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하수 탈출-3- >
"도훈아, 여기다."
성수가 문앞에서 두리번거리는 도훈을 불렀다. 도훈은 테이블에 앉은 멤버를 확인하더니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1학년 후배들이라는 게 쟤들이었어?'
"와, 오빠다."
"도훈 선배! 왜 이제왔어요? 저희가 얼마나 기다렸다고요오!"
두 사람은 월급날 통닭을 사들고 오는 아빠를 맞이한 아이처럼 도훈을 격렬히 환대했다. 술에 잔뜩 취한 탓인지, 지나치게 업되 있는 모습에 도훈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저것들은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무슨 이런 자리까지 따라온거야?'
[잘 된 일 아닙니까? 8선녀 중 아직 미공략한 둘이나 얼큰하게 취해 있는 걸요.]
'취한 게 문제가 아니지. 내가 그랬잖아. 쟤둘은 같이 붙어 있으면 죽도 밥도 안된다고.'
[벌써 쓰리썸을 두번이나 성공시키신 분께서 엄살이 심하시군요.]
도훈의 최초 쓰리썸은 새터에서였다.
두 번째는 재벌집 막내아들 고성민의 별장.
'그땐 그때고, 이건 경우가 다르지. 그건 처음부터 의도한 게 아니었잖아.'
새터에서는 정음과의 정사를 훔쳐보던 효민은 반협박하다시피 끌어들였다.
관음증을 가진 그녀가 몰래 자위하다 걸렸기 망정이지, 소리라도 질렀더라면 엄청난 후폭풍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고성민의 별장 온천에서 사라를 끌어들일 때도 다행히 그 전에 관계를 맺은 상태라 가능한 일이있다. 만약 은성과의 밀회를 발견한 사람이 사라가 아닌 스테파니나 여동생이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두 사례 모두 어쩌다보니 쓰리썸이 성사 된 것이지, 처음부터 쓰리썸을 제안했더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둘은 맨날 티격태격 다투는 것 처럼 보이지만 둘 도 없는 절친.
한 사람과 관계를 맺을 경우, 나머지 하나는 자동으로 탈락하고 만다.
도훈의 딜레마는 바로 거기 있었다.
서로가 너무 친하다는 것.
누가 먼저가 됐든 비밀조약은 깨질 수 밖에 없다.
"늦은 시간에 오느라 고생많았어. 여기 앉아."
"사람 되게 많은 줄 알았는데 넷 뿐이네요?"
"경기 때문에 피곤하다고 먼저 갔어요."
우선이 대답했다. 성수가 술에 취한 나연두 콤비를 흘겨보며 말했다.
"우리도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어. 근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의 푸념에 연두가 발끈했다.
"부회장님, 왜 그렇게 보세요? 설마 저희 때문에 지금 집에 못가고 있다는 뜻인가요?"
"와, 섭섭하다, 섭섭해. 후배들이 술 좀 먹고 싶다는데 등 떠밀어 보내려는 선배님이라니!"
"아, 아니 내말은 그게 아니고."
성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남자다 보니 어린 여자 후배의 생때엔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하여간 여자애들은 남자 선밸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야? 여자 선배라도 하나 있었음 찍소리도 못할 것들이.'
성수는 본인이 감당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도훈을 끌어 들였다.
자신보단 도훈의 말이 더 먹힐것 같았다.
"어쨌든 도훈이 얼굴도 봤으니 소원 풀었지? 내일 오전 수업도 있으니까 좀 만 더 마시고 마무리 하자."
도훈은 성수가 여자애들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본인을 불러낸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야밤에 불러낸다 싶더라. 저것들 성수형을 얼마나 들볶은 거야?'
"그래. 나도 친구 만나고 막 오는 길이라 피곤하다."
"뭐에요, 오빠! 오자마자 집에 갈 생각부터 하는 거에요?"
"근데 누굴 만나고 왔길레 피곤하신 거?"
"설마 여자?"
두 사람의 추궁에 도훈이 곧바로 부정했다.
경험상 이런 질문에 머뭇거리는 것은 긍정의 싸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냥 고등학교 동창. 이번 달 군대 간데서 얼굴 좀 보고 왔어."
"그렇군요."
"아, 남자였구나."
두 사람은 뻘쭘했는지 곧바로 말을 돌렸다.
"근데 남자들도 참 불쌍한 것 같아요. 한창 놀고 싶을 때 군대가야 한다니."
나연의 말에 이 자리의 유일한 미필자인 우선이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에게도 군대는 인생일대의 스트레스. 해서 되도록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는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화제에 오르고 말았다.
술에 취해 눈치가 실종된 연두가 침울해진 우선에게 물었다.
"참, 우선 오빠도 아직 안가셨죠? 언제 가요?"
"음, 난 2학년 마치고."
"에구, 불쌍해라. 우리 우선 오빠 힘내라고 한 잔씩 해요."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연두를 보며 도훈이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군대 가는 남자 심정을 눈곱만큼이라도 알고 하는 소릴까?
잔이 한 순배 돈 후 연두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우선 오빠 군대가면 제가 손 편지 꼭 써드릴게요."
"말로만도 고맙다."
"어머 얘, 그러다 여자친구로 오해받음 어쩌려고 그래?"
"오해하면 하라지?"
"뭐어?"
나연이 놀란 표정으로 연두를 쳐다보았다. 분명 도훈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행동으로 봐선 우선에게 추파를 던지는게 아닌가?
나연은 연두가 무슨 꿍꿍인지 생각했다.
'도훈 오빠가 앞에 있으니까 일부러 저러나?'
여자들의 약은 수법 중 하나는 정작 호감 있는 상대 앞에서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보임으로써 수컷 특유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전략이다. 대게 밀당질을 잘하는 연애고수의 수법이지만, 그녀가 아는 연두는 고수는 커녕 남자를 사겨본 적도 없는 모태솔로
였다.
'아님, 설마 날 밀어주려고?'
나연은 이 귀여운 절친 앞에서 몇번이나 도훈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어쩌면 의리있는 연두가 그 마음을 헤아리고 스스로 양보한 것은 아닐까?
연두의 행동에 나연 못지 않게 도훈도 의구심을 품었다.
'저건 누가봐도 끼부리는 거잖아? 연두가 내가 아니라 우선한테 관심이 있었나?'
도훈이 나연과 다른 점은 그에게는 상대의 본심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쿨타임도 돌았겠다 마침 잘 됐군. 연두의 정보창을 한 번 열어봐야 겠어.'
[알겠습니다, 주인님]
도훈은 연두의 정보창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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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이연두(처녀)
나이 : 20
호감도 : 49/100
개방성 : ???
성감대 : ???
성욕지수 : ???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그녀는 당신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습니다.
?추천멘트 : "난 나연이한테 별로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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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정보창으로 확인한 결과는 내 예상을 훌쩍 벗어나 있었다.
50 이하로 형성된 낮은 호감도도 그렇지만 '라이벌'이라는 표현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라이벌이라니? 이게 무슨 뜻이야, 로시?'
[설명 그대로 입니다. 연두양이 주인님을 연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연적이라면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남자들한테 쓰는 말 아니야?'
[정확히는 '한 여자를 두고 경쟁을 펼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죠.]
놀랍지만 연두의 호감도가 기대이하로 낮게 나온 이유는 바로 나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연두가 나연이를 좋아한다고?'
[정보창을 토대로 추측한다면 그렇게 되겠군요.]
'설마 연두가...'
[네, 동성을 좋아하는 여자같습니다.]
대박! 연두가 레즈비언이었다니.
실제 동성애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놀라고 말았다. 게이였다면 조금은 거부감이 들었을지 모르나, 깜찍하고 귀여운 연두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호기심이 피어났다.
'하긴 두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꼭 붙어다녔지. 이제 이해가 가는 군.'
본인들 말로는 시간표를 같이 맞추느라 그렇다고 했지만, 사실 연두가 의도한 결과였던 모양이다.
지난 개강총회 일도 마찬가지.
당시 연두는 이지환 문제로 우울해 하는 나연을 위해 밤늦게 혼자 커피숍까지 다녀왔었다. 실은 그것이 친구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연인에 대한 배려였던 것.
다만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연두가 단 한번도 나에게 싫은 티를 안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호감도 수치를 해석하자면 그녀는 길가다 처음 만난 사람 쯤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발생한 걸까?
'아, 나연이 때문이군?'
[네?]
'나연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아니까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맞춰준 거라고.'
또 우선에 대한 태도 역시 납득이 갔다. 그녀에게 남자 선배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라든가, 그로인해 여자친구로 오해를 받는 일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연두는 레즈비언이니까!
'하-. 그나저나 큰 일인데? 팔선녀 공략 최대 난관에 봉착한 느낌이랄까?'
정보창 스킬은 호감도를 올리는데 최적이지만, 그것은 평범한 여성에게나 통용되는 말이다.
'혹시 호감도를 올리면 뭔가 수가 생기려나?'
[글쎄요. 정말 남자에게 관심없다고 한다면 호감도를 올리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을 겁니다. 아주 잘해봐야 친한 선배 정도랄까요?]
'혹시 남여 둘 다 좋아하는 바이섹슈얼일 수도 있잖아?'
[그것까진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확실한건 나연양을 두고 주인님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아이고야, 이거 완전 복병이었네. 이연두.'
실망에 빠진 나를 향해 로시가 위로했다.
[너무 속상해 마십시요. 위기는 곧 기회라지 않습니까?]
'기회?'
[연두양이 레즈비언이 분명하다면 다음과 같은 위업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로시가 디스플레이에 새로운 위업을 띄웠다.
★달성 가능한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7/108)
45. 남자 맛 좀 보여드려? (남성과의 섹스에 흥미가 없는 레즈비언과 관계시 달성)
-당신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습니다.
-업적 보상 : 아이템 제공 - 위대한 유산(임신 걱정은 그만, 노콘질싸를 즐겨보세요.)
내 이럴 줄 알았지.
게이 관련 미션까지 있는 마당에 레즈비언이라고 없을까.
미션의 내용보다는 업적 보상에 눈길이 갔다.
'위대한 유산이라고?'
[네. 어떤 상태에서도 임신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문신형 아이템입니다. 자매품으로는 소모성 아이템 '고자라니' 알약이 있습니다.]
'설마 저 유산이 그 유산이란 뜻이야?'
[글쎄요. 의미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꼭 필요하던 건데 잘 됐군. 문신형 아이템이면 몸에 새긴다는 뜻인가?'
[네. 주인님이 원하시는 부위에 스위치 모양의 문신이 생성됩니다. 평소에는 활성화 상태로 있다가 필요에 따라 비활성화도 가능합니다.]
'가만, 학교 선생이 문신을 새겨도 되나? 채용검사에서 탈락하는거 아냐?'
[아주 작기 때문에 눈에 띄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라도 걱정되시면 안보이는 곳에 새기셔도 되구요.]
바로 전 마유미에게 질사를 하고 왔기 때문일까?
이번 위업에 제공되는 아이템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아이템만 있으면 이제 임신에 대한 부담없이 마음껏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필요에 따라 해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씨없는 수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보상이 굉장한데?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졌어.'
[그렇기 위해선 연두양을 설득하셔야 합니다.]
나는 다시 연두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다. 테이블 위로 나연의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걸로 봐선, 나에게 그녀를 빼앗길 까 전전긍긍하는 것 같다.
한번 간 좀 봐볼까?
"우선이 부럽네. 난 군대가서 여자한테 편지 한 번 못받아 봤는데."
"정말요?"
"도훈 오빠가요?"
"아, 아니구나. 한 번 받은 적 있어. 훈련소 있을 때."
"피. 난 또 진짠줄."
"누구였어요? 애인?"
"아니 엄마. 엄마도 여자잖아."
"에이, 뭐에요 그게."
"엄마가 멀리 미국에서 보내주셨더라고. 요샌 국제우편도 되게 빨라."
나연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말도 안되요. 어떻게 아무도 편지를 안 쓸 수 있어요? 오빠 새내기들 사이에서 인기 짱인데."
"정말?"
"진짜라니까요? 저랑 연두랑 오빠 팬클럽도 결성하기로 했어요. 그치, 연두야?"
"으, 응."
연두는 모처럼 적극적인 나연의 모습이 탐탁치 않은 눈빛이었다.
"팬클럽은 좀 오버 아닌가?"
"아니에요. 오빠정도면 충분히 있을 수 있죠."
"아까도 말했지만 나 군대서 편지 한 통 못 받았다니까?"
사연을 아는 성수가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때 도훈이면 그럴만도 하지."
"어? 성수 오빠 뭐 아는 거 있으세요?"
"이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아잉, 말해 주세여엉."
"도훈아 애들 앞에서 말해도 되냐?"
"상관없어요. 어차피 2년도 지난일인데."
나는 쿨하게 승락했다.
"실은 도훈이 군대가지 전까지 과씨씨였어."
"헐, 진짜요?"
"과씨씨면 체육과 안에서?"
"혹시 지금도 있어요? 몇학년인데요?"
"선배랑 사겼었거든. 지금은 졸업했지."
"아."
"근데 그거랑 편지 못 받은 거랑은 무슨 상관이에요?"
"도훈이가 군대 가자 마자 차였거든. 믿었던 여친이 배신 때리고 나니까,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었던 거지."
"불쌍해."
"말도 안돼요. 어떻게 도훈 오빠를 찰 수 가 있죠?"
나는 잠자코 성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타이밍을 잡고 끼어 들었다.
"그땐 많이 어렸었거든. 연애를 할 줄 몰랐달까?"
"그럼 지금은 잘 아세요?"
연두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어왔다.
< 179. 하수 탈출-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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