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좋은x, 나쁜x, 이상한x.-24- >
로시가 성과보고를 시작했다.
[감축드립니다. 그 어려운 미션을 이렇게 해내시다니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그 의사 놈이 거기서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저나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다 진짜로 좆됀 것 같던데, 괜찮을는지 모르겠군.’
[설마 동정하시는 건가요?]
‘아니 전혀.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까 완전 쓰레기가 따로 없더구먼? 그런 새끼는 한 번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그런가요? 제가 볼 땐 주인님도 별반 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뭐 인마? 난 그래도 임신공격 같은 무책임한 짓은 안 하잖아.’
[흠흠. 내가 하면 로맨스, 뭐 그건가요?]
‘이게 오늘따라 영 삐딱선 타네? 나한테 불만있냐?’
[실은 아까 박지애 양 공략할 때 좀 모순적이더라고요.]
‘모순적이라니?’
[당장 주인님께선 서현 양이 학교에 주인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릴까 전전긍긍하시고선, 막상 지애 양에 대해선 배려가 부족했던 것 아닙니까? 어찌 됐건 그녀에겐 이곳이 생계를 위한 일터인데 말이죠. 만에 하나 들켰으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요?]
로시의 일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요샛말로 반박불가 레알펙트다.
어쩌면 내가 그 의사를 욕하는 것처럼, 남들도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겠지.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욕한다더니만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음. 인정. 듣고 보니 내가 좀 심했네. 그건 명백한 내 잘못이야.’
[범죄가 아니면 상관없다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좀 더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를 갖추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도구가 아니니까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구구절절 맞는 소리다.
최근 시스템에 점점 적응하면서, 만나게 되는 파트너들을 그저 미션이나 위업 달성을 위한 도구쯤으로 취급했던 게 사실이다. 그들도 나와 다를 바 없이 인격과 감정을 가진 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반성한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도 뉘우치시니 다행입니다. 오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주인님께 조금 실망했을 것 같았거든요.]
‘아니야. 언제든 내가 잘못하면 앞으로도 따끔히 일러 주면 좋겠어. 로시, 네 덕에 그나마 현실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니, 내가 더 고맙지.’
그 말은 진심이다.
아이템, 위업, 미션, 그리고 레벨업.
플레이어로 살다 보니 점점 세상이 게임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저 도훈의 몸속에 빙의된 영혼이고, 가상의 세계에서 그를 아바타처럼 조정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다 보니 너무 안일해 버렸다. 난봉꾼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새로이 다짐해 본다.
[잔소리는 이쯤하고 보고 계속하겠습니다. 주인님의 놀라운 활약으로 야근 병동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특전으로 500포인트와 ‘응급 처방 킷’ 아이템이 지급됩니다. 아이템은 필요하실 때 요청하시면 언제든 수령 가능하고요.]
‘근데 응급 처방 킷의 내용이 정확히 뭐였지?’
[신체 손상률 20% 미만의 부상에 대해 즉각적인 회복을 시켜주는 아이템입니다. 사지의 절단 같은 불가역적인 부상이 아닌 이상 언제든 요긴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 가능해?’
[얼마든지요.]
‘호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분명 쓸모가 많겠어. 참, 한지연을 공략한 댓가는?’
[애석하게도 한지연 양의 경우 미션이나 위업과는 별도의 공략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보상은 없습니다. 단, 교합을 통해 음양보합술의 강화 포인트를 35 획득하셔서 현재 120포인트 누적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스킬 하나쯤 강화할 수 있으려나?’
[충분하죠.]
음양보합술의 위력은 정말 엄청난 것 같다.
정력 강화는 물론이거니와, 섹스할 때마다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적립시켜 준다. 마치 RPG게임의 경험치 노가다처럼, 퀘스트와 상관없는 반복된 전투를 통해서도 레벨업이 가능하게끔 해주는 것이다.
‘이건 뭐 전쟁 같은 사랑이 아니라 전투 같은 섹스라고 해야하나?’
[네?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혼잣말. 그나저나 내일 일정이 다소 복잡해지겠어. 숙적 송지희를 공략하는 날이었는데 하필 불청객이 끼어드는 바람에.’
[박서현양 말씀인가요?]
‘그래. 아까 톡으로 물 뺐냐고 물어볼 땐 진짜 또라인 줄 알았다니까?’
[확실히 보기완 다르게 앙큼한 구석이 있더군요.]
‘그러고 보면 최근 공략하거나 공략하기로 한 여자들은 하나씩 특징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말인가요?]
‘폭유 간호사 박지애는 성실하고 착한 여자, 원주인을 가지고 논 송지희는 나쁜 여자, 그리고 나를 감시하려고 파견되었다가 이중 스파이가 된 한지연은 이상한 여자랄까?’
[그럼 서현 양은요?]
‘음, 걔는 그냥 미친년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이쯤 되면 놈놈놈에 비견되는 년년년 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흠흠, 썩 바람직한 비유는 아니지만 어쨌든 착한 년과 이상한 년을 공략하셨으니 이제 두 년 남으셨군요.]
‘그리고 그 둘이 가장 난적(亂 賊)이라고 볼 수 있지.’
송지희는 원주인은 가지고 논 원죄가 있다.
최근 우연히 만났을 때 행동만 봐도 여전히 이도훈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내가 직접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육신을 빌려 갱생한 입장에선 원수 같은 존재랄까?
한 번쯤은 그 건방진 콧대를 꺾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이렇게 훌륭한 몸뚱이를 가지고도 제대로 된 섹스도 못 해보고 이승을 하직한 원주인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두고 봐. 그 동정 킬러에게 대물 맛,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주인님.]
***
다음 날.
민주가 지희와의 약속 시각을 문자로 알려왔다. 고등학교에 근무 중인 지희가 야자 때문에 퇴근이 늦는다며, 저녁 10시 이후에나 만남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내 입장에선 차라리 잘됐다. 서현 때문에 약속이 중복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차례로 스케줄이 잡혔다.
수업 중 만난 서현은 어제 그런 문자를 보냈다곤 믿기 힘들 만큼 태연한 태도였다. 순진해 보이는 안경 너머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궁금하다.
수업이 끝나자 서현이 나에게 사인을 보냈다.
"오빠, 혹시 오늘도 도서관 가세요?"
"어. 그러려고."
"저도 들를 일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럼?"
우린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핑계 삼아 동행했다. 캠퍼스를 걷는 중에도 서현은 어제의 일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주말 MT 때문에 걱정이에요. 선배들이 저희 과는 좀 힘들다고 각오하라고 해서."
"그래? 나 이번 MT 조교 맡았는데."
"도훈 오빠가요?"
"응. 2학년 과대가 부탁하더라. 원래 그런 건 막 전역한 예비역들이 잘한다면서."
그때 서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하긴··· 도훈 오빤, 조교도 잘하실 것 같기도."
"어?"
왠지 뉘앙스가 수상하다. 설마 그 조교가 그 조교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데 갑자기 서현이 뭔가를 발견하는 듯 손가락을 들어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오빠, 저기 좀 잠시 들를래요?"
그곳은 캠퍼스 내 입점해 있는 커피숍이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대학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럴까? 공부하기 전에 커피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선배니까 내가 살 게."
"호호, 고마워요. 정말 후배위하는 선배님이시라니까?"
음, 이걸로 확실해졌다. 서현은 나를 은근히 도발하고 있었다. 요망한 것. 내가 너한테 말려들줄 알고?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 잡은 서현이 뜨거운 머그잔을 호호 불며 물었다.
"오빤 대학 생활 재밌으시겠네요."
"무슨 뜻이야?"
"그냥 인기도 많고···, 따르는 후배들도 많으니까?"
"따르기는 무슨."
"왜요? 그래서 다들 침대까지 따라가는 거 아닌가?"
푸헉-!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설마하니 이렇게 공공연한 장소에서 저런 야한 말을 던질 줄이야. 어이없고 황당하여 그녀를 쳐다보는데, 서현이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요. 이런 곳이 더 안전하니까. 누가 우리 대활 엿듣겠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커피숍엔 대학생들이 한 가득이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을 펼쳐놓고 공부 중인 여학생, 노트북을 꺼내 인강을 듣는 남학생, 찰싹 달라붙어 깨가 쏟아지는 커플까지.(대게 C.C라고 한다. 캠퍼스커플의 약자냐고? 아니, 씨발 년 씨발 것 이라던가?)
하지만 그녀 말마따나 다들 자기 일에 열중이라 누구도 우리 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오히려 지나친 소음이 자연스레 우리 대화를 묻고 있다. 일부러 이곳을 골랐다면 상당히 철두철미한 성격이 아닐 수 없다. 밀담을 나누기엔 은
밀한 곳보다 시끌벅적한 곳이 더 나으니까.
"그나저나 나한테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나는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게 조바심처럼 느껴졌을까?
서현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격도 급하시긴. 아직 커피 많이 남았거든요? 혹시 불안해요?"
"불안까진 아니고. 그냥 궁금하잖아. 나한테 왜 그러는지."
"후훗-. 글쎄요? 왜 그렇다고 생각해요?"
"약점 잡고 싶어서?"
"잡으면요?"
"음, 뭔가를 요구한다거나?"
"요구라···. 오빤 그게 뭘 거 같은데요?"
서현이 상체를 기울이며 안경을 추켜 올렸다. 생글거리는 모습이 왠지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표정이다.
저런 표정 언젠가 본 적 있다. 철부지 아이들이 잠자리를 손에 쥐었을 때다. 녀석들은 한참 신기하게 쳐다보다가도 금세 실증이나 양 날개를 찢어 죽였다.
악의 없는 순수한 장난기로.
하지만 나는 그녀의 노리개도 아니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질문을 질문으로 회피하는 서현을 향해 끈기 있게 물었다.
"그게 궁금하니까 물어보지."
"흐음, 전 지금 오빠 물건이 더 궁금한데요?"
"···뭐라고?"
헐, 한 방 맞았다.
저렇게 뜬금없이 들어올 줄이야.
가만 보면, 조용히 있다가도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화법을 구사한다. 머리만 좋은지 알았더니 입심도 제법이군.
"저희 동기들 사이에서 한때 소문 돌았던 거 아시죠? 오빠가 새터 가서 말뚝박기할 때···."
"아···."
"그 뒤로 오빠가 대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그게 엄청 크다고. 그거 진짜예요?"
"대답해주면 너도 말해 줄래?"
"우선 들어보고요."
서현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나를 시험하려 들고 있었다.
‘요런 앙큼한 계집애 좀 보소?’
말려들긴 싫지만,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었다.
"맞아. 사실이야."
"얼마나요?"
"너 폰 어떤 거 쓰니?"
"에이폰 플러스요."
"테이블 위에 올려봐."
서현이 잠자코 폰을 올렸다. 나는 핸드폰의 길이를 눈대중으로 대충 가능한 뒤 대답했다.
"그거 세로 부분 있지?"
"설마 이 정도에요?"
"아니. 머리 빼고 그쯤 되지."
"머리요? 아···. 와, 오빠가 크긴 크구나."
서현이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롄가?"
"아뇨? 아직 안 끝났는데요?"
"뭐야? 대답하면 너도 말할 거라며?"
"질문이 하나라곤 안 했죠. 혹시 희주 말고 오빠랑 잔 사람 또 누구 있어요?"
"이런 식은 곤란하지. 나도 대답 못 해."
"히히. 그럼 말하지 말고 제가 맞춰 볼까요?"
"뭐?"
"가만있자, 오빠랑 자주 사라지던 애들이 누가 있더라? 육정음? 맞죠? 정음이."
"······."
살짝 식은땀이 나려고 했다.
이 녀석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지난번 개강총회도 의심스러운데···. 그때 그 4학년 선배랑도 잤었죠?"
"난 분명 노 코멘트라고 했다."
"그리고 왠지 우리 동기 중에는 나연이나 연두도 오빠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둘도 가능하겠고, 와? 4명이나 돼요? 그것도 한 과에서만? 아니지 내가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최소 4명인건가?"
그녀의 넘겨짚기에 점점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군. 로시. 상태창 띄워.’
[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흥. 말 안 한다고 네가 원하는 걸 알 수 없는 건 아니거든.’
상태창의 공략 팁은 상대방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무리 관찰력과 추리력이 뛰어난 서현이라도, 설마하니 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것은 생각 못 했을 거다.
곧 디스플레이에 서현의 상태창이 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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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박서현 (비처녀, 일시 17세 8개월)
나이 : 20
호감도 : 89/100
개방성 : B
성감대 : 옆구리, 팔꿈치, 목덜미.
*애무 포인트 : 부드러운 키스에 흠뻑 달아오르는 타입입니다.
성욕지수 : 높음
공략팁
*그녀는 호감이 있던 선배가 자신처럼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을 여럿 자빠뜨렸다는 것에 굉장한 질투심과 소유욕이 발동한 상태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독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의 멘트를 추천합니다.
-추천 멘트 : "너가 대주면 다른 여잔 앞으로 쳐다도 안 볼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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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주인님. 이건···.]
‘헐! 이게 무슨! 이 구역의 미친년이 바로 서현이었구나!’
왠지 잘못 말려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난봉꾼이라면 절대로 피해야 할 상대.
스토커 같은 집착녀가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 249. 좋은x, 나쁜x, 이상한x.-2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