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오빠랑 MT갈래?-7- >
정음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희주나 수정처럼 쿨한 성격이었다면 진즉 모든 걸 오픈해버렸을 텐데···. 아니면 학회장 마유미나 조교 강민주같은 변태였더라도 이렇게 마음이 무겁진 않았을 것이다.
정음은 너무나도 순수한 사람이다.
오매불망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그런 그녀에게 천하의 호색한임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이 점점 부담으로 느껴진다.
언젠간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도훈 : 아직 안 자. 무슨 일이야?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정음 :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신음 끝에 수화기로 떨리는 정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가 걸려고 했는데···.
"아니야. 누구라도 먼저 걸면 되지."
-오빠 통화비 나가잖아요.
아. 나를 배려하는 정음의 태도에 가슴이 뭉클해 온다.
그깟 통화비가 뭐라고.
"괜찮아. 안 자고 있었니?"
-네.
정음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잔뜩 풀이 죽어 있다.
불길한 예감에 내가 선수를 쳤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
-······.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통화가 끊어졌는지 연거푸 확인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토록 망설이는 것일까? 침묵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정음아. 편하게 얘기해. 괜찮아."
-실은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무척 고민했거든요···.
아-!
올 것이 왔구나.
머릿속으로 엔딩 크레딧이 떠올랐다.
정음이 기어코 눈치를 챈 모양이다.
희대의 난봉꾼. 체육과 카사노바.
너 모르게 다 돌린 공중 변소같은 남자.(이건 좀 추하군)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려온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항상 올백만 맞다 처음으로 OMR 마킹을 밀려 시험을 망쳤던 고등학교 시절보다 지금이 백배는 충격적이다.
정음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버릴 줄이야.
-그래도 오빠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사형수가 가장 떨리는 순간이 언젠 줄 아는가?
사형을 언도 받기 직전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형복을 입고 수감 되는 순간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최후를 예감한 사람은 초연해지기 마련이므로.
지금의 내가 그렇다.
처음엔 충격으로 주춤했지만 점차 부들대던 손이 잠잠해지고, 흔들리던 동공도 가라앉았다.
그래.
언제까지 순진한 그녀를 가지고 놀 순 없다.
이제는 보내줄···.
-2학년 선배가 자꾸 오빠 안 좋은 소문을 내더라고요.
으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핀트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엔딩인 줄 일어섰더니, 예고편인 것처럼.
-글쎄, 오빠가 바람둥이니 여자를 가지고 논다느니···. 오늘도 동기들한테 그 말 전해 듣고 너무 화가 나서 한바탕 싸우려다 겨우 참았지 뭐에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가만 정음아.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왜 2학년에 현미 언니 있잖아요. 같이 수업 듣지 않으세요?
빠가로 전락해버린 두뇌를 풀가동시켜 기억을 더듬는다.
2학년 현미.
그게 누구더라?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다.
대놓고 아웃사이더라 내 눈에 띄지 않았던지, 아니면 내가 봤더라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미미한 존재다.
전공 수업을 같이 듣는 2학년 중에 여자 동기라곤 고작 둘 뿐인데. 아마도 그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아, 이제 기억났다.
항상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던.
얼굴도 평범한데 몸매마저 볼품없어 상종조차 안 하던 여자애다.
"정말 현미가 그런 소문을 냈다고?"
나도 모르게 격앙된 반응이 튀어나왔다.
실은 처음엔 서현이를 의심했다. 그녀는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최근 뜸해진 희주나 나연이, 혹은 연두도 미심쩍었다. 그러나 악의적인 루머의 유포자는 평소 대화도 나눈 적 없던 2학년 동기 여학생이었다. 니가 왜 거기서 나
와?
-그렇다니까요. 제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 판 뜨려고 했는데 나연이랑 연두가 말리더라고요. 그 언니 원래 뒷담 쩐다고, 괜히 밉보여서 좋을 것 없다면서.
"아니 걔는 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껏 문어발을 뻗치면서도 철저하게 정체를 숨겼다.
오픈해도 될 여자들에게만 약간의 여성 편력을 공개했을 뿐, 결코 떠벌이고 다닌 적 없다. 그건 남자 동기나 선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 한마디로 현미는 아무 근거 없이 중상모략을 펼쳤다는 소리다.
"정확히 말해봐. 현미가 뭐랬는데?"
-그게 내용이 좀···.
"괜찮아. 나도 알아야 따질 거 아냐? 네가 알려줬다고 안 할 테니까···."
-아뇨. 말하셔도 돼요.
"뭐?"
-제가 말했다고 해도 된다고요. 안 그래도 손 봐주고 싶었어요. 오빠, 그냥 제가 밟아 버릴까요?
나왔다. 열혈 육정음.
태권도 국대 직전까지 갔던 파이터의 본능이 불타오르고 있다.
"아, 아니야. 네가 나설 필요까진 없어."
-그래도요. 감히 오빠한테···.
"말해준 것만으로 고마워. 근데 이 문젠 내가 해결할 게. 현미란 얘가 정확히 뭐랬는지 소상히 알려줄래?"
-그러니까 그게요···
정음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한남충 새끼들 단체로 부랄방광 떠는 것 좀 봐, 크크."
과방 창밖으로 남학생들의 축구 장면을 지켜보던 우현미가 자영에게 말했다. 그녀와 늘 함께 다니는 자영이 혀를 끌끌찼다.
"야. 너 그런 말 좀 쓰지 말라니까?"
"왜? 한남충한테 한남충이라는 말도 못 하니?"
"그거 안 좋은 말이잖아."
"어머어머, 너 지금 씹치남 편드는 거니?"
"어휴, 무슨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암튼, 나 오늘 나 약속있으니까 먼저 간다."
"자영아, 이자영!"
"진짜 약속 있어. 고등학교 선배들이 동문회 안 오면 죽인댔단 말이야."
유일한 여자동기 자영이 떠나자 현미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여간 저 걔집애도 진작 텄다니까? 자트릭스에 찌들어 가지곤···."
과방에서 홀로 공간 시간을 보내게 된 현미는 평소처럼 핸드폰을 켜 메갈워드에 접속했다. 메갈워드는 페미니즘을 표방하며, 여성우월주의와 남성혐오사상을 퍼뜨리는 커뮤니티였다.
그녀는 한참 게시글을 클릭하며 낄낄거렸다.
"하여튼 소추놈들 갓양남한텐 안되지? 이 우월한 대물 좀 봐. 평균 길이 6.9센티 밖에 안되는 한남새끼들 평생 따라오지도 못할걸?"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씨부렁대던 현미는 심심해졌는지 깨톡을 열어 단톡방을 확인했다.
2학년 동기들이 모인 방에는 남자들의 축구 얘기와 게임 얘기로 가득했다. 전공과제와 조모임만 아니었으면 진작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방을 유지한 체 눈팅만 하는 처지였다.
"쯔쯧. 프로필들 봐라. 하나같이 자릉내 풀풀 풍기게 생겨 가지곤···."
그녀의 남성 혐오가 처음부터 이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다.
체육교육과에 처음 입학할 때만 해도 그녀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꼬여가는 연애사업, 실연으로 인한 폭식, 뒤따르는 자기관리 실패로 악순환 고리에 빠진 그녀는 점차 남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특히 둘밖에 없는 여자 동기 가운데, 그나마 몸매가 좋은 자영이에게만 남학생들의 호의가 몰리면서, 그녀의 질투심과 자격지심이 폭발해버렸다.
가질 수 없는 거 부셔버리고 말겠다는 억하심정으로 메갈워드에 가입한 그녀는, 이후 무슨 사이비 종교단체에 빠진 사람처럼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친구인 자영은 그럴 때마다 현미를 타일렀지만, 현미는 자영이마저 자트릭스의 포로로 간주하며 들은 체만 체 할 뿐이었다.
한참 단톡방의 글을 훔쳐보던 그녀는 문득 복학생 도훈이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MT와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도훈은 단답으로 알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대화에 끼질 않았다.
‘이도훈···.’
새터를 가지 못했던 현미는 개강총회 때 처음으로 도훈을 봤다.
훈훈한 얼굴에 잘 빠진 몸매를 가진 도훈은, 평소 대한민국 남성을 한남으로 싸잡아 욕하던 현미마저도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첫눈에 도훈에게 반해버린 현미는 그 이후 도훈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안 하던 화장을 하고, 옷도 매일같이 신경 썼다. 향수를 뿌리고 값비싼 악세사리도 구입했다.
하지만 도훈은 그런 자신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오로지 수업에만 열중했으며, 대화를 나누더라도 남자랑만 이야기했다. 그에게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다. 아니다. 보릿자루는 뭐라도 담을 수나 있지, 자신은 그저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유령.
처음엔 도훈이 여자에 관심이 없어 그런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길을 가다 후배들을 보면 밝게 인사하고, 또 몇몇은 점심도 사주는 모습을 보자 현미의 자존심에 심한 스크레치가 생겼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 진심으로 다가갔는데, 도훈의 지나친 무반응이 그녀의 남성 혐오를 또 다시 일깨우고 말았다.
하여간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아.
예쁜 여자만 눈에 보이고, 나머진 안중에도 없지.
도훈도 똑같은 한남 새끼야.
키만 멀대같이 컸지 거기는 새끼 손가락만 할 듯.
현미의 마음속에 도훈에 대한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현미는 도훈에게 안 좋은 소문을 흘리고 다녔다.
도훈이 여자 후배들만 밥 사준다는 둥 남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등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소문은, 점점 부풀려져 도훈이 소문난 바람둥이라느니, 여자들을 한 번 따먹고 버리고 다닌다느니 하는 악의적인 내용으로 번져갔다.
물론 그녀의 성향을 아는 다른 동기들은 현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과대인 우선은 허튼 소리하지 말라며 화를 낸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싹을 틔운 소문은 도훈의 잘생긴 얼굴과,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활약과 함께 음지로 음지로 퍼져나갔다.
본래 잘생기고 예쁜 사람에겐 얼굴값 한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듯, 도훈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도 그의 비밀스런 행보와 맞물리며 확대 재생산됐다.
DVD방에 단 둘이 들어가는 걸 봤다느니, 여자랑 자고 다음날 아침 모텔에서 등교를 했다느니 등등.
그녀는 끊임없이 루머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어느새 건너 건너 정음의 귀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
-···그게 그렇게 된 거예요.
정음이 긴 얘기를 끝내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이토록 강렬한 살의를 느껴보긴 환생 이후 처음이다.
"알려줘서 고마워. 내일 전공시간에 따로 불러서 얘기해 볼게."
-오빠, 굳이 오빠 손 더럽힐 필요 없잖아요. 그냥 제가 확···.
"아냐, 정음아. 안 그래도 돼. 근데 너 통화할 때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한다?"
-아···. 오, 오빠니까요.
"요새도 나한테만 오빠라고 불러?"
-···네.
정음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전 소도 때려 잡을 것 같던 열혈 소녀는 수줍음 뒤로 자취를 감췄다.
나는 수화기 넘어 얼굴이 빨게 진 정음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정음아. 나한테만 오빠라 불러줘서."
-아···. 갑자기 그런 말 하니까 부끄럽잖아요.
"우리 사이에 부끄러운 게 어딨니?"
-···그래두.
"아무튼, 현미 건은 내가 알아서 할 게. 넌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네.
"참, 이번 주 갈 거지?"
-어떤 거요?
"까먹고 있었니?"
-아! 네, 가야죠.
"그래. 정음아, 오빠랑 MT가자, 같이."
-오, 오빠···.
"새터 때처럼 뜨거운 밤을···."
-하앗, 그런 말 민망하다구요!
"그럼 기대할게?"
-아앗, 몰라요. 끊을래요. 안녕히 주무세요.
정음이 민망함을 못 견디고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귀여운 아이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하기 짝이 없다.
방금 뭐랬지?
-오빠, 그냥 제가 밟아 버릴까요?
이런 말도 했지?
-굳이 오빠 손 더럽힐 필요 없잖아요.
푸하하. 생각해 보니 이건 무슨 야쿠자 보스가 기르는 자객도 아니고···. 귀여운 정음이 덕에 기분이 다소 풀리긴 했지만, 현미가 한 짓을 떠올리자 다시 머리에 스팀이 받쳤다.
"아오, 생각할수록 열 받네. 이 년을 어떻게 조지지?"
[근데 희한하게도 아주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군요. 주인님 행보를 볼 때···.]
"야! 그게 주인한테 할 소리냐! 남은 열받아 죽겠고만."
[죄송합니다. 역시 조지려면 남자에겐 몽둥이, 여자에겐 좆방맹이가 제 격 아니겠습니까?]
"뭐? 저 메갈을 먹으라고? 야! 내가 아무리 잡식이지만, 가릴 건 가려! 줘도 안 먹어 그딴 년!"
[그렇다고 두들겨 팰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렇다.
그게 문제다.
남자와 달리 여자와의 다툼은 물리력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 됐건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남자는 쓰레기가 되고 만다. 현미가 제멋대로 깝치는 배경엔 아마 그러한 생각이 깔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둬선 안 된다.
내가 문어다리 어플을 구매하고, 매사 신중하게 행동했던 이유가 이런 추문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공을 들여 조용히 지내왔는데 뜬금포가 터지고 말았다.
경험상 좋은 소문보다 안 좋은 소문이 훨씬 전염성이 크다. 오죽하면 덕담이 문지방을 지날 때, 악담은 나라 밖을 넘는다 했을까.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분명 나의 대한 의심도 증폭될 것이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전에 조져야 한다.
방법이 무엇이건.
"일단 적부터 알아야지."
나는 단톡방을 뒤져 2학년 동기방으로 들어갔다. 맴버란을 열어 우현미를 클릭하자 그녀의 프로필이 공개되었다.
"어쭈? 뽀샵 봐라?"
< 267. 오빠랑 MT갈래?-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