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좋은x, 나쁜x, 이상한x.-13- >
벌컥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안 구석 침상이 보인다. 지연은 산모가 분만하는 자세로 다리를 세운 체 누워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얇은 이불이 덮어져 현행범으로 몰아가는 덴 실패했다.
쳇, 이건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이군.
"누, 누구야?!"
"이든아, 나. 도훈이."
"아앗! 자, 잠시만요···."
허둥대는 목소리.
지연이 놀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현광등을 켜자 턱 밑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지연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여, 연락도 없이 어떻게···."
"놀래 주려고. 서프라이즈! 자고 있었니?"
"막 잠들려던 참이었어요."
지연은 초조한 표정이었다. 한창 절정에 이른 순간 불쑥 들이닥쳤으니 거의 멘붕상태일 것이다. 비록 현장 적발엔 실패했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죄진 놈은 티가 나기 마련이거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히 물었다.
"먹을 걸 사오려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빈손으로 왔어. 뭐 좀 시켜 줄까?"
"괘, 괜찮아요."
"어디 불편하니? 무슨 식은땀을 그렇게···."
"오, 오지 마!"
가까이 다가가자 지연이 미친년처럼 소리쳤다.
반말까지 하는 걸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어어?"
"그러니까 오, 오지 마시라고요. 옮을지도 몰라요!"
대체 뭘? 지연의 쏟아내는 아무 말에 대잔치에 실소가 터질 뻔 했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아냈다.
"너 무슨 전염병이라도 걸렸어?"
"···예? 아니, 예."
"예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예."
되지도 않는 변명에 나는 벌컥 화를 냈다.
물론 연기다.
"아니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면 다리가 부러져 들어와서 전염병에 걸려? 무슨 이따위 병원이 다 있어?"
"그, 그러게요."
"이런 건 그냥 넘어가선 안 돼. 가서 따져야겠어."
"아니에요. 진짜로 괜찮아요. 그닥 위험한 건 아니랬어요."
"괜찮긴! 니가 어리고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거야. 독실도 그래서 내 준거야?"
"아, 아마도 그런 것 같기도···. 그래도 혼자 지내니까 얼마나 편한데요. 병실 같이 쓰는 게 은근 불편하거든요."
지연은 쏟아낸 말을 주어 담느라 횡설수설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걸로 퉁쳐서 얼렁뚱땅 넘어 갈 속셈인가 본데, 이런 건 절대로 그냥 둬선 안 돼. 병원에 와서 병을 얻어가는 게 말이 돼? 너 담당의가 누구야?"
"아니 도훈 오빠, 그게···."
나는 노발대발하며 병원 침상 밑에 걸린 차트를 확인했다.
환자 : 한지연
담당의 : 문정준
"한지연? 이건 누구야?"
"아, 저 그게 제가 갑자기 병실을 옮겨가지고···. 이름을 아직 못 봐꿔서···."
"이것들이 진짜! 차트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이든아, 내가 당장 가서···."
뛰쳐나가려는 액션을 취하자 지연이 황급히 팔목을 붙들었다.
"안 된다니까요!"
"놔봐, 확 그냥 이것들을!"
그러나 지연의 아귀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붙잡는 힘을 봐선 유도종류를 익힌 것 같다. 아으, 내 손목.
"오빠 제가 다 설명할 테니까 잠깐만요."
"설명이라니?"
"그거 제 본명 맞아요, 한지연."
"어?"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알았어."
나는 침상 끝에 엉덩일 걸치고 앉았다. 지연은 겨우 나를 진정시켰다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저 실은···. 개명했어요."
‘풉- 이건 뭔 소리야?’
"정말로?"
"네. 어렸을 때 엄마가 이혼하고 새아버지랑 결혼하셨거든요. 원래 이름이 송이든이었는데, 지금은 새아버지 성을 따라 한씨로 개명했어요. 바꾼 김에 이름까지 싹 다요."
"그랬구나."
"그래서 주민등록상엔 한지연이란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어요.하지만 전 새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송이든으로 알리고 다니고요. 근데 병원은 실명을 써야 하잖아요."
"아,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럴싸한 거짓말로 둘러댄 지연은 내친김에 또 다른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리고 독실로 옮긴 건, 제가 있던 방에 면역력이 유독 약한 환자분이 들어와서 그런 거예요. 제가 살짝 감기 증세를 보이니까 혹시나 싶어서."
"그게 말이 돼? 차라리 그 환자를 격리시켜야지?"
"그 방에 다른 환자들 상태도 별로 안 좋았거든요. 여러 명을 옮기느니 차라리 나 혼자 보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아···. 그럼 뭐 가서 따질 필욘 없는 거야?"
"네. 그렇다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지연이 겨우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방심하는 그 순간, 멱 줄을 잡아채야 한다.
바로 이렇게.
"근데 이건 뭐야?"
아까부터 눈 여겨 보고 있던 물건이다.
이불 밑자락으로 삐져나온 옷가지를 끄집어 당기자 환자복 바지가 주르륵 딸려나왔다. 바지 가운데엔 팬티가 세트로 매달려 있었다. 동시에 벗으면서 겹쳐 벗겨진 모양이군.
"아아앗!"
갑작스런 행동에 지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리 줘요!"
"미안. 난 그냥 뭔가 해서···."
지연이 환자복 바지를 빼앗아 이불 속에 감췄다.
이건 또 뭐라고 둘러댈 생각이지?
"제, 제가 잘 때면 홀딱 벗고 자는 습관이 있어가지고···."
"아···."
"그, 샤, 샤넬 NO.5··· 아, 알죠, 마돈나?"
"어, 알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나도 여름엔 다 벗고 자 거든."
"네···."
갑자기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밑을 홀딱 벗은 체 얇은 이불만 덮고 있는 여자와 신체 건강한 사내가 한 침대에 앉은 상황.
이제 결정타를 날릴 순간이다.
"근데 내가 뭘 또 깔고 앉은 것 같은데···."
사실 침대에 앉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타이밍을 잡기 위해 기다렸을 뿐.
나는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어 길쭉한 원통형 화장품을 꺼내 들었다. 얼굴에 수분을 보충하는 미스트 종류였는데, 끝이 뭉특해 딜도 대용으로 그만이었다.
"아아아앗! 안 돼!"
지연이 놀란 나머지 허우적대며 뺏으려 들었지만 나는 요리조리 피하며 계속 화장품을 간직했다.
"가만, 이거 표면이 너무 끈적거리는데···."
일부러 화장품에 손가락을 붙였다 때자 끈끈한 거미줄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대체 얼마나 쑤셔댄걸까?
"다, 달란 말이에요!"
"너 설마 이거 가지고···."
"내놔!"
이성을 잃은 지연은 숫제 발광을 했다. 그녀는 나를 등 뒤에서 껴안으며 어떻게든 힘으로 빼앗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아무리 운동을 배웠다 한들, 여자는 여자. 힘으로 나에게 당할 순 없었다. 내가 버티는 사이 그녀의 유일한 가림막인 이불이 주르
륵 바닥으로 쏟아졌다.
"허억!"
하의를 실종한 지연이 황급히 두 손으로 밑을 가렸다.
가랑이 사이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모습이 더 야하게 느껴진다.
"보지마!"
음. 왠지 그 말이 더 음란한데···.
"아···. 너 진짜로 했구나···."
"내가 뭘!"
나는 흥건히 젖어버린 시트를 말없이 가리켰다.
숨길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그곳에 있었다.
"오, 오줌 싼 거예요!"
지연은 마지막까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가 코를 가져가 킁킁대자 곧바로 나를 밀쳐냈다.
"오줌 냄새 아닌데?"
"뭐, 뭐하는 거야! 미쳤어?"
"너 왜 근데 자꾸 반말이야?"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진실이 옥죄어 올수록 거짓말쟁이는 갈 곳을 잃고 허둥댔다.
한지연, 이제 그만 본색을 드러내시지?
"···왜? 나이도 설마 가짜야? 그 이름처럼?"
"뭐, 뭐야? 너 어떻게 그걸···."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였어? 삼현그룹 경호팀 소속 한지연 씨?"
"아아아!"
정체가 까발려진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바보야, 문제는 아랫입이라고.
"너 밑에 다 보여."
"아앗!"
이번엔 다시 밑을 가렸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한지연, 왜 나를 감시했지?"
"아니에요. 전 송이든이예요."
"이게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아랫 입은 솔직한 데 윗 입이 문제고만?"
"벼, 변태!"
"누가 누구보고 할 소릴? 이걸로 자위나 하는 주제에."
내가 미스트 통을 들어 올리자 지연이 다시 뺏으려 들었다.
"내놔, 그거 내 꺼야!"
"어? 또 보인다."
"아앗!"
바지도 이불도 없어진 그녀는 두 손이 묶인 신세나 마찬가지. 나는 손발이 제압된 그녀를 추궁했다.
"자위하는 걸로 비난할 생각은 없어. 내가 궁금한 건 누가 널 내게 보냈고, 도대체 왜 그랬냐는 거지."
"웃기지마. 내가 대답할 것 같아?"
"열게 해줄까? 그 입."
내가 차갑게 웃었다.
***
지애는 졸음을 쫓기 위해 탕비실로 가 커피를 내렸다. 최근 들여놓은 커피 머신은 캡슐은 다소 비싸지만, 매장에서 사먹는 것과 비슷한 맛을 내서 먹기 좋았다.
달달 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신이 작동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애는 생각했다.
‘정말 선배 말대로 내가 제대로 된 남자를 못 만났던 걸까?’
연애감정이 말라 비틀어졌다곤 해도 가끔 성욕이 치밀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위를 하며 생각했다. 차라리 혼자 하는 편이 훨씬 더 기분 좋다고.
그녀가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는 조루였다.
애무는 뛰어났지만 삽입 시간이 채 5분을 넘지 못했다. 뭔가 느낌이 올라오려고 하면 이미 주르륵 흘리기 일 수였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닐텐데···.
그와 헤어지고선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바쁜 3교대 근무는 삶의 여유를 앗아갔다. 그녀는 워커홀릭처럼 일에 치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친하게 지내던 정 간호사가 결혼을 앞두고, 친구들도 하나 둘 청첩장을 보내오자 그녀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스물여섯 나이에 결혼은 아직 이르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누군가를 사겨야 2~3년 뒤에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휴, 나도 이럴 때가 아닌데···.’
지애는 커피 잔에 쪼르르 채워지는 커피를 쳐다보다 문득 자신의 커다란 가슴으로 시선이 쏠렸다.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녀의 가슴은 살짝 고개만 숙여도 불룩한 부위가 시야에 걸릴 정도였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받쳐 들었다.
‘남자들은 이게 그렇게 좋나?’
정 간호사 말처럼 남자들은 그녀의 가슴을 대놓고 좋아했다.
처음 보는 환자건, 자주 보는 의사건.
새파란 중학생이건 하얗게 샌 노인네건 간에 그녀의 가슴 앞에 시선을 멈추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B만 되도 볼륨 있어 보이고, C정도면 글래머 소릴 듣는 판국에 지애의 가슴은 D도 아니고 꽉 찬 F.
국내에선 속옷 사이즈마저 없다는 바로 그 F!
아무리 꾹꾹 눌러도 불룩 튀어나오는 가슴 때문에 간호복 단추가 터진 적도 여러 차례. 한때는 고개만 숙여도 골짜기가 보이는 문제로 초여름까지 목티를 입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녀도 사람인지라, 남자들의 관심이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자신이 호감있는 사람이 쳐다봐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도훈이랬던가? 아까 그···.’
지애는 불쑥 도훈의 얼굴을 떠올랐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용기 있게 환자를 구한 사내. 만약 그때 교통사고가 났다면 환자 관리에 실패한 자신은 큰 징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도훈이 구한 것은 어쩌면 회장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지애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네. 염치없는 사람처럼 보이겠다.’
괜히 마음이 쓰인 지애는 내친 김에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아는 동생 문병 왔다 했지? 아직 병원에 있을 것 같은데 만나면 커피나 한 잔 주면서 고맙다고 말해야지.’
양손에 커피 두 잔을 받쳐 든 지애가 도훈을 찾아 나섰다.
***
"열게 해줄까? 그 입."
도훈의 차가운 목소리에 지연이 안색을 굳혔다. 여태껏 도훈을 감시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이 자식, 본색을 숨기고 있었구나. 팀장님 말이 맞았어. 분명 뭔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하지만 지연은 육군사관생도 출신에 특채로 경호팀에 채용된 인재. 그 정도 엄포에 굴할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 고문이라도 할 거야?"
"고민이라니? 아직 어느 입을 열겠다곤 말 안했는데?"
‘미, 미친놈. 진짜로 변탠가?’
진지한 상황에 자꾸 섹드립을 날리는 도훈은 정신병자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미스트를 깔고 앉아 놓고선 시치미 뚝 때고 모른 척 한 저의가 의심스럽다.
‘젠장, 하필이면 저걸 꺼내가지고···.’
손가락을 세 개까지 넣어보았으나, 깊이감이 부족한 게 화근이었다. 뭔가 큼직한 걸 찾다보니 파우치를 뒤지다 우연히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화장품 통을 발견했다.
그것을 쑤셔대던 중 도훈이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자 아무렇게나 팽개쳤는데 하필 그가 깔고 앉을 줄이야···.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지연이 머릴 굴리는 데 도훈이 화장품을 통을 들고 말했다.
"밖으로 다 들리더라."
"뭐, 뭘."
"너, 내 생각하면서 했지?"
도훈이 돌직구를 날렸다.
아주 묵직하게.
"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지연은 부정부터 했다.
분명 도훈의 물건을 상상하긴 했다. 그가 보기 드문 대물이란 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와의 섹스를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목소리로 소리치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이 깜깜해지면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정말 흥분해서 소릴 질러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르가즘이 턱밑까지 차오른 상태였고, 그 당시만큼은 정말 도훈이 달려와 박아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마법처럼 등장해 버렸다.
"근데 내가 이렇게 작아보였어?"
도훈이 미스트를 던지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 238. 좋은x, 나쁜x, 이상한x.-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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