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17화 (197/2,000)

< 199. 하수 탈출-23- >

도훈은 정음을 보내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요 며칠 복습을 게을리 한 것이 떠올라 평소보다 훨씬 집중해 공부했다.

‘위업 달성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놓쳐선 안 돼. 노력하는 사람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하는 사람 중에 게으른 사람은 없으니까.’

그는 노력의 힘을 믿었다.

특히 공부야말로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분야라고 확신했다.

‘머리가 나쁜 건 잘못이 아니야. 유전자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부모를 원망하는 거야말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 하지만 노력하지 못하는 건 명백한 내 잘못이야.’

공부를 잘하는 데 꼭 머리가 좋을 필욘 없다. 그것이 좀 더 시간을 줄여주고 효율을 높일지언정, 도훈은 공부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믿었다.

‘근성이다. 오로지 근성. 남들이 1시간 만에 해낸다고 조급할 필요 없어. 2시간, 3시간이 걸려도 끝까지 해내면 똑같은 거야.’

도훈은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밀렸던 복습을 끝마쳤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아-! 살 것 같다."

도서관의 답답한 공기만 쐬다 밖에 나오니 살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거의 4시간을 내리 의자에 앉아있었다.

‘뭐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왜 말 안 한 거야?’

[괜히 방해될까 봐서요. 그나저나 대단한 체력이시네요. 화장실 한 번을 가시질 않을 줄이야.]

‘원래 내 스타일이 그래. 이정우 시절엔 10시간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도 있었어.’

[과연 전국급 수재 출신은 어딘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일종의 자부심이랄까?’

[어떤?]

‘머리는 빠가됐지만 노력만큼은 지지 않겠다, 뭐 그런.’

[캬-. 멋지십니다.]

흡연구역에서 담배 한 대만 피우다 가려는데 누군가 도훈을 이름을 불렀다.

"여어, 이도훈이!"

"성수형."

끼리끼리 뭉친다고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성수였다.

"웬일이냐 이 시간까지 학교에 붙어 있고?"

"그러는 형은요, 아 감사."

라이터에 불을 댕기는 성수에게 도훈이 담배를 입에 물고 바짝 다가섰다.

"나야 임용공부 중이지. 3학년인데 놀 순 없으니까. 가만, 너 방금 저기서 내려온 거야?"

성수가 사범대 도서관을 가리켰다. 해당 흡연구역은 주로 도서관을 이용한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공간이었다.

"네."

"리포트 썼냐?"

"아뇨. 저도 공부했는데요."

"무슨?"

"임용요. 수업 복습도 좀 하고."

"흐익, 벌써?"

물론 2학년 때 공부를 하는 학생이 전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도훈처럼 복학한 지 일주일도 안 된 군필 남자가 개강 첫 주부터 도서관에 처박히는 경우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

"너···, 진심이었구나?"

"네?"

"사범대 수석 하고 싶다는 말."

"당연하죠."

"신기하네, 요놈. 가만 뒤 좀 돌아봐."

"왜요?"

"얼른."

도훈이 몸을 돌리자 성수가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한참 뒤적이던 성수가 말했다.

"군대 가서 머리를 다치거나 한 것 같진 않은데···."

"아, 뭐에요 형."

"하하. 왜 뇌를 크게 다치고 성격이 확 돌변했다는 사람들 얘기도 있잖아. 혹시나 해서."

"제가 성격이 바뀐 것 같아요?"

도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주인이 입대하기 직전까지 자주 어울렸던 사이다 보니, 어쩌면 그의 변화를 가장 예민하고 감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성수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바뀌었지 많이."

"···어디 가요?"

"철없던 네놈이 철들었잖아. 사범대 최초 유급생 탄생신화를 보나 했더니 말이야, 푸하하. 무슨 의대생도 아니고!"

다행히 성수는 도훈의 변화를 ‘군대 다녀와 정신을 차린’ 정도로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여러모로 도훈에게 있어 다행이었다.

"하하. 언제까지 학생일 순 없잖아요. 졸업까진 금방일 텐데."

"어째 인생 두 번 산 것 같은 통찰력이네."

성수의 날카로운 지적에 도훈이 뜨끔했다.

"그런 사람이 어딨겠어요. 게다가 전 기회가 있어도 안 할 것 같은데요."

"왜?"

"군대 두 번 가야 하니까."

"음, 생각해보니 그것도 못 할 짓이네. 야, 그래도 공부만 하지 말고 여자 좀 만나고 그래."

‘이미 실컷 만나고 있는데···.’

"그럴까요?"

"너 1학년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더구먼. 아까도 1학년 애들 몇 명 밥 사줬거든?"

"누구요?"

"연두랑 누구였지? 희주? 그리고 남자애들 두 명."

"아니 연두랑 희주는 이름을 아는데 남자애들은 왜 기타 등등이에요?"

"내가 이름 말하면 네가 알긴 하냐?"

"하긴 그렇네요. 안 친한 후배들은 잘 몰라서."

"아무튼, 1학년 애들한테 우리 선배 중에서 누가 제일 인기 많냐고 물어보니까 다 너를 찍더라고."

"진짜요?"

‘연두랑 희주면 그럴 만도.’

"심지어 남자애들도 너를 가장 좋아하더라?"

"남자요? 저 그런 취향은 없는데."

"아니, 그냥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으니까. 닮고 싶은 선배랄까? 하여튼, 적응 잘하고 있다. 내심 걱정했는데."

도훈은 그가 2학년 과대 정우선에게 그의 학교생활 적응을 부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괜히 고마웠다.

"형이 잘 챙겨주셔서 그렇죠."

"챙기긴 뭘 또. 야, 그나저나 너 이발 좀 해라."

"이발요?"

"아까 들춰보니까 머리 너무 많이 길렀더라. 너 전역하고 두발 정리 한 번도 안 했지?"

"아마도요?"

"쯧쯧. 그러다 아재 된다 너? 남자가 언제 아재 소리 듣는 줄 아냐?"

‘이미 영혼은 아잰데···.’

"언제요?"

"돈 아깝다고 미용실 안가고 블루클럽 다닐 때."

"블루클럽이 어때서요? 가격도 저렴하고 깔끔하게 쳐주더만."

"어허. 아재 다 됐네, 자슥이. 대학생이면 염색도 하고 빠마도 하고 그 뭣이냐, 샤기컷이니 댄디컷이니, 아니면 투블럭 뭐 이런 것도 해보고 그래야지."

"뭔 소린 줄 하나도 모르겠네."

"암튼 주말에 이발 좀 해. 남자는 머리 빨 이지. 형 봐, 배컴 같지 않냐?"

성수가 머리를 옆으로 쓸어 올렸다.

가운데를 살짝 길게 자른 소프트 모히칸 스타일을 강조하는 동작이었지만 도훈이 보기엔 그냥 스포츠머리를 자르다 만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 네."

"이 자식 대답에 영혼이 없어!"

"아 옙, 배컴의 환생인 줄?"

"야. 배컴 아직 살았다. 멀쩡한 사람 고인드립치지 마라."

"그렇군요."

"에이, 시간이 또 이렇게 됐네. 난 좀 더 공부하다 갈란다."

"네 형. 전 이제 운동하러 가려고요."

"그래. 담 주 보자. 주말에 심심하면 뽈이나 차고."

"시간 없어요. 지방에 답사가야 돼서."

"왠 답사?"

"교양수업 과제요."

"햐, 거 과제 한 번 빡세네. 암튼 수고."

"네, 형."

도서관으로 다시 향하는 성수를 보며 도훈은 생각했다.

‘역시, 괜찮은 녀석이란 말이지. 계속 친하게 지내야지.’

그러면서 수북한 뒤통수를 쓱 어루만졌다.

"근데 진짜 이발 좀 해야 하려나?"

***

"네? 안 나오셨다고요?"

"네. 송미나 트레이너분은 집안 사정으로···. 일단 그룹 PT 자리 예약해 드릴까요? 오늘 빠진 횟수 주말에 채워주신다고 하던데."

허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랜만에 헬스장엘 갔더니 하필 미나가 결근한 날이었다.

"아뇨. 제가 주말엔 일이 있어서. 그냥 다음 주에 올게요."

"네, 죄송합니다."

용돈도 두둑이 생겼겠다, 큰맘 먹고 그룹 PT나 신청하려 했건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미나가 없으니 운동할 맛도 나지 않았다. 가볍게 몸만 풀고 샤워를 마친 후 헬스장을 나왔다.

집으로 걸어가는 데 문득 성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너 이발 좀 해라.

이발이라.

내일부터 답사 때문에 시간 없는데 오늘 자를까? 그러나 어느덧 저녁이 늦어 영업 중인 미용실을 찾기 어려웠다.

한참을 골목을 헤매다 보니 조그만 동네 미용실을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자 한 명이 바닥에 널린 머리카락을 쓸고 있다.

"혹시 영업하나요?"

"아, 마감인데···."

젠장. 아홉 시도 전에 가게 문을 닫는구나.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 여자가 물었다.

"혹시 커트하시는 거?"

"네. 정리만 좀."

여자는 힐끔 시계를 보더니 들어오라고 다시 나를 불렀다.

"들어와요. 어차피 다른 데 가도 영업 끝내고 있을 텐데."

"엇, 감사합니다."

동네 미용실이라 그런지 내부가 비좁았다.

이발 의자는 딱 두 개였고, 뒤에 대기용 소파도 인조가죽으로 보이는 3인용이었다.

‘좀 허름하네.’

의자에 앉아 거울을 통해 미용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30대? 잘 쳐주면 20대 후반으로도 보이는 성숙한 여성이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진한 화장이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게 했다. 아주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빛에서 색기가 엿보이는 인상이었다.

"스타일은 어떻게?"

"전역하고 한 번도 정리를 못 했거든요. 깔끔하게 정리만 좀 부탁드려요."

"아항."

계속 대화를 하다 보니 은근히 말이 짧은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곧바로 말을 놓았다.

"대학생이야?"

‘뭐야? 날 언제 봤다고.’

살짝 기분 나빴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거니 했다.

"네."

미용사가 나일론으로 된 커트 보를 목에 둘러주며 내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시선.

"···잘생겼네."

"네?"

"아니, 얼굴 잘생겼다고."

분명 칭찬인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자꾸 함부로 반말해서 그럴까? 한마디 쏴주려는데 소매를 걷어붙인 그녀의 손목 안쪽으로 장미 모양의 문신이 언뜻 보였다.

‘헉. 뭐지? 웬 문신?’

문신을 보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 들었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문신을 드러내게 한 사람들은 왠지 거친 삶을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미용사가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리며 말했다.

"전역한 지 두 달 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머리끝이 엉망이야. 군대에서 못 배운 애들이 바리 깡으로 밀면 꼭 이렇더라?"

"아···."

"잘생긴 얼굴인데 머리 관리도 좀 하지."

"하하. 네."

자꾸 반말을 듣다 보니 원래 성격이 저려 러니 했다.

왜 있잖는가, 남자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각사각-

미용사가 거침없이 가위질을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머리를 끼워 잘라내는 폼이 숙달된 기술자 같았다.

"어디 다녀?"

"네?"

"아니 학생이라며. 대학 어디?"

"국성대요."

"오, 4년제 다니네? 공부 잘했나 봐?"

어째서 4년제가 공부를 잘했다는 근거가 되는지 모르지만 나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전문대 나왔어. 미용 학과."

"아, 네."

별다른 대답이 없는데도 미용사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직업상 손님에게 말을 붙이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호기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자 친구는 있고?"

"네?"

"많을 거 같은데?"

내 얼굴에 쓰여 있나?

"그래 보여요?"

"응.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뭐··· 나쁘지 않고."

그새 몸은 또 언제 봤데?

"없어요. 복학한 지 얼마 안 돼서."

거짓말은 아니다.

여자는 많지만, 애인은 아직 공식적으로 없으니까.

"흐음, 한창땐데 참기 힘들겠네."

"예?"

"아냐. 옆머리는 확 쳐버릴까? 아님 구레나룻 좀 남겨줄까?"

"알아서 해주세요."

가만 듣다 보니 대화의 수위가 심상치 않았다.

단골도 아니고 처음 보는 손님한테 너무 막 던지는 거 아닌가?

‘로시,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중년 아저씨 하나가 빼꼼 머리를 들이밀었다.

"영업해요?"

"아니요, 마지막 손님입니다."

"나참, 문 여는 데가 없네. 알았수다."

손님이 나가자 미용사는 잠시 주머니 춤에 가위를 넣더니 "잠깐만."하고 통유리 창에 블라인드를 치기 시작했다. 오픈이라도 걸린 팻말도 안쪽으로 뒤집었다. 그녀는 바깥 싸인 불 코드까지 뽑아내고서야 다시 내 쪽으로 왔다.

"머리 자르고 있으니까 자꾸 손님 들어오네. 이제 아무도 안 올 거야."

‘흠. 왠지 느낌 쌔 한데···.’

[직관력의 발동인가요?]

‘그냥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

[궁금하시면 확인해 보시던가요. 현재까지 관련 위업이나 미션이 뜨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오케이. 정보창 띄워봐.’

곧 스마트폰에 정보창이 띄워졌지만, 손이 커트 보 아래 감춰져 있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름 황선영, 나이 31세. 현재 호감도는 64로 호감도가 낮아 나머지 정보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호감도만 봐선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닌데, 원래 좀 흘리는 타입인가?’

[호감도를 개선할 방법은···. 가게 단골이 되는 것을 추천하는군요.]

‘단골까지 돼서 공략할 정도는 아닌데. 다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면 무수히 많다.

물론 처음 보는 여자가 가장 매력적이긴 하지만, 공들여 자빠뜨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익힌 스킬을 써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이지선다?’

[네. 스킬 성능도 확인해 볼 겸 말이죠.]

‘오, 그건 좀 솔깃한데? 어떻게 쓰는 건데?’

[주인님이 하고 싶은 바를 생각한 뒤 스킬을 시전하면 두가지 선택지가 제공될 겁니다. 각각의 선택지는 결과를 시뮬레이션하실 수 있고요.]

‘결과를 시뮬레이션하다니? 도통 감이 안 잡히는데?’

[일단 한 번 써보시죠. 어차피 내일이면 또 충전되니까요.]

‘그래. 연습 겸해서 말이지.’

나는 머릿속으로 황선영을 미용실에서 따먹는 상황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지 선다 스킬을 실행시켰다. 잠시 후 로시가 말했다.

[현재 디스플레이에 두 가지 선택지가 제공되었습니다. 읽어 드릴까요?]

‘아니. 처음인데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봐보고 싶어.’

"누나. 잠시 메시지 좀 볼게요."

"폰?"

"아뇨. 스마트 워치에 연동되어 있어서 이걸로 봐도 돼요."

나는 커트 보를 젖혀 스마트 워치를 꺼내 들었다.

디스플레이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 : 그녀의 다리 사이로 불쑥 손을 집어넣는다.

㉯ : "누나 애인 있어요?"

‘오잉? 이게 뭐야?’

< 199. 하수 탈출-2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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