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11화 (191/2,000)

< 193. 하수 탈출-17- >

***

당황하던 지연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난다. 병문안 온다고 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 이걸로 2주간은 꼼짝없이 병원 감금 확정이다.

‘크크. 귀찮은 혹을 뗐으니 한동안은 마음 편히 활보할 수 있겠군.’

해방감에 기쁜 마음으로 병원 밖을 나서는데, 도로변에 서 있는 휠체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휠체어에는 초로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노인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휠체어 바퀴를 밀었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뒤를 꽉 붙잡고 있는 간호사 때문이었다.

"대체 왜 못 가게 하는겨?"

"할아버지, 지금은 충분히 쉬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화장실 간다 해놓고 이렇게 밖으로 나오시면 어떡해요?"

"아, 글쎄 담배 한 갑만 사온다니까 그래?"

"그 담배가 문제라고요! 퇴원하기 싫으세요? 할아버지 연세에는요, 관리 안 해주면 뼈도 잘 안 붙어요."

"난 그런 거 몰라! 지금 꼭 펴야겠으니까 어서 놔."

"안된다니까요!"

손녀뻘로 보이는 간호사는 노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은은한 라임색 간호복으로 보아, 방금 지연이 입원한 병원 간호사로 보였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유난히 하얀 것이 인상적.

특히 간호복 단추가 터질 것처럼 전면 돌출된 가슴은, 헉- 소리 날만큼 거대하고 위대했다.

‘우아 씨, 대포동 미사일 두 기가 왜 저기 달려있어?’

자연스레 시선을 뺏기고 만 나는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계속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둘은 옥신각신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다.

"길만 잠깐 건넜다 오면 되는데 왜 자꾸 그래?"

"아, 증말! 자꾸 이러시면 자녀분한테 다 일러 버릴 거에요!"

"일러! 일러, 일름보야!"

나이 들면 애가 된다더니 노인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떼쓰는 모습이 영락없는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그때, 한참 힘겨루기 중이던 휠체어가 보도블록 아래로 미끄러졌다. 힘 싸움을 벌이던 중 간호사가 잠시 손을 놓친 사이 관성을 못 이고 바퀴가 굴러가 버린 것이었다.

"엄마야!!"

휠체어가 도로 아래로 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황한 노인은 쿵- 하고 한 계단 떨어지더니 제동도 걸지 못하고 계속 도로 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인접한 차도에선 빠른 속도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빠른 속도로 도로로 뛰쳐나가 굴러가는 휠체어를 붙잡았다.

여전히 차는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젠장! 미친 차주 새끼, 핸드폰 쳐 보고 있잖아?’

달라진 동체 시력이 운전자의 상태를 확인하자 판단에 앞서 행동이 선행되었다.

나는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해 노인과 휠체어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나조차도 신기할 지경이다.

[주인님, 조심 하십시요! 전방에 차가 달려옵니다!]

‘나도 알아!’

그제야 나와 노인을 발견한 운전자가 황급히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이미 가속이 붙은 차량은 제동거리를 확보하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젠장할!’

당황한 나는 휠체어에 탄 노인을 보도블록 쪽으로 집어던졌다. 그 순간 끼이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스키드마크가 새겨지며 차량이 덮쳐왔다. 나까지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주, 주인님!!!!!!!!]

"꺄아아악!!!"

간호사의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머릿속으로 온갖 장면이 편집적으로 재생된다.

아, 나의 두 번째 삶도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 것인가!

피하지 못할 것을 짐작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

······

···

··

·

그리고 기적이 벌어졌다.

차량이 가까스로 내 몸 10cm 앞에서 멈춰 선 것이다.

다행히 ABS가 장착된 차량이었나 보다.

"후-"

긴장이 풀리자 나도 모르게 나를 치어 죽일 뻔한 차주에게 분노가 솟구쳤다.

"아이씨! 전방 주시 안 합니까! 사고 날 뻔했잖아요!"

차주는 곧바로 튀어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다치신 덴 없으세요?"

그가 뻔뻔한 사람이었다면 더 열 받았겠지만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금세 화가 누그러졌다. 생각해 보면 갑자기 도로로 튀어나간 휠체어도 잘한 것은 없었다.

"괜찮아요. 보시는데로."

"아아, 정말 십년감수 했네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나는 툭툭 털고 일어났다. 횡단 보도 근처에 모인 사람들이 영웅이라도 보는 것처럼 나를 둘러싸더니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짝짝-

"우아! 정말 잘하셨어요!"

"젊은 친구가 용기가 대단하구만!"

"오빠 멋있어요!"

칭찬을 받기 위해 한 행동을 아니었으므로 나는 금방 멋쩍어졌다. 쑥스러워 고갤 숙이고 얼른 갈 길을 가려는데 아까 봤던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휠체어 탄 분은 괜찮으세요?"

"좀 넘어지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으세요."

간호사의 말처럼 노인은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나에게 다가올 만큼 멀쩡한 상태였다.

"젊은이 정말 고맙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아닙니다. 큰 사고 안 나 다행이네요. 전 그럼 이만···."

군중들이 쳐다보는 뻘쭘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영 불편했다.

‘으. 괜한 짓을 해버렸나.’

[아닙니다. 정말로 잘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주인님이 달라 보이는군요.]

‘뭐?’

[다른 사람의 목숨을 건졌잖습니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셨는지···.]

‘몰라.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이고 있더라고. 왜 철부지 아이가 우물가에 빠지려고 하면 누구나 구해주려는 마음이 든다잖아. 그냥 그런 거야.’

[그래도 그 상황에서 선뜻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죠. 너무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신기한 일이다.

전생의 이정우였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구해주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었을 테니까.

‘···그냥 왠지 될 것 같더라고.’

[네?]

‘아니 그 휠체어 들어 올릴 때 말야. 지금 몸이면 가능할 것 같았어.’

위기에 처하면 누구에게나 초인적인 힘이 솟아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물리적인 근육량의 한계는 있기 마련. 내가 과감할 수 있었던 것도, 뒤바뀐 이도훈의 육체가 워낙 밑바탕이 좋았기 때문이리라.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뚱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군.

물론 마지막에 차가 코앞에서 멈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다시 그때를 떠올리자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쫘악 돌았다.

‘으! 두 번 다신 못하겠어. 목숨이 아홉 개도 아니고.’

"헉헉···저기요! 잠시만요!"

등 뒤에서 숨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간호사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헛!"

위아래로 출렁대는 가슴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유방은 단추를 뚫고 나올 것처럼 수직의 진자운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저, 저 가슴 실화냐? 젖소부인이 따로 없네.’

"그렇게 말도 없이 가버리시면 어떡해요!"

여자는 한참을 뒤따라 오느라 지쳤는지 내 앞에서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연스레 상의가 흘러내리며 가슴골이 훤히 비췄다.

‘대박! 빨통에 지려버렸다.’

[음···. 방금 했던 말은 취솝니다. 역시 주인님은 저속한 편이 훨씬 잘 어울리시네요.]

‘뭐래 이 자식이!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못 들었어?’

[······.]

"할아버지가 아, 그 아까 구해주신 분이요."

"네."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보내면 안 된다면서···."

"네?"

"저보고 연락처라도 받아오라고."

"아뇨 괜찮습니다. 보답 받으려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하네요."

"사양 마세요. 저도 너무 감사해서요."

"네?"

"제 실수로 놓친 거잖아요. 그 환자분 다쳤으면 저도 진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자 간호사도 아찔했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유독 도드라진 가슴을 쳐다보다 문득 명찰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박지애]

‘음, 이름부터가 박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군.’

[아 주인님, 쫌!]

‘알았어 인마. 난봉꾼이 [도훈]한데는데 뭘 또.’

[도훈 하다뇨? 그런 동사도 있습니까?]

‘응. 내가 방금 만들었어. 발정 나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는 거 말야.’

[훌륭하십니다. 매번 도훈 하십쇼.]

‘어째 비꼬는 것 같다?’

[영웅 호색은 무슨···.]

‘이 자식이!’

간호사 지애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 번호 좀 적어주세요. 할아버지가 꼭 사례하고 싶데 서요."

"아니 사례는···."

가만?

생각해 보니 지애의 번호를 딸 기회잖아?

나는 마지못한 척 번호를 찍고나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주머니에 폰이 울리자 바로 종료했다.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이도훈이요."

"네. 저기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 할아버지 되게 부자거든요."

"네?"

"아뇨 그러니까···. 아무튼 연락 드릴게요."

"네."

나는 돌아서는 지애의 뒷태를 입맛을 다셨다.

‘와, 몸매 오지네 진짜. 백의의 천사가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주인님. 미션과 상관없는 욕정은 하수 탈출에 하등 도움이··· 제길. 미션이 발동되었습니다.]

‘야, 제길은 뭔데?’

[정말 천운이 따르시네요. 미션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번 미션의 명칭은 ‘야근 병동’입니다.]

‘오. 이름부터 뭔가 느낌 빡 오는데?’

[맞습니다. 주인님의 경험치가 오름에 따라 단순 공략 미션에서 난도가 올랐습니다. 미션을 성공하시면 특전으로 500포인트와 ‘응급 처방 킷’ 아이템이 지급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이야, 대체 미션이 뭐길래 포인트랑 아이템을 같이 줘? 제한 조건이 뭔데?’

[야근 병동 미션은 나이트 근무 중인 간호사를 현장에서 공략해야 합니다.]

‘현장? 설마 병원에서 그 짓을 하라고?’

[네. 금번 제한 조건은 ‘시간’과 ‘장소’입니다. 지정된 시간은 새벽 2시-5시 사이. 그리고 장소는 박지애양이 근무하는 튼튼 병원 병동입니다.]

음. 쉽게 넘어 갈런지 모르겠는데···.

[미션이 수락까지 2:30초 남았습니다.]

‘일단 고!’

[미션이 수락되었습니다. 디스플레이 창을 터치하시면 미션의 상세 내용이 표시됩니다.]

-야근 병동-

*새벽시간 병원에 당직 중인 간호사를 공략하는 미션입니다.

*성공 보상으로 5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성공 보상으로 ‘응급 처방 킷’이 제공됩니다.

-응급 처방 킷(소모성 아이템) : 신체 손상률 20% 미만의 부상에 대해 즉각적인 회복이 가능합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수행 장소가 ‘병동’으로 고정됩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수행 시간이 새벽2-5시로 고정됩니다.

*2주일이 지나면 미션이 자동 소멸됩니다.

*남은 시간 : 14일

나는 핸드폰에 남겨진 부재중 번호에 이름을 저장했다.

-박지애.

그러나 너무 밋밋한 거 같아 별명을 붙였다.

-박지애(폭유 간호사)

[···여윽시 저속하기 짝이 없으십니다!]

로시가 떠들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빈말로 내뱉은 건데 조만간 한지연 병문안을 가긴 가봐야겠군.

***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박문수에게 상황을 보고한 지연이 고개를 떨궜다.

자신만만 맡겨두라고 소리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전하기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알았다. 사정이 그리됐다니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팀장님. 면목 없습니다."

-일단 다음에 얘기하자. 이쪽도 잡지사 인터뷰 때문에 정신없거든.

"인터뷰요?"

-어. 고성민이 지난번 일로 약점 잡혀서 필명 공개하기로 한 날이야. 근데 매스컴에서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잔뜩 몰려들었어. 회장님께서 그룹 후계구도에 차질 없도록 프레스 컨트롤을··· 야! 저기 막아. 개나 소나 다 들여 보낼래! 야, 바쁘니까 끊는다.

뚜우-뚜우-

급작스럽게 끊어진 전화에 한지연이 핸드폰을 내던졌다.

붕대로 감아 고정된 다리가 지금처럼 원망스럽긴 처음이었다.

육사 출신의 엘리트.

국내 굴지 기업의 정직원.

20대 중반의 억대 연봉.

누구 하나 남부러울 것 없었던 인생이 도훈을 만난 후로 점점 꼬여가는 기분이었다.

"아오! 진짜 이도훈!"

괜한 이도훈에게 화풀이하는 지연이었다.

***

도훈은 쉬는 시간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교수는 알겠다며 나중에 송이든 보고 진단서를 제출할 것을 전달했다.

남은 시간 수업을 모두 마친 도훈은 밀려오는 피로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진짜 엄청 피곤하다. 이대로 누우면 이불과 한 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집으로 바로 갈까 하던 도훈은 근처 찜질방 간판을 보곤 생각을 고쳤다.

‘간만에 목욕도 해야지.’

혼자 찜질방에 입장한 도훈은 락커에 대충 옷을 때려 박고는 토굴에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뜨뜻한 바닥이 노골노골 몸을 녹여왔다. 도훈은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편안히 주무시길.]

도훈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헐! 몇 시간을 잔 거야?"

서윤과 약속된 시간은 자정.

준비를 위해선 1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탕에만 살짝 들어갔다가 나가야지.’

찜질복을 훌렁 벗어 던진 도훈이 남탕으로 입장했다.

근육질의 발달한 몸이 시선을 끌었다.

목욕 의자에 앉아 때를 밀고 있던 중년의 남성은 놀란 눈으로 도훈의 다리 사이를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다른 젊은 남자는 도훈과 비교될까 두려워 두 손으로 그곳을 가리고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도훈은 욕탕에 걸터앉아 쩍- 하고 다리를 벌렸다.

그야말로 왕의 포스였다.

< 193. 하수 탈출-17- > 끝

ⓒ 성난불기둥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