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좋은x, 나쁜x, 이상한x.-1- >
***
혜공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점심 무렵이었다.
새벽녘 찬 기운을 고스란히 견뎌낸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충만한 내공 덕에 한 겨울에도 냉골에서 지내던 그에겐 전에 없던 경우.
‘내가 혼절해 버렸단 말인가? 내공은 또 왜···.’
그는 으슬으슬 몸을 떨며 옆에 쓰러진 혜민을 깨웠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혜민도 곧 깨어났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이게 어찌된 일이냐?"
"저도 막 일어나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혜공은 기억을 더듬으며 어제 밤일을 떠올렸다. 동굴 속 밀실에 가부좌를 틀고 수련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그리곤 동굴에서···.
‘모든 게 꿈이었단 말인가?’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장면과 장면이 연결되지 않고 뚝뚝 끊어졌다. 한바탕 기나긴 꿈을 꾸고 깬 것처럼 오래전 회상같이 느껴졌다.
혜민이 차가워진 몸을 비비며 말했다.
"공아, 아무래도 우리 형제가 주화입마에 빠졌던 모양이구나."
주화 입마란 운기조식 시 외부 충격을 받거나, 심마 같은 마음의 큰 동요로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해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
두 사람이 조각난 기억을 맞추어본 결론이었다.
혜공이 탄식했다.
"제가 심마(心魔)가 들어 헛것을 본 것 같습니다. 형님께선 저를 구하기 위해 진신내력을···. 아아, 어찌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그 덕에 목숨은 건졌지 않느냐."
혜공은 주화입마를 겪고도 무사한 이유를 혜민 덕분이라 여겼다. 내공이 흩어져 버린 까닭 역시 마찬가지.
혜공은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의 부덕으로 애꿎은 형님까지···."
"괜찮다. 천만다행으로 단전에는 손상이 없는 것 같으니. 이제 세수경도 있으니 내공이야 다시 쌓으면 그만이다."
"혀, 형님···."
"내공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 아니냐. 너무 연연치 말거라."
그 순간 혜공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두 눈을 치켜떴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응? 있다가도 없고."
"아니 그 다음 말입니다."
"하니 연연치 말라고."
"아아···!"
혜민의 말은 총탄이 되어 혜공의 가슴팍에 꽂혔다.
약물의 효과로 잠시 흐릿해지긴 했지만, 혜공은 또 다시 해탈에 이르렀다. 혜민이 그의 변화를 알아채고 대경했다.
"서, 성불하셨구려, 혜공 스님!"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혜민이 소리쳤다.
***
"혜공스님께도 인사드리고 가려 했는데···."
"주지스님은 어젯밤 혜민 스님과 출타하시며 한동안 찾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두 분이 워낙 신출귀몰하시다보니···"
"알겠습니다. 그럼 잘 쉬었다 갑니다, 스님."
주찬이 합장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표로 인사를 마친 일행은 절 아래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침 공기 너무 좋지 않아요? 은근 저도 산 체질인 듯?"
"그럼 아주 사는 건 어떠냐?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헛! 취소, 취소."
답답한 절간 생활을 떠올린 태영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말했다.
"그래도 밥은 입맛에 잘 맞았는데."
"맞아. 어제 저녁도 그렇고, 아침도 엄청 맛있더라. 어떻게 풀만 가지고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까?"
"보살님이 요릴 되게 잘 하시나보죠."
"보살님?"
"왜 그 예쁜 아주머니 있잖아요. 음식 가져다 주시던."
"아···! 기억난다. 엄청 미인이었지?"
주찬이 신이 나 맞장구치는 모습에 정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두 사람은 절에 와서도 예쁜 여잘 찾네? 하여간 도훈오빠 반만 좀 닮지.’
그러면서 도훈을 보는데 역시나 도훈은 그런데 일정 관심 없다는 표정. 그는 평소에도 여자얘기가 나오면 시큰둥했기 때문에, 정음은 도훈을 무척 점잖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나랑 단 둘이 있을 땐 전혀 다르지만.’
어제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힌 정음이 주찬에게 물었다.
"주찬 선배, 코는 괜찮아요?"
"아직도 만지면 아픈데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어. 괜찮아."
"오, 정음이 너 지금 주찬이 형 걱정하는 거?"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짓궂은 태영이 분위기를 이상하게 몰고 갔다.
"하-. 부럽네. 나도 어디 한군데 부러져야 정음이 한테 관심 좀 받을 텐데···."
"그 말 진심이니? 여기서 해줄까?"
정음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손을 풀자, 태영이 움찔하며 번복했다.
"노, 농담이야. 동기끼리 왜이래? 무서워서 농담하겠냐?"
"병결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도와 줄 의향은 넘치니까."
"학생들! 잠시 만요!"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데 뒤에서 누군가 일행을 불렀다. 돌아보자 멀리 산문 근처에 아까 말한 보살이 손짓하고 있었다.
"어, 그 보살님이네?"
"우리 부르는 거 맞지?"
"무슨 일일까? 숙소에 뭐 놓고갔나?"
도훈이 뭔가를 눈치 채고 말했다.
"내가 다녀올게."
"형, 제가 갈게요."
"아냐. 달리긴 여기서 내가 제일 빠르잖아."
"아, 그렇지."
도훈은 한 걸음에 달려가 희원 앞에 섰다. 일행과는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어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로···."
"아침부터 설거지 한다고 배웅도 못했네. 이거···."
희원이 음식이 담긴 비닐 랩을 건넸다.
"올라가는 길에 출출하면 간식이라도 들라고."
"고맙습니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맙지."
"네?"
희원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웠거든."
"아···. 네, 저도."
"그리고 도훈 학생이 했던 말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어."
"무슨 말이요?"
"죽은 남편한테 얽매이지 말라는 말. 이만하면 충분하겠다 싶기도 하고, 또 희망을 봤으니까."
"희망이라뇨?"
"잘 찾다보면 날 감당할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도훈이 너처럼."
도훈은 속으로 뜨악했다.
‘나도 두 스님들 아니었음 죽을 뻔 했는데···. 괜히 벌집을 건드려 애꿎은 남자들 피 보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 정돈 아닐 겁니다. 주인님의 희생 덕에 10년 묶은 음기를 모두 방출했으니까요. 이젠 좀 밝히는 아줌마 정도랄까.]
‘그러면야 다행이지만···. 그나저나 두 스님들한테 인사도 못 드리고 가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진데.’
[지금은 어쩔 수 없지요. 아이템으로 겨우 기억을 봉인해 놨는데, 괜히 주인님을 만났다간 머릿속이 더 복잡해 질 뿐입니다. 다행히 희원보살은 두 스님의 존재를 모르니,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잊혀 질 거구요. 꿈은 휘발성이 강하니까요.]
‘그러려나?’
[그러니 감사를 전하고 싶으시더라도 시일이 흐른 뒤에 하십시오.]
‘알겠어. 로시 네 말대로 할 게.’
[그래도 고마운 줄은 아시니 다행이네요.]
‘당연하지. 당시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잠들기 전에 생각해보니 두 스님이 나 때문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셨더라고. 사람이 그만치 받았는데 입 닦으면 쓰나.’
[훌륭한 태도입니다. 원한을 잊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주인님 말마따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까요.]
‘그래야지. 두 스님에게 받은 힘으로 더욱 훌륭한 카사노바가 되어야 겠어.’
[···그러라고 준 힘은 아닐 거 같은데.]
도훈이 희원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잘 됐네요. 꼭 좋은 사람 만나세요. 이번엔 되도록 건강한 분으로.""그래 고마워."
희원과 작별한 도훈은 다시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보살님이 왜 불렀대요?"
"응, 이거 간식으로 준다고."
도훈이 음식이 담긴 봉지를 흔들었다.
"우아! 이게 다 뭐에요? 전이랑 떡인가? 이야, 얼굴도 예쁜데 인심도 후하시구나."
"어쩌면 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스님들이랑 친분이 좀 있으니까···."
주찬이 거들먹거렸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도훈이 운전하려면 고생하겠네."
"아니야. 네가 점심 사잖아."
도훈의 말에 다시 어젯밤 도박이 떠오른 주찬이 씩씩거렸다.
"내가 사는 건 사는 건데, 어제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나 억울하다."
"그래. 설마 고의로 그랬겠어.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할 거야."
"맞아요. 저흰 주찬이 형이 점심 쏘고 싶어서 숨겼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 ···뭐?! 그런 거 아니래니까 자슥이."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래도 기왕 쏘시는 거 소고기 어때요? 콜?"
"소고기? 와타시도 좋아합니다, 한우!"
"봐요. 료코도 좋다잖아요. 이틀 째 풀만 뜯었더니 다들 고기 먹고 싶은 거 같은데."
태영이 여론을 몰아가자 주찬이 흥분해 소리쳤다.
"야! 방금 전까진 절 밥 엄청 맛있다면서?"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죠. 아, 고기 먹으려면 간식 조금만 먹어야 겠다."
"아으!"
씩씩거리는 주찬을 향해 도훈이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다들 먹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그냥 고기 먹자. 부족하면 내가 좀 보태도록 할 게."
"도, 도훈아···."
뜻밖의 호의에 주찬이 감격했다.
‘역시, 이 자식 진국이었어. 어젠 괜히 사기꾼으로 몰아 짜증났는데, 내 오해였나’
[실컷 골탕 먹여놓고 뒤로 달래는 겁니까? 이런 걸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나요?]
‘쪼잔하게 돈 몇 푼에 척질 필욘 없으니까. 정음이한테 껄떡대는 게 꼴 보기 싫어 그랬는데, 대충 눈치 보니 맘 접은 눈치기도 하고.’
[뭐 어쨌든 잘하셨습니다. 친구는 못 되더라도 불필요한 적은 만들지 않는 편이 현명한 태돕니다.]
‘나도 동감이야.’
일행은 광주에 들러 소고기를 점심으로 먹은 뒤 KTX에 올랐다. 이틀간 여독이 쌓였는지 출발 때와 다르게 모두 잠이 들었다.
***
정음 : 오빠, 저도 레포트 쓰는 거 도와드릴까요?
도착 직후 서현을 만나러 간다 하자, 정음이 폰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바로 옆에서 톡을 날려놓고도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라니···. 귀엽기 짝이없군.
도훈 : 아냐. 나도 피곤해서 대충 알려주고 금방 돌아 갈 거야. 말만으로 고맙다.
정음 : 그래요, 그럼.
"열차에서 내리 잤는데도 피곤하네."
"도박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래요. 저도 지금 허리 아파요."
"어쨌든 다들 고생 많았다. 집에 가서 푹 셔. 내일은 또 학교가야 되니까."
"도훈이 넌 서현이 본다고 그랬지? 고생해라."
"응. 금방 마무리할거야. 아까 서현이가 반 이상 정리해놨다고 했어."
"다행이네. 난 그럼 여기서 지하철 타고 먼저 간다."
"네. 수업 때 뵈요."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흩어지고 결국 혼자 남았다.
서현이가 굳이 이쪽으로 오겠다는 통에 근처 커피숍에 자릴 잡고 기다렸다. 커피를 시켜놓고 10분 쯤 있으니 서현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죄송해요, 오빠! 제가 늦었죠?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일찍 마중 나오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차가 엄청 막히더라고요."
"아무래도 일요일이다 보니 밖에 나들이 갔다 들어오는 차들이 많을 거야. 대게 이 시간 되면 막히더라고."
"아···. 그런 거예요?"
지금은 중고차하나 없는 뚜벅이지만, 한땐 값비싼 수입차 15년 넘게 끌고 다니던 몸. 서울 시내 도로 상황은 빠삭하다면 빠삭했다.
"그나저나 레포트는 어떻게 됐어?"
서현이 가방에서 조그만 넷북을 꺼내며 말했다.
"아까 톡으로 말씀드린 데로 절반 쯤 써왔어요. 근데 제가 직접 답사를 간게 아니라 오빠가 전체적으로 한 번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 한 번 보자."
넷북은 화면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같이 보려고 하니 옆으로 바짝 붙어야 했다. 오늘 따라 달라붙은 레깅즈 치마를 입은 서현의 다리가 자꾸 내 몸에 닿았다.
‘얘 향수 뿌렸나? 몸에서 좋은 냄새 나는데?’
[왠지 예감이 좋군요. 서현 양은 어떻게 공략하실 셈입니까?]
‘스킬 쿨도 다 돌았겠다, 정석으로 가야지. 정보창 띄워.’
나는 서현이 써둔 레포트를 훑는 척 하면서 스마트 워치를 힐끔거렸다. 디스플레이엔 서현의 프로필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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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박서현 (비처녀, 일시 17세 8개월)
나이 : 20
호감도 : 68/100
개방성 : B
성감대 : 옆구리, 팔꿈치, 목덜미.
*애무 포인트 : 부드러운 키스에 흠뻑 달아오르는 타입 입니다.
성욕지수 : 높음
공략팁
*그녀는 평소 호감이 있던 선배와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에 들 떠 있습니다. 일부러 지각한 것처럼 꾸민 것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의 멘트를 추천합니다.
-추천 멘트 : "피곤한데 잠깐 눈 좀 붙였다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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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프로필을 본 나는 생각 정보창의 달라진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오. 진짜로 처녀를 잃은 일시까지 공개되네?’
[강화된 처녀감별사 옵션 때문입니다. 서현양의 경우는 만 17세 8개월. 그러니까 한국나이로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쯤 처녀를 상실했군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저렇게 안경 범생같은 얼굴 가지고 이미 고등학교 때 아다를 땠단 말이지?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엇 그러고 보니 진짜 70이 안되는데도 정보가 공개 되네?’
예전 같으면 호감도 70이하에선 무조건 ‘???’였다.
하지만 이제는 60만 넘어도 확인이 가능했다. 거기다 공략팁의 설명 역시 묘하게 내용이 디테일하게 변한 느낌.
‘캬! 강화가 좋긴 좋구나! 오늘 공략은 누워서 떡치기겠는데?’
[네?]
나는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서현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어떻게 이 범생인 척 위장하고 있는 여자애를 자빠뜨려 볼까나?
< 226. 좋은x, 나쁜x, 이상한x.-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