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깊은 밤, 달은 지고-4- >
‘혜공아, 혜공아···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구나.’
혜공은 자책했다. 사이한 술법을 펼치는 도훈을 앞에 두고도, 전혀 단서를 못 짚어내는 스스로가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굳이 비유하자면 야바위꾼의 돈 먹고 돈 먹기.
분명 사기 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도무지 어디서 속고 있는 건지 분간할 도리가 없다.
‘···내 어떻게든 저 청년의 본색을 밝혀내고 말 것이야.’
심안을 개안한 뒤로 전에 없던 경우를 당한 혜공이 각오를 다졌다.
한편 희원의 정보창을 손에 넣게 된 도훈은, 혜공이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시와의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호감도가 70이라고? 초면치곤 엄청 후한데?’
[아주 초면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까 잠깐 짐을 들어 준 게 그렇게 감동적이었을까?’
[그보다는 죽은 남편분과 주인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지.]
‘공교롭긴 하네. 하필 미망인 남편과 동명이인이라니···.’
도훈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뭔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가만, 저 보살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주찬이 우릴 소개한 것은 분명 보살이 들어오기 전이었잖아?’
[엇, 그렇군요. 혹시 문밖에서 훔쳐 들었을까요?]
‘그것도 말이 안 되지. 남자가 셋인데 정확히 내가 도훈이라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겠어? 뭔가 수상한데? 싸이코메트리로 확인해 볼까?’
[지금은 자중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 스님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서요. 방금 정보창 스킬 사용 이후 더욱 예민해졌습니다.]
‘한데 저 땡중은 내가 스킬을 쓰는 건 어찌 아는 거야? 눈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정말 신안을 갖춘 능력자라면 온 세상이 열 감지 카메라로 본 것처럼 인식됩니다. 쉽게 말해 기의 흐름이 보인달까요? 그러니 주인님이 스킬을 발휘할 때마다 자꾸 눈에 밟힐 수밖에요.]
‘으, 짜증나. 이럼 스킬을 봉인 당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일단 면전에서는요, 네.]
도훈은 의외의 복병 등장에 손발이 꽁꽁 묶인 심정이었다. 미션 완료까지 남은 시간마저 촉박했기 때문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어. 어떻게든 저 땡중부터 해결 봐야지.’
***
"전 이만 저녁 공양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아미타불, 고생 많으시네."
김보살, 희원은 손바닥을 합장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절간의 주방이라는 후원으로 향했다. 도훈은 다소곳이 물러서는 그녀의 뒤태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꿀꺽 군침을 삼켰다.
‘우아, 엉덩이 씰룩대는 것 좀 보소? 어지간히 빵빵하네.’
승복과 유사한 누빔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희원의 굴곡진 몸매는 감출 길이 없었다. 애초 타고난 몸매가 탁월하기도 했고, 나이 들도록 애를 갖지 않아 처녀 시절 몸매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탓이다.
거기다 30대 중반이라는, 여자로선 가장 성욕이 왕성한 나이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음기(淫氣)를 주체할 도리가 없었다.
희원의 농염한 자태에 도훈은 물론 태영과 주찬 역시 홀린 듯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혜공에게서 짧은 탄식이 쏟아졌다.
‘허어-! 김보살의 음기가 어찌 저리 강해졌을꼬.’
음양의 조화는 대자연의 이치.
젊고 활기 넘치는 남녀가 가까이 어울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정분이 생겨나는 것도 두 기운이 자연스레 서로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혜공의 심안으로 본 희원은 유독 도화살이 강하고 음기가 짙은 여자였다.
그녀의 사주를 보면 일지(배우자 자리)에 무덤을 깔고 있는 형상인 데다, 자궁살이 워낙 강해 소위 남편을 잡아먹을 팔자. 실제로 그녀의 전남편은 첫날밤도 버텨내지 못하고 급살을 맞았다.
희원의 남다른 내력을 알고 있던 혜공은 그간 음기를 눌러주는 수양법을 통해 그녀의 넘치는 음기를 억제해왔다. 불문의 수련법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오욕칠정을 다스리기 때문에 유난히 음기가 강했던 희원도 어느덧 평범한 사람처럼 갈무리가 되었다.
본인으로선 다소 가혹한 처치일 수 있지만, 당장 희원의 강한 음기를 받아낼 상대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혹여 또 다른 사람에게 재가를 간다손 치더라도, 지금 상태론 1년을 못 버티고 또다시 과부가 될 게 분명했으니까.
과거 왕후로 태어났으면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강한 음욕을 지닌 여자. 그것이 바로 희원의 타고난 운명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동안 억눌려있던 음기가 폭발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고 있었다. 젊은 사내들이 희원에게 눈길을 빼앗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도 저 청년이 원인일테지.’
혜공은 도훈을 향해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내력을 알 수 없는 그의 등장이 김보살의 굳건한 심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저 둘은 가까이 두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10년간 다스려온 공덕을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놔둘 순 없지.’
"흠흠, 그럼 한 번 둘러보세나."
"네, 스님."
혜공은 경내의 이곳저곳을 거닐며 불교 건축물의 배치와 유래 등을 설명했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그의 해설에 필기를 맡은 정음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태영도 미처 놓치고 간 장면을 사진에 담느라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료코는 어려운 한국어를 이해하는 것도 다소 버거워 보였다.
"우리 사찰과 같은 가람 배치를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이라고 부른다네. 이 형태는 주로 백제 영향을 받은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혜공이 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도훈은 그를 떼어낼 궁리를 거듭했다.
‘로시, 지난번 고성민에게 썼던 수면제 있지?’
[‘숙면할 수 있을 때 숙면하세요’, 알약 말씀입니까?]
‘응. 그거면 저 말 많은 노인네 꿈나라로 보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차에 슬쩍 타가지고 먹일 수만 있으면.’
[이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왜?’
[신안을 갖춘 그에겐 천상계의 아이템 또한 독특한 파장으로 보일 테니까요. 오히려 음독을 시도한 주인님을 더욱 의심해 역으로 감시당할지도.]
‘음독이라니? 단순히 수면제로 재우는 게 무슨 음독? 너무 나갔네,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나참, 성가시기 짝이 없구만! 확 실수한 척 발 걸어 넘어뜨려 버릴까? 늙어서 뼈도 성치 않을 것 같은데 슬쩍 자빠뜨리기만 해도 며칠 고생하지 않겠어? 몸 아프면 나한테 신경 쓰지도 못할 거고.’
[글쎄요, 제가 볼 땐 주인님이 견줄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인마?’
로시의 단언에 도훈은 자존심이 상했다.
혜공은 적게 잡아도 환갑은 훌쩍 넘긴 노승.
그에 반해 자신은 쇳조각도 씹어 먹을 것 같은 팔팔한 20대 초반이다.
완력부터 체력까지 무엇하나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노승에게,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발언이었다.
‘아까 그 금나 뭐시긴가 때문에 그래? 그런 손장난이야 손목만 안 잡혀 주면 그만이지. 나 정음이한테 태권도 능력 흡수한 거 잊었어? 무려 국대급 태권도 능력이라고.’
[정확히는 국대급의 70% 수준이죠.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제 감이지만 저 스님은 불문의 비전무공을 익힌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님이 설사 국대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한들, 정식으로 붙으면 털끝 하나 못 건드릴 게 분명합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 너무 무시한다, 너?’
평상시 도훈이라면 인공지능인 로시의 분석에 수긍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남자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진짜 함 붙어봐?’
[자중하십시오. 주인님답지 않게 흥분하셨습니다.]
‘아니, 직접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야.’
[네?]
‘새로 배운 이지선다 스킬 있잖아.’
[그 스킬을 스님에게 쓰겠단 말씀인가요? 하루 한 번 뿐인데요?]
‘아깝긴 하지만 별수 있어? 어차피 이래가지곤 아무것도 못 할 판인데.’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이곳은 극락전이라 한다오. 다른 말로 무량수전이라고도 부르는데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지.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이었는데 그 지위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혜공이 설명에 심취한 틈을 타 도훈이 재빨리 이지선다 스킬을 열었다.
그러자 디스플레이에 두 가지 선택지가 제공되었다.
㉮ : 몰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 : 혜공의 ‘동자공’을 깨뜨린다.
‘어라? 두 번째 선택지는 뭐야?’
[···역시 예상대롭니다. 그는 동자공(童子功)을 연마한 고숩니다.]
‘동자공이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동자공은 내공심법의 일종으로 이성과 접촉을 일절 금하여 강력하고 순수한 양강의 속성을 띤 내공을 쌓아가는 심법을 의미합니다.]
‘그거 완전 무협지 설정 아니냐?’
[아닙니다. 동자공은 실존하는 무공입니다. 주로 소림 동자공이라고 불리며 나름의 투로 역시 존재하고요.]
‘헐, 진짜로?’
[물론 세간에 알려진 동자공은 기본적으로는 무술에 필요한 다리와 허리의 유연성을 길러주는 스트레칭을 의미합니다만 저 고승은 불문에 내려오는 진짜배기를 연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21세기에 무공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물론 그렇다고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하늘을 난다거나 장풍을 쏘는 그런 수준까진 아닙니다. 애초에 스님들이 익히는 무공이란 정신수양의 일환으로 신체를 다스리는 데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쳇, 한마디로 저 나이 먹도록 아다라는 거 아냐? 아니지, 스님한텐 당연한 건가?’
[한평생 무공을 연마한 고승입니다. 방심해선 결코 안 됩니다.]
‘흥, 그딴 아다 신공 따위. 내 발차기로 한 방에 보내주지.’
***
이지선다 스킬이 발동되자 높은 곳에서 추락한 것처럼 진한 탈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가상 세계로의 진입은 여전히 적응이 쉽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혜공이 설명을 마치고 있었다.
"자, 다음은 천왕문으로 가보시겠소."
앞서가는 혜공에게 다가가 교묘히 발을 걸었다. 그러자 혜공이 딛던 발을 힘을 주더니 오히려 내 발목을 걷어차는 것이었다.
빡-
"악!"
"도훈이 형!"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런! 이 젊은이가 실수로 나랑 발이 엉킨 모양이구먼. 여보게 괜찮은가?"
혜공이 쓰러진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눈빛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고의를 알아챘다는 의미.
승자의 여유 넘치는 아량이 내 자존심을 긁었다.
‘이 땡중 새끼가!’
발목이 시큰대는 통증을 참으며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딴죽걸이가 실패한 이상 밑으로 혜공을 잡아당겨 바닥에 패대기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 당겨도 혜공은 꿈쩍하지 않았다. 천근추라도 발휘한 것인지 바닥에 붙은 발은 고목처럼 단단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악력을 가하더니 내 손아귀를 부술 것처럼 힘을 가하는 것이었다.
"크헉!"
손등뼈가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 고통에 절로 비명이 터졌다.
"저런, 젊은 친구가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구만. 이럴게 아니라 가까운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으으!
역공에 완전히 당한 나는 분에 찬 표정으로 스마트 워치의 휠을 돌렸다.
시뮬레이션이 아니었더라면 제대로 창피를 당할 뻔했다.
현실로 복귀했는데도 여전히 발목과 손등이 시큰거렸다.
‘으윽, 제기랄. 노익장이 장난 아닌데?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거지?’
[그러게 제가 함부로 덤비지 말라지 않았습니까.]
‘근데 가상 현실이라며 왜 이렇게 아픈 거야?’
[환상통입니다. 가상 세계를 현실로 인식할 경우 실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VR 롤러코스터 타다 토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네. 의식하지 않으면 사라질 겁니다. 아무튼 ‘가’는 정답이 아닌 것 같군요.]
‘젠장, 만만히 볼 노인네가 아니군. 동자공은 어떻게 깨뜨리는 거야?’
[동자공은 방사를 절제함으로써 정순한 내공을 쌓는 무공. 동자공을 깨기 위해선 사정을 유도해야 합니다.]
‘사정이라고? 저 환갑 넘은 노인네를 무슨 수로?’
[···글쎄요. 저도 당장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젠장,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인 건가?
나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호적수에 거대한 벽을 마주 선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늙은 혜공은 양아치 김기춘도, 허세남 강찬혁도, 심지어 싸가지 밥 말아 드신 재벌 손자 고성민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나의 불안감을 눈치챘는지 로시가 충고했다.
[주인님. 언제나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상대가 상대니 만큼 이번에는 업적과 미션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네?]
‘감히 내 앞길을 가로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노인네 동자공을 깨부수고 말겠어. 도로아미타불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오호, 모처럼 각오를 불태우시는군요. 역시 이래야 주인님답죠.]
나는 주지승 혜공을 쳐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상 세계에서 그에게 붙잡힌 손아귀에선, 아직까지 기분 나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비례해 그에 대한 호승심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 206. 깊은 밤, 달은 지고-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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