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깊은 밤, 달은 지고-7- >
***
주찬은 23년째 모태 솔로였다.
본인은 그 이유를 남중-남고-군대 테크 탓으로 돌렸지만, 똑같은 코스를 밟고도 여친 잘만 사귀는 친구들도 있는 걸 봐선 원인 파악부터 잘못됐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문제는 도훈의 지적대로 시대를 역행하는 패션 감각.
정 옷을 못 고르겠음 스트릿 숍 마네킹에 디피된 데로만 사 입어도 평타는 칠 텐데, 꼭 희한한 곤조를 부리며 독자적인 스타일 고집했다.
통 넓은 일자 바지.
상의는 후줄근한 체크남방 혹은 늘어진 라운드 티.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벨트 없이 올려 입은 배바지.
딴에는 하이웨스트 룩이라 지껄이지만, 누가 봐도 시골 아저씨 논매러 갈 때 입는 스타일이었다.
옷차림뿐인가?
외모도 문제다.
최대한 양보해 얼굴은 그럭저럭 중간은 간다 쳐도, 빠르게 시작된 탈모로 인해 20대 초반임에도 이미 정수리 쪽이 훤했다. M자 라인이 뚜렷한 이마 역시 조만간 베지터를 능가할 지경.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지만 자신감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앞서 말했듯 그는 여친이 없는 이유를 환경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괜찮은 상대만 있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사귈 수 있을 거로 착각했다.
이런 이유로 주찬은 이번 1박 2일의 여정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우연히 같은 조에 속한 여학생들이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했던 것이다.
셋 중 누구를 꼬셔도 주변 모쏠들로부터 영웅 대접받을 정도랄까?
뿔테 안경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서현은 나이답지 않은 성숙미와 지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교환 학생 료코는 문화 차이에서 빚어지는 엉뚱한 행동과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제스쳐가 절로 귀여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단언컨대 으뜸은 육정음이지.’
나머지 둘도 준수했지만, 그중에서도 육정음은 독보적이었다.
시디 한 장이면 가려지는 조그만 머리.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는 연예인 뺨치는 비율이다. 게다가 특유의 단발머리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과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며 새내기다운 풋풋함과 상큼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길다가 우연히 마주치면 절로 고개가 돌아갈 만큼 빼어난 미인. 그녀가 바로 사범대 17학번 퀸카로 불리는 육정음이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실은 주찬이 정음에게 호감을 품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평소 태도가 쌀쌀맞은 서현이나 한국말이 서툰 료코와 달리 정음은 항상 자신에게 친절했다.
이는 평소 사려 깊은 그녀의 성격이 드러난 일면이었지만, 모쏠인 주찬에겐 정음의 태도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긴, 내가 머리가 일찍 빠져서 그렇지 얼굴만 놓고보면 도훈이랑도 별 차이도 없잖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주찬은 정음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확신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찰싹 달라붙은 료코 때문에 둘 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저 일본 꼬맹이만 없으면 바로 작업 들어가겠는데··· 커헉!’
주지승 혜공이 사천왕상의 유래를 설명하는 도중에도 틈틈이 정음을 힐끔거리던 주찬은, 그녀가 조각상을 살피기 위해 허리를 앞으로 숙이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쫙 달라붙은 바지가 정음의 몸매를 유감없이 드러냈던 것이다.
‘진짜 실루엣 예술이네!’
정음은 흡사 뒤치기를 당하는 것처럼 엉덩이를 뒤로 쭉 내민 자세였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콜라병 같은 허리라인과 업이 된 힙이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으!!! 완전 공격적인 몸매!’
물론 가슴은 료코 쪽이 좀 더 컸지만, 물살에 가까운 일본 교환 학생에 비해 정음은 척 보아도 살결에서 쫀득함이 묻어나왔다.
탄력있는 몸매, 예쁘장한 얼굴,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정 많은 성격.
정음은 주찬의 23년 솔로 인생을 한방에 보답 받을 수 있는 이상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갑자기 주지승 혜공이 누군가의 전갈을 받더니 후다닥 산문 아래로 뛰쳐 내려갔다. 그 틈을 타 료코가 볼일을 본다며 화장실로 향했고, 태영은 DSLR 카메라 베터리를 갈러 숙소로 이동했다.
마침내 둘만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오오! 바로 지금이다!’
주찬이 드디어 용기를 냈다.
"체육교육과라고 했던가?"
"네."
"운동 잘하겠다."
"그냥 적당히요."
"······."
하지만 평소 여자와 말을 섞어 본 적 없던 주찬은 도통 대화를 길게 이어가질 못했다. 계속된 시도가 자꾸 뻘쭘한 침묵에 그치자 주찬은 슬슬 조바심이 들었다.
‘젠장! 이런 똥 멍청이 같으니! 왜 이렇게 버벅대는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란 말이야! 남자는 박력이라잖아!’
"···너 근데 남자친구는 있어?"
난데없이 치고 들어오는 주찬의 질문에 정음은 속으로 당황했다.
‘이 사람 뭐지?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만 천성이 착한 정음은 주찬에게 무안을 주고 싶지 않아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뇨. 아직."
"왜?"
연이은 주찬의 질문.
정음은 살짝 불편함을 느꼈지만, 여전히 상대를 배려했다.
"글쎄요. 저도 잘···."
"미필들은 어차피 군대 가야 하잖아. 남친은 예비역이 좋지 않겠어?"
밑도 끝도 없는 주찬의 말에 정음은 황당함까지 느꼈다.
가만 보면 말을 못하는 차원을 넘어, 비약과 생략이 심해 대화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둘만 있으니까 많이 심심하신가? 아, 애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오빠는 또 어디 가고.’
그녀는 얼른 다른 사람이 와줬으면 했다.
주찬과 단둘이 있는 게 점점 견디기 힘들었다.
"너도 예비역이 좋지?"
"···네?"
"아니 기왕 사귈 거면 예비역이 사귀기 좋지 않겠느냐고."
정음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다 같은 예비역인 도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나 예비역이야."
"···에에?"
‘뭐야? 이상해! 이 사람.’
정음은 점점 말도 섞기 싫어졌다.
재미없는 걸 떠나 의사소통의 기본도 안 된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는 게 곤욕스러웠다. 차라리 한국말이 서툰 료코가 훨씬 상대하긴 편했다. 적어도 그녀는 눈치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유독 눈치 없는 주찬은 점점 오해를 시작했다.
‘역시.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해. 예비역이 괜찮다잖아. 흐흐. 슬슬 재력 과시로 넘어가 볼까?’
쥐뿔도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의외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집안에 재산이 제법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진 농협 조합장이셔. 저기 시골에."
"그, 그래요?"
"응. 난 그래서 자췻방 얻을 때 전세로 얻었잖아. 알지? 서울 물가 비싼 거? 내 친구들은 다 월세더라고."
"아, 네···."
‘관심 없는 데. 왜 자꾸 자랑을···.’
"내년에 차도 한 대 물려받기로 했어. 2000cc급으로다가. 아버지가 2년밖에 안 타신 거라 새 차나 마찬가지야."
"네."
정음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지만, 눈치 없는 주찬은 자신의 재력이 먹힌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눈 똥그래지니까 더 귀엽네? 솔직히 내가 평소 후줄근하게 다녀서 그렇지 우리 집이 얼마나 알부잔 줄 알면 깜짝 놀랄 걸? 넌 나한테 시집오면 땡잡은 거야.’
"정음인 드라이브 좋아하니?"
정음은 이제 대답도 하기 싫었다.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는데 주찬은 그것이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계속 말을 걸었다.
"내가 차만 받으면 드라이브 신나게 시켜 줄 수 있는데···."
"도훈 오빠!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한참 신이 나 떠들던 주찬에게 훼방꾼이 등장했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도훈이었다.
‘저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정음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도훈을 크게 반겼다.
영문을 모르는 도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미안. 담배가 떨어져서 밑에 가서 사오느라."
"어휴 참! 말이라도 하고 가시지 그랬어요."
"스님 옆에 있는데 차마 담배 사러 간다는 얘길 못하겠더라고. 절 에선 금연이잖아. 근데 다른 애들은 어디 갔어?"
"로쿄는 화장실 갔구, 태영이는 카메라 베터리가 떨어져가지고요."
잠시 후 태영과 료코가 합류하자 도훈이 말했다.
"자료 조사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아."
"왜요?"
"올라오는 길에 보니 주지 스님한테 중요한 손님이 오신 것 같더라고."
"아, 어쩐지 아까 밑으로 뛰어가시더라."
"이쪽으로 다시 안 올라왔어?"
"네. 제가 계속 여기 있었는데 안 오셨어요."
"다른 길로 갔나? 암튼 조사는 충분한 것 같아. 태영이랑 정음이는 필기한 거 사진 찍어서 서현이한테 보내줘. 추가로 찍은 사진도. 서현이가 미리 타이핑 해놓으면 내일 내가 가서 같이 정리할게."
"네, 형."
"알겠어요."
도훈이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 다 끝났네. 이제 뭐 하지?"
"좀 쉬자."
"전 방에 가서 정음이랑 같이 작업할게요. 순서대로 정리하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아요."
태영의 말에 주찬이 끼어들었다.
"나도 도울게."
물론 그는 정음과 함께 있으려는 수작이었다.
"그래. 다들 저녁 먹을 때 모이자."
"네."
"후딱 끝내고 한숨 자야겠어요."
각자 뿔뿔이 흩어지는데 료코 혼자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건물 밖을 맴돌았다. 도훈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료코는 안 들어가니? 방에서 좀 쉬지. 아침부터 열차 타느라 피곤할 텐데."
"아니에요.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요. 한국 절 예뻐요."
두 스님 문제로 고민하던 도훈은 머리도 식힐 겸 료코에게 말했다.
"그럼 같이 산책이나 할래? 나도 좀 걷고 싶은데."
"그럴까요?"
***
도훈이 료코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땡중이랑 보살님 때문에 료코를 깜빡하고 있었구나. 이번 템플 스테이 목표 중 하나였는데 말야.’
그녀는 일본과 다른 한국의 사찰 건물이 신기한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바람이 일며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에서 은은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료코가 아이처럼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스고이! 저게 무엇이므니까, 도훈사마?"
"저건 풍경이라 불리는 작은 종이야. 소리 예쁘지?"
"하잇! 엄청나게 카와이!"
풍경은 조그만 종 아래 물고기 형상의 구조물이 달려 있었는데,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싱그러운 울림이 퍼져갔다. 료코는 한참 동안 풍경소리에 심취해 있다가 도훈에게 말했다.
"한국 너무 예쁜게 많아요."
"료코는 한국을 무척 좋아하나 보네?"
"그렇스무니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 왔어."
"한국이 왜 좋아?"
"한국은 음식도 맛있고, 남자들도 잘생겼어."
"응?"
"나 한국 남자 좋아해."
"정말?"
"응. 한국 남자. 멋있어. 사내다워. 일본 남자는 계집애 같아서."
‘어랍쇼? 얘가 한국 뽕이 좀 있나?’
도훈이 이유를 물었다.
"한국 남자들이 왜 멋있는데?"
"한국 남자들은 군대 가잖아. 군대 가면 알통 막! 이래!"
료코는 자기 팔에 힘을 주더니 이두박근을 수축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워낙에 물살이라 딱힌 나오는 건 없었다.
‘풉- 귀엽잖아?’
도훈이 피식 웃는데 료코가 물었다.
"오빤 군대 갔다 왔어요?"
"응."
"그럼 오빠도 근육 막 이래?"
료코는 이번엔 고릴라처럼 두 팔을 늘어뜨리더니 배에 힘을 주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나름 복근을 뽐내는 동작이지만, 커다란 가슴만 앞으로 돌출될 뿐이었다. 도훈은 로켓처럼 툭 튀어나온 가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헛! 얘는 레알로 단백질 덩어리구나. 만지면 순두부처럼 야들야들할 것 같아.’
"료코. 알아둬야 할 게 있어. 한국 남자들은 모두 군대를 가긴 하지만, 드라마처럼 다 근육질인 것은 아니야."
"에에? 혼또니?"
"응. 그냥 사람마다 다른 거지."
"그럼 도훈 사만 근육 없어?"
"나? 나는 좀 있긴 한데···."
"야빠리! 한 번만 만져도 돼요?"
"여기 팔."
도훈이 제대로 힘을 주며 팔을 구부리자 알통이 불끈 튀어나왔다. 료코는 철봉에 매달린 자세로 도훈의 팔을 붙잡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스고이! 도훈 사마 근육 엄청나다!"
"그래? 여기도 있는데···."
도훈은 이번엔 배에 힘을 줘 료코의 팔을 끌어당겼다. 료코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도훈의 알토란같은 식스팩을 매만지더니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우아아아아아! 도훈 사마 엄청 딱딱해!"
‘뭘 이 정도 가지고. 밑에는 진짜로 돌덩인데. 한번 만지게 해줘?’
도훈은 감탄사를 연발하는 료코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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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3년 만에 만난 쌍둥이 형을 두고 혜공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전국을 떠돌다 무슨 일이라도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던 까닭이다.
"별고는 무슨. 밥 굶지 않고 다녔으면 됐지."
"하면 탁발은 언제까지···."
"때 되면 어련히 그치지 않겠느냐. 발길 가는 데로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아직까진 재미가 있으니."
말은 그리 했지만, 혜민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동생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본래 불문에 귀의한 뒤론 형제고 가족이고 모두 연을 정리하는 것이 맞지만,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함께 자란 쌍둥이였기에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를 알뜰히 챙기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 눈썰미가 많이 좋아졌더구나."
"예? 무슨 말씀인지."
"그놈 말이다. 그 기이한 녀석. "
"도훈 군 말씀이군요."
< 209. 깊은 밤, 달은 지고-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