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깊은 밤, 달은 지고-11- >
‘대관절 스승은 왜 묻는 거지?’
[아마도 능력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게 아닐까요?]
‘근원이라니?’
[가령 혜민, 혜공 스님은 그 바탕을 불문에 두고 있지 않습니까? 바티칸의 템플 나이츠라든가 구마(驅魔)사제들은 천주교에 근간을 둘 것이구요.]
‘잠깐, 구마 사제? 설마 엑소시즘 말하는 거야?’
[네.]
‘그딴 게 실존한다는 얘긴 아니지?’
[주인님, 환생한지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내가 뭘?’
[주인님이 환생하기 직전까지 전 부인을 쫓아다니며 구천을 떠돌던 사실을요.]
‘아차.’
도훈은 불현 듯 떠올렸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된다는 사실을.
그것은 실제 본인이 겪은 일이기도 했다. 귀신이 실재한다면, 악령을 퇴치하는 엑소시즘 역시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이 세상에 전승되어온 수많은 신화, 민담, 전설들이 전혀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멀린은 실제 플레이어가 아님에도 스스로 마법을 깨우친 인물이었고, 제갈공명 역시 그 지혜가 하늘에 닿을 만큼 신출귀몰한 재주를 타고 났습니다.]
‘헐,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 말이야? 유비의 책사였던 제갈량?’
[어디 그뿐입니까? 역발산기개세로 불리던 항우는 실제 플레이어와 쌍벽을 이룰 만큼 경이적인 무력의 소유자 였습니다. 좀 더 가까운 예로는 고려시대의 무신 척준경 역시 그러했구요.]
‘가만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맞습니다. 꼭 신탁을 받은 플레이어만이 아카식레코드에 근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깨달은 자들이라면 그 힘을 일부를 사용할 수 있지요.]
도훈은 이 세상에 특별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능력을 각성하고 나서야 이제껏 몰랐던 세상에 초대장을 받은 느낌이랄까?
[물론 평범한 인간들이 제아무리 노력으로 얻어낸 능력이라도 플레이어에 견줄 바는 아닙니다. 우연히 비밀의 일부를 알게 되었다고 한들 일부 부스러기에 불과하니까요. 또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성물이라는 것 또한 천상계 수준에서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지요.]
‘성물?’
[왜 엑스칼리버라든지, 롱기누스의 창이라던지, 만파식적이라든지 하는 물건들 말입니다.]
‘아아. 그런···.’
[제법 그럴싸하지만 결국은 천상계의 모조품일 뿐. 감히 오리지널과 비교할 순 없지요.]
천상계의 기술력을 뽐내는 로시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얼씨구. 자기도 메이드 인 헤븐이라 이거네. 그나저나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혜공 스님이 궁금한 것은 주인님께서 사용하는 능력의 근원이 자신들과 같은 정도(正道)에 바탕을 둔 힘인가를 묻는 것일 겁니다.]
‘정도? 그러니까 정파와 사파 같은 건가?’
[그편이 좀 더 이해가 빠르시겠군요. 능력을 발휘하는 자들 중엔 간혹 사사로운 목적이나 개인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 그들을 사도, 혹은 사파라고 하지요]
‘가만, 이거 완전 내 얘기 아니냐? 능력을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쓴다는 건···.’
따지고 보면 도훈은 사파중에 사파.
신이 주신 능력과 이능이 담긴 아이템을, 온전히 개인의 사리사욕 충족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를 공략하는데 만.
[그렇군요. 어쩌면 대마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뭐래? 내가 왜 마두야?’
[하하. 농담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나눈 임의적 구분에 불과합니다. 신께선 그러한 것엔 일절 관심이 없으시거든요.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러니까···.]
도훈은 로시의 조언에 따라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외람되오나 사문(師門)을 밝히긴 곤란합니다."
한참을 궁리 끝에 나온 도훈의 대답에 혜공은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끄응···. 비밀이 많은 친구로구먼."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저희 스승님께선 본문의 맥이 불가에서 파생되었다 하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혹시 개파 조사 분 존함이 삼봉어른···."
"더 이상 밝히긴 곤란합니다."
"알겠네."
혜공은 속으로 생각했다.
‘불가에서 파생되었으면 필시 무당파를 원류로 하고 있겠군. 조선까지 내려온 걸 보면 속가제자 쯤 되려나? 형님께서 정순한 내공을 느끼셨다는 게 틀림없는 사실이었어.’
"아무튼 이른 나이에 성취가 대단하구먼."
"과찬이십니다."
혜공은 도훈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그가 무당파의 전진을 이어받은 전승자라고 착각해 버린 것이었다.
현재는 무공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여전히 과거의 맥을 이어오는 전승자들이 있다. 대게 무공을 익힌 자들은 자신 대에서 맥이 끊기는 것을 경계했고, 이에 후계자를 구해 일인전승으로 무공을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군. 그의 비범함을 알아챈 스승이 어린 시절부터 그를 수련시킨 거였어. 그러니 약관을 겨우 넘긴 나이에 저런 수준까지 이르렀을 테지.’
혜공은 도훈의 균형 잡힌 몸을 보며 감탄했다.
‘확실히 기골이 장대하고 뼈대가 튼튼한 아이다. 누가 봐도 탐날만한 육체를 타고났어. 거기다 나의 심안과 형님의 명견으로도 간파 못할 정도로 내력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니···. 저런 기재가 어디서 나타났을꼬?’
혜공은 동시에 부러움도 느꼈다.
‘공자께서 이르길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라 하였거늘···. 밑에 있는 수행승들이 영 변변치 못하니 원.’
"더 얘길 나누고 싶지만 예불 준비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네. 혹시 시간이 되거든 저녁 늦게 차나 한 잔 하세나."
"네, 스님."
혜공이 물러나자 도훈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시, 대체 저 대답이 무슨 뜻이기에 땡중이 의심을 거둔 거지?’
[혜공은 주인님이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무공의 일부라고 착각하도록 유도 했고요.]
‘무공? 진짜로 무공 말이야?’
[네. 내공에 바탕을 둔 무공이 아니고서야 혜민 스님이 내력을 알아보려 했을 때 회피한 것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거든요. 아마도 혜공은 주인님이 특별한 심법을 익힌 내가의 고수라고 착각할 것입니다.]
‘헐, 무슨 내가 고수?’
[왜요? 나름 색공의 대가시지 않습니까?]
‘음 어감은 썩 별로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도훈은 사무실에서 바지를 구해 일행에게로 합류했다.
***
다시 한데 모인 대학생들은 조그만 방안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화기애애한 넷과 달리 문짝에 얼굴을 강타당한 주찬은 시름시름 앓는 소릴 내며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분명 도훈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벌컥 문이 열릴 당시를 떠올리던 주찬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 목도했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던 탓이다.
‘뭔가 발가벗고 있는 느낌이었단 말이지.’
그러다 이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럼 정음이가 도훈이랑 떡이라도 치고 있었다는 거야 뭐야?’
당시 워낙에 경황이 없었고, 얼굴을 얻어맞아 혼란스러운 틈에 머릿속에 이상한 잔상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발가벗고 있던 정음이 문짝을 걷어 차 자신을 때려 눕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굶긴 했나 보네. 정음이 벗은 모습을 상상하는 걸 보면···.’
"주찬이 형 좀 괜찮아요?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돈 아니야. 이마 맞은 데가 욱신거려서 잠깐 쉬고있는 거야."
"코피도 나셨다면 서요? 뼈는 괜찮아요?"
"지금 봐선 크게 이상은 없는 거 같아."
"미안하다, 주찬아."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저녁엔 뭐하고 놀까요? 아, 화투라도 하나 챙겨오는 건데."
"화투가 무엇이므니까?"
"어? 료코 화투 몰라? 고스톱있잖아."
"고스돕?"
"허얼. 그거 너희 나라에서 만든 거야. 닌텐도 알지? 거기서 만들었을 텐데?"
"닌텐도는 압니다. 근데 화투는 처음 들어 봅니다."
"음, 카드가 있으면 딱 좋겠는데···."
"하나 사오면 되지. 요 아래 읍내가면 팔 텐데."
"이 시간에 누가 갔다 오겠어요? 벌써 어둑어둑 한데."
"왜, 우리 렌트카 있잖아."
주찬이 슬쩍 분위기를 띄웠다.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은 도훈과 자신.
그런데 자신은 부상으로 몸져누웠으니 결국 현재 운전이 가능한 사람은 도훈뿐이었다. 결국 주찬의 의도는 도훈을 바깥으로 내보내려는 속셈.
"도훈이 올 때 고생했으니까 내가 운전하면 좋을 텐데···."
숫제 도훈을 등 떠미는 형국이었다.
주찬의 얼굴이 상한데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도훈은-따지고 보면 정음의 잘못이지만-흔쾌히 수락했다.
"그래. 밤에 할 것 없으면 심심하니까 나가서 화투장이나 사오지 뭐. 저녁에 먹을 간식도 있어야 할 거고."
"아, 제가 괜히 얘길 꺼내가지고···."
"아니야. 괜찮아."
차로 나가도 읍내까지 왕복은 1시간은 걸리는 거리.
정음은 도훈이 혼자 고생하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럼 저도 같이 다녀올게요."
"정음이 니가?"
"선배 혼자 가면 심심하니까."
"기왕 말 꺼냈으니 내가 따라 갈게."
태영이 대신 나섰으나 주찬이 반대했다.
"안 돼. 넌 이따 사진도 찍고 해야지. 의외로 밤에 연등 켜놓으면 야경이 예쁘단 말이지. 그리고 정음이 너도 옆에서 적을 게 있을 거야. 저녁 예불이라든가 타종의 유래라든가."
주찬은 도훈을 혼자 보내기 위해 계속 머릴 굴렸다. 어떻게든 도훈만 보내고 나면 작업을 속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나 혼자 다녀와도. 저녁 공양 까지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후딱 다녀올게."
"아···."
그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료코가 나섰다.
"그럼 제가 도훈사마랑 다녀오겠스므니다."
"어? 료코가?"
"어차피 전 여기 있어도 할 일이 없으니까요."
료코의 자세는 워낙에 강경했다.
사실 저마다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료코는 임무가 없다시피 한 상황.
주찬은 답사 전반의 일정을 계획했고, 태영은 사진담당, 정음은 필기를 맡았다. 도훈은 올 때 갈 때 장시간 운전을 했고, 불참한 서현 역시 차후 리포트 작성을 맡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별 과제를 무임승차하는 것에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료코는 허드렛일이라도 거들고 싶었다.
"흠···."
료코가 도훈과 같이 외출을 한다는 것에 태영이 불만을 드러냈지만, 딱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주찬 역시 어떻게든 도훈을 내보내고 싶어 했으므로 료코의 말에 냉큼 동의했다.
"하긴, 도훈이 혼자 다녀오면 심심 할 테니까.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렇게 할 게 그럼. 료코 같이 가자."
"하잇."
두 사람은 렌트카를 세워 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
"굳이 같이 안가도 되는데."
"아닙니다. 솔직히 많이 불편해서···. 저도 뭔가 하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점수를 같이 받는 것은 민폐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생각이 제대로 된 아이구나. 사실 교환학생으로 온 이상 수업을 따라 가기보다 한국말을 배우는 것도 벅찰 것이다.
이는 이정우 시절 미국에서 유학할 때 직접 겪은 일이기도 했다. 나름 한국에서 영어를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유학 첫 학기는 교수가 하는 수업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발음도 불분명하거니와 말이 빨라 도무지 무슨 얘길 하는 것인지 수업의 흐름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밤 늦게 까지 원서로 된 교재를 예습하고 나서야 겨우 학점을 채울 수 있었다. 나중에도 영어를 듣는 것엔 어느정도 귀가 트였지만, 김치 발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생각이 나자 어린 료코가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나는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료코의 손등 위에 올리며 말했다.
"료코. 우리 조 누구도 그렇게 생각 안할 거야. 료코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도훈 사마···."
료코는 감격한 모습이었다.
"도훈 사마는 정말 친절한 분이시네요."
"하하. 또 그 소리네. 료코는 한국 남자에 대해 너무 좋은 인상만 갖고 있는 것 같아."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오히려 한국 남자들이 일본 여자를 더 좋아할걸?"
"예? 혼또우데스카?"
"응. 혹시 스시녀라고 들어봤어?"
"스시년?"
"아, 아니 스시녀."
"하잇, 스시년."
아, 요깟따네.
뭐 대충 알아들으라고 하지.
"암튼 그런 말이 있는데, 일본 여자들을 굉장히 좋게 보는 말이야."
"예?"
"왜 일본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굉장히 헌신적인 이미지거든."
"헌신짝?"
"아니 그러니까···. 남자들한테 잘한다고."
"아···."
"요새 여권신장이니 페미니즘이니 해서 기가 드센 여자들이 있거든. 물론 일부긴 한데 가끔 보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심할 데가 있더라고. 근데 일본 여자들은 의외로 순종적이라 그래야 하나? 암튼 되게 좋게 생각해."
료코가 운전중인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도훈사마도 일본 여자 좋아하십니까?"
"나?"
"하잇. 궁금합니다."
나야 치마만 두르면 국적 나이 가리지 않지.
하지만 진심을 드러내기엔 너무 경박해 보이므로 적당히 둘러댔다.
"음, 난 뭐 사람만나면 사람을 보는 주의라서. 국적이 뭐가 중요하겠어?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거지."
그나저나 둘이 차도 타고 나왔겠다, 슬슬 작업을 시작해 볼까?
< 213. 깊은 밤, 달은 지고-1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