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하수 탈출-4- >
"다른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
"뭔데요?"
"과씨씨는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것."
단호한 나의 태도에 두 후배에게서 상반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
"오!"
전자의 목소리엔 탄식과 아쉬움이 뒤섞였다.
후자에게선 놀람과 만족감이 묻어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자는 연두, 후자는 나연이다.
짧은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의 본심이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냈다. 물론 우리사이의 삼각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평범한 감탄사로 보일테지만.
"방금 그 말 진심이세요?"
나연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려 나온다. 나에게 호감이 가득한 그녀에게, 방금 전의 발언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을 거다.
반면 연두는 모처럼 경계의 눈빛을 거두고 한껏 나긋나긋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여기던 나의 하차 선고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하긴 과씨씨가 좀 부담스러운 데가 있죠."
"맞아. 아무래도 한 번 데인 게 있다보니 더 그렇더라."
나는 연두에 맞장구치며 슬쩍 나연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체 빈잔에 남은 맥주를 따라 홀로 들이키는 광경은, 누가봐도 심통이 잔뜩 난 모습이었다. 벌컥벌컥 목울대가 꿀렁이더니 탁-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놓은 나연이 말했다.
"선배, 그건 조금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무슨 말이야?"
"처음부터 딱 선을 긋는 태도 말이에요. 같은 과라서 사귈 수 없다구요? 종교가 달라서 안된다, 집안 형편이 차이나니 안된다, 이런 소리랑 뭐가 달라요? 사람만날 땐 사람만 봐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녀는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나로 인해 서운한 감정과 술기운이 맞물리면서, 새내기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나연이었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성수나 우선도 말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의중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대꾸했다.
"그거랑은 다르지. 네가 말한 건 '차별'이고, 나의 경우는 '선택'이랄까?"
"무슨 차이죠?"
"가령 이런 거야. 차별이란 본인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가려 사귀는 태도야. 네가 언급한 종교라든지 집안 형편, 출신 지역이나 외모같은 것들 말이지. 날 때부터 부모님께 물려받거나, 쉽게 바꾸기 힘든 믿음을 핑계삼아 누군가를 박
해하거나 멸시하는게 차별이야."
"오빠가 말한 학과도 똑같은 것 아닌가요? 단지 같은 과라는 이유만으로 안 만나겠다니요? 그게 뭐가 다르죠?"
"꼭 그렇게만은 볼 수 없어."
"왜요?"
바락바락 따지고드는 나연의 태도는 무척 당돌한 데가 있었다.
허나 그것은 위아래 분간 못하는 천둥 벌거숭이 같은 모습이라기보다, 패기넘치는 젊은이의 자신감 표출에 가까웠다. 귀엽게 앞이마를 드러낸 올림머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체조로 꼿꼿히 펴진 허리?
확실한 것은 그녀의 뛰어난 외모가 은은한 아우라를 발휘하며, 그녀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쁜애가 하면 못해도 이뻐보이고, 못생긴애가 하면 잘해도 독해보이는 이치였다.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타입이군. 어리고 예쁜데가 언변도 훌륭하니 또래 남자 정도는 눈에도 안 차겠어. 2학년 에이스 이지환에게 관심 보이다 곧바로 나로 갈아탄 걸 보면, 남의 시선 신경 안 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꼭 쟁취하는 욕심쟁이기도 하고.'
[오호, 정보창의 도움도 없이 그 정도까지 분석하셨단 말입니까?]
'이게 관록이란 거야.'
[관록요?]
'오랜 경험이 누적되면서 생긴 통찰력 이랄까? 경험칙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체화된 안목같은.'
[그 관록을 통해 나연양의 캐릭터를 분석하셨군요.]
'사실 저런 타입은 제법 흔해. 직장생활 하다보니까 학벌 좋고 어리고 예쁜 신입 여사원들, 딱 지금의 나연이처럼 기고만장했거든. 요샛말로 알파걸이라던가?'
[해서, 그 알파걸들은 어떤식으로 공략하셨습니까?]
'공략은 무슨. 당시엔 바람 필 생각 같은 해본적도 없었어.'
[하긴 소물 이정우로 누군들...]
'확 이게 지금 누굴 놀리냐? 물론 다른 의미로 찍어 누르긴 했었지.'
[어떻게요?]
'어린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아. 남의 건 작게 보이고 자기가 가진 건 커보인 달까? 하지만 직장생활이란 게 자기 혼자 독불장군처럼 잘났다고 잘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직장 뿐이라 모든 영역이 그래.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처럼 조직을 능가하는 개인은 불가능한 법이야. 그래서도 안되고.'
[오, 연륜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혼자만 잘났다고 까불다가 세상의 혹독감을 몸소 느끼다 보면 알아서 찌그러지더라고. 그말이 딱 맞아.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
[후훗. 청춘의 몸에 중년의 지혜를 겸비한 주인님께서 도도한 나연양을 어떻게 굴복시킬지 벌써부터 궁금해 지는군요.]
'지켜보라고.'
난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연기했다.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난 군대 있을 때 차이면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어. 여기 성수 형도 알 거야. 헤어지는 과정이 정말 안 좋았거든."
"음, 격하게 동의한다. 내가 아는 결별 중 가장 최악이었으니까."
잠자코 있던 성수가 적절한 타이밍에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한가지 원칙을 세웠지. 헤어졌을 때 주변사람 관계까지 불편해질 수 있는 사람하곤 두번 다시 사귀지 말아야 겠다고. 내가 우리과에서 씨씨를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나름의 전략적 선택인 거야."
"완전 억지잖아요, 그건."
나연은 지지 않고 끝까지 따졌다.
"차별이 아니라 선택이라고요? 같은 과라는 이유만으로 애초부터 배제하는 것이 어떻게 차별이 아니죠? 그리고 오빠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그 사람과의 문제지 같은 과였다는 문제는 아닐거라고 봐요. 사람이 다 똑같지는 않잖아
요."
나연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자 지켜보던 연두가 그녀를 만류했다.
"나연이 너 왜 그래? 선배님들 앞에서."
연두에게 내가 말했다.
"괜찮아. 이런 문제는 선후배를 떠나 남자대 여자로서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해. 연두 넌 나연이 의견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교묘하게 화살을 돌렸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된 기획이다.
내 목표는 둘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균열이 생기게 만드는 것.
여기서 나연을 편들자니, 자신의 처지와 모순되고, 친구의 의견을 묵살했다 간 둘 사이에 의가 상할 것이다.
자, 너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할테냐? 무엇을 골라도 넌 이미 졌다.
"저, 저요?"
불똥이 자신에게 튈 거라곤 생각못했던 연두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응. 과씨씨 어떻게 생각해?"
"전, 음..."
나연이 연두를 쳐다보았다. 대게 여자들은 친구가 자신을 편 들길 바란다. 그것이 비합리적인 걸 알아도, 그 순간 만큼은 같은 편이 되어주길 원하는 게 보편적인 정서다.
"그러니까..."
나는 우물쭈물하는 연두를 몰아세웠다.
"너도 나연이랑 같은 생각이야? 하긴 둘이 단짝이었지?"
"아뇨. 전 과씨씨가 불편할 거라는 오빠 생각에 동의하는..."
"야!"
배신감을 느낀 나연이 연두를 향해 소리쳤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말은..."
"됐거든?"
나연이 팔짱을 끼며 꾹 입을 다물었다.
묘한 기류가 흐르며 테이블에 어색한 침묵이 내리앉았다.
보다 못한 성수가 잔을 쳐들었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의상하고 그러냐? 자자, 술이나 마시자."
"술 얼마 없는데요? 저기요, 맥주 2병만 더요."
술자리가 다시 이어졌지만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두 사람의 태도가 느껴졌다.
나연은 믿었던 친구가 자신의 편들지 않은 것에 토라져 연두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연두는 연두대로 미안하고 속상한 감정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킨 맥주 2병까지 모두 동나자 성수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우선아 계산서 좀 주라."
"형이 쏘시게요?"
"학생이 돈이 어딨냐? 나도 학생이야. 일단 내가 한번에 계산할테니 나중에 N분해서 송금해."
"형, 요샌 다 어플로 토스해요. 누가 송금으로 보내요."
"토스건 스파이크건 알아서 하시고."
***
한지연은 누군가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너 뭐야, 새끼야!"
갑자기 손목을 꺾어 쥔 지연에게 남자 종업원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소, 손님. 잠들어 계셔서 깨워드린건데, 좀 놔주세요 아파요."
"내가? 잠들었다고?"
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빠르게 둘렀다.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호프집.
테이블의 대부분 비어 있고, 구석에 직장인으로 보이는 한 팀만 요란스레 떠들고 있다.
'뭐야? 이것들 다 어디갔어?'
지연은 당황하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자신이 기억하던 시간으로부터 30분 가량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저 앞 테이블 대학생들은?"
"네?"
"아니, 아까 저기서 술마시던 애들 있잖아. 남자 셋에 여자 둘 있던."
"아, 그분들이랑 일행이셨어요? 한참 전에 계산하고 나가던데... 전 손님 혼자 오신 줄 알고."
'으앗! 나 술 먹고 깜빡 잠든 사이에 나가버린 거야?'
도훈과 대학생들의 대화를 염탐하던 지연은 도훈이 자신을 알아볼까 등 돌려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주제가 너무 쓸데 없었다. 무슨 과씨씨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애들 장난 같은 연애이야기. 그러다 문득 술기운이 올라와 벽
에 기대 살짝 눈을 붙인 순간, 그대로 30분 가량을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 사이 도훈은 나가버렸고.
"아아악! 이게 무슨!"
지연이 급히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데 이번엔 남자 종업원이 그녀의 소매를 붙들었다.
"잠깐."
"뭐야? 이거 안 놔?"
"손님. 아무리 급해도 계산은 하시고 가셔야지."
"아이씨. 바빠 죽겠는데..."
지연은 급히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지만, 도훈 일행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또 다시 헛물만 캐고만 지연이 새벽의 길거리에서 포효했다.
"도훈이 이 자식 비겁하게 술먹고 잠든 사이 도망을 쳐? 이 홍두깨 같은 자식, 잡히면 보자!"
도대체 무엇이 비겁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외침이었다.
한편 30분 전 술집을 나온 일행은 택시 승강장 근처에서 모여있었다.
성수가 말했다.
"연두는 나연이네 집에서 잔댔지? 나랑 도훈이랑 같은 방향이니까, 우선이만 따로 가야겠네."
"전 괜찮습니다. 집까지 많이 안멀어서요."
"혼자니까 그럼 너부터 타고 가. 저기 택시 왔다."
"아니에요. 여자애들부터 보내죠."
"그럴래? 그럼 둘이 먼저 타, 나연이랑 연두랑."
"저흰 따로 갈 건데요?"
"어?"
"그냥 그러기로 했어요."
"연두 너희 집 여기서 멀다지 않았냐? 할증 붙으면 요금 엄청 나올텐데."
"괜찮아요."
두 사람은 아까 이후 감정이 틀어졌는지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계집애 들이란... 하여간.'
성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밤늦게 여자애들 혼자 보내긴 위험한데."
그때 도훈이 나섰다.
"연두 너네 집이 어딘데?"
"개포동요."
"여기서 택시 타도 40분은 걸리겠네. 형 이렇게 하죠."
"어떻게?"
"저희 고모가 개포동 사시거든요. 그렇잖아도 반찬 가져라고 엊그제 연락 왔는데 겸사겸사 연두랑 같이 가서 거기서 하루 자고 오려고요. 고모네 집 사촌동생이 군대가서 빈방있거든요."
"아, 그럴래?"
"오빠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나도 낼 학교 마치고 가기 애매해서 그래. 그리고 시간도 이렇게 늦었는데 어떻게 먼길을 혼자 보내냐?"
도훈이 연두를 각별히 챙기는 모습을 보이자 나연이 툴툴거렸다.
"저도 혼자 집에 가는데요?"
"넌 집이 어딘데?"
"나연이 넌 공대 뒷문 근처 서 자취한다며?"
"어, 어쨌든 혼자 가잖아요."
"뭐 걸어가도 20분 거리구만 무슨."
빵-
기다리던 택시가 경적을 울렸다.
성수가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내며 우선에게 말했다.
"야야, 일단 우선이 너 부터 타라. 저 택시 짜증나겠다."
"알겠어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오빠 잘가요."
우선이 혼자 택시를 타고 떠나자 다음은 나연의 차례였다.
그러나 나연은 도훈과 연두가 단 둘이서 택시 타고 가는게 영 마음에 걸렸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과 사이가 틀어진 연두가 자신이 연모하는 도훈을 유혹할까봐 불쑥 겁이 났다.
'저 계집애가 나한테 토라져서 도훈 오빠한테 꼬리치면 어쩌지?'
그녀는 남자들은 준다는 여자를 마다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가는데 갑자기 연두가 도훈에게 속삭이는 망상이 떠올랐다.
-오빠, 우리 저기서 조금만 쉬었다 갈래요?
-늦었는데 집에 가야 되는거 아니었어?
-괜찮아요. 집에는 나연이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거든요.
-진짜 쉬었다만 가게?
-뭐, 오빠 하고 싶은거 하셔도 되구요. 전 오빠가 하는 거면 뭐든 괜찮으니까.
"아, 안돼!"
나연이 빼액 소리쳤다.
< 180. 하수 탈출-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