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하수 탈출-16- >
"아침 등굣길에 삐끗했지 뭐에요."
"많이 다쳤나 본데? 병원은 가본 거야?"
"단순 염좌 같아요. 압박붕대면 충분해요."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치마를 툭툭 터는 것이었다.
과연 육사 생도 출신이라 그런지 터프하군.
"암튼,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배고파요."
"···그, 그래."
의도치 않게 다친 사람을 넘어뜨리는 바람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지연의 요구를 수락할 수 없었다. 애초 약속을 안 했다면 모를까 한 번 내뱉었던 말을 다시 주워 담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나 참, 피곤해 죽겠구만 하필 이 타이밍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십시오. 아무리 졸리더라도 끼니를 거르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근데 얘는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정확히 찾아내는 걸까? 뭔가 수상하지 않아?’
[주인님의 시간표를 외우고 있는 게 아닐까요? 화목 수업이 전공과목들로 이루어진 것을 안다면 동선 파악이 어려운 일은 아닐 테죠.]
‘물론 그렇긴 한데···.’
로시의 대답은 일견 타당해 보였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어제 배구 끝나자마자 체육관으로 찾아온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 것이다. 그건 애초부터 시간표에 잡히지 않던 스케쥴이었으니까.
가만? 혹시?
소오름!
순간 팔에 닭살이 일어나며 등골이 오싹해진다.
절뚝거리며 걷는 지연과, 그녀가 내 위치를 매번 정확히 찾아내는 기이한 현상이 교차 되면서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떠오른 것이었다.
‘설마 그 도둑이 한지연이었나!?’
나연의 비명에 뛰쳐나갔을 때 본 것은, 골목길로 숨어드는 절뚝거리는 사람의 뒷모습.
그땐 당연히 발바리 따위의 변태 남성이라고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남자치곤 몹시 체구가 작았다. 그리고 그 도둑은 멀리서 봐도 확연할 정도로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지연이가 똑같은 발을 절고 있군.’
[지금 지연 양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생각해봐. 만약 지연이 시간표를 외운 게 아니라 나한테 추적장치를 단 것이라면? 그리고 저 삔 발목, 어제 그 도둑놈이 다친 부위랑 똑같잖아. 이게 정말 우연일까?’
[흐음. 그녀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군요.]
‘그렇지. 대 삼현 그룹 경호팀 소속이라면야.’
"오빠, 저 수제 돈가스 먹고 싶은데 괜찮아요?"
"돈가스 좋지. 나도 좋아해."
나는 대답을 하면서 계속 로시에게 물었다.
‘혹시 내 몸에 추적장치 같은 게 붙었는지 알 수 있을까?’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스캐닝을 통해 전자기 신호를 감지해 보겠습니다. 이 작업은 2분 정도 소요됩니다.]
‘알았어.’
식당으로 향하던 길에 점검을 마친 로시가 나에게 말했다.
[정말이군요. 상의 뒤편에 미약한 전자장치의 신호가 잡히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시그널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초소형 추적장치 같습니다.]
‘이럴 줄 알았지! 이걸 언제 심었지? 싸이코 메트리로 확인해 볼까?’
나는 로시가 일러준 데로 추적기를 찾아 정보를 읽어 들였다.
‘···어제 체육관 앞에서였군. 그렇다면 체육관으로 찾아올 때는 다른 방법을 썼다는 소린데.’
[감시 카메라라든지 제3의 인물까지 고려해 봐야합니다.]
‘제3의 인물이라니?’
[한지연 양 외에 또 다른 감시자가 존재할 가능성 말이죠.]
‘흠···. 내가 삼현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이대로는 앞으로의 행동에 많은 지장을 받을 겁니다. 주인님 추측대로면 어젯밤에도 나연 양 자취방까지 감시망을 좁혀왔다는 소리 아닙니까?]
‘맞아. 업적 달성에도 애로사항이 꽃필 테지. 무엇보다 나를 지속해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하군.’
[처리할 방법이 있으십니까?]
‘···일단 저 푼수부터 구워삶아야겠어.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자고.’
나는 절뚝거리는 지연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도훈이 우선적으로 확인한 것은 지연의 정보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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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한지연
나이 : 26
호감도 : 70/100
개방성 : C
성감대 : 클리토리스, 겨드랑이, 입술
*애무 포인트 : 그녀는 키스할 때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어 주는 걸 좋아합니다.
성욕지수 : 중간
공략팁
그녀는 감시 대상에게 이성적인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 행동을 추천합니다.
-추천멘트 : "나 여군이 참 매력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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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지난번보다 호감도가 상승했는데? 감시자가 감시 대상에게 흥미를 느끼다니···. 독특한 반응이군.’
[역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주인님께서 만약 어떤 여대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남몰래 감시하고 지낸다면 이성적인 흥미가 동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말이 되는군. 이러면 일이 좀 더 수월할지도.’
주문한 수제 돈가스가 나오자 도훈은 나이프를 들어 돈가스를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칫. 내 것도 잘라주면 어디 덧나나?’
자기 것만 챙기는 모습에 지연이 심드렁해 있는데 돈가스를 잘게 자른 도훈이 갑자기 접시를 맞바꿨다.
"이거 먹어. 적당한 크기로 잘라놨어."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너 다리 다쳤잖아."
‘풉- 다리 다친 거랑 돈가스 써는 거랑 무슨 상관이람? 은근히 하는 짓이 귀엽네?’
"어젠 미안했어. 동아리 면접 보려고 기다리는데 교수님한테 연락이 왔지 뭐야? 당장 배구 하러 체육관 튀어오라면서."
"그러셨구나···. 전 말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당황했다구요. 가뜩이나 이상한 동아리라."
"암튼 기분 상했으면 미안."
"괜찮아요. 이걸로 퉁치죠, 뭐."
도훈의 진정 어린 사과에 꿍해 있던 지연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난봉꾼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매너가 좋네. 이래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걸까?’
며칠 동안 감시한 결과 도훈은 늘 여자들과 함께였다. 심지어 어젠 여자 후배 집에서 자기까지 했다.
피곤에 찌든 얼굴을 보니 밤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안 봐도 훤했다.
‘하여간 잘생긴 애들은 얼굴값 하고 다닌단 말이지.’
갑자기 도훈에게 심술이 난 지연은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어졌다.
"근데 오빠. 어제랑 옷이 그대로네요? 혹시 외박하셨어요?"
나름 허를 찌른 질문이었으나 도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어제 술 먹다가 후배 집에서 잤어."
"후배 맞아요? 여자친구 아니고?"
"응? 나 여자친구 없는데?"
"정말요?"
‘와, 이 뻔뻔한 자식 봐라? 그럼 여자친구도 아닌 후배랑 원나잇을 했다는 거야, 뭐야?’
지연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도훈이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 후배가 여자는 맞는데···."
"어머! 그럼 여자 후배 집에서 잤다고요?"
"그게 좀 사정이 있었어. 어제 배구 끝내고 뒤풀이 겸해서 술자리가 있었는데 여자애 하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완전히 뻗어 버린 거야."
‘술집에서 봤던 그 여자애들 인가?’
"근데 집도 하도 멀어서 데려다줄 수가 없었어. 다행히 학교 근처에 자취하는 애가 있길래 걔 집에서 재우기로 했지. 그 후배만 업어다 주고 갈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걔가 내 등에다 대고 토해 버린 거야."
"으, 저런···."
"별수 없이 야밤에 옷을 빠는데 옷이 바로 말라야 말이지."
"진짜 황당하셨겠네요."
"다행히 그 집에 방이 두 개더라고. 난 작은 방에서 자고 여자애들은 큰 방에서 잤어. 여자 혼자 자는 상황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야."
"그러셨구나."
도훈에게 깜빡 속아 넘어간 지연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여자애 집에서 잔 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여자애들이 둘이었다면 별일은 없었겠네.’
지연은 왜 자꾸 자신이 도훈의 사생활을 의식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새벽에 엄청 고생하셨겠네요. 지금도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맞아. 잠을 좀 설쳤어. 내가 낯선 데선 잠을 잘못 자는 편이라. 그 와중에 아침에 회의까지 있어 가지고."
"회의라뇨?"
"다음 주 MT 때문에 아침부터 다 모였거든. 참, 너희 과는 MT 어디로 가?"
이번엔 도훈이 빈틈을 찔렀다.
도강생에 불과한 지연으로선 결코 대답하기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연이 허둥대며 둘러댔다.
"전 아싸라서 학과 활동을 안 해가지고···."
"그래? MT 가서 친해지면 되잖아."
"그, 그런가요?"
"너무 과 활동 안 하는 것도 좀 그래. 나중에 전공시험 볼 때 물어볼 사람은 있어야지. 가만, 미술과라고 했던가?"
"네."
"내가 다른 교양수업에서 친해진 미술과 애가 있는데 물어봐 줄까? 어디로 가는지?"
"괜찮아요! 제가 알아볼게요."
"같은 조라 단톡방에 있을 거야. 어디로 가는지만 살짝 물어볼게."
"진짜로 괜찮아요."
"그래?"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러지? 잘못하면 정체를 들키겠는데···. 본래 송이든은 휴학 중이란 말이야. 얼른 화제를 돌려야겠다.’
"근데 오빠네 과는 어디로 가기로 했어요, MT?"
"우린 오늘 결정했는데 대성리 캠핑 장으로 갈 거 같아."
"캠핑요? 좋겠다. 저도 캠핑 엄청 좋아하는데."
"정말?"
"네. 제가 또 텐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치거든요. 24인용도 장비만 있으면 혼자···."
"24인용? 그거 군용 텐트 아냐?"
‘아뿔싸! 내가 뭔 소릴···.’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던 자기도 모르게 지연은 생도 시절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하하! 제가 말이 헛나왔어요. 24인용이 아니라 2-4인용 텐트요."
"난 또···. 군대라도 다녀온 줄 알았네."
"여자가 어떻게 군대를 가요."
"왜 못 가? 요샌 여자도 사관학교 많이 가잖아. 여대에 ROTC까지 만드는 세상인데."
"그, 그런가?"
도훈은 허둥대는 지연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난 여군이 그렇게 멋있더라."
"오빠 여군 좋아해요?"
"응."
"왜요?"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자립심 있어 보이잖아. 뭐든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은 다 멋있지."
"···그러시구나."
두 사람은 점심을 함께하며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날 때쯤 지연은 도훈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괜찮은 녀석인데? 얼굴만 잘생긴 바람둥인 줄 알았더니 매너도 좋고 생각도 깊고···.’
특히 여군을 좋아한다는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 다음 수업 같이 듣지? 가자. 더 늦으면 지각하겠다."
"네."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수업시간이 가까워졌다.
지연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발을 내딛는데 불쑥 찌르르한 통증이 몰려왔다.
"악!"
"왜 그래? 아파?"
"다친 다리에 모르고 무게를 실었더니···."
"조심해야지. 걸을 수 있겠어?"
"네, 괜찮아요. 이 정도쯤이야."
지연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곧바로 주저앉고 말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밀려오는 격통이 심해지더니 이젠 가만히 있어도 바늘로 쑤신 것처럼 아파 왔다.
"아무리 봐도 삔 게 아닌 거 같은데? 혹시 금 간 거 아냐?"
"그, 그럴려나."
지연은 아침에 꼭 병원에 다녀오라던 팀장의 분부를 떠올렸다.
‘그때 그냥 말 들을걸.’
"안 되겠다. 같이 병원 가서 X레이라도 찍어 보자."
"수업은 어떡하고요?"
"사람이 다쳤는데 수업이 대수야."
"······."
"일단 앉아 있어. 내가 택시 불러 올게."
"진짜로 괜찮은데···."
도훈은 사양하는 지연을 눌러 앉히고 택시를 불렀다.
‘정말로 수업에 빠질 생각이십니까?’
[한두 번 정돈 괜찮아. 지금은 한지연을 꼬시는 쪽이 더 급하니까. 그리고 정말로 다리에 금 간 거라면 혹 땔 수 있으니 쌩큐지.]
택시가 도착하자 도훈은 지연과 함께 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지연의 X레이 사진을 확인한 의사는 놀란 목소리로 지연에게 물었다.
"이렇게 심하게 금이 갔는데 안 아프셨어요?"
"단순 염좐 줄 알았어요."
"염좌로 발목이 이렇게까지 붓진 않죠.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깁스는 물론이고."
"수, 수술요?"
"네. 이주간은 입원도 해야 하구요. 세상에···. 어쩌다 이렇게까지 다치셨어요?"
"그, 그러게요."
이주일간 입원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 지연은 난감해졌다. 당장 지원팀마저 모두 떠난 마당이라 자신이 입원해 있으면 도훈을 감시할 방법이 없었다.
지연이 진단실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도훈이 물었다.
"의사 샘이 뭐라셔?"
"발등뼈가 금이 갔데요. 수술하고 입원까지 해야 한다는데···."
"저런···. 내가 입원 수속 밟는 거 도와줄게."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오빤 이제 가보세요."
원무 절차를 밟다 실명과 나이가 공개될 것을 우려한 지연이 한사코 도훈을 쫓아냈다.
"지금이라도 수업 들어가세요. 결석이랑 지각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어떻게 그래. 입원까지 한다는데."
"아뇨. 오빠가 아니라 저 때문에요. 저 다쳐서 입원한다고 교수님한테 말씀 좀 전해 달라고요. 오빤 저 부축하느라 지각했다고 하시고요."
"아···. 또 그렇네. 말씀을 드리긴 해야겠다."
도훈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저 그리고···. 고마웠어요, 오늘."
"뭘 이런 것 가지고."
"아니에요. 정말로 감사해요. 다음번엔 제가 꼭 밥 한번 살게요. 아셨죠?"
"알았어. 몸조리 잘해. 이주간 입원한댔지?"
"네."
"시간 되면 병문안 올게."
"벼, 병문안을요?"
"당연하지. 너 과에서 아싸라며. 입원해 있는데 아무도 안 오면 은근 서럽다."
"안 그러셔도 돼요."
"아니야. 어쨌든 난 이만 간다. 다음에 보자."
"아, 저기!"
도훈은 지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훌쩍 떠나 버렸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연이 혼자 중얼거렸다.
"아씨···. 병문안을 와버리면 꼼짝없이 여기 갇혀 있어야 된단 소리잖아? 이걸 팀장님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단독 작전 수행 첫날부터 꼬여버린 지연은 울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192. 하수 탈출-1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