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깊은 밤, 달은 지고-1- >
KTX를 타고 가는 동안 주찬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동갑에 같은 복학생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금세 동질감을 느낀 주찬은-사실 난 전혀 아니었지만-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럼 도훈이 넌 여자친구 있냐?"
"아니."
"너도 아직이구나. 난 복학하면 금방 여자친구 생길 줄 알았거든? 근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
‘일단 배바지부터 빼고 말하자.’
솔직한 충고를 해주고 싶었지만, 옷차림을 지적했다간 민망해질까 봐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나 실제 나이 마흔이 넘은 내가 봐도 녀석의 패션 감각은 테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엉기성기 자라난 수염은 제대로 면도가 되지 않아 지저분한 이상을 주었고, 마른 팔다리에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는 복부비만을 의심케 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탈모.
유난히 숯이 없는 정수리부위가 가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다.
"솔직히 군대 갔다 오니까 여자 보는 눈이 바뀌더라고. 어렸을 땐 얼굴 예쁜 애들만 눈에 들어왔는데, 요샌 은근히 몸매 좋은 애들이 더 끌려."
"···그래?"
"솔직히 얼굴 뜯어 먹고살 것도 아니잖아. 근데 웬걸? 몸매 좋은 애들이 더 드물다는 거지."
"···그런가?"
"사실 그래서 아직 못 사귀는 것도 있어. 쓸데없이 눈만 높아져서는 내 성에 차야 말이지. 특히 우리 농대 여자애들은···. 어휴, 말도 마라."
"···그렇겠네."
도무지 자아 성찰이라곤 모르는 녀석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추임새만 넣을 뿐. 가만 보니 눈치도 없구나, 이놈은.
"그래도 사범대는 여자들 많으니까 괜찮은 애들 제법 있지 않아?"
주찬이 다시 정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료코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정음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평소 보이쉬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주로 보이던 그녀였기에, 유난히 밝은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정음에게 노골적으로 눈독을 들이다니···.
정말이지 분수를 모르는 녀석이로군.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시선을 차단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템플 스테이는 뭐하는 거야?"
"어?"
"아니 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막 사찰음식 먹고 그런다던데···. 주찬이 넌 작년에 가봤다며?"
"응.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경내에 사랑채를 지어두고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거야. 요새 뭐 힐링이다 산림욕이다 많이 하잖아. 경치 좋은 산속에 가서 며칠 푹 쉬다 오는 거지."
"아하."
"물론 템플 스테이도 크게 보면 두 가지 방식이 있어. 하나는 체험형이라고 불리는데, 스님 한 분이 인솔교사처럼 달라붙어서 108배니, 타종체험이니, 다도니 하는 것들을 소개해 주는 거야. 이건 좀 일정이 빡빡해서 1박 2일짜리론 거의 없어."
"또 하나는?"
"나머지는 대개 휴식형이라고 불리는 건데 우리가 고른 게 이거야."
"휴식형?"
"다른 말로는 방임형이랄까? 그냥 방 한 칸 내주고 주변 산책을 하건 명상을 하건, 아님 방에서 푹 쉬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오, 괜찮네."
"단 식사 공양 시간엔 알아서 맞춰 가야 돼. 설거지도 스스로 해야 하고."
"그럼 점심부터 거기서 먹나요?"
옆 좌석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료코가 용케 주찬의 말을 알아듣고 질문했다.
"아, 그게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광주 떨어지면 11시가 넘는데 거기서 렌트해서 사찰까지 가는데 또 2시간이고. 그래서 점심은 가는 길에 담양 들러서 대통밥에 떡갈비 먹기로 했어."
"오! 떡갈비 오이시! 근데 대통밥은 뭡니까? 대통령이 먹는 밥?"
여전히 로쿄의 대화문은 엉망진창이었다.
정음이 계속 웃고 있던 것도 아마 저 이유일까?
"아, 아니 그게···."
"대통밥이 뭐냐면 대나무 알지?"
"대나무? 큰 나무입니까?"
"아니, 아니."
일본어에 딱히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우리 땅 독도를 죽도로 표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죽도(竹島)를 부르는 일본말은 다케시마.
"그러니까··· 다케?"
"다케? 아, 다께!"
"그렇지. 다께 마디를 잘라서 그 안에 밥을 넣고 찌는 거야. 맛있어."
"맛있어?"
"응, 오이시."
"도훈 사마는 일본 말도 잘하시므니다."
"아니야. 전혀 못 해."
"아무튼, 친절한 설명, 감사하므니다."
료코가 모자 윗부분을 잡고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역시 예의 바른 니혼진이군. 그런데 갑자기 몸을 숙이는 바람에 드레스 앞이 훤히 드러나면서 가슴골이 내비치는 것이었다.
‘헉, 발육상태 한번 끝내주네.’
[보통 일본 여성의 가슴 사이즈가 한국에 비해선 큰 편이죠.]
‘역시 성진국···. 아, 아니 선진국이랄까.’
[예?]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이번 템플 스테이는 료코 공략인가? 일본인이랑은 처음인데.’
[국제적으로 노시는 것도 나쁘진 않죠. 관련된 위업도 해결할 수 있고요.]
‘정음이도 꾸준히 관리해 줘야 돼. 호감도 100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후후. 원하는 바를 이루길 기원하겠습니다.]
‘내가 마음먹은 거 실패한 거 본 적 있어?’
나는 곁눈질로 료코의 큼지막한 가슴을 의식하며 각오를 다졌다.
***
"정말 훌륭한 점심이었어요."
"역시 음식은 전라도라니까."
"도훈이 형 운전 잘하시네요?"
담양을 들러 대통밥을 먹고 나온 일행은 곧 사찰로 향했다. 6인승 밴의 운전을 맡은 도훈 옆에선 태영이 앉아 있었다.
"난 군대서 운전 좀 했었거든."
"운전병요? 이야, 운전병 출신이면 운전 엄청 잘하시겠다. 혹시 드리프트 뭐 이런 것도 가능해요?"
"네가 게임을 너무 많이 했구나. 운전은 안전이 최고야."
"그런가요?"
태영이 보조석에 앉았기 때문에 나머지 셋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도훈은 룸미러를 통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정음에게 눈독 들이는 주찬을 감시하는 차원이었다.
‘풉- 굳이 신경 쓸 필욘 없겠군.’
주찬은 옆에 앉은 정음이 부담스러웠는지, 잔뜩 긴장해서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미인 앞에서 부쩍 자신감을 상실한 표정이다. 자연히 여자들끼리만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안도하며 도훈이 태영에게 물었다.
"너 요새도 그 게임 해?"
"뭐요?"
"그때 수강 신청할 때 하던 거."
"아, 그거요? 아뇨. 요샌 또 새로운 게임이 대세잖아요."
"새로운 게임?"
"네, 워 그라운드라고 생존 게임 방식인데요, 막 100명이 동시에 무인도에 떨어져서는 각개전투하는 거 있어요."
"각개전투라면···."
"네. 100명이 모두 적인 거죠. 최후의 한 명까지."
"오, 신기한데?"
"형도 한번 해보세요. 넷이서 스쿼드 짜서 할 수도 있는데 아는 사람끼리 하면 엄청 꿀잼이에요."
"하하. 됐다. 난 게임은 영 소질이 없어서."
"왜요? 형님 운동은 잘하잖아요."
"운동이랑 뭔 상관이야?"
"게임도 스포츠니까요. 굳이 따지면 구기 종목이랄까?"
"잉?"
"마우스 볼도, 볼은 볼이죠. 하하하!"
‘태영이 대가리 박아 새끼야. 이 자식 예전엔 안 그러더니 점점 아재 개그만 늘어가지고.’
도훈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다가 생각했다.
‘차라리 100명이 싸우는 거보다, 여자애 99명에 혼자 남자로 무인도에 떨어지는 조건이 더 재밌지 않나?’
한참 무인도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다 왔다."
"와, 수고했다."
"선배 운전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야. 난 주차하고 올라갈 테니까 먼저 짐 풀고 있어."
"그러자."
네 사람을 먼저 내리게 한 도훈은 멀찍이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산속에 있는 지형이다 보니 평평한 공간을 확보하기 쉽지 않았는지 사찰과 주차장은 상당한 거리였다.
주차를 마친 도훈이 개인 짐을 챙겨 산길을 오르는데 앞에 무거운 짐을 든 스님 한 분이 낑낑거리고 있었다.
‘도와줄까? 힘들어 보이는데···.’
"스님, 짐 좀 들어드릴까요?"
뒤에서 말을 거는 도훈의 목소리에 스님이 돌아서며 꾸벅 합장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어?"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뒤태로 봐선 체구가 작은 스님인 줄 알았는데, 돌아선 얼굴을 보니 여자였다. 머리에 쓴 그레이비니 옆으론 긴 머리도 살짝 삐져나온 것이 삭발도 하지 않은 듯했다.
"실례했습니다. 전 스님인 줄 알고."
"예, 공양주입니다. 복장 때문에 그리 오해하시는 분이 많더군요."
공양주란 절에 시주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통상 절에서 밥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아, 그래서. 근데 음···. 모자로 가려서 그렇지 상당한 미인인데?’
도훈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넘겼을까?
피부는 비단결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자릴 잡은 모습이 단아한 인상을 풍겼다. 특히 하얀 피부에 상대적으로 뚜렷한 눈썹이 매력적이었는데, 애초에 숱이 많은 타입으로 보였다.
‘아, 누군가 했더니 임청하를 닮았구나!’
도훈은 과거 학창시절 [동방불패]란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홍콩 배우를 떠올렸다.
"그거 주세요. 저도 올라가는 길이거든요···."
도훈은 공양주의 어깨에서 에코백을 뺏듯이 받아들었다. 등에도 봇짐 같은 것을 매고 있어 유독 등산길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근데 웬 짐이 이렇게 많으세요? 아, 이거 반찬거리네요?"
도훈이 에코백의 벌어진 틈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저녁 공양 찬거리를 좀 해오느라고요."
"아, 그러시구나. 맛있게 부탁드려요. 저도 오늘 여기서 저녁 먹거든요."
"템플 스테이 오셨나 보군요."
"네. 뭐 답사도 할 겸 겸사겸사요."
"좋은 추억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공양주의 말투는 무척 점잖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도훈이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가끔 보는 예쁜 아줌마 정도로 느꼈을 테지만, 실제론 마흔이 넘은 그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나이였다.
‘이햐, 절에 와서 이렇게 예쁜 보살님을 만날 줄이야. 내가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나 보군.’
[주인님 전생에 칼 맞고 돌아가셨는데요?]
‘닥쳐.’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번 템플 스테이도 흥미진진하겠어. 나는 혹시나 70대 비구니한테 육보시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업적이 남아 있었군요. 대상이 있는지 경내를 한 번 둘러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됐거든? 차라리 고자가 되고 말지. 내가 절대 시도하기 싫은 업적이 딱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육보시고, 하나는 남자랑 하는 거야.’
[랭커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도전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 도전, 죽기 전이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예쁜 보살님은 허리 숙여 합장하더니 이내 절간으로 들어갔다. 마침 마중 나와 있던 태영이 도훈을 불렀다.
"형, 이쪽이요."
"어. 간다."
도훈은 어느새 개량 한복 같은 옷으로 갈아입은 태영을 보고 물었다.
"너 근데 그 옷은 뭐냐? 신발은 왜 고무신이고?"
"템플 스테이 할 땐 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데요. 방에 넣어 놨으니까 형도 입으세요."
"내 방이 어딘데?"
"저 건물 맨 끝방이요."
"저기 수정당 현판 걸린 곳?"
"네. 다 개인 독방으로 주긴 했는데 엄청 작아요. 무슨 고시원인 줄."
"절간이 다 그렇지."
"주찬이 형은 잠시 어머님 아시는 스님 인사드리러 갔어요. 일단 짐부터 풀고 답사 시작하도록 해요."
"그러자."
도훈은 고즈넉한 경내 분위기에 만족하며 짐을 풀었다.
이 조용한 곳에서 오늘 밤 벌어질 일을 상상하니 벌써 아랫도리가 불끈거렸다.
***
"아이고, 웬 찬거릴 이렇게 많이 챙겨 왔댜? 여기 텃밭에도 많은디."
"저번에 보니 이것저것 재료가 떨어진 것 같아서요."
"그랴. 저그 밥 안치고 있응께, 뜸 들이는 것만 좀 봐줘잉."
"네."
공손히 합장하고 물러서는 공양주를 향해 나이 든 할머니 둘이 소곤거렸다.
"얼굴도 고운 아가씨가 매번 거르지도 않고, 공양하러 오는 구마잉. 마음씨도 곱지. 우리처럼 월급 받는 불목하니도 아님서."
"쌓은 업보가 많아서 그렇댜."
"으잉? 그거시 뭔 소리당가?"
"못 들었어?"
"뭔디뭔디?"
머리에 두건을 쓴 할망구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바깥 눈치를 살피더니 귓속말을 건넸다.
"김보살 있잖여, 청상과부잖여."
"음에 그것이 참말이여? 난 시집도 안 간 처년지 알았는디? 으찌야쓰까잉 쯧쯧. 나이도 어린디. 남편은 사고로?"
"사고는 아니고잉···."
"그라믄?"
"아따 쪼까 거시기 헌디···, 나가 좀 흉한 소문을 들어갔고."
자꾸 말을 아끼는 할망구의 모습에 다른 할머니가 채근했다.
"대체 뭐신디 그라고 뜸을 들인당가 사람 궁금하게서리. 싸게 말해 보랑께."
"김보살이···."
"응."
"음기가 너무 쌔서···."
"음기가?"
"첫날밤에 남편 잡아먹어 브렀디야."
"그거시 참말이당가?"
"진짜라니께? 남편이 복상사로 그냥."
두건을 쓴 할머니는 자기 목을 손날로 치는 시늉을 보이며 "꽥"소릴 냈다.
"오메야, 참말로 사람 겉보기랑 다르구마잉."
"그 뒤론 수절하고는 맨날 공양드리러 오잖여. 죄를 씻을라고."
"짠해서 어찌야쓰까잉."
"그랑께. 알고보믄 딱한 사람이랑께. 시집은 갔는디 남편이랑 알콩달콩 살 맞대고 살지도 못하고는···."
"에끼. 절에서 그런 상스런 소리 하는 거 아녀."
"아따, 우들이 뭔 스님도 아니고···."
"그려도."
그때 행주를 찾기 위해 다시 절간에 들어오려다 문지방에서 발길을 멈춘 김희원이 소리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 잡아 먹은 년.
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진탕치며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절간에서 김보살로 통하는 희원은 못 들은 척 조용히 절간을 빠져나갔다.
< 203. 깊은 밤, 달은 지고-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