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25화 (205/2,000)

< 207. 깊은 밤, 달은 지고-5- >

***

‘방금 또 사이한 기운이!’

도훈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혜공은 비정상적인 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하지만 워낙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 나를 향해 살을 날린 것 같았는데···?’

의심만으로 청년을 추궁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꿍꿍이를 벌이는 도훈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잠자코 있어선 안 되겠군. 저 청년이 스스로 본색을 드러내게 하는 수밖에.’

혜공은 기회를 벼르다 다른 학생들이 커다란 사천왕상에 정신이 팔린 사이 도훈을 따로 불렀다.

"혹시 도훈 군은 종교가 있으신가?"

"외람되지만 아직까진 무교입니다."

"그렇구먼. 혹시 윤회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는가?"

"부처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삼계 육도를 돌며 생사를 거듭한다는 사상 말씀인가요?"

"정확하군."

"우연히 책에서 읽었습니다."

‘실제로 죽어도 봤고 말이야. 그거 아나? 저승 가면 염라대왕도 있어.’

"난 이제껏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네. 수도승 시절엔 오랜 시간 외국을 떠돌기도 했지."

‘이 땡중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한번은 티벳에 갔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네."

"전생···을요?"

도훈은 흠칫 몸을 떨다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혜공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물론 처음엔 반신반의했지. 그런데 백 년도 더 지난 일을 소상하게 들려주는데 정말로 그럴싸하더란 말이야."

"한데 그 얘기를 왜 저한테?"

"그 전생자에게 풍겨 나오던 기운이 자네와 비슷해서 말일세."

"···예?"

허를 찔린 기습에 도훈이 움찔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비밀을 알아채는 사람을 만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하던 그였다.

"하하, 스님 농담이 과하시군요."

도훈은 온몸에 한기가 돋는 것을 느끼며 어물쩍 넘기려 들었다. 그러나 혜공은 약점을 잡은 독사처럼 집요하게 도훈을 물고 늘어졌다.

"농담이라니? 나는 일평생 농담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만."

"······."

"스님 저쪽에 악기 들고 있는 동상을 뭐라고 불러요? 어라, 두 분 얘기 중이셨네, 제가 방해를 했나요?"

"크흠, 아닐세. 지국천왕을 말하나 보군. 내 지금 가서 설명해 주겠네."

갑작스러운 정음의 등장에 대화가 중단된 혜공은, 다시 도훈을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워낙 목소리가 작아 마치 전음을 날리는 것 같았다.

"···자네하곤 단둘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구먼. 이따 따로 보세나."

혜공이 천왕문 안으로 들어가자 정음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힐끔 뒤를 돌아보며 도훈의 안색을 살폈다.

‘오빠가 곤란해 보이길레 끼어들긴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람? 표정이 심상찮네···.’

정음은 여전히 도훈만을 걱정하는 일편단심이었다.

***

혜공이 천왕문 가운데서 사천왕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도훈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절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곤 일주문을 벗어나기 무섭게 담배를 꼬나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동작이 무척 신경적으로 느껴졌다.

‘제기랄! 완전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잖아?’

[이런 것을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닥쳐! 분위기 파악 못 하냐?’

[···죄송합니다.]

담배 연기가 들어가자 급격히 치솟던 스트레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도훈은 괜히 로시에게 분풀이를 한 것 같아 곧바로 사과했다.

‘음, 방금 화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주인님. 오늘따라 유난히 흥분하신 것 같군요. 지금은 차분히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내가 왜 이러지?’

모르는 척했지만, 도훈은 알고 있었다.

가상 세계에서 혜공에게 짓밟힌 사실이, 자신의 평정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이도훈으로 환생한 이후 처음 맛본 패배감은 쓰라린 상처를 남겼다.

[심장이 뜨거울수록 머리는 차갑게. 평소 주인님이 즐겨 하시던 말씀 아닙니까?]

‘그래, 로시 네 말이 맞다. 내가 땡중을 지나치게 의식 했나 봐.’

[엄밀히 말하면 땡중도 아니지요.]

‘그런가? 하긴, 굳이 흑백을 나누자면 내가 나쁜 놈에 가까울까? 순진한 보살님을 욕보일 궁리나 하고 있으니 말이야.’

[자책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모두 각자의 신념을 향해 나아갈 뿐이니까요. 스님에겐 스님의 길이 있듯, 주인님 또한 주인님의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무엇이 옭고 그른지는 오직 신께서 판단할 문제니까요.]

‘흐음.’

로시의 말은 도훈의 용기를 북돋웠다.

따지고 보면 서로의 처지가 다를 뿐이다.

욕망을 극단적으로 절제해온 혜공이나, 그 욕망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온 자신이나 누가 옳다 그르다 할 문제는 아니었다.

진리란 하나지만, 그 길에 다다르는 방식은 수만 가지인 것처럼.

[김보살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평생 욕망을 억누르며 살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요? 오히려 주인님 같은 분이 나서 잠시나마 외로움을 달래주는 편이 더 옳은 일이 아닐까요?]

‘맞아. 나는 나쁜 짓을 벌이는 게 아니야. 내가 범죄를 꾸미는 것도 아니잖아?’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역시 로시 너뿐이구나.’

[후후. 저야 언제나 주인님의 편이니까요.]

‘그나저나, 나중에 따로 보자는 데 어찌 대처해야 할까? 힘으론 상대가 안 되고, 동자공을 깨뜨릴 방법도 딱히 떠오르질 않으니···.’

도훈은 이지 선다의 두 번째 보기를 아직 실행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그대로 시간을 멈춘다 한들 도무지 답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도훈이 한참 고민하며 담배를 태우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경내에선 금연이에요, 총각."

"앗."

도훈은 곧바로 담배를 바닥에 비벼껐다. 뒤를 돌아보자 비니를 벗고 묶음 머리를 한 희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살님?"

"역시 아까 그 총각이군요.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사람들은 좋지도 않은 걸 왜 그렇게 태워대는지···."

"죄송합니다. 일주문 밖에선 피워도 되는 줄 알았어요."

"보통 절의 입구를 일주문부터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피안교를 건너서부터가 시작이에요. 들어올 때 조그만 다리 하나 건넜죠? 그곳이 중생의 세계인 차안(此岸)과 열반 부처의 세계인 피안(彼岸)을 넘는 다리거든요."

"아, 그런 뜻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도훈은 우연히 이루어진 희원과의 조우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았다. 특히 혜공의 감시망을 벗어난 지금이 단둘이 정분을 쌓을 수 유일한 시간이었다.

‘키야-. 재수 좋은 놈은 엎어져도 여자가 말타기로 꽂아 준다 다더니!’

[예? 그런 말도 있습니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엄마.’

도훈은 희원의 손에 조그만 소쿠리가 들린 것을 보고 물었다.

"근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간식으로 쑥떡이나 할까 해서요. 요 아래 텃밭에 쑥 좀 캐러."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학교 수업 때문에 왔다면서요."

"조별과제라서 저 하나 빠져도 상관없어요. 실은 주지 스님 설명이 너무 지루해서 잠깐 딴짓하러 나온 거거든요."

"저런! 나중에 일러줘야지."

"그러지 마세요. 그 스님 좀 무서워 보이던데."

"혜공 스님요? 설마요.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데."

‘인자는 개뿔. 발 한번 걸었다고 잡아먹으려 들더만.’

"하긴, 혜공 스님도 가끔 엄할 때가 있어요. 특히 참선 때 조는 스님들 죽비로 때리는 거 보면 손속에 인정 사정이 없더라고요. 맞은 스님들이 눈물을 찔끔거릴 만큼."

"죽비는 소리만 요란하지 별로 안 아픈 거 아닌가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혜공 스님 죽비에 맞으면 다른 스님들 정신이 번쩍 들더래요."

[아마도 내력을 사용하는 모양이지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구만. 아다 신공으로 사람이나 패고 말이지.’

[동자공입니다, 주인님.]

‘그거나 그거나.’

"암튼 기왕 나온 김에 도와드릴게요."

"아이참, 정말 괜찮은데···"

도훈은 더 사양 못 하게 희원의 손에서 소쿠리를 뺏어 들었다.

"어디에요? 텃밭 있는 곳이?"

막무가내인 도훈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희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휴,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요 아래라는 설명과 달리 절에서 한참을 내려가서야 텃밭이 나왔다. 그런데 희원은 텃밭을 그냥 지나치더니 경사가 험한 비탈 쪽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었다.

"텃밭에 가려던 거 아닌가요?"

"쑥은 텃밭에서 키우질 않아요. 길가에 피어 있는 걸 캐는 거지. 보세요, 이쪽에 많아요."

"아···."

비탈엔 쑥이 한가득.

두 사람은 철퍼덕 주저앉아 쑥을 뜯기 시작했다. 다 큰 총각이 열심히 쑥을 뜯는 모습이 퍽 우스웠는지 희원이 물었다.

"덩치는 큰데 뜻밖에 섬세한 구석이 있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저보다 누나 같은데 말 편히 하세요."

"누, 누나요?"

"누나 아니었어요? 저보다 서너 살 많은 줄 알았는데···."

"어머, 무슨 말을. 저 보기보다 나이 많아요."

"정말요? 20대 아니에요?"

도훈은 그녀의 나이를 뻔히 알지만 듣기 좋으라고 모르는 척했다. 사실 정보창으로 보지 않았다면 20대 후반으로 착각할 만큼 동안이기도 했다.

"학생도 참···. 저 아줌마예요, 아줌마."

"앗. 죄송해요. 전혀 몰랐어요."

"괜찮아요."

"근데 진짜 결혼하셨어요? 전혀 생각 못 했는데."

도훈의 슬쩍 아픈 곳을 찌르자 희원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결혼은···. 했었죠."

"아···."

"아니 이혼한 건 아니고 사고로···."

"괜한 얘길 꺼냈네요. 죄송합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쑥을 캐던 희원이 도훈에게 물었다.

"학생은 그럼 몇 학년이야?"

"저 이제 2학년이요."

"스물하나?"

"아뇨. 군대 갔다 와서 스물셋이요."

"아이고, 나보다 학생이 동안이었네."

어느새 희원이 말을 놓는 것을 깨달은 도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연스러운 반말이 둘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줄 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네요. 고맙습니다."

"빈말 아닌데···."

"그럼 저희 둘 다 동안인 걸로."

"호호. 학생 참 재밌구나."

"학생아니고 도훈이요."

"응?"

"제 이름, 이도훈이라고요."

"아···, 도훈."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입으로 읊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희원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 미안. 그 이름 너무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제 이름요?"

"응. 죽은 남편 이름이 도훈 군이랑 똑같았거든. 심지어 성까지도."

"진짜요?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가증스러운 연기력이군요, 주인님.]

‘뭘 인마? 저 여자도 내 이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똑같은데.’

[피장파장인가요?]

‘엎어치나 매치 나지. 그나저나 보살님이 남편을 참으로 사랑했나 보구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보면.’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그녀의 사연을 알아야 공략법을 찾을 것 같은데 말이지.’

도훈은 희원을 빠르게 스캔했다.

저렇게까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이라면 필시 그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찾았다. 사별한 여인이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라면 분명 결혼반지가 틀림없겠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도훈은 다 뜯은 쑥을 소쿠리에 담는 척 희원에게 다가갔다.

"여기다 넣을까요?"

"응. 거의 다 채웠네. 조금만 더 담으면 되겠다."

"나머진 저 혼자 할게요."

"아니야. 같이 하면 금방 끝나는데."

"저보다 훨씬 많이 캐셨잖아요. 좀 쉬고 계세요."

"그러는 게 어딨어? 도훈 학생은 도와주러 온 건데."

"소쿠리 이리 주시래두요."

도훈은 실랑이를 벌이는 척 소쿠리를 잡은 희원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싸이코메트리 On!’

그의 손끝이 희원의 반지에 닿는 순간 머릿속으로 하나의 영상이 펼쳐졌다.

***

"두 사람은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저두요."

결혼식장이었다.

하객들의 헤어스타일을 보아 10여년은 전으로 보였다.

막 결혼을 마친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특히 젊은 시절 희원의 모습은 꽃이 시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휙휙- 필름이 빨리 도는 것 같더니 장소가 유람선으로 바뀌었다. 두 연인은 갑판 위 테이블에서 와인 잔을 부딪히며 사랑을 속삭였다.

"마침내 그날이네요."

"그래. 오늘은 우리가 정식으로 부부가 된 날이니까."

"지켜줘서 고마웠어요, 도훈씨. 제가 처음이 아닌 걸 알면서도···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 하지 마. 희원이 넌 나에겐 처음이니까."

"고맙고 미안해요. 미안하고 사랑해요."

"희원아."

"도훈씨."

다시 빠르게 필름이 흐르며 호텔 방으로 이어졌다.

그곳엔 발가벗은 두 남녀가 완벽하게 뒤엉켜 있었다.

영상을 보던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그곳이 불끈 서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정열적이고, 뜨거웠고, 화끈한 섹스가 장시간 이어졌다.

‘우아, 그렇게 안 봤더니 완전 활화산 같은 여자였네. 근데 어째서 반지에 담긴 추억이 결혼식 첫날 밤뿐이람? 설마?’

도훈의 우려는 점차 현실로 변해갔다.

1시간 넘도록 계속되는 섹스에 남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가는데도 희원의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은 것이다.

‘저거 좀 위험한데? 보라고. 가슴을 움켜쥐고 있잖아. 남편 심장이 안 좋은 거 아냐?’

그러나 도훈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싸이코 메트리로 재생되는 영상은 그저 정해진 과거를 리플레이하는 게 전부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욕망의 화신으로 변한 희원이 남편의 위에 올라탔다. 가슴이 출렁대며 침대가 삐걱거릴 만큼 강렬한 요분질이 이어졌다.

"으윽!"

"하앙, 하앙! 도훈씨 계속! 아직 싸지마 도훈씨! 조금만 더!"

남편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후에도 희원의 움직임은 그칠 줄 몰랐다. 쾌락에 눈먼 희원의 모습은, 교미 중 수컷의 머리를 씹어 먹는 사마귀를 연상시켰다.

영상은 그 장면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그제야 반지가 첫날밤 영상만을 보여준 이유를 깨달았다. 결혼반지에 담긴 추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세상에···. 대체 난 누굴 건드려 버린 거지?’

< 207. 깊은 밤, 달은 지고-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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