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깊은 밤, 달은 지고-16- >
단박에 초기 자본의 20%를 밀어 넣자, 태영과 주찬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지금껏 나의 배팅액중 가장 큰 액수.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 패를 던졌다.
"어이쿠, 도훈이 떴나 보네."
"그러게요. 떴으니 죽어야지."
나는 씩 웃으며 패를 뒤집었다.
낱장의 합은 영 끗. 섰다 판의 최약체 패였다.
"아니! 망통을 들고 이천을 던져?"
"와! 뻥카에 제대로 당했네."
"그러게 왜 패도 안보고 죽으셔."
나는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돈을 쓸어 담았다.
[큭. 고작 이천 원가지고 이천만원처럼 던지시는 군요.]
‘인마, 금액이 중요하냐? 이겼다는 게 중요하지.’
[헌데 상대방이 안 죽었음 고스란히 날릴 뻔 했는데 왜 그런 무리수를 두셨습니까?]
‘조용히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돈을 밀어 넣으면 좋은 패를 들었나 의심하는게 일반적이거든. 땡을 잡지 않은 이상에야 나라도 죽었을 걸?’
[호오. 고도의 심리전인가요?]
‘그정돈 아니고. 어차피 이건 1회성 전략이야. 두 번은 안속을 테니까.’
다음 판. 오랜만에 4땡이 떴다.
섰다판에서 땡을 잡으면 어지간해선 지지 않는다.
도합 스무 장으로 조합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는 190개.
그중에서 4땡을 이길 수 있는 패는 몇 안 된다. 특히 4를 잡고 있는 상황에선 구사파토의 가능성까지 줄어들기 때문에 더욱 확률이 높다.
나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판돈을 올렸다.
"한 번 더 해볼까? 레이스, 이천!"
두 번 연속 한도까지 치는 배팅액에 주찬과 태영도 슬슬 약이 올랐다. 다음 순서인 주찬이 나섰다.
"이쯤 되면 한 번 해 보자는 거지? 따라간다. 이천!"
태영은 한 술 더 떴다.
"형, 같은 수법에 두 번씩 당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누굴 호구로 아시나. 이천 받고 이천 더!"
태영이 맞불을 놓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쌓여가는 지폐에 료코과 정음은 잇따라 포기를 선언했다.
다시 나의 차례.
"이게 뻥카로 보여? 그럼 이천 더!"
멈추지 않는 나의 기세에 태영이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왔다. 놈의 버릇.’
[버릇요? 그게 뭡니까?]
‘실은 아까부터 태영이를 유심히 보고 있었어. 놈은 좋은 패를 들면 오른쪽 입고리가 슬쩍 올라가는 버릇이 있거든. 대신 안 좋은 패를 들고 고민할 땐 아랫입술을 깨물더라고. 지금 저 표정은 자기 패에 자신이 없다는 뜻이야. 한마디로 배짱으로 튕겨 본
거란 소리지.’
[캬! 놀라운 관찰력이십니다. 혹시 지금껏 가만히 있으시던 게 그런 이유였습니까?]
‘당연하지. 도박은 확률 싸움이기도하지만 동시에 눈썰미 싸움이야. 누가 어떤 패를 들었을지 예측할 수 있다면 절대 큰 손해를 보는 일은 없어. 어차피 타짜가 섞이지 않는 이상 이길 승률은 대부분 비슷해. 중요한건 딸 때는 왕창, 잃을 땐 최소한으로 만
드는 게 포인트랄까.’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금액에 주찬이 어깨를 으쓱하며 포기를 선언했다.
"난 다이. 후달려서 못 해먹겠다. 두 사람끼리 박 터져보라고."
이제 승부는 1:1.
태영이 한 번 더 내 표정을 살폈다.
전판에서 당한 기억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것 같았다.
놈이 자기 패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또 망통이면 열 받는데···."
"뭐하냐 너? 얼른 받던지 죽던지 해."
"도훈이 형이 은근 배짱 좋네요?"
"아이고, 불광동 타짜 어디 마실 나가셨나?"
"에이, 좋다. 그래도 패는 확인해야지. 콜!"
태영이 금액을 밀어 넣으며 콜을 선언했다.
뒤집힌 녀석의 패는 8끗.
그리 낮지도 높지도 않은 패다.
내가 4짜 한 장을 먼저 던지자 놈이 반색하며 물었다.
"엇? 설마 구사에요? 에이, 어차피 다시 해야 하는데 뭘 이렇게까지···."
툭-
"아니. 4땡인데."
"어억!"
태영이 벌침을 맞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와! 4땡이라니! 어쩐지 느낌이 쌔 하더라니."
일순간에 만원 넘는 돈이 들어오자 재계 순위가 재편되었다. 이제부턴 나와 주찬 그리고 태영의 3파전.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지면서 료코가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갔다. 큰 판에서 몇 번 밟힌 뒤 기세가 확 꺾이면서 점점 소극적인 배팅으로 고사해버리는 전형적인 초보의 패턴이었다.
료코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얏빠리. 도박은 저랑 안 맞는 것이므니다."
료코는 항복을 선언하고 정음의 뒤에 찰싹 붙어 훈수를 두었다. 초보들끼리 서로 모인다고 뭐가 되나? 뭉쳐있는 두 여자를 보고 있으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정음이 박고, 료코 더! 이렇게 외치면 얼마나 좋을까? 홀딱 벗긴 정음이를 바닥에 눕히고 료코를 끼얹어 층층 봊이를 만드는 거지. 일층 박다 이층. 그럼 끝내 줄 텐데···.’
[역시! 주인님은 도박 중에도 여자 생각뿐이시군요. 참으로 한결같으십니다.]
‘인마. 어차피 이거 다 시간 때우려고 하는 건데 뭘.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션을 완수 하는 거야.’
[희원 보살 공략할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대충은? 천 배 올리기 전에 잠시 산책을 제안해 볼 거야. 오후에 보니 절 뒤편에 조금만 암자가 하나 있더라고. 거기로 끌고 가서 확 그냥···.’
[암자 안에서 하시게 되면 제한 조건에 위배됩니다.]
‘암자 안이 아니라 건물 뒤에서 하면 되지. 어차피 사람들도 안다니는 곳이니 들킬 염려도 없을 테고. 참, 정음이 관련된 업적은 아직 미달성 맞지?’
[네. 업적 클리어가 메시지가 안 되셨으니 호감도 100은 못 채우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신, 료코양 공략으로 ‘인종의 도가니탕’ 위업 1/3 달성은 완료 하셨고요.]
‘생각보다 정음이 호감도 올리는 게 지지부진 한데?’
[아무래도 100% 신뢰를 못해서가 아닐까요? 아까도 료코양과 단둘이서 차를 타고 나건 것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던데···.]
‘거참, 어렵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음이한테 올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뭐, 그건 시간을 두고 차차 지켜봐야지.’
무료하게 패를 돌리고 있는데 때마침 좋은 패가 들어왔다.
무적패라 불리는 삼팔광땡.
거뭇거뭇 배경에서 해가 떠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릴 지를 뻔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패가 좋지 않았는지 일찍 포기 했지만, 의외로 정음이 기세를 올리며 덤벼왔다.
"선배, 저랑 끝장 승부 가요."
정음의 목소리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 정도면 거의 9땡이나 장땡을 잡았다고 봐야한다.
‘정음인 너무 솔직해서 탈이란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너를 밟고 올라서는 수밖에.’
"그렇게 자신 있어?"
"쫄리면 죽으시던가요."
"어쭈? 정음이 도박할 땐 위아래도 없구나?"
"앗, 죄송해요."
"농담이야 농담."
결국 정음은 자신이 가진 돈을 전부 털어 넣고 패배했다. 그녀가 가진 자금은 이제 몽땅 내차지가 되었다.
"아아! 9땡을 들고 밟히다니!"
머리를 쥐어뜯는 정음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특유의 승부욕 때문인지 도박에서 진 것이 몹시 분한 모양이다.
‘크크. 나중에 1:1로 섰다 하자고 꼬셔야겠다. 진 사람이 벌칙으로 옷 하나씩 벗기. 아, 그래서 게임 이름이 섰다 인건가?’
[설 일 많아서 퍽이나 좋으시겠습니다.]
‘왜? 옷 벗기 도박 재밌을 것 같지 않냐? 우리 과 8선녀들 싹 모아다 단체로 하면 때씹 가능할지도.’
[으이구. 진짜.]
"도훈이 형이 오늘 패 빨 좋으시네요."
"그러게. 하지만 첫 끗발이 좋으면 뭐다?"
주찬과 태영은 노골적으로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도박에서까지 나에게 밀리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원래 주색을 밝히는 사람은 잡기에도 능한 법이란다, 애송이들아.’
좀 더 시간이 지나니 태영이가 떨어져 나가고 나와 주찬만 남게 되었다. 주찬이 능숙한 솜씨로 패를 섞으며 물었다.
"하는 거 봐선 절대 초보는 아닌 것 같은데···. 도훈이 너 어디서 좀 놀았냐?"
"그냥 저냥."
물론 거짓말.
원주인 이도훈이 라면 모를까, 마흔 살 넘게 산 이정우의 일생에 도박 경험은 적지 않다. 노름에도 경륜이 필요한 법. 스무살 겨우 넘긴 풋내기들에게 호락호락 질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된 거 더 시간 낭비 말고 단판 전 갈래? 너나 나나 가진 돈은 비슷해 보이는데."
처음 분배되었던 돈은 이제 나와 주찬에게 나뉘어 있었다.
"좋아."
나와 주찬이 올 인을 선언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아, 이걸 단 한 판으로요?"
"이게 다 얼마람?"
"오늘 가장 큰 판이네!"
[주인님, 자신 있으십니까? 이건 너무 요행에 맡기시는 거 같은데요.]
‘물론 운에만 기댈 수 없지. 절대지지 않는 싸움을 할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두고 봐.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타짜의 명대사를 읊은 몰래 빼놓았던 8광 패를 손에 쥐었다.
[설마, 비겁하게 그걸로···.]
‘이기면 장땡이지 뭘.’
드디어 마지막 패가 들어왔다.
긴장하며 패를 쪼는데 하필 2와 3, 합이 5끗이었다.
숨긴 8광을 이용한다 해도 망통 아니면 1끗이다.
도저히 이기기 힘든 패다.
반면 주찬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패를 받았다는 표시다.
"어차피 레이스도 없는데 바로 깔까?"
"레이스를 왜 안 해? 후식으로 커피 어때?"
"커피?"
"그래. 여기서 진 사람이 커피 쏘기."
"커피만 가지고 되겠냐? 커피 받고 아이스크림 얹어."
"자신 있나 보다?"
"난 도박으론 안지거든."
주찬은 의기양양했다. 자신하는 모습이 최소 땡을 든 게 틀림없다. 이대로 가면 필패.
그때 내가 료코와 정음을 향해 물었다.
"두 사람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희요?"
"응. 이 판에 진 사람이 내일 간식 쏠 거야."
"그래, 뭐든 말해봐. 어차피 도훈이가 계산할 거니까."
"그러면···, 와따시는···."
이때다.
주찬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빠르게 화투 패를 놈의 밑으로 날렸다. 손끝으로 튕겨낸 화투패가 스르륵 담요를 미끄러져가더니 놈의 다리 아래로 들어갔다.
역시 손은 눈보다 빠르다.
"잠깐. 좀 이상한데? 이거 화투패 안 맞는 거 아냐?"
"뭐?"
"봐봐. 바닥패가 모두 15장뿐이잖아. 너랑 나랑 두 장씩 받았으니 남은 게 16장이어야지."
"무슨 소리야 갑자기? 니가 기리했으면서."
"기리야 내가 했지만 패를 섞은 건 너지."
"어디 흘린 거 아니에요?"
태영이 담요를 들추며 사라진 패를 찾았다.
그러자 주찬의 밑에서 8광이 튀어나왔다.
"어엇, 이게 왜 여기 있어?!"
"주찬이 형! 설마 처음부터 숨겨놓은···."
"뭐, 뭔 소리야!"
"어쩐지 삼팔이 잘 안 나온다라니."
"아니라니까! 어쩌다 흘렸나 보지."
나는 가만히 지켜보다 물었다.
"너 들고 있는 패 까봐."
"어?"
"만약 그 패 중에 삼광이 있으면 오해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뭐, 뭐야? 날 의심하는 거야?"
"그러니까 패부터 확인해 보자고."
주찬이 부들부들 떨면서 패를 내보였다.
하필 놈이 들고 있던 것은 3땡.
8광과 조합하면 삼팔이 나올 수 있는 패였다.
"허허. 이럼 완전 나가린데."
"와! 주찬이형 그렇게 안봤더니!"
"야, 나 진짜 억울하다. 숨긴 거 아니야. 도훈이 넌 뭐였는데?"
"내 패가 뭐가 나오건 삼팔을 어떻게 이기겠어? 내가 졌다."
"진짜 그런거 아니라니까? 그냥 마지막에 운 좋게 삼땡이 나온거라고! 아오!"
"알았어. 내가 졌어. 내가 후식 쏠 게. 그럼 됐지?"
나의 항복 선언에 정음과 료코는 경멸어린 시선으로 주찬을 바라보았다. 속임수를 써서 이겼다고 오해하는 표정이다.
"도훈이 니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뭐가 되긴. 어쨌든 너 삼땡이라며? 난 끗이야 어차피. 그러니 내가 졌다고."
"아니 그게···."
"주찬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좀 심하네. 가위 바위 보 하는데 혼자 쌍권총 든 거랑 뭐가 달라요?"
"맞아요."
"치사합니다."
오해를 산 주찬이 노발대발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담배를 피러 간다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암튼 재밌게 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방에 가서 쉬자."
"네."
"그럼 주무세요."
"사요나라."
"야!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결국 주찬은 정정당당하게 이기고도 체면을 구겨야 했다.
녀석이 불쌍했지만 정음을 노린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설마 주인님께서 말한 절대 지지 않는 승부라는 게 이런 의미인줄 몰랐습니다.]
‘원랜 내 손에 3광이나 8자가 들어오면 삼팔광땡이나 8땡을 노리려고 했어.’
[하지만 전혀 다른 게 들어왔죠.]
‘맞아. 그래서 뒤집어씌우기로 작전을 바꿨지. 주찬은 이기기도 치사한 사람이 되었으니 결국 아무 소득도 없는 셈이랄까. 반면 나는 부당한 결과에도 승복하고 후식을 쏘는 멋진 선배로 남고.’
[주인님은 ···참으로 야비합니다.]
‘흐흐. 그러게 누가 정음이한테 눈독들이래? 내가 먼저 침 묻혔는데 어디서 감히?’
그나저나 이제 슬슬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 희원 보살님을 공략할 시간이다. 문득 고갤 들어 하늘은 보니 보름달이 휘엉청 떠올라 있었다.
저 달덩이처럼 커다란 엉덩이에 팟팟 꽂아 버리고 싶은 밤이군.
나는 담배를 피우러 가는 척 밖으로 나가다가 희원 보살이 있는 후원으로 자릴 옮겼다.
< 218. 깊은 밤, 달은 지고-1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