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좋은x, 나쁜x, 이상한x.-9- >
서현은 두 사람이 나온 건물을 다시 확인했다.
모두 3층짜리.
1층은 음식점인데 두 사람이 걸어 나온 곳과 다른 곳으로 입구가 나 있었다. 2층은 호프집으로 내부 인테리어 공사로 수리 중이라고 적혀 있다. 남은 것은 3층의 DVD방 뿐.
‘진짜 둘이서 DVD방을 갔다는 거야?’
서현은 생긴 것만 순진했지, 실제론 전혀 순진한 타입이 아니었다.
학교에선 내숭으로 이미지를 관리할 뿐, 친한 친구들과 놀 때는 짧은 치마를 입고 클럽도 자주 다닌 편이었다. 최근 한 달 안에 원나잇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다음날 새벽같이 도망치고 연락처를 지웠지만.
‘도훈 오빠에게 저런 숨겨진 면이 있었다니···.’
도훈과 같이 나온 희주는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다.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느니, 흘리고 다닌다느니 말이 많았다.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걸레’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워낙 남자 선배들에게 지분대고 다녔던 탓이다.
‘희주가 도훈 오빠한테 꼬리 친 거구나?’
서현이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남자를 잘 알았다.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라도, 여자의 육탄돌격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게 남자였다. 주는 여자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었다.
‘치잇. 도훈 오빠 좋게 봤더니···.’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도훈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도 다른 남자들과 똑같았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몰라. 정말로 영화만 봤을 수도 있는 거잖아?’
서현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희주의 꼬임에 넘어가 같이 DVD방에 출입했지만,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거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주는 몸매는 그럴싸했지만, 얼굴은 영 꽝이었다. 여자가 봐도 좀 못난 편이라, 남자들 사이에서도 호오가 갈리는 타입이었다.
‘확인해 봐야지.’
두 사람이 멀어진 것을 본 서현이 DVD방으로 급히 뛰어 올라갔다. 카운터에 모자를 쓴 시커먼 알바생이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혼자 오셨나요?"
"아, 저기 방금 제가 뭘 두고 간 것 같아서···."
"네? 뭘요?"
"왜 방금 키 큰 남자랑 같이 왔었잖아요."
서현은 희주인 것처럼 위장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 얼굴을 대충 기억한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알바생은 잠깐 눈을 껌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방금 반지의 제왕 보신 커플이요?"
"네, 네. 맞아요. 제가 뭘 두고 왔는데 잠깐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방이 어디였더라, 중요한 건데···."
서현이 초조한 기색을 보이자 알바생이 룸 넘버를 알려주었다.
"14호 실이요, 아직 안치웠어요."
"아, 맞다. 고맙습니다."
서현은 두 사람이 방금 전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갔다. 영사기에선 아직까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불빛에 의지해 쓰레기통부터 뒤졌다.
"둘이 했다면 분명 흔적이 있을 텐데···."
그녀가 찾는 것은 쓰고 버린 콘돔이었다.
그러나 쓰레기통에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진짜로 그냥 영화만 본 건가?"
서현이 안도하던 그때. 소파 밑으로 검은색의 천 조각이 슬쩍 삐져나온 게 보였다. 서현은 탐정처럼 소파 밑을 뒤져 천 조각을 끄집어냈다.
"헛! 양희주, 이 미친!"
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검은 천의 정체는 바로 가운데가 축축이 젖은 팬티였던 것이다. 얼핏 봤을 때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DVD방에다 팬티를 벗어놓고 간 것이다. 아마도 젖은 팬티를 다시 입기 찝찝해 구석에 처박아 놓고 간
것으로 보였다.
"···했네, 했어."
허탈한 표정으로 서현이 털썩 소파에 주저 앉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다. 영화보다 혼자 빤스를 벗을 리 없으니 이는 명백한 밀회의 증거였다.
서현은 음식물 쓰레기나 되는냥 희주의 팬티를 쓰레기통에 처박고는 도망치듯 DVD방을 빠져 나갔다.
"두고 나온 물건은 찾으셨어요?"
뒤통수에 대고 알바가 물었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알바생은 별 이상한 여자 다 보겠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야, 대체."
그리고 잠시 후 14호실 룸을 청소하러 들어간 알바생은 젖은 여자 팬티를 발견하고는 몰래 호주머니에 챙겼다.
***
‘아, 하루 다섯 번은 역시 무리였나? 다리가 막 후들거리는데?’
[음양보합술 덕에 그나마 이 정도로 버틴 겁니다. 관계를 마칠 때마다 양기를 보충하셨으니까요.]
‘그렇겠지? 오늘은 시간도 애매하니 공부고 뭐고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걸어가는데 깨톡 메시지가 왔다.
박서현 : 오빠? 교수님이 저희 리포트 뭐래요?
‘얘는 아까 수업시간엔 별말 없더니 이제 물어본담?’
[자연스럽게 연락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흐흐. 나한테 너무 대놓고 들이대는데?’
하는 짓이 깜찍해 곧바로 답장을 했다.
이도훈 : 어, 잘 썼데. 교수님이 칭찬하길래 네가 쓴 거라고 말씀드렸어.
박서현 : 잘됐다. 그리고 저 혼자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셨어요.
이도훈 : 아니 어차피 조는 같은 점수 받잖아. 그래도 네가 썼으니까 그건 알려드려야지.
박서현 : 고마워요. 어제 오빠가 까페에서 맥락을 짚어주셔서 수정이 잘 된 것 같아요.
이도훈 : 아냐. 글솜씨 좋더라. 역시 1학년 수석다워.
박서현 : 자꾸 띄우지 마요. 운 좋게 한 것 가지고.
이도훈 : 어쨌든 입학 수석은 수석이지.
박서현 : 참, 오빠 오늘 혹시 희주랑 있었어요?
어라?
메시지를 읽는데 순간 뒷골이 땡- 울렸다. 얘가 어떻게 알았지? 대놓고 부정하기엔 오히려 이상해 보일 게 분명하므로 슬쩍 말을 돌렸다.
이도훈 : 어, 아까 벤치에서 잠깐 만났거든. 희주는 왜?
박서현 : 다른 교양수업 같이 듣는데 희주가 저희 조거든요. 오늘 발표 준비로 얘기할 게 있었는데, 학교 끝나고도 계속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이도훈 : 그래?
박서현 : 근데 누가 오빠랑 희주랑 같이 가는 걸 봤다고 해서요. 혹시 희주 학교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간 건 아니죠?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한다?
괜히 엉뚱한 소릴 했다간 학과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판에 식은땀이 났다.
나와 희주의 동행을 목격한 사람은 어디까지 봤을까?
학교에서 같이 나가는 거? 아님 DVD방으로 둘이 들어가는 거? 전자라면 대충 얼버무릴 수 있지만, 후자라면 빼박이다.
이도훈 : 희주를 어디서 봤다는데? 벤치 근처?
박서현 : 네, 아마도요?
휴-. 천만 다행이다.
목격자는 학교에 같이 있던 장면만 봤나보다.
이러면 둘러대기 수월하지.
이도훈 : 나도 그때 헤어져서 잘은 모르겠어. 아마 토익학원 간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박서현 : 아, 그때 헤어지셨구나. 얘가 자꾸 조 발표 준비 안하고 도망가서 오빠한테 혹시나 하고 여쭌 거예요. 죄송해요.
이도훈 : 아니야. 어쨌든 도움이 되었으니 다행이네.
박서현 : 네. 오빠. 그럼 쉬세요.
서현이와 톡을 마친 나는 핸드폰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한테 작업 거는 건 줄 알았더니 희주 얘기만 잔뜩하다 끝내네. 싱겁기는."
***
"하-. 완전 거짓말쟁이었네, 이 오빠."
혼자 커피숍에 앉아있던 서현은 도훈과의 톡을 마치더니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들겼다. 건반을 치는 것처럼 달그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 그녀가 가진 독특한 버릇이었다.
"희주랑 같이 있었다곤 죽어도 말 안 한다 이거지? DVD방에서 팬티까지 벗겨놓고 말이야."
한번 의심스러운 구석이 보이자 서현은 이제까지 도훈의 모든 행동 들이 수상하게 여겨졌다. 어쩌면 희주가 자빠진 게 아니라 도훈이 희주를 자빠뜨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개가 아냐. 순진한 척, 여자 안 사겨본 척했으면서 어제 커피숍에서 만난 전 여친만 봐도···."
대게 사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어제 만난 학과 선배라는 여자는 첫눈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런 여자를 군대가기 전에 사귈 정도라면 분명 도훈도 보통은 넘을 것이다.
"새터 때도 왠지 수상했어. 자꾸 장기자랑 연습할 때마다 사라졌잖아? 게다가 그 말뚝박기 얘기도 있었고···."
도훈이 말뚝박기를 할 때 여자애 엉덩이에 꼬추를 비볐다는 가십이 잠깐 화제가 된 적 있었다. 물론 그것은 우연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다시 돌이켜보니 뭔가 의심스러운 행동이었다.
"가만, 개강총회 때도 무슨 4학년 선배 데려다준다고는 한참 사라지지 않았나?"
기억력이 좋은 서현은 퍼즐을 맞춰가듯 도훈의 행방을 되짚어갔다. 그녀가 놀 거 다 놀면서도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남보다 월등한 기억력과 추리력에 있었다.
"···이상해. 아무리 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서현은 이제 강박적으로 손가락을 두들겼다. 드드득 거리는 소리가 크게 퍼지며 다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주변 상황을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초집중하고 있었다.
탁-.
마침내 결론을 내린 그녀가 손가락을 멈추었다.
"후훗. 도훈 오빠, 완전 내과였잖아?"
서현은 마침내 도훈의 정체를 간파했다.
안경잡이, 학구파, 입학 수석. 그녀를 둘러싼 수식들은 사실상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희주보다 더한 노출광.
지나치게 남자를 밝히는 탕녀.
그리고 원하는 것은 기필코 손에 넣고야 마는 집착녀가 그녀가 가진 본 모습이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든가?
서현은 도훈이 자신과 동류(同流)임을 깨닫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도훈을 꼬실 수 있을지 장고에 들어갔다.
***
"박 간. 퇴근하는 길이야?"
외과의 종찬이 물었다. 박지애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네, 김 선생님."
지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외과의 김종찬.
30대 후반에 벌써 정수리가 훤한 중년의 사내.
손버릇이 안 좋다는 소문에 평소에도 될 수 있는 한 거리를 두는 편이다.
‘저 변태같은 새끼. 저번 회식 때 3병동 유간호사한테도 엄청 추근거렸다지?’
띵-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누구라도 타고 있길 바랬건만 하필 비어있었다. 지애는 종찬과 단둘이 타는 게 부담스러워 잠시 주춤했다.
"뭐해? 안 타?"
"아, 네."
종찬이 먼저 들어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기에 지애는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애씬 사복도 잘 어울리는구나."
최대한 시선을 피해 서 있는데 종찬이 말을 걸어왔다.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지애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김 선생님."
"아니 빈말이 아니고 정말로. 이렇게 보니까 전혀 다른 사람 같은걸?"
"그래요? 그래도 전 간호복 입을 때가 제일 좋더라고요."
"···뭐 그것도 좋지."
종찬의 시선은 노골적일 정도로 지애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대놓고 가슴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으! 저 변태새끼, 지금 어딜 보는 거야?’
평소 큰 가슴 탓에 남자들의 시선 마사지를 자주 받던 박지애였지만, 종찬의 눈빛만큼 기분 나쁜 것은 처음이었다. 흔히 시선 강간이라 불리는 음욕 가득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근데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걸 보니 내일 나이트 근무인건가?"
"네."
되도록 말을 섞지 않기로 결심한 지애가 단답으로 말을 끊었다. 그럼에도 종찬은 끈기있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내일 당직인데. 잘됐네. 외과 병동이지? 잘 부탁해."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애가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종찬이 씰룩대는 지애의 히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흐흐. 저 왕가슴은 보면 볼수록 맘에 든단 말이야? 새침한 저 얼굴에다 한 발 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인턴 시절부터 의사라는 직위를 무기로 간호사들을 농락해온 종찬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뭐 안 될 건 뭐야? 야근 병동에선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이니까."
종찬은 음란한 상상으로 부풀어 오르는 물건을 주무르며 박지애를 자빠뜨릴 궁리를 시작했다.
***
귀가한 도훈은 하루를 마감하며 잠을 청했다.
잠들기 전 로시와 대화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번 주도 정신없겠어. 지희한테 복수도 해야지, 내일은 야근 병동 미션도 완수해야지. 참, 주말엔 MT까지 있구나.’
[업적과 미션 수행도 좋지만, 교내에서의 행동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아까 양희주 때문에?’
[아무리 철두철미해도 꼬리가 길면 언젠간 잡히는 법이니까요. 아까도 서현 양에게 메시지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유야무야 넘어갔잖아. 같이 DVD방 간 것을 들킨 것도 아니고. 아니 설사 들켰다고 쳐. 그냥 둘이 심심해서 영화나 한 편 봤다면 되지. 소문 나봐야 둘이 썸타는 것밖에 더 되겠어?’
[이번엔 잘 넘어갔지만, 다음엔 또 모르죠. 나연양과 연두양 건도 있고요.]
‘물론 로시 네가 뭘 우려하는 줄 알아. 솔직히 좁은 이너써클 안에서 너무 많은 여자를 공략했지.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입장이고.’
[문제가 되면 굉장히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난봉꾼 이미지가 대학 생활에 득이 될 린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주엔 최대한 밖으로 돌잖아. 사범대 부설학교에 근무하는 지희도 그렇고, 병원에 입원한 한지연이나 그 폭유 간호사도 그렇고.’
[혹시 구체적인 복안은 있으십니까? 당장 내일이 거사일인데···.]
‘당장은 없지만. 일단 계속 생각 중이야.’
< 234. 좋은x, 나쁜x, 이상한x.-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