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깊은 밤, 달은 지고-6- >
***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사후 발기를 인지 못 한 체, 마지막까지 엉덩이를 들썩이는 장면에선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
싸이코메트리가 끝나고 한동안 할 말을 잇지 못하는데 로시가 말했다.
[희원 양이 전남편과 사별한 이유가 복상사 때문이었군요.]
‘그러게. 청순한 얼굴 뒤에 희대의 요부가 숨어 있었네.’
[물론 남편분께서 평소 지병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꼭 첫날밤이 아니었더라도 오래 살진 못했을 것 같네요.]
‘동감이야. 어차피 기 빨려 죽었을 듯.’
[혹시 쪼신 건 아니죠? 미션은 언제든지 포기하셔도 무방합니다. 꼭 완수 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쫄긴 누가? 내가 저 정도로 겁먹을 사람으로 보여? 조금 놀란 것뿐이야. 어쨌든 사람이 죽는 영상이니까.’
[흐음. 급격히 성기가 수축되셨길래 혹시나 해서 여쭸습니다.]
‘음, 그건···.’
"도훈 군? 괜찮은 거야?"
"네, 네?"
희원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도훈 군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영상에서 본 그녀의 대사가 오버랩 된 탓이다.
-하앙, 하아! 도훈씨 계속! 아직 싸지마 도훈씨! 조금만 더!
‘으으, 하필 이름까지 똑같아서는···’
"갑자기 멍한 표정이길래."
"제가 그랬어요?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나니까 살짝 어지러웠나 봐요."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어머, 땀을 이렇게나 많이."
희원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키 차이 때문에 부쩍 가까워진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몸에 꿀이라도 발랐나? 왜 이렇게 냄새가 좋은 거야?’
"평소 안 하던 일 하니까 힘들지? 그러게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
그녀는 이마에 이어 목덜미까지 촘촘히 땀을 훔쳤다. 보드라운 터치가 이어지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끝에 시선이 머물렀다.
‘와, 보살님은 손도 예쁘네.’
희원의 손은 조금 전까지 쑥을 뜯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희고 고왔다. 섬섬옥수라는 말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 같았다.
"좀 괜찮니?"
상냥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물어오는 희원을 보니, 조금 전 영상으로 품었던 경계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은근히 사내의 방심을 흔드는 모습에서 타고난 요부의 끼가 느껴진다.
의도치 않아도 이목을 집중시키며 몇 마디 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간 절에 처박혀 있길 망정이지, 사회생활을 계속했다면 주변에 남자가 끊이지 않았을 여자다.
"덕분에요.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지. 내일 도와주느라 괜히 고생하는데. 저쪽 그늘 가서 쉬고 잠깐 쉬고 있어. 나머진 내가 할게."
희원이 소쿠리를 뺏으려 하자 힘을 주며 붙잡았다.
그녀에게 허약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얘가 고집은? 이리 줘."
"정말 괜찮다니까요? 저 체력 좋아요."
"체력 좋다는 애가 무슨 식은땀을 그리 흘리니?"
"그건···. 잠시 현기증이 났던 거라니까요."
한창 소쿠리를 들고 희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데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림 좋다~."
뒤를 돌아보니 주지승이 우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저 땡중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주, 주지 스님?"
"허어, 젊은 놈이 벌써 노안이 들었느냐? 똑똑히 봐라. 내가 어딜 봐서 혜공이냐?"
가만 보니 같은 가사 복장이긴 한데 묘하게 옷차림이 달랐다. 게다가 걸걸한 목소리 하며 손에 짚은 지팡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분명 주지승 혜공과 판박이다.
"···혹시 혜민 스님?"
"혜, 혜민?"
"용케 나를 기억하는구나."
당황하며 연유를 묻자 희원이 답했다.
"이분은 혜공 스님의 쌍둥이 형님이신 혜민 스님이셔."
싸, 쌍둥이? 이런 제길!
땡중 하나도 버거운데 쌍라이트 형제라니!
"오랜만이네요. 3년 전 뵙고 처음이죠?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탁발승이 탁발이나 하러 다녔지, 별일이야 있으려고. 아이고 삭신이야. 내 목이 마른 데 축일 물 좀 다오. 도저히 못 걷겠다."
혜민은 그 말을 마치더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무슨 스님이 저렇게 체통이 없담?
"아···. 지금은 물이 없는데. 위에 가서 금방 떠올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갈게요."
"아냐. 주지 스님께 기별도 드려야 하니까 내가 다녀올게."
희원은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뻘쭘한 마음에 그녀를 뒤따르려는데 어느 틈에 다가온 지팡이가 내 발목을 툭툭 건드렸다.
"꼬마야, 넌 어디 가지 말고 내 어깨나 주물러라. 시주 봇짐을 한참 매고 왔더니 온몸이 다 쑤시는구나."
"제가요?"
"그럼 이놈아,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근데 이 양반이 날 언제부터 봤다고 명령이야?
게다가 난 이 절 식구도 아니고 손님인데.
어이가 없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내 얼굴을 쳐다보던 혜민이 제 이마를 탁치며 소리쳤다.
"얼레? 꼬마야, 너 뭐하는 놈이냐?"
"···네?"
"허어. 희한한 놈일세.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뭐야?
설마 이 작자도 쌍둥이 동생처럼 심안의 소유자였나?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혜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걱정마라. 혜공이 놈한테는 이르지 않을 테니. 아니지, 이 정도 기운이면 아무리 둔한 그놈이라도 눈치를 챘을 텐데?"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돌리자 혜민이 지팡이를 내 허리에 걸더니 훅- 잡아당겼다. 그 동작은 너무 빨라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빨려 들어가듯 혜민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쪽으로 넘어졌다.
"어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는데 혜민이 쌍 장을 내밀어 나를 받쳤다. 공중에서 두 손바닥이 얽히더니 뜨거운 기운이 내 몸속으로 타고 흘러들었다.
[삐빅- 경고! 스캔 차단 기능이 발동됩니다. 과도한 에너지 소모로 잠시간 시스템이 정지될 수 있습니다.]
‘뭐라고?’
앞으로 넘어지던 나는 마주 댄 손바닥에 튕겨 반대로 밀려 나왔다. 마치 누군가 등허리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이 균형이 잡혔다. 꼴사나운 꼴을 당할 뻔한 내가 혜민에게 소리쳤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스님!"
그러나 혜민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허어, 내력이 전혀 읽히질 않는다니···.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로구나."
"아니 사람을 넘어뜨릴 뻔했으면···"
"시끄럽다, 이놈아! 노인네 귀 떨어진다."
혜민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듣는 순간 귀가 얼얼해지며 심장이 진탕 치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몸이 움츠러들었다.
‘뭐지? 방금 그건? 스킬인 건가?’
[······]
‘로시? 왜 대답이 없어?’
[······]
젠장! 아까 시스템 정지 어쩌고 하더니만 이 무슨···.
갑작스레 등장한 탁발승 혜민. 로시의 도움마저 차단된 상황에서 동생보다 더한 능력자의 등장은 나를 바짝 긴장시켰다.
이런 두려움은 환생한 이후 처음이다.
***
혜민은 가부좌를 풀더니 벌떡 일어났다. 다리 아프다는 소리도 핑계였는지 몸놀림이 젊은 애들 못지않게 날랬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 선 도훈의 주위를 천천히 빙 돌았다. 신기한 동물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혜민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참으로 보기 드문 강골이로고. 네 너와 같은 몸뚱이로 태어났으면 진즉 소림사에 들어가 18나한의 말석이라도 차지했을 텐데···. 모친께선 어찌 이런 못난 몸뚱이를 두 쌍이나 낳으셨는지 원."
"네?"
"혼잣말이다, 이놈아. 한데 이 절엔 무슨 용무냐?"
앞뒤 없는 질문이었으나 시스템이 차단된 상황에서 도훈은 일단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 친구들과 템플 스테이를···."
"으잉?"
"절에서 하루 묶으며 불교 미술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과제 때문에요."
"허허.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평범하게 사는 게 쉽지 않을 터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됐다, 이 놈아. 자꾸 숨기려 드니 더 캐묻진 않으마. 만 명이 있으면 만 개의 사연이 존재하는 법. 허튼짓에 힘을 쓰지 않는 다면야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
쿨하게 넘어가는 혜민의 태도에 도훈이 안도했다. 꼬장꼬장한 쌍둥이 동생 혜공에 비하면 어딘가 말이 통하는 사람 같았다. 혜민은 다시 도훈에게 등을 돌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깨나 주물러라, 꼬마야."
"네."
도훈은 무릎을 꿇고 앉아 혜민의 어깨를 마사지했다. 자신의 특이한 점을 간파하고도 더 정체를 궁금해 않는 화통한 태도가 혜공과 달리 친근감을 주었다. 도훈이 정성을 들여 안마를 이어가는데 혜민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래, 부처가 실제로 있더냐?"
"···예?"
"나는 항상 궁금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행이 부족해 뵈러 갈 용기가 나질 않더구나. 해서 네놈에게 묻는 것이다. 부처가 진짜 있더냐?"
"그게···."
도훈이 어찌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는데 때마침 스마트 워치가 재가동 되며 로시가 소리쳤다.
[주인님!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천상계에 대한 내용은 절대 발설 금지입니다!]
‘로시! 뭐하다 이제 나타나는데?’
[죄송합니다, 주인님. 저 스님이 갑자기 시스템을 침투하려 해 차단 기능이 작동되었습니다. 스캔 차단엔 막대한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전원이 꺼졌구요.]
‘스캔 차단?’
[네. 혜민이라는 스님은 내력을 다스릴 줄 아는 잡니다. 상대방의 손바닥에 기를 불어넣어 내면을 관조하려 하더군요. 앞선 혜공 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위의 고수가 분명합니다.]
‘제기랄! 왜 이렇게 이상한 중이 많은 거야 여긴?’
"어찌 대답이 없느냐? 말해선 안 되는 내용이더냐?"
"······."
"하긴 부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거겠지. 스스로 깨닫지 아니하고 지름길이나 찾고 있으니. 쯧쯧.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구나."
혜민은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세상을 통달한 사람처럼 기이했다.
‘정신 나간 사람 같구나. 이 중은 광중이라 불러야겠다.’
그때 멀리 혜공이 버선발로 뛰어왔다.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황망한 모양새가 귀인이라도 영접하는 극진한 태도였다.
"형님! 기별도 아니 주시고 어찌 이곳까지!"
오랜만에 보는 혈육에 이끌려 반갑게 달려오던 혜공은, 할아버지와 손주처럼 나란히 앉아 있는 도훈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저놈은 왜 형님과 함께 있단 말인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 게 주지승 노릇이 제법 재밌는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한데 이 청년은···."
"내 어깨가 아파 잠시 주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꼬마가 제법 손이 야무지구나."
그때 혜공에 뒤이어 희원이 숨을 헉헉대며 뒤따라왔다.
"헉헉-. 주지 스님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셔요? 혜민 스님 여기 물 가져왔습니다."
"고맙네."
혜민은 희원이 건넨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그제야 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좀 기운이 나는구나. 잇차."
혜민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도훈도 일어나 옆에 섰다.
"피곤하실 텐데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자꾸나."
혜민이 앞장서서 걷는데 혜공이 도훈을 향해 말했다.
"자넨 나와 따로 할 얘기가 남았지? 이따 보세나."
"공아."
"예, 형님."
혜민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 아이와는 다 얘기가 끝났으니 더는 귀찮게 말 거라."
"네? 하지만 이 청년은···."
"이놈! 주지가 되었다고 이젠 내 말도 허투루 듣는 게야?"
"아, 아닙니다. 형님. 알겠습니다."
혜공은 끄응- 앓는 소릴 내더니 나를 한껏 흘겨보고는 이내 혜민을 뒤따랐다.
‘웬일로 늙은 땡중이 쌍둥이 형 앞에서 꼼짝을 못하네? 내가 보기엔 혜공이 훨씬 고명한 스님 같은데···.’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겠지요.]
그때 뒤에 같이 남은 희원이 도훈에게 물었다.
"혜민 스님이 말씀이 무슨 소리야? 얘기 끝나다니?"
"아, 별건 아니에요. 그냥···."
"음, 나한테 말하긴 곤란한 내용인가?"
"네. 좀 눈치가 보여 가지고."
도훈이 앞서 걷는 두 스님을 보고 속삭이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나중에 둘이 있을 때 알려줘. 나도 지금 저녁 공양 준비하러 가봐야 할 것 같으니."
"벌써요?"
"귀빈이 오셨으니 대접 준비를 해야지."
"혜민 스님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세요?"
"넌 잘 모르겠구나. 주지 스님께서 평소에 이르시길, 당신의 쌍둥이 형이 자기보다 백배는 훌륭한 분이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젊어서 엄청 뛰어난 불교학자 셨나 보더라. 지금도 혜민 스님이 쓰신 금강경 해석은 대학교재로 쓰여."
"아···."
"종단에서도 높은 자리를 권했는데 모두 마다한 체 몇 년째 탁발을 하고 다니시나 보더라."
"왠지 특이하신 분이네요."
"그치? 암튼 난 이제 가봐야겠다. 저녁에 보면 꼭 얘기해줘야 돼?"
"저녁에도 여기 계속 계세요?"
"응. 오늘 저녁 일 천배가 예정되어 있어서 하루 묶고 갈 예정이야. 세 시간 절하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려 못 걷겠더라고."
"그러시구나. 근데 무슨 절을 천 번씩이나 하세요?"
"남들은 삼천 배도 곧잘 하는데 천 배 가지고 뭘. 그럼 이만."
도훈은 후다닥 달려가는 희원과, 그보다 앞서가는 두 스님을 보며 생각했다.
‘가만, 광중을 잘만 이용하면 땡중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도훈이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 208. 깊은 밤, 달은 지고-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