 한국인이 들어갈 수도 있던가?"
"너 몰랐어?"
"아니 군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선발되긴 어렵지만 가능은 해. 그래서 이름부터 외인부대(外人部隊)잖아. 5년 이상 복무하면 프랑스 시민권도 받을 수 있어서 귀화목적으로도 많이들 한다더라고."
지연이 마저 설명했다.
김문수는 현재 삼현의 회장이자 고성민의 친조부인 고경표가 직접 골라 뽑은 인물. 명목상 삼현그룹의 경호팀장을 맡고 있지만, 회장일가의 친인척 관리가 주 업무라고 했다.
아하, 그래서 고성민이 경찰서 잡혀간 날 득달같이 달려온 거였구만?
"한마디로 회장 딱가리네?"
"너 말 조심해. 나도 그럼 딱가리니?"
"암튼, 내가 알고 있던 거랑 크게 다르진 않네. 난 또 뭔가 더 있나 했지."
"팀장님은 훌륭한 군인이야. 내가 비록 너한테 붙긴 했지만 우리 팀에 대해서 모욕하는 건 못 참아."
"충성심이 대단하군."
"나도 군인이 되려던 사람이니까···."
어쨌든 이것으로 김문수의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양아치 고성민보다 내심 신경 쓰이던 인물이다. 특히 곰처럼 커다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과 범같은 날카로운 눈빛은 지금도 또렷히 기억한다. 언젠가 한 번쯤 부딪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건 기분 탓은 아니겠지?
"참, 고급 정보란 건 또 뭐야?"
"아가씨 보름뒤에 귀국한데."
아가씨?
"설마 고은성?"
"응. 너도 알지? 별장에서 만났었다니까."
"알긴 알지. 무슨 일로?"
"유학 접고 영구 귀국이야. 그래서 경호팀에 비상 걸렸어."
고은성이 아주 돌아온다? 그 재벌집 막내딸이? 뭔가 일이 복잡해 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내가 생각에 잠기자 지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나도 제법 쓸모 있지?"
"응. 잘했어. 앞으로도 고급 정보 부탁할 게."
"흥. 오늘 하는 거 봐서?"
"어쭈. 나 누군지 몰라서 물어? 나 이도훈이야."
"자신감 넘치시네. 너 운 좋은 줄 알아, 날 먼저 만나서. 경호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 그렇지, 급한 일 없었으면 팀장님이 직접 널 마크했을 걸?"
"김문수?"
"그래."
"한 번 오라고 해. 내가 밀릴 것 같진 않은데?"
지연이 피식 웃었다.
왠지 깔아 보는 눈빛이다.
"너 팀장님 어떤 분인지 정말 모르는 구나? 팀장이 외인부대 소속일 때 파견지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이었어. 실전에 투입된 군인이라고. 대 테러 작전까지 수행한."
"그래봐야 회장 딱가리지."
"야! 남이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알았어. 조심할 게. 지연이 너가 내 편이라서 안심이야."
"내 편 싫은데?"
"그럼?"
"···남편해줘."
헐-.
지연이 부끄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쟤는 나이도 많으면서 하는 짓이 왜 저렇게 유치하담?
나는 지연의 머리를 부스스 헝클어트렸다.
"암튼, 난 곧 버스 출발할 것 같아서 먼저 갈게. 나중에 텐트촌에서 봐."
"이도훈! 너 안 오기만 해! 확 내가 쳐들어 갈테니까!"
등 뒤로 지연의 빼액 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휴, 대체 MT에 몇 명이나 모이는 거야?
< 273. 오빠랑 MT갈래?-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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