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49화 (229/2,000)

< 231. 좋은x, 나쁜x, 이상한x.-6- >

‘솔깃한데?’

[설마 국춘 문예에 도전하시려고요?]

‘방금 못 들었어? 입선 상금이 500이라잖아. 안 그래도 서현이 잠수타고부턴 돈 나올 구멍도 없는 마당에.’

[지난번 편의점 알바에 이번 게스트 출연료까지···. 잔고만 봐선 대학생치곤 꽤 여유로운 편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용돈을 따로 받지 않는다지만, 도훈은 생활비가 크게 드는 편은 아니었다. 미국에 계신 아버지가 주거비만큼은 꼬박꼬박 보내주기 때문.

그는 창밖에 보이는 도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차가 한 대 있었음 좋겠거든.’

[차요?]

‘그래. 허름한 중고차라도. 다른 건 몰라도 뚜벅이 생활은 도저히 적응이 안 돼.’

생전의 이정우는 고급 차를 몰고 다녔다.

지금의 이도훈은 버스나 지하철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겉멋이나 허세 때문이 아니라, 이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다. 또 차가 생기면 여자를 공략하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다.

[흐음, 돈을 모아야 할 이유가 생기셨군요. 하지만 굳이 돈 때문이라면 다른 일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

[지난번 AV 데뷔 제의 말입니다. 그때 연락처 받아 놓으시지 않았던가요? 한 번 연락해 보는 것도···.]

‘아, 그게 있었지?’

도훈은 핸드폰을 뒤졌다.

스카우터란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가 남아있다.

[모르긴 몰라도 공모전 입상보단 출연료 쪽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마침 주인님의 적성이 딱 맞는 일이기도 하고요.]

도훈은 물끄러미 번호를 쳐다보다 핸드폰을 뒤집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물론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닌 데 어차피 촬영하려면 일본으로 넘어가야 할 거 아냐. 학기 중에 움직이기엔 부담이 너무 커. 이건 여름 방학쯤 생각해봐야겠어.’

도훈은 자신의 매니저 역할로 료코를 떠올렸다. 외국어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계약이라든가 여러 부문에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잠시 다른 쪽으로 샌 도훈이 다시 로시에게 말했다.

‘아무튼 이번 공모전 도전은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솔직히 돈만 생각했다면 진작 호빠 같은 데 진출했겠지.’

[호빠요? 호스트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남자 접대부. 이 정도 와꾸에 대물이면 돈 많은 아줌마들이 서로 스폰해 주겠다며 줄을 서지 않겠어?’

[호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하지만 호스트빠에 나가는 선수들도 나름 프롭니다. 생계를 걸고 젊음을 파는 청춘들을 너무 얕잡아 보진 마십시오.]

‘뭐 어쨌건 말야. 암튼 이번 공모전은 새로 얻은 아이템 능력도 확인해 볼 겸 하려는 거야.’

속으로 로시와 대화를 마친 도훈이 혼자 밥을 먹고 있던 태영에게 물었다.

"그 국춘 문예라는 거, 주제가 뭐야? 마감은 언제까지고?"

"진짜 해보시게요? 저처럼 과제로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도전이나 한 번 해 볼까 하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도훈이 부쩍 흥미를 보이자 태영은 신기한 눈빛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잘생긴 외모, 우월한 신체.

선수에 근접한 놀라운 운동신경.

게다가 엄청난 학구파에, 성격도 모난 데 없이 원만하다.

여자 후배들 사이엔 워너비 남친 1순위이며 남자 후배들 또한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도훈이 이제는 글쓰기까지 도전한다니···.

전혀 연관성 없는 분야지만, 태영은 마치 그가 글쓰기에서 마저 능력을 보여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왠지 도훈이 형이 나가면 당선될 것 같아요"

"그런 게 어딨냐? 날고 긴다는 애들 다 나올텐데."

"그냥 기분이 말이에요. 형이 워낙 다재다능하시니까."

"나 참, 별말을 다 듣겠네. 밥 사줬다고 그렇게 아부 안 해도 돼."

도훈은 씩 웃고 말았지만, 자신을 고평가하는 태영의 칭찬이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은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다.

"암튼 공모전 주제가 뭐냐면요···."

태영이 국춘 문예에 관한 내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삼현 그룹 경호실 소속 한지연은 며칠째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 현장직을 자원했던 그녀였기에 병동은 그 자체로 감옥이나 마찬가지.

컨디션을 체크 하러 온 간호사를 보고 지연이 물었다.

"저 깁스 언제 풀어요?"

간호사가 하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다음 주요."

"제가 볼 땐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은데···."

"혹시 의사세요?"

"아, 아뇨."

"그럼 의사 말 들으세요. 뼈에 금 갔는데 함부로 움직였다가 안 붙으면 어쩌려고. 괜히 후유증 남으면 평생 고생해요."

‘으, 짜증나.’

자신을 담당하는 간호사는 상냥한 태도에 비해 의료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선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이었다.

군에서 흔히 보이는 FM 타입이랄까?

‘저 고지식한 왕가슴 같으니라고···.’

그녀는 특히 남자 환자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는데, 유니폼 단추가 벌어질 만큼 돌출된 가슴 때문이었다. 여자가 봐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돈니,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선을 강탈하는 가슴을 한참동안 주시하자, 간호사가 당황한 듯 물었다.

"왜그래요? 제 옷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니요. 잠시 딴 생각을···."

"오후 회진 때 담당 선생님이 보러 오실 거예요. 치료 경과보고 깁스 푸는 날짜 조정해 드릴 테니 얌전히 누워 있으세요. 아셨죠? 환자분."

"알았어요."

홀로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지연이 불쌍해 보였을까? 왕가슴 간호사 박지애가 물었다.

"근데 지연씨 친구들은 문병 안 와요?"

"친구요?"

"아니 계속 혼자 계시길레."

"아···, 다들 바빠서요."

불미스럽게 육사를 자퇴하고 나선 대부분의 동기들과 연락이 끊겼다.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들 마저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는 상황. 누군가 온다면 경호팀 동료들이 전분데, 최근 메스컴에 노출된 고성민의 밀착 마크로 인해 다들 정신이 없었다. 결국,

그녀를 찾아올 손님은 아무도 없는 셈.

이를 떠올리자 지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가 괜한 말을 꺼냈나···.’

지애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연에게 말했다.

"정 심심해지면 호출 버튼 눌러요. 한가할 때 말동무나 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전 혼자서도 잘 노니까."

지애의 배려는 고맙지만, 동정을 살 생각은 없었다.

그건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든다.

지애가 병실을 나가자 다시 홀로 남게 된 지연은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였다. 바쁘게 살 적엔 몰랐는데, 아플 때 문병 오는 지인 하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서글퍼졌다.

‘하-. 나도 인생 헛살았구나. 어떻게 이럴 때 연락할 친구 하나 없냐.’

지연은 불쑥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도훈이 괘씸했다.

그날 밤 도훈을 추적하지만 않았어도 발등뼈에 금이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도훈.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아오!’

물론 술에 취해 멋대로 행동한 자신의 과실이 더 크지만, 지연은 애꿎은 도훈을 원망했다. 그렇게라도 화를 전가시키지 않으면 울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은 별말 없지만, 나중에 퇴원하면 징계받겠지?’

첫 실전 투입에 흥분해 오버한 댓가는 너무도 처참했다.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전자기기 무단사용, 타켓에 대한 임의 동행으로 애써 획득한 현장 요원 자격까지 박탈당할지 모른다. 그러면 또 사무실에서 모니터나 보고 썩어야겠지.

"으, 짜증 지대로네 진짜!"

다른 환자와 있으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독실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병원생활이었다. 매일 켜놓는 티비도, 온종일 쳐다보던 스마트폰도 이젠 지겨웠다. 허락만 해준다면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 자식,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입원까지 손수 시켜놓고선 코빼기도 안 비친다 이거지?’

마침 지애가 언급한 병문안 이야기에 자극받은 지연이 도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그녀의 가명인 송이든의 이름으로.

송이든 : 오빠, 잘 지내시죠? 저 이든이에요.

잠시 후 도훈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이도훈 : 어, 다리 다친 덴 좀 어떠니?

‘어쭈? 의외로 칼 답이네? 심심한데 잘됐다.’

송이든 : 다 괜찮은데 심심해 죽을 것 같아요. 가족들은 멀리 살고 학과에서도 아싸라 아무도 안 찾아와요.

이도훈 : 그랬구나. 안 그래도 조만간 병문안 한 번 가려고 했는데···. 뭐 먹고 싶은 건 있니?

송이든 : 아니에요. 무슨 병문안까지 오시려고. 안 그러셔도 되요.

‘좀 와라, 양심 있으면.’

이도훈 : 아냐. 평일엔 수업 때문에 힘든데 저녁에 찾아 가도 될까? 보호자가 아니라 저녁은 좀 그런가?

송이든 : 괜찮아요. 저 알러지성 비염 때문에 독실로 옮겼거든요.

이도훈 : 독실? 거긴 좀 비싸지 않아?

송이든 : 회사에서 내주는 거라 괜찮···

문자를 두들기던 지연은 아차하는 마음에 다시 내용을 고쳐썼다.

송이든 : 어머니가 보험을 많이 들어놔서 괜찮아요.

이도훈 : 잘됐네. 여럿이 같이 있으면 괜히 눈치보이고 불편하잖아. 그럼 몇 호실이야?

송이든 : 진짜로 오시게요? 아이참,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참 저 그리고 떡볶이 좋아해요.

지연은 문자를 보내면서도 참으로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혼자 있느니 도훈이라도 와주면 좋을 것 같았다.

‘···감시업무도 재개할 겸 말이지.’

김문수 팀장이 전해준 말에 따르면 이도훈에 대한 감시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고 했다. 별다른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당분간 고성민의 신변 강화 쪽에 집중한다나 뭐래나.

하지만 그를 개인적으로 밀착 마크했던 지연은 이도훈에게서 독특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뭔가 촉이 왔다. 팀장의 말처럼 보기보다 비밀이 많은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그의 비밀에 대해 조그만 단서라도 찾게 된다면, 중단되었던 감시업무도 재개될 것이다. 그러면 현장 요원 자격 또한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연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훈에게서 한참 뒤에 문자가 왔다.

이도훈 : 미안. 쉬는 시간이 다 끝나가지고. 근데 떡볶이 좋아한다고? 그거 먹어도 돼? 환자들은 환자식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송이든 : 몰래 들고 오면 돼죠.

이도훈 : 그래도 기껏 사 들고 갔는데 못 먹거나 그럼 억울하잖아. 병원에 따라 뺏는 데도 있다더라고.

송이든 : 저희 병동 간호사 중에서 꽉 막힌 언니만 아니면 상관없을 걸요?

이도훈 : 꽉 막힌 언니?

송이든 : 왜, 가슴 수박같이 커다란···

지연은 다시 문자를 고쳐 썼다.

송이든 : 있어요. 완전 FM 스타일. 밤늦게 오신다고 했죠?

이도훈 : 응, 평일엔 시간이 잘 안돼서.

송이든 : 제가 그 언니 근무시간 좀 확인해 볼게요. 나이트 근무 날만 아님 괜찮을 것 같은 데···.

지연은 병원에 비치된 인터폰으로 관리동에 전화했다.

"5062호 환잔데요, 혹시 이번 주 나이트 스케쥴 나왔어요?"

-그건 왜요?

"아, 제가 뭐 좀 드릴 분이 있어서···. 혹시 박지애 간호사분 당직일이 언제에요?"

-이번주 지애 샘 나이트는 내일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지연은 곧바로 도훈에게 연락했다.

송이든 : 오빠 내일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 FM 간호사 내일 야간 근무래요.

이도훈 : 알았어. 근데 그 간호사 이름이 뭔데?

송이든 : 박지애라고 있어요.

한참 이어지던 도훈의 문자가 잠시 멈추었다.

잠시후 도훈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도훈 : 박지애? 내 초등학교 동창이랑 이름 똑같네? 혹시 그 간호사 비쩍 말랐든?

송이든 : 아뇨. 전혀 아닌데요.

혹시나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 더 확인을 마친 도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싸. 안 그래도 미션 때문에 그 간호사 근무 날이 궁금하던 참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구나.’

이도훈 : 암튼 내일만 피하면 된다는 거지?

송이든 : 네. 그럴거에요.

이도훈 : 그럼 준비 되는 데로 연락 줄게. 잘 쉬고 있어.

송이든 :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

"형 여자친구 생겼어요? 누구한테 그렇게 문자를 보내요?"

"무슨 여자친구? 여동생이야."

눈치 빠른 놈 같으니.

수업이 끝나고 한참 지연과 톡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태영이 물어왔다. 정음과 서현은 다른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고, 하릴없는 태영과 잠시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전 쉬는 시간에도 계속 톡하길래 여친인 줄 알았지 뭐에요. 근데 동생 미국에 있다지 않았어요?"

"미국에선 깨톡 안 되냐? 와이파이 없데?"

"아아, 형. 그나저나 오늘 교수님 좀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뭐가?"

"자꾸 절 쳐다보면서 실실 웃은 거 있죠?"

니가 아니라, 날 보고 웃은 거겠지. 녀석은 내 바로 앞 좌석에 앉았기 때문에 손 교수의 흐뭇한 시선을 착각한 모양이다.

"그랬어? 하긴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긴 하더라.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을까?"

"흐흐. 교수님 은근 섹시하지 않아요? 분명 애인 있겠죠? 부럽다. 저렇게 예쁜 교수님이랑 매일···."

애인은 없고, 오늘 섹파 하나 생겼지.

이도훈이라고···.

하지만 태영에게 솔직히 말할 순 없으니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별소릴 다 하네. 오늘은 동아리 안 가?"

"요거 다 마시고 가려고요. 형은 이제 뭐하세요?"

"공부나 하러 가야지. 예습 복습."

"대단하시네요. 참, 내일 저희 동기들이랑 PC방 가기로 했는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 저번에 말한 그 게임 알려드릴게요."

"됐다. 내일부턴 시간 나는 데로 국춘 문예나 쓸란다. 마감 마치려면 하루가 급할 것 같아서."

"알겠어요. 전 이만 동아리 가볼게요. 오늘 점심 잘 먹었습니다."

"그래."

실은 태영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다.

‘한지연이 입원한 병동 간호사가 마침 그 폭유라니···. 내일 저녁엔 야간 병동에 주사나 놓으러 가야겠구나.’

< 231. 좋은x, 나쁜x, 이상한x.-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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