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16화 (196/2,000)

< 198. 하수 탈출-22- >

***

"형형, 어제 봤어요?"

오후 수업 전 만난 태영이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남모를 비밀을 공유하는 비밀 결사의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끄떡여 본다.

"···봤지."

"진짜 역대급이지 않아요? 조만간 토랭이 뜨면 향후 10년간은 밥도둑, 아니 단백질 도둑 노릇 톡톡히 할 걸요?"

"토랭이?"

"토렌트 말에요."

"토렌트가 뭐야?"

"형님, 잘 모르시는구나. 인터넷 P2P로 공유하는 거 있어요. 요샌 웬만한 야동은 다 토렌트로 뿌리거든요."

내가 놀라 물었다.

"그거 불법 아냐? BJ가 벌 돈을 다른 사람이 갈취하는 거잖아?"

"에이, 불법은 맞는데 갈취는 아니죠. 토렌트 이용자들이 서로 돈 주고 파는 것도 아닌데···."

"아니 그게 말이냐 방구냐? 어쨌든 잠재적인 고객들의 기대수익을 앗아간다는 면에서 상도덕적으로 굉장히 그릇된 거 같은데?"

서윤의 돈이 줄줄 새어나간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기껏 돈 벌려고 열심히 방송분을 찍었더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꼴 아닌가? 아니지 이 경우는 그냥 공중분해 됐다고 봐야하나?

내가 다소 격한 반응을 보이자 태영이 흠칫했다. 왜 자기 일도 아닌데 저럴까 하는 표정이다. 겨우 배트맨 논란을 불식시켜놓고선 괜한 긁어 부스럼이군. 의심을 피하고자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 난 돈 주고 봤는데 누군 공짜로 받아 본다니까 좀 짜증 나서."

"하긴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전 어제 별풍 200개나 쐈어요."

"그랬어?"

‘고맙네, 이 자식. 내 용돈도 보태주고.’

"네. 그래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역대급 작품을 라이브로 봤다는 감동은 특별한 경험이었으니까요. 물론 저도 토랭이 쓰는 애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천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든, 시청률 40%를 넘나드는 드라마든 결국엔 다 돌고 돌 수밖

에 없거든요. 제작자들도 그 부분은 현실적으로 포기하는 부분이고."

"그런가?"

"뭐, 어쨌든 가영이도 벌 만큼 벌었으니까 그렇게 섭섭지는 않을 거예요. 대충 보니 어제 하루만 거의 돈천 가까이 땡긴거 같은데."

"처, 천 만원?"

헉.

누가 100만원 한 방에 쏘는 걸 보긴 했는데 총수입이 그 정도나 됐다고? 그럼 수수료 제하고 1/4 주기로 했으니 나한테 떨어지는 돈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보통 일간 탑 찍으면 그 정도 되거든요. 캬, 근데 진짜 가영이 분수쇼는 정말···."

"둘이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분수 쇼가 뭔데?"

서현의 등장으로 우리 대화는 중단되었다. 게다가 하필 서현은 태영의 마지막 대사를 들었던 모양이다. 태영은 황급히 둘러댔다.

"어, 어, 중외 공원에 음악 분수 말이야. 엊그제 거기 다녀왔는데 엄청 화려하더라고."

"오, 데이트야? 누구랑?"

"그냥 혼자. 나중에 여자 친구 생기면 데려갈 곳을 미리 답사해 보는 셈 치고."

"이열, 열심인데? 이제 여자만 있으면 되겠네?"

"그렇지. 준비된 남자랄까?"

기민한 대응으로 위기를 모면한 태영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형, 그나저나 서현이까지 왔으니 슬슬 답사 계획이나 짜볼까요? 저희 셋끼리라도 먼저 의논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좀 더 기다리지."

"어차피 료코는 수업이 연강이라 참석 힘들다고 했어요. 정음이랑 농대생 형님은 조금 늦는다고 했고."

"그래? 그럼 일단 시작해야 겠네."

이곳은 도서관 1층에 위치한 세미나룸.

우리 조는 내일의 답사 일정을 의논키 위해 공강 시간을 할애해 모이기로 했다.

대략적인 일정은 답사지를 추천했던 농대생(남자 이름 따윈 기억하지 않는다.)이 단톡방에 올려놓은 상태이므로, 우린 오고 가는 교통편이라던가 소요되는 식비나 준비할 간식 등을 논의했다.

"KTX 편은 제가 예매할게요. 서울서 광주역까지 떨어진 다음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더 들어가면 될 거 같아요."

"가만, 사람이 모두 몇명이더라?"

"음, 서현이가 친척 결혼식으로 빠지니까 형이랑 저, 료코에 정음이 그리고 농대생 형님까지 다섯 명이네요."

"힝, 나도 가고 싶다."

"넌 보고서나 열심히 써."

"그래도 난 무임승차하기 싫어서 사전 협의도 참석한다 뭐?"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왜 숫자를 물어봤냐면, 다섯 명이 버스를 타고 움직일 거면, 렌트를 하는 것도 비용상 별 차이 없을 것 같아서."

"아, 맞다. 형 운전할 줄 아시죠? 새터에서도 읍내 다녀오셨잖아요."

"응."

‘도훈이 운전면허증 있는 거 맞지?’

[네. 군대 가기 전 1종 보통으로 취득했습니다. 장롱면허긴 하지만, 운전 경험은 주인님이 있으시니까요.]

"아~ 부럽다. 도훈 오빠가 운전도 해주고."

"부러우면 결혼식 포기하고 와."

"빠지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괜찮아. 서현이는 나랑 일요일에 보고서나 열심히 쓰자. 사진 많이 찍어 올게."

"넹."

그 밖에 식당이나 간식 등을 알아보고 있을 때 나머지 두 사람이 합류했다. 특히 정음은 늦어서 미안하다며 음료수까지 뽑아 오는 센스를 발휘했다.

"죄송해요. 교수님이 생각보다 수업을 늦게 끝내줘서.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캬, 역시 정음이!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지!"

태영은 정음을 유난히 환대했다.

어떻게 저놈은 여자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껄떡대는지.

"어디까지 얘기됐어? 내가 톡방에 올린 건 봤지?"

"어. 거기 맞춰서 차편까진 대충 정리됐어. 지금은 맛집 알아보는 중이야. 기왕 전라도까지 내려가는데 맛있는 거 먹고 와야지."

"템플 스테이에서 제공하는 사찰 음식도 맛있고, 근처 식당도 괜찮은데 많을 거야."

"맞아요. 방금 검색해 봤는데 맛집 엄청 많네요."

"역시 음식은 전라도인가?"

"거긴 뭐 음식 맛없다고 소문나면 식당 접어야 한다잖아."

협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들 모난 구석 없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보통 조모임은 무임승차와 사보타주로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그런 경우는 피한 것 같았다.

"자, 이쯤 정리하면 되겠다. 내일 아침 늦지 말고 서울역에서 봐."

"헉, 벌써 시간이···. 전 그럼 동방에 좀 가볼게요. 다음 달 공연 연습이 있어서."

"연극부?"

"네. 저 이번에 단역 하나 맡았거든요. 다들 시간 되면 보러오세요. 표는 제가 구해드릴게요."

"그래. 열심히 해라."

"저도 수업 갑니다!"

다들 다음 일정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세미나 룸에는 나와 정음만 남게 되었다.

"정음이 넌 수업 없어?"

"네. 오빠는요?"

"나도 마지막 수업 하나 남았는데 1시간 뒤야. 점심 안 먹었음 같이 먹자."

"좋아요."

단둘의 식사에 정음이 모처럼 활짝 웃었다.

음, 역시 귀엽군.

***

두 사람은 대학로 주변의 식당가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거 뭐든 말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정말요? 안 그려서도 괜찮은데···."

"선배가 후배 밥 사줄 땐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얻어먹으면 되는 거야."

"그래도 죄송해서요. 다른 후배들도 자주 사주시면서···."

정음이 계속 예의를 차리자 도훈이 말했다.

"사양 안 해도 돼. 나 이번 달 용돈 두둑하게 받았거든."

도훈은 서윤에게 받게 될 게스트 출연료를 떠올렸다. 태영의 말을 들으니 적어도 백만원 넘는 돈이 입금될 예정.

갑작스러운 공돈에 다소 여유가 생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나연이랑 연두까지 엮이고 나니 괜히 죄책감 드네.’

이거 마치 본처 몰래 바람 핀 남자가 미안함에 더 잘해주고 싶은 심리랄까? 다른 여자들과 달리 정음에게는 유독 신경이 쓰이는 도훈이었다.

정음은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

"오빠 그럼 저 순대국밥 사주세요."

"순대국밥? 그거 좋아해?"

"네. 전 다 잘 먹어요."

‘···오빠가 사주는 거라면 뭐든. 그리고 너무 비싼 건 미안하니까.’

정음이 뒷말을 애써 삼켰다.

식당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그런지 내부가 북적북적했다. 한 그릇에 5,000원이란 저렴한 가격과 주인의 후덕한 인심으로 원체 손님이 많은 가게였다.

종업원이 물을 가져다주자 정음이 컵에 물을 따르며 수저를 꺼내 세팅했다. 도훈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애는 참, 사람이 됐단 말이지. 대게 저 정도로 예쁘면 얼굴값 한다고 비싸게 구는데···.’

[그래서 유독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흠, 그럴지도?’

[하지만 항상 유념하셔야 합니다. 업적을 위해 때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요.]

‘나도 알아 인마.’

플레이어로 거듭나기 위해 도훈이 포기해야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순애였다.

다른 여자와 몸을 섞으면서 일부종사를 할 순 없는 노릇.

그런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이, 정음을 볼 때마다 충돌하며 그에게 딜레마를 안겼다. 그녀의 마음을 알지만, 진심으로 받아줄 수 없다는 사실이 미안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학교 생활은 할 만해?"

"아뇨. 여전히 정신없어요. 조모임도 많고, 행사도 잦고···. 오빠는요?"

정음은 도훈과 단둘이 있을 때면 꼬박꼬박 ‘오빠’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가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만약 다른 동기들이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평소 그녀가 남자들을 향해 오빠 소릴 낸 적은 한 번도 없

었으니까.

"이제 좀 적응한 거 같아. 첨 복학했을 땐 막막했거든."

"그러시구나. 워낙에 학교생활 잘하셔서 복학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어요."

"내가?"

"네. 수업도 열심히 들으시고···. 또 후배들이랑도 친하고."

도훈은 정음의 마지막 말에서 서운함을 읽었다.

때마침 순대국밥이 식탁에 올려지며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은 뜨거운 국밥을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이 가게는 찹쌀 순대를 쓰는데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여기 괜찮지 않아요?"

"응, 맛있네. 이 가겐 어떻게 알았어?"

"아까 수업 때 나연이가 말해줬어요."

"아."

정음의 입에서 나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도훈은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망설이고 있던 정음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오빠 근데 나연이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어?"

도훈은 순간 입에 담고 있던 순대를 뱉을 뻔했다.

‘뭐야? 설마 나연이 요 계집애 그때 그 일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무슨 뜻이야?"

"아니, 나연이가 아까 그러던데요? 오빠랑 엄청 친해졌다고."

"아···. 엊그제 배구 기억나지?"

"네."

"그때 나연이랑 연두가 응원 왔었거든. 끝나고 남자들끼리 술 한잔하는데 둘이 거기까지 따라왔더라고."

"아···."

"술 먹고 이런저런 얘기 많이 했는데 나연이가 그렇게 생각했나 보네."

"네. 오빠가 그날 집에까지 바래다줬다며···."

‘헉!? 얘가 진짜 어디까지 말한 거지?’

도훈이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는데 정음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오빠보고 매너 짱이래요. 연두랑 같이 가는데도 여자들끼리 가면 위험하다고 집 앞까지 배웅해줬다고."

"그때 연두가 많이 취해서 말이야."

다행히 셋이서 같이 잤다는 얘기까지는 안 나온 것 같았다.

도훈이 몰래 안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지 들도 쪽팔릴 텐데 셋이 잤다는 얘기는 못 하겠지. 그나저나 이것들이 생각보다 입이 방정맞네. 아니다. 정음이 들으라고 일부러 했을 수도 있겠구나. 나연이가 유난히 정음을 의식하더니만 질투심 나라고···.’

도훈은 대충의 사정을 파악한 뒤 정음에게 말했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연이나 연두나 좀 유별난 거 같아. 솔직히 배구 할 때 응원하는데 좀 창피하더라."

"인기 많으셔서 좋은 거 아니에요?"

"아이고, 난 그런 애들 한 트럭이라도 별로야."

"왜요? 둘 다 예쁘잖아요. 여성스럽고."

"예쁘긴 정음이 네가 훨씬 예쁘지."

"네, 네?"

정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도훈이 그런 식으로 대놓고 비교를 할 것이라곤 예상을 못 한듯했다.

"왜, 들리는 소문이 있는데? 체육과 17학번 팔선녀라고 못 들었어?"

"그게 뭔데요?"

"사범대 타과에서 너네 동기들 그렇게 부르러다. 워낙에 미모가 출중하다며."

"에이, 무슨··· 말도 안 돼요. 무, 물론 저희 동기들이 별로란 얘기가 아니고 그 정돈 아닌데."

정음은 민망해하면서도 내심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역시 여자에게 예쁘단 칭찬만큼 듣기 좋은 소린 없다고 생각하며 도훈이 한술 더 떴다.

"그리고 팔선녀 중에서 으뜸이 바로 너라던데?"

"아이참, 오빠 왜 그래요, 창피하게."

"아니 그냥 난 소문을 전해 준거야."

"아, 소문···."

"근데."

도훈이 정음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아···."

정음이 끝내 숟가락을 놓고 두 볼을 감쌌다.

노골적인 칭찬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른 밥이나 먹자. 너 오후 수업 있지 않아?"

"네, 네 오빠."

밥을 먹는 동안 정음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

"요새도 저녁에 도장 가서 애들 봐주니?"

"네. 이번 주까지는요. 담 주 시합이라."

"그래. 그럼 남은 수업 잘해라."

"네. 내일 아침에 뵐게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는 정음을 보며 도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정음이는 사랑스럽단 말이야? 이번 템플스테이 때 제대로 한번 느끼게 해 줘야지. 호감도 100도 달성하고 말이야.’

< 198. 하수 탈출-2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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